중국-카자흐스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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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카자흐스탄'''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근세 이전
2.2. 근세
2.3. 근대
2.4. 20세기
2.5.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3. 관련 문서


1. 개요


중국카자흐스탄의 관계. 양국은 소련 해체 이후에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경제적으로 교류가 매우 활발하다. 하지만 중국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카자흐족들을 위구르족들과 탄압하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근세 이전


고대부터 중국과 카자흐스탄 지역과 교류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오늘날 카자흐인의 직계 기원은 킵차크 칸국이 붕괴되면서 우즈벡 울루스로부터 갈라져 나온 근세 카자흐 칸국이다. 카자흐 칸국 생성 이전 중세 말 원나라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회회인[1]들은 코가 무척 길고 털이 덥수룩하고, 킵차크 칸국에서 온 사람들은 머리색이 노랗고 눈 색이 파랗기 때문이 괴이한 외양으로 한족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중화주의적 사료의 옥시덴탈리즘은 제쳐두고라도,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중국으로 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백인종이었거나 혹은 킵차크 칸국에 종속된 슬라브인들이 중국으로 다시 파견되어 정착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듯 하다.

2.2. 근세


15세기 카자흐 칸국이 건설되어 남쪽의 부하라 칸국(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 북서쪽의 시비르 칸국(오늘날의 튜멘 일대), 서쪽의 노가이 칸국(오늘날의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 일대)과 아스트라한 칸국, 그리고 동쪽으로 모굴리스탄 칸국(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주 남부 일대)와 대치하였다. 신장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던 카자흐 칸국은 오이라트 유목민들이 건설한 준가르 칸국에 패배하여 상당수가 노예가 되어 준가르족들이 건설한 도시 각지에 노예 노동력으로 정착하는데, 이들 상당수는 준가르 칸국이 노예화한 키르기스인, 한족 등과 합쳐서 타란치라고 불리는 농민 집단이 되었다.
18세기 중반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청나라 측에서는 장거리 보급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준가르와 대치 상태였던 카자흐 칸국과 협력 관계를 맺고 비단과 군마, 군인들이 양식으로 먹을 양을 교환하였다. 청나라에서 중가리아로 말이나 양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가축 상당수가 폐사했기 때문에 청나라 군인들은 추가로 비단, 면화, 차 등을 들고 가서 즉석으로 현지에서 가축이나 군량과 교환하였다.
준가르 칸국이 청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청나라와 카자흐 칸국이 서로 영토를 맞대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을 정벌하면서 카자흐인들이 살던 일리 강 유역까지 장악한 청나라는 쿨자를 중심으로 새로 만주족, 시버족 팔기군을 파견하여 정착시키는데 만주족은 엄연히 청나라의 귀족이었고 무슬림 카자흐인들은 비무슬림 여성과 통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카자흐인과 만주족, 한족 등등 사이의 통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2.3. 근대


카자흐 칸국은 1847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862년 후이족들이 일으킨 봉기를 청나라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부 후이족들과 위구르족, 카자흐족들은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주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정착한 후이족들은 둥간족이 되었다.[2] 중국 내륙에서 벌어진 후이족들의 봉기에 자극받아 신장 지역의 위구르인들과 후이족들이 1864년부로 봉기를 일으켰는데, 봉기의 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1871년 러시아 제국이 일리 강 서부 유역을 합병하였고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해당 조약을 계기로 일리 강 서부 유역은 러시아 제국 및 그 후신인 소련으로 이어지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해당 영토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일리 강 서부 유역을 다시 노리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 강 서부 근교에 카자흐스탄의 핵심 도시 중 하나 알마티가 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측에서는 이를 넘겨줄 생각이 없다.

