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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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1일 ~ 2020년 1월 11일
1. 소개
3. 부상과 사망
4. 관련 문서


1. 소개


任宅根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이다. 종교천주교(세례명 : 사도 요한)이다. 임재범, 손지창의 생부이자 전 주한 미국 대사인 성 김(한국명 김성용)의 외삼촌이다. 즉, 성 김의 아버지이자 전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기완이 임택근의 자형이라는 얘기다. 그의 동생 임양근도 1967년 동양방송 아나운서 4기로 입사하여 1970년대에 형과 같이 아나운서로 활동한 적이 있다.
1932년, 경성부 수송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서 태어나 서울 수송초등학교, 휘문중학교(42회),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연세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1년,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방송계에 발을 들였는데, 당시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지원 자격은 대졸 이상이라[1] 임택근은 당연히 자격 미달이었지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방송국에 쳐들어가 당시 방송국장이던 노창성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몇날 며칠에 걸쳐 떼를 쓴 끝에 노 국장이 예외적으로 아나운서 시험 자격을 주었고 그 결과 그는 시험에 합격하여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나운서가 된 임택근은 스무고개와 노래자랑[2] 등 당대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명세를 탔으며 이후 올림픽 중계방송을 맡으면서 스포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당연히 초창기 TV 프로그램에도 여럿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4년 MBC로 이직하면서 방송부장, 이사 등 고위급 직책을 맡았고 동시에 올림픽 중계방송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여럿 진행하다가 1969년 MBC TV 개국 후 아침 토크 프로그램인 '''임택근 모닝쇼'''를 1년 정도 진행했다. 이는 한국 TV 프로그램 명칭에 최초로 진행자 이름이 들어간 사례였다.

그렇게 오랜 기간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을 진행하면서 얻은 유명세를 바탕으로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상현 후보에 밀려 36%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낙선하였다.
이후 다시 MBC로 복귀하여 상무이사, 전무이사를 지내고 1980년 MBC-경향신문 사장이던 이환의가 경질되고 이진희가 후임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사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신임 사장 이진희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새 시대를 맞이하여 방송국과 신문사 내 구시대 인물을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대다수의 중역들에게 사직을 요구했고, 임택근을 비롯한 간부들이 제출한 사표가 전부 에누리없이 수리되면서 회사에서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그는 방송계를 떠났다.
퇴사 후 보험과 광고 관련 사업을 벌이고, 중간에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와 대한고용보험 상무를 역임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 다시 정계에도 발을 걸치기도 했다. 물론 1년 남짓 활동한 수준이기는 하다. 1990년에 KBS '''노래는 사랑을 싣고''' MC로 20년 만에 마이크를 잡기도 했으며, 이후 코스모스 악기 임원 등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MBC 라디오중계 캐스터에 복귀했다.
'''여기까지면 전설적인 방송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2. 여성편력


