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더비
1. 개요
안양 LG 치타스가 사라지기 전 치뤄진 마지막 구 지지대 더비.
K리그에 존재했었으나 한동안 사라졌던, 그리고 다시 부활하게 된 더비 매치의 명칭.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안양 LG 치타스(~2003), FC 안양(2013~)의 매치업을 가리킨다. 2013년에는 양 구단 협약에 의해 오리지널 클라시코의 명칭도 도입되었으나 첫 FA컵 경기 이후로 공식전이 없어 그다지 퍼지지는 않았다.
명칭은 경수산업도로의 의왕시 고천동에서 수원시 이목동·파장동으로 넘어가는 구간 중 하나인 지지대고개[1] 에서 땄다. 지지대(遲遲臺)라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의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올 때 이 곳을 넘어가게 되면 더이상 현륭원이 있는 화산(華山)이 보이지 않아 정조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발걸음을 지체한 것에서 공자가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면서 한 말인 ‘지지하도다 나의 발걸음이여!’에서 지지(遲遲)를 따온 것이다.
그러나 지지대 더비의 명칭은 2003년 마지막 매치업을 치르고 사커월드의 한 안양팬이 제안한 것으로, 그 이전까지는 양측의 구단이나 서포터 클럽이 해당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2] 오히려 뒤이은 안양 LG의 연고 이전 이후부터 이러한 더비를 회상하면서 인터넷과 기사들을 통해 명칭이 부여된 것이다. 실제 최초 작명자가 2013년에 쓴 글에 따르면 작명 시기에는 LG의 연고 이전설이 암암리에 퍼져가던 때였으며, 연고지 이전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이름붙였다고 하니...
지지대 더비 명칭 최초 작명자가 오리지널 클라시코라는 새로운 더비 명칭에 대해 쓴 글
2013년 FC 안양의 탄생으로 더비가 부활했고, 그 해 FA컵 32강에 매치업이 성사되면서 양 측 지지자들이 서로 공식적인 합의하에 '''오리지널 클라시코(Original Classico)'''란 명칭을 부여했다.
더비를 이루는 주체 중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라고 할 수 있는 양 팬들의 대립 중 한 쪽이 안양에서 서울로 완전히 바뀐 슈퍼매치와는 엄연히 별개의 더비다. 물론 안양 LG 치타스를 응원하다가 팀 따라 FC 서울로 팬고이전한 팬들도 없진 않겠지만 안양팬 전체, 서울팬 전체 중에서 그 비중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슈퍼매치가 그 이름이 붙고 흥행하기 시작한 것은 FC 서울이란 팀이 생긴 직후도 아니고 몇 년 후였다. 따라서 지지대 더비와 슈퍼매치 사이에는 단절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별도의 더비로 볼 수 있는 것이다.[3]
2. 발단
수원과 안양 간에 라이벌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초는 수원이 처음 K리그에 참가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그룹에 이어 2인자의 위치였던 대기업 삼성그룹이 축구판에 들어오는 데 대해 팀을 운영중이던 기존 기업들의 반발심이 존재했고[4] 삼성전자를 모기업으로 삼성전자 본사가 위치한 수원시에 연고지를 정해 기어코 K리그에 입성한 수원이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여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자 기존 구단들 사이에서는 '수원은 이기자'라는 은근한 견제 심리가 형성되었다.[5] 이러한 심리는 그 중에서도 국도와 전철로 수원과 이웃한 도시이면서 모기업끼리도 재계 라이벌 관계인 안양이 가장 컸다. 다만 이때까지는 리그 내 치열한 매치업 중 하나 정도였고 더비까지는 아니었다.[6]
3. 전개와 중단: 지지대 더비
그런데 수원과 안양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불타기 시작한 데에는 두 개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는데, 하나는 '''조광래 전 수원 코치의 안양 감독 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정원의 수원 입단'''이었다.
