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호 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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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기체 창랑호(더글러스 DC-3, 등록부호:HL106)와 동일 기종인 만송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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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8년 2월 16일에 일어난 '''대한민국 항공 역사상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사건'''. 대한민국 최초의 민항사인 대한국민항공사(Korea National Air ; KNA)[1] 의 여객기 '''창랑호'''가 북한의 남파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다.
2. 사건 발생 및 전개
1958년 2월 16일 창랑호는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기장: 윌리스 P.홉스(미국인) / 부기장: 맥클레렌 미 공군 중령), 총 34명을 태우고 오전 11시 30분 부산 수영 비행장을 이륙하여 서울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던 중 12시 40분경 평택 상공에서 김택선 등 남파공작원 5명(+ 방조자 2명)에게 공중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승객 중 군인 2명을 둔기로 쳐서 실신시키고 총기로 조종사를 위협하여 기수를 북으로 돌리게 했으며[2] ,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평양순안국제공항에 강제로 착륙시켰다. 탑승자 중에는 미국인 기장/부기장 외에도 미 군사고문단원(중령) 1명[3] 과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 승객 3명과 유봉순 자유당 대한민국 국회의원,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4] 등 고위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2월 17일 북한 당국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발표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북한이 대한민국 민항기를 납치한 이유는 마침 당시 중국 수상이었던 저우언라이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KNA기가 자진 월북한 것처럼 꾸며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답이 없다
3. 사건 경과 및 승객 송환
사건 발생 후 대한민국 국회는 2월 22일 본회의에서 민주당 소속 정일형 의원 주도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를 받은 UN군은 2월 24일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였고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서도 압력을 가했다. 자국민이 납치된 주한 미국/독일대사관도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지만 여의치 않다가 사건 발생 18일만인 3월 6일 납치범을 제외한 승객과 승무원 26명을 송환하기로 합의하였고 당일 오후 7시 승객과 승무원 26명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으나 창랑호 기체는 끝내 반환받지 못했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은 같은달 2월 20일 북한 간첩 기덕영의 조종을 받은 공작원 김택선/길선 형제와 김순기, 최관호, 김형 등 5명(월북동행자 김애희와 김미숙(본명 김신자)을 포함 총 7명)이 납치범이라 발표하었으며, 25일에는 기덕영 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 3명은 재판에 회부되는데 이 중 기덕영만 간첩 및 강도상해죄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다른 2명은 무죄로 석방된다. 이는 납북사건의 특성상 범행 당사자가 모두 월북해버렸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 전말보다 정황과 방증조사에 의존한 추측성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4. 사건 이후
창랑호 사건을 겪고 난 뒤의 대한민국 정부와 항공사는 완전히 충공깽을 당했으며 이후 재발 방지를 위해 항공기 탑승자의 총기 등 위험물 소지에 대한 단속과 항공기 운항에 대한 공중 감시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1년 뒤인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이 터지게 된다.
한편 북한으로부터 창랑호의 기체를 반환받지 못한 KNA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게 된다. 본 사건에 앞서, 1957년 7월 7일 만송호가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 도중 추락하는 사고로 기체가 전손처리되어(인명피해는 없었음) 상당한 타격을 입은 마당에 창랑호 납북 사건까지 터져서 당장 보유 기체가 우남호 1대밖에 없게 된 것이다[5] 이에 KNA는 1959년 4월 22일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동년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 서울 ―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여 1961년 7월 16일 신용욱[6] 대표가 한강에 투신 자살하였고 1962년 11월 13일 KNA는 폐업처리된다. 헌데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미 그 전부터 KNA를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해왔는데[7] 부채가 너무 크고 다양한 부실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어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인지라 아예 국영기업으로 바꾸기 위해 '''대한항공공사법'''을 제정하였고 1962년 9월 대한항공을 설립한다. 그러나 대한항공공사가 결항률 18%를 기록하고 각종 정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민영화를 결정, 1968년 11월 1일 한진그룹이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김기완은 뒷날 김재권이란 가명[8] 으로 일본 영사로 부임하여 김대중 납치사건에 가담하게 된다. 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한 경우다.
[1] KNA는 1948년 10월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민항사로 스티슨기(4인승) 4대로 영업을 시작했으나 6.25 전쟁으로 이 4대를 모두 잃고(징발된 것이 맞다) 1950년 12월 더글러스 DC-3기 2대를 도입하여 각각 장택상과 이기붕의 호를 붙여 '창랑'호와 '만송'호(등록부호:HL05)로 명명하였다. 1954년에 추가 도입한 1대는 이승만의 호를 붙여서 '우남'호(등록부호:HL2002)로 명명되었고 1955년 하와이 교포들의 모국 방문을 위해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한국 민항기로 기록된다.[2] 이런 것을 볼 때 당시 민항기 탑승자에 대한 총기 등 위험물 소지 여부 검색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가 1950년대였다고 해도 분명 전쟁을 치른 직후였다는 점에서 더더욱.[3] 납치 후 북한군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4] 미 국무부 북핵 특사였고 2011년 7월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 성 김의 아버지다. 그리고 아나운서 임택근의 자형이기도 하다. 즉, 손지창과 임재범의 고모부다. 거기에 아들이 미국 고위직에 오르게 되는 간접적 사건인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되었다가 팽당할 위험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5] 우남호는 이후 대한항공에 인수되어 1971년까지 총 36,216시간 비행 기록을 남기고 퇴역한 뒤 현재는 인하대학교 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 [6] KNA의 창업자로 1953년 동양인 최초로 3천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세운 실력있는 조종사였고 1950년과 1954년에는 민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정치에도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7] 이 때문인지 민영 항공사인 한국항공(한진 계열)이 문을 닫았다.[8] 개명한 건지는 확인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