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태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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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정#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소요정, 취한정, 취규정, 농산정, 청의정과 같이 소개한다.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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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昌德宮 太極亭
창덕궁 후원 옥류천 권역에 있는 정자이다.

2. 이름


태극(太極)’은 ‘음양 사상과 결합해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근원’이다. 《주역》에서 따온 이름으로 태극기의 그 태극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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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문양

3. 역사


1636년(인조 14년)에 지었다. 첫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이었는데 나중에 태극정으로 바꾸었다. 이후 많은 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활용했다. 일제강점기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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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동궐도》의 태극정(붉은 원 안), 오른쪽은 《조선고적도보》의 태극정

4. 구조


  • 1층[1]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칸 수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총 1칸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3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장대석 1단을 깔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주춧돌은 원형이며 기둥 안쪽 가장자리에 문틀을 설치했다. 출입은 남쪽 칸으로만 할 수 있으며 건물로 오르게하는 디딤돌은 2단이다. 기단의 사방 가운데에는 1단짜리 계단이 있다. 남쪽 기단의 계단 앞에는 돌판을 길게 덧대고 그 위에는 전돌을 깔았다.
  • 사방이 트여있다. 그러나 《동궐도》를 보면 원래는 측면에 을, 정면에 을 달아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벽은 사라졌지만 사방에 들문이 달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지금처럼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지붕은 사모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기둥 사이에 창방을 두고 그 위에 소로를 얹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기와로 쌓았으며 내림마루 끝에는 막새기와를 얹었다.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절병통을 올렸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칠했다.
  • 각 칸의 하단부에는 머름을 두었고, 건물 바깥에는 쪽마루를 깐 뒤 그 가장자리에 난간을 설치했다. 다만, 건물로 들어가는 부분에는 머름과 난간을 두지 않았다. 난간은 ‘아(亞)’자 형 교란으로, 그 위에 호리병 형태의 난간기둥과 돌란대를 얹은 형태이다.
  •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한 형태이다. 실내 바닥은 마루이다.
  • 기둥 바깥 쪽에 주련을 걸었다. 주련에는 를 적어놓았다.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隔窓雲霧生衣上 (격창운무생의상)
>창 밖의 운무(雲霧)는 옷 위에서 피어오르고
>
>捲幔山川入鏡中 (권만산천입경중)
>휘장을 걷자 산천이 거울 속으로 들어오네
>
>花裏簾櫳晴放燕(화리염롱청방연)
>꽃 속이라, 주렴 친 창 밖에 비 개자 제비 날고
>
>柳邊樓閣曉聞鶯(유변누각효문앵)
>버들 곁이라, 누각에선 새벽녘에 꾀꼬리 소리 들리네
>#

5. 여담


  • 역대 임금들이 태극정을 많이 찾고 아꼈다. 숙종은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정자 3채를 '상림삼정(上林三亭)'으로 불렀는데 태극정도 여기에 포함시켰다.[2] 관련하여 《상림삼정기》를 썼는데 거기서 ‘여산(廬山)[3]과 난정(蘭亭)[4]이 어찌 여기보다 나을까’라며 태극정의 경치를 극찬했다.# 숙종의 증손자 정조는 《태극정시》를 지어 빼어난 풍경을 찬양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만나 《심경》을 읽게했다.#



[1]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2] 나머지는 청의정소요정.[3] 산세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중국명산으로, 남북조시대남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모두 한 번씩 찾던 산이었다.[4] 중국 샤오싱에 있는 왕희지의 유적지. 역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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