2.4. 20세기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몰락한 뒤에 소련이 출범했다. 소련 시절에 카자흐스탄 지역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신장성이라고 불리던 신장 지역과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로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는데, 위구르인들 중 적지않은 수가 카자흐스탄 일대로 이주하였고, 반대로 1932~1933년 카자흐스탄 대기근 당시 카자흐인 상당수가 일리 강 유역 동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3] 1933년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몰락하는 과정에서 친소군벌 성스차이가 신장성을 장악하면서 신장성은 한 때 실질적으로 소련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신장과 카자흐스탄 일대의 교류가 훨씬 더 활발해졌다.
1940년대 성스차이 군벌 정권과 소련 사이의 관계가 냉각되고 결국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성스차이를 신장성장에서 실각시키면서 신장과 소련 사이의 국경을 닫아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신장성의 카자흐인, 위구르인, 러시아인들은 가까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더 이상 물산을 구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직 신장성과 중국 내륙 지역이 철도로 연결되기 전이었다. 한 술 더 떠서 한족 상인들이 성스차이 군벌정권 시절 사용했던 화폐를 교환하면서 폭리를 취하면서 카자흐인 민간 경제가 붕괴되며 국민당에서 군용 말을 무상으로 징발하자 일리 강 유역의 카자흐인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며 쿨자를 점령하는데, 이 때 위구르인 공산주의자들이 카자흐인 봉기군에 합세하면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건설되었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은 카자흐인과 위구르인 중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일리 민족군을 창설하고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신장 전역에서 국민당 군을 축출해냈으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소련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접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측에 소수민족 자치를 성스차이 군벌정권 시절 수준으로라도 보장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레닌주의 민족 자치 교리에 따라 신장성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개명되고, 소련의 압력으로 카자흐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일리 카자흐 자치주로 설정되었으며, 신장성의 성도는 중국어 이름 디화에서 몽골어 이름 우루무치로 다시 변경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과 소련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중국과 소련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혼란상 와중에 카자흐인 상당수가 소련 영토로 탈주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 일리 카자흐 자치구 인구 중 최대 민족은 아직 카자흐인라고 한다. 91년에 소련이 해체된 뒤에 카자흐스탄은 독립국이 되었고 중국과 수교했다.

2.5.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중국과 카자흐스탄은 수교 이후, 교류가 많아지고 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은 일대일로의 영향으로 경제교류가 많은 편이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카자흐스탄을 잇는 도로를 통해 경제교류가 활발하다. 중국인들도 카자흐스탄에 진출을 많이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족들과 카자흐족들을 탄압하면서 갈등이 생기고 있다.
중국에도 카자흐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 중국 내에도 일리 카자흐 자치주를 포함한 일부 카자흐족 자치주, 자치현이 설치되어 있다. 중국 내 카자흐족들은 카자흐스탄과 달리 카자흐어를 표기할 때 아랍 문자를 사용한다. 그리고 카자흐스탄내에도 둥간족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은 둥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중국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진출하면서 카자흐 경제를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은 데다가 중국 당국이 위구르족을 탄압하면서 중국 내 카자흐인들도 같이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4]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는 친중 국가임을 내세움에도 국민들은 반중 감정이 강하다.
1949년에 중국의 신장 침공 당시에 위구르족들이 피난을 가면서 카자흐스탄에도 위구르족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중국이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하면서 카자흐스탄에게 위구르족 난민들이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중이라서, 카자흐스탄 내 위구르족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2019년 7월 10일에 카자흐스탄에서 정부요원이 중국의 스파이 행위를 하다 체포된 사건(!)이 발생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2026년까지 1만1천700km에 달하는 도로를 건설할 계획이지만, 일대일로와 연계되었다.#
이젠 대놓고 카자흐스탄은 중국 땅이란 식의 개소리도 늘어놓자 카자흐스탄 외교부에서 항의했다.#
2020년부터 코로나19가 퍼지고 있는 가운데, 카자흐스탄에서 원인 모를 폐렴이 퍼지고 있는 것에 대해 중국의 관영매체는 카자흐스탄의 의료 여건이 좋지 않은 탓으로 책임을 돌렸다.#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이 심해지자 미국마이크 폼페이오는 카자흐스탄측에게 위구르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자흐스탄측은 고민을 하는듯하다. 이미 카자흐스탄에는 25만명 정도의 위구르족이 거주하고 있다.

3. 관련 문서


[1] 중세 기록 상으로는 회족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중동에서 온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혹은 유대인들을 의미한다.[2] 둥간족들은 지금도 중국에 대해선 반중 성향이 있다.[3] 일부 카자흐인들은 회족 군벌 마부팡이 지배하는 칭하이성으로도 이주하였는데, 이들을 의심한 마부팡의 지시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4] 이미 카자흐 정부에서 중국 내 카자흐인들을 인구 증가를 목표로 자국으로 데리고 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인구 증가율이 별로 높지 않은 데다가 이미 자체 국가가 있으니 독립 운동을 따로 할 이유가 적은데도 탄압하는 이유는 카자흐인들과 위구르인들이 가까운 관계인데다가 중국 당국에서 카자흐스탄 정부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적극적인 항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이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