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
1. 개요
'허황후', '허왕후'라고도 불리며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고향이 인도 아유타야라고 기록했다. 금관국의 수로왕과 혼인해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아들 7명은 모두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김해시에 수로왕비릉이 현존하며 김해시는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아요디아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아요디아 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도 김해시가 속한 경상남도에 자매 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다.
2. 어디서 온 것인가?
허황옥의 출신지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는 형편이라 모든 게 추측의 영역이기 때문. 그런고로 기록 그대로 현 인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 본래 토착민이거나 혹은 이주민이더라도 인도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허황옥을 권위를 위해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그 과정에서 인도를 끌어와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허황옥 인도설은 불교적으로 윤색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허황옥이 김해시 쪽의 토착민이었을 가능성도 낮다는 쪽의 연구가 많다. 정말 바다를 넘어서 배를 타고 온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허황옥 역시 이주민일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금관국 내에서 허씨 일가의 권력은 김씨 왕가의 권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허황옥은 김해를 기반으로 한 김씨 일가와 직접 상대가 가능한 정도의 큰 세력 출신이라는 설이 많다. 문제는 큰 세력이 누군가 하는 것이지.
2.1. 아유타국설
허황옥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1]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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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인데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허황옥 인도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대체로 인도의 아요디아(Ayodhya)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아유타국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아요디아라는 집단은 당시에 확인되지 않는다.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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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도 몇 차례 언론을 통해 허황옥에 대해 소개되었기에 이에 관심있는 현지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를 거론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태국의 아유타야는 9세기 이후 이주한 타이인에 의해 세워진 정치체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12년 방영된 KBS 스페셜 등 허황옥 아유타국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가야에서 아유타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인도계 유리구슬이 나오고 가야의 철정 기술이 인도 남부와 유사한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이 한국으로 가져와서 쌓은 파사석탑이 남아 있는데 조사 결과 이 돌은 한반도에서는 전혀 나지 않는 돌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철정 기술은 기원전 7∼5세기에 무산의 범의구석 제5문화층에서 출토한 도끼, 기원전 4∼3세기경 범의구석 제6문화층과 기원전 2세기경의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영변 세죽리 출토 철기들이 선철(銑鐵) 제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기의 사용이 부분적이었고, 기원전 3∼2세기경에 철기가 광범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한다.[3]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은 신석기·청동기·철기의 순서로 된 문화층이며 5기의 주거지와 함께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살촉·명도전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2.2. 불교윤색설
학계에서는 허황옥의 출생지를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 아닐가 하는 설에 더 무게를 싣는다. 기록에 쓰여진 것이 다 사실이라고 보는 설은 인도학, 불교학 관련 논문 일부 등에서만 주장하는 소수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2.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
'아유타(阿踰陀)'는 '아요디아(Ayodhya)'를 가리키는 듯한데, 문제는 '아요디아'라는 지명이 굽타 왕조 시대, 즉 4세기 이후에 성립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사케타(Saketa)'라고 불렸고 5세기 법현의 <불국기>에서도 '사케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기(沙祇)'라고만 나타난다.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단계가 되어서야 '아유타'라는 지명이 보인다. 고로 이 설이 맞는다면 당연히 1세기에 한반도에 왔다는 허황옥이 '저는 아유타국 출신입니다.'라고 소개할 리 없다.