조광래는 1998년 시즌 후 안양 감독으로 취임하는데, 그는 원래 수원 초창기에 김호 감독의 밑에서 코치로 재임하면서 수원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김호 감독과 극심한 불화를 겪고 한 시즌만에 수원에서 뛰쳐나오게 된다. 김호와 앙숙 관계인 조광래가 하필 안양의 사령탑을 맡은 데 대해 국내 축구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바로 뒤이은 1999 시즌 전 '''서정원의 수원 입단'''이다. 원래 안양 소속이었다가 프랑스의 RC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여 활약했던 서정원은 국내로 복귀할 때 원소속팀으로 오겠다는 당초 합의를 깨고 수원과 계약한다. 이에 안양 측은 위약금을 요구하며 서정원과 법정공방까지 벌였다.[7]
이런 판국에 1999 시즌 K리그의 시작을 알리는 '''K리그 슈퍼컵''' 매치업이 하필이면 '''1998 K리그 우승팀인 수원'''과 '''1998년 FA컵 우승팀인 안양'''과의 맞대결이었다. 이 경기에서 안양 팬들은 서정원의 유니폼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막상 경기에선 수원이 5-1로 압승을 거둔다. 양 팀은 그 시즌 K리그 리그컵 결승에서도 맞붙지만 이번에도 수원이 승리. 수원은 해당 시즌 K리그 챔피언에도 등극[8] 하면서 안양을 압도했지만, 다음해인 2000 시즌에는 조광래 감독의 안양이 K리그에서 우승[9] 하며, 두 팀은 K리그를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지지대 더비가 정점에 이르던 2000년대 초반에 양 팀 서포터스들은 각 팀의 팀명을 본따 수원은 치킨 혹은 닭날개[10] , 안양은 치토스라 폄칭하며 더비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위에 있는 치토스 검열삭제 걸개나 돈닭은 싫다 걸개가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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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팀은 2001-02 아시아 클럽 선수권(AFC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저 대회가 아시아 클럽 선수권이라는 이름으로 치뤄진 마지막 대회다.)에서도 타 아시아 클럽들을 때려잡으면서 결승에서 맞대결하기도 한다. 유럽으로 치면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만난 격.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수원이 승리. 이렇게 보면 각종 대회 결승전 등 주요 길목마다 수원이 안양을 때려잡은 것 같지만 사실 K리그로 국한하면 수원이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 넘는 기간 동안 안양을 한 번도 못 이긴 기간도 있다. 전적으로 보면 그럭저럭 치고박고했다.
2003년에는 네 번의 지지대 더비가 성사되어 수원이 3승 1무로 우세했고,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있었던 10월 8일 경기 이후로 안양의 모기업 LG가 팀을 서울로 연고이전하는 바람에 지지대 더비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4. 부활: 오리지널 클라시코
안양시민축구단 창단을 공약으로 내건 최대호 안양시장 후보가 지방선거에서 안양시장으로 당선되자 축구팬들은 안양에 신생팀이 곧 창단될 것을 기대하면서, 덧붙여 지지대 더비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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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짤에서도 보다시피 수원팬들은 이 팀과의 매치업을 '''북벌(北伐)'''이라 하지, 더비라고 하지 않는다.
구 지지대 더비의 일익이었던 구단 자체는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했고 신생 안양시민축구단은 별개의 구단이지만, 더비 매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팬들 사이의 라이벌 의식'''이다. 따라서 구 지지대 더비에서 수원팬들과 으르렁거렸던 안양팬들이 지지하는 안양시민축구단이 지지대 더비를 다시 형성할 수 있다 하겠다.
여러 곡절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FC 안양이 창단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FA컵 또는 K리그 클래식에서 지지대 더비의 부활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일찍 더비가 성사되었다! 2013년 4월 18일, FA컵 32강 추첨을 통해 FC 안양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맞붙게 되었다. 여러 반응이 있지만, 우선 32강 대진 중 가장 관심이 쏠리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 안양 서포터를 대상으로 온라인 생중계를 진행하던 FC 안양 서포터의 전언에 의하면, "시종일관 조용하던 추첨장이 (당시 추첨을 맡았던) 김대의가 수원과 안양의 대진을 뽑자마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웃음 까지 터져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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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비 부활을 알리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FC 안양의 역사적인 첫 경기는 5월 8일 FC 안양의 홈 경기장인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후반 7분 안양 정재용이 선취골을 넣었으나 후반 42분 정현윤의 자책골, 후반 48분 서정진의 역전골로 수원이 2 대 1로 승리하였다.
5. 주요 인물
- 조광래
- 서정원
- 비탈리 - 두 팀 모두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 출신 공격수
- 박정석 - 서정원과는 정반대의 케이스로 수원에서 뛰다 해외로 진출하였다가 안양으로 복귀했다.