뒤늦게 여성편력이 드러나면서 당대에 그의 방송을 보고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가수 임재범과 배우 겸 가수 손지창이 알고보니 그의 혼외자식이었던 것. 임재범의 가족사 문단에서도 언급되듯이,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바람을 피워 얻은 자식이 임재범과 손지창인 것. 더 가관인 것은 임재범의 모친이 두번째, 손지창의 모친이 세번째였다고 한다.
물론 그 시절에는 아직까지 가부장제가 절대적이고 여성의 지위가 바닥이라 힘 있는 남자들이 첩을 두고 두집, 세집 살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3] 그러고도 탈이 없으려면 그래도 아버지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매우 질 나쁜 케이스였던 것이다.[4]
그렇게 바람을 피워가며 자식을 낳아 놓고도 정작 애 키울 생각은 없었는지, 임재범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숨겨서 키웠고[5], 손지창은 한 술 더 떠서 처음부터 끝까지 외면해서 이모부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이모부의 성씨를 따라 손씨가 된 것. 후에 손지창이 생부임을 인지하고,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첫 등록금을 지원해 달라고 했으나 그마저도 거부했다.
손지창의 말에 의하면,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등록금을 달라고 찾아갔던 것이 아니라, 친아버지인걸 알고 있었고 그래도 아버지니까 아들의 첫 학기 등록금만큼은 내주는 것으로 최소한 친아버지된 도리는 해달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수백만 원짜리 시계를 찬 상태로 손을 떨면서 '''"나도 어렵다."'''라고 뻔뻔한 태도로 거절하자, 손지창이 격분하여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크게 화를 내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고 당황해하며 알겠다고, 돈을 주겠다고 급하게 말했다고 한다. 환멸을 느낀 손지창은 두번 다시 아버지를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그렇게 손지창을 끝까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다가, 자신의 여성편력과 사생아에 대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재빨리 '아들아!'라며 감동의 재회를 하는 방송을 찍었다. 당시 손지창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부자관계를 회복해서 서로 왕래하며 지내기로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으나, 훗날 손지창은 '''"그건 임택근과 친분 두터운 방송사 고위관계자의 압력 때문에[6] 어쩔 수 없이 찍은 것이며,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다시 보고 싶지도 않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손지창, 임재범도 영상에도 나오듯이 아버지라고 해도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이후 그의 추악한 행실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타를 받았음에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두 아들을 둬서 행복하다."''' 따위의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등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 결국 그 두 아들들은 각자의 2세를 위해 호적을 정리하고 아버지와 혈연적으로 완전히 떨어저 나갔다고 한다.
편의상 호적을 정리하고, 혈연적으로 떨어져 나간다고 표현했지만 손지창과 임재범은 임택근이 호적에 올리지 않는 바람(추정)에 오히려 아버지와 '''손쉽게''' 절연할 수 있다. 임택근으로부터 이미 태어났으니 혈연적으로는, 생물학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단순히 향후 앞으로 아버지인 임택근과 왕래를 하지 않으면 될 뿐. 호적에 올렸다면, 대한민국 법 체계에서는 한번 부모 - 자식 관계로 등록될시 이를 말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조항이 없어 아무리 민/형사소송을 해도 소용이 없지만 호적상 아버지가 없는 것이고 기록상 이미 남남이기 때문에, 임택근과 연결된 근거가 없으니 그냥 한평생 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심지어 버스에서 넘어져 반신불수가 된 뒤에도 임재범에게 "아버지가 지금 굉장히 힘들고 어려우며 몸과 마음도 많이 망가진 것은 알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라고 냉정한 말을 듣는 등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 이쯤 되면 임재범과 손지창이 이 양반 장례식을 지킨 게 신기할 지경이다.
언론사 연구자인 고려대 김민환 교수의 책 <아나운서 임택근>의 말미에 손지창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지만 위에서 서술한 내용은 대부분 생략되었고 극도로 순화된 서술만 있다. 대한민국 교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두리뭉실 넘어가려는 습관을 보여준 것이지만..이런 건 올바르게 연구하는 자세가 아니다.
임택근과 같은 시기에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생전 불의를 참지 못하는 꼿꼿하고 강직한 선비 기질과 바른 언행, 몸가짐으로 사후에도 언론계에서 존경받고 있는 장기범 아나운서[7]는 임택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임택근의 경우 상술한 사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아나운서 시절부터 당대 정권과 밀착하여 이승만, 박정희와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한 반면, 언론은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정권의 입맛을 맞추는 보도 따위는 거부했던 장기범은 높으신 분들에게 밉보이면서 지방 방송국장 등 한직만 전전하다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둘은 서로 극과 극으로 비교되고 있다.

3. 부상과 사망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 여행 도중 버스에서 넘어져 목을 접지르는 사고를 당한 후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한다.
2020년 1월 11일 오후 8시 경,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9년 10월에 심장질환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었고, 11월에는 뇌경색 진단을 받은 뒤 12월에 다시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갔었다고 한다. 임재범상주로 빈소를 지켰으며, 손지창/오연수 부부도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
보통 네티즌들은 어떤 특정 유명인이 사망하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추모의 반응을 보이곤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말은 거의 없고 살아생전의 영 좋지 않은 사생활비난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뭐 당연지사겠지만...

4. 관련 문서





[1] 이제 막 문맹에서 벗어난 이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는 엄청난 엘리트였다는 얘기다.[2] 이 중에서 노래자랑은 여러 개편과정을 거쳐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3] 2020년이 된 대한민국에도 시골의 유력자들 중에 첩을 두고 두집, 세집 살림하던 할아버지들이 아직 살아있는 케이스가 적지 않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케이스가 바로 대한민국일본을 넘나들며 세집살림하던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4] 그나마 신격호는 최소한 자식을 저버리진 않았고, 자녀들은 전부 롯데 쪽에서 일을 했다. 1983년 생으로 막내인 신유미는 롯데호텔 고문. (임택근과) 가장 비슷한 예라면 야구인 김동주. 김동주는 간통을 한 것도 모자라 자식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했다.[5] 고아원에서 자라게 방치하다가 나중에 첫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을 한 뒤에는 결국 호적에 올려주기는 했지만, 임재범의 생모가 아닌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는 웃지 못할 촌극을 저질렸다.[6] 사실 위의 경력만 보면 알겠지만 방송시점에선 임택근과 같이 직장생활을 했던 후배들이 임원직을 역임했을 시점이기는 했다. 선배 체면 생각해서 억지로 화해시킨 것.[7] 임택근의 중앙방송국 3년 선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