2.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 '아유타국'으로 후대에 불리게 되는 지역 사람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까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물론 인간의 탐험에 대한 욕구는 경이로워서 기원전에도 전혀 불가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항로 자체가 한 사람이 스쳐가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서 고생 끝에 만들어낸 경로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대에 인도로 가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한나라 정부에 의해 보장되는 실크로드를 거친 육로였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은 주로 북중국과 북인도 사이의 육로로 이루어졌다. 한나라 대 불교가 수입된 것 또한 입국 승려들의 국적을 볼 때 실크로드를 거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경향은 4세기 무렵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해양 경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해에서 출토된 유리 유물 중 일부가 인도계로 추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김해 출토 유리기는 '''2~4세기 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허황옥 전설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야 자체의 건국 기년이 끌어올려졌다는 의견이 다수이기에 넘어가더라도, 이 유리 유물의 출토 지역은 Arikamedu, 현재의 Kakkayanthope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링크). 그런데 후대에 '아요디아'로 불린 지역은 갠지스 강의 지류에 붙어 있는 내륙... 아니, 말이 내륙이지 오늘날의 지리적 관점에서는 남인도보다 '''히말라야 산맥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지도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은 내륙과 연결된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거나 지척에 있는 지역이었으며(지도) 동방 여행을 간다면, 특히 그 동네 고귀한 공주 출신이었다면 그나마 쿠샨 왕조와 한나라의 안전 보장이 되는 육로를 대신해 해로를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똑같은 인도 아니냐고 하겠지만, Kakkayanthope 지역은 전근대 인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도 전 지역 통일에 근접한 아소카 대왕도 직접적으로 복속시키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북인도와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애초에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실제로 한 대 해상 경로를 확인시켜주는 <한서> 지리지의 경로도 일남(日南, 베트남)-도원국(都元國, 말레이시아)-심리국(諶離國, 태국)-부감도로국(夫甘都盧國, 미얀마)를 거쳐 근해 항해를 하다가, 갑자기 '배로 2개월 가서 황지국(黃支國, 인도 타밀나두 칸치푸람)에 도착한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 자체만으로 북인도는 경유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앞서 언급한 쿠샨 왕조는 '귀상(貴霜)' 왕조로서 당대 중국에 꽤 유명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경유했다면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북인도가 남인도 지역과 중국 사이의 유리구슬 교역에 끼어들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4]
2.2.3.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
가야의 철정 제작 기술이 인도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근거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인도 고인돌에서 나왔다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게다가 영문 위키백과의 고인돌 목록(List of Dolmens) 문서에서는 '아유디아'(다시 말하지만 후대에 그렇게 불리게 되는 지역)가 속한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이 제작되는 것은 인도에서도 철기시대의 일인데, 4대 문명에 속한 범인도 지역은 철기시대도 빨라서 한반도와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무리한 추정과는 달리 한반도의 철제 유물 제작 기술은 대체로 전국시대 중국의 제철 기술이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 남부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이성주(2007), <청동기·철기시대 사회변동론>, 학연문화사).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허황옥과 인도 제철 기술의 전래(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면)가 관련이 있다면 허황옥은 여행 다니는 와중에 배에다가 '''광산 노동자와 제철 기술자를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대 항해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여러 모로 경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 사례일 뿐, 전근대에 배 타고 멀리 가다가 식량 떨어져서 굶어죽는 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항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원을 태우고 한반도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2.2.4.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
허황옥의 출신지를 굳이 각색할 이유가 있냐는 것도 사실 좀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불교계에서 인도는 말 그대로 성지이며, 진흥왕도 아소카 왕이 만들다 못 이룬 불상이 어쩌다 떠내려와서(...) 신라에서 완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전설을 날조할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국 전설은 후대에 신화화되기 가장 좋은 소재이다. 단군,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전설들이 많다. 가야 역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었다. 물론 현대인들은 곰이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등 이런 신화를 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즉 신화적 기록은 사실과 허구가 섞인 거라고 이해해야 합리적이다. 고로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인들이 각색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허황옥 일가가 가야에 미쳤던 영향력을 고려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좌지왕 시절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인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할만한 영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것. 신라에 병합된 이후 김유신 후손들이 가야 세력의 영향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허황옥을 신격화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아가 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적힌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면 다른 역사서에도 충분히 이런 얘기들이 기록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등에선 이런 얘기를 적지 않았다.[5]
2.2.5. '허황옥' 이라는 이름 그 자체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보면 성은 허요, 이름이 황옥이다. 이것이 명백히 중국이나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 이름에 기반하지, 인도인의 이름이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마치 투란도트 오페라에서, 유럽인이 중국의 공주라면서 실제 중국 이름과는 별 상관이 없는 '투란도트'를 중국 공주 이름이라고[6] 설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작성된 사료에는, 외국인이나 이민족의 이름들을 죄다 한자로 표기하여 적지만, 그 표기를 보아하더라도 한족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흉노인인 난제어부라 또는 혁련발발이나, 인도에서 온 승려인 구마라집, 고구려인인 명림답부, 백제 출신인 흑치상지, 돌궐인인 아사나묵철, 여진인인 완안아골타, 일본인인 풍신수길이나 이등박문, 선비족인 독고가라, 거란인인 야율아보기나 몽골인인 패아지근철목진이나 만주인인 애신각라노리합적같은 이름은 그 원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한자 표기만 보더라도 명백히 한족이 아닌 민족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연이 한족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있지만 이는 사서에서 이민족들이 중국 지역에 왕조를 세우고 한족식 이름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명백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대 인도 아대륙권 인물의 이름 중 하나를 대라고 하면, 고타마 싯다르타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인도가 단일한 국가가 아니며 언어도 한두개가 아니라지만, 불경 등에 나오는 고대 '인도인'들의 이름들(아난다나 데바닷타, 슈도다나, 라훌라 등)과, '허 황옥' 이라는 이름을 비교해보면, 과연 허황옥이 진짜 '인도 아대륙에 있다던 아유타국'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조차 의심이다.[7] 게다가 허황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성씨가 허요 이름이 황옥이라고 하니, 인도인이 한반도 남부 가야에 정착해 따로 개명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조차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도인의 이름이 허황옥이라는 것은 실제 인도인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오페라 투란도트나 고대 아랍 설화 알라딘에서 실제 중국과는 별 상관 없는, 단지 이야기 저자들의 환상과 판타지 속의 중국을 만든 것처럼 허씨 가문이 자신의 시조를 꾸며내면서 그들의 환상 속의 인도 아유타국을 만든 것에 가깝겠다.