- 뚜따 - 2002년 안양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조광래 감독과의 불화로 시즌 종료 후 방출. 그리고 2003년에 하필 수원으로 입단하여 안양 팬들을 충공깽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뚜따는 수원 빅버드에서 열린 2003년 첫 번째 지지대 더비에서 후반전 결승골을 넣고 안양 벤치의 조광래 감독을 향해 도발적인 세레머니를 선보인다.
- 진순진 - 2002년 수원 빅버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려 팀에 2-1 짜릿한 원정승을 안긴 주인공. 소속팀이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게 된 후 대구 FC로 이적하자 안양 팬들은 진순진이 연고이전에 반발하여 팀을 나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 정용훈 - 2003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더비에서 골을 넣었고 경기는 2-2 무승부. 그해 8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이 골은 그의 생애 마지막 골이 되었다.
- 에니오 - 전북의 그 에닝요 맞다. 수원에서는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지지대 더비에서만큼은 매번 맹활약. 2003년 빅버드에서 열린 안양과의 경기 도중 경기장 밖으로 향하는 공을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안양 벤치를 향해 캐논슛을 날리는 초강력 도발을 시전하였고, 잠시 후 이번에는 골대를 향해 진짜 캐논슛을 꽂아넣어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 나드손 - 2003년~2013년 10년 동안 구 지지대 더비의 마지막 득점 선수다.
- 오근영 - 2012년 수원의 단장직을 맡다가 사임하고, 2013년 안양의 초대 단장으로 취임.
- 최대호 - 2013년 현재 안양시장. FC 안양의 초대 구단주이며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안양시민축구단 창단을 공약으로 내걸어 시장에 당선되었으며 임기 중 구단 창단에 성공했다.
- 한동원 - 안양 LG 치타스,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FC 안양에 모두 몸담은 경험이 있는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
6. 그랑블루 VS A.S.U. RED
지지대 더비는 경기뿐만 아니라 양 팀 서포터들의 응원 대결이기도 했는데, 주로 수원 그랑블루의 카드섹션과 안양 레드의 홍염의 대결로 요약된다. [12]
7. 관련 문서
[1] 1번 국도(경수대로) 영동고속도로 북수원IC 부근. 정상에서 수원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간이휴게소가 있다.[2] 수원 팬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수안전'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적은 있다.[3] 연맹에서 지지대 더비의 기록을 슈퍼매치에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지지대 더비와 슈퍼매치는 다른 더비로 본다.[4]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가입금 이외에 '''축구발전기금'''이란 걸 만들어서 삼성에게서 30억을 뜯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은 창단 후 참가한 첫 시즌인 1996년에 준우승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낸다. 그리고 2년 뒤 K리그를 우승을 차지하면서 초고속으로 강팀 반열에 오른다.[6] 초기 수원이 가장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던 상대는 삼성에 있어 LG 이상의 재계 라이벌이자 첫 시즌인 96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혈투를 벌인 울산 현대였다. 다만 팬층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포터 클럽의 조직화가 빨랐던 부천과 안양도 비교적 의식했던 흔적이 있다. 가령 수원의 초기 응원가 중 '마루치 아라치'에는 상대편을 '악의 무리 XXXX'로 부르는 가사가 있는데, 다른 팀과 달리 (가령 전남 드래곤즈는 '전라남도 드래곤즈'로 썼다) 안양은 반드시 악의 무리로 부르라고 매뉴얼에 적혀 있었다.[7] 당시 해외 진출 선수들에게 국내 복귀시 원소속팀에 돌아오는 조건으로 이적료의 일부를 떼어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서정원의 경우 스트라스부르의 이적료 100만달러 중 50만달러를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법정 공방에서 서정원측이 패소하여 결국 위약금을 안양 LG에 지급해야 했다.[8] 유명한 샤샤의 신의 손 파문이 이 시즌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나왔다.[9] 이 때 조광래 감독은 수원 코치 시절 김호 감독에게서 배운 지도법과 훈련법을 적용하여 취임 2시즌만에 팀의 전력을 탄탄하게 구축했다고 한다.[10]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감바 오사카와의 대결은 닭다리 더비라고 한다.[11] 여담으로 당시 안양팬들의 반응은 '드디어 지들이 닭인 걸 인정했군'.[12] 실제 2017년 FA컵 상암 원정경기에서 홍염을 피운 데 대하여 제재금이 떨어지자 안양팬들이 모금해서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