2.2.6. 역사상 실제 장거리 여행-항해 사례와 비교하여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대양 확장, 박연과 헨드릭 하멜의 표류 사례,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의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에 출입하지 못하는 인도의 공무원의 사례, 고대 카르타고의 탐험가인 항해자 한노는 대양항해는 꿈도 못 꿀 시기에 연안항해를 통해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일대까지 탐험한 기록 등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항해는 개인의 항해가 아닌 인구 집단의 항해이며,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박연-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는 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유치하고 있었고, 조선도 그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카르타고와 세네갈의 경우에도, 인도와 한반도의 거리에 비해서는 아득한 차이가 날 정도로 짧은 거리에 있으며 그 사이를 가로막을 정치체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같은 국가에 속하는 인도 공화국과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강원도 정선군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유럽계 유골이 출토된 사례 # 까지 언급되었으나, 이 경우는 수천 년에 걸쳐서 소수 인구 집단이 이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 시대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물론 서기 1세기 후한의 탐험가인 감영이 지금의 캅카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일대에 이르는 지역까지 탐험한 사례, 고대 그리스의 피테아스가 그냥 탐험하려고 브리튼 제도까지 가본 사례, 중세 모로코의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가 메카 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중국까지 다녀온 기록 등도 있다. 그러나 감영은 후한 정부가 절반 이상의 경로를 보장해 준 데다가 후한의 정부 관료로서 안식국(파르티아)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그 사이의 경로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고, 이 시기에 로마 기록에서 '시니카'가 확인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로마가 중국과 교역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피테아스는 이미 그 시대에 적어도 스페인까지는 그리스-로마인의 교역망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리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측정 자료를 남겨 경로의 재구성이 가능했다. 이븐 바투타의 경우 메카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홍해와 인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 정식으로 국가 대 국가로 교섭하는 정치체들 사이에 계절풍을 이용한 정기 무역이 이미 발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여행기에서 그 풍습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남겨 오늘날까지 연구에 대해 이용되고 있다. 반면 허황옥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런 항해 내용을 증언해 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억지로 <한서> 지리지 등의 기록을 끼워 맞춰 없는 기록을 땜질해 보려하는 것이지만, 당시 남해 항로에 대해서는 한의 정부에서 점 단위(말이 점 단위이지 지금 기준으로도 국가 단위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점들이었다) 조직을 겨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 있다는 국가들도 한나라와 '아유타국(앞에서 말했듯 이름은 둘째 치고 대충 그 전신이 있기는 했다면)'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었다. 무엇보다 앞의 여행가들은 '''당대에 기록을 남겨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반면''',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100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가락국기로 추적하는 것이 고작이다.
3. 한-인도 관계에서
이처럼 학계에선 정설로 공인받지 못한 설이나, 허황옥이 자주 인도 출신이라고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이유는 불교계의 영향력도 있고,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한-인도 친선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도 가락중앙종친회는 매년 아요디아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있고,[8] 심지어 인도에는 지금도 아요디아 왕족이 존재한다. 아요디아 라자의 궁전에 가면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라자도 허황옥이 자기 집안 사람이 분명할 거라고 믿는다고. 이 라자 가문은 1999년 국민의정부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해 김씨 종친회와 공동으로 수로왕비릉을 참배한 적도 있었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만남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경을 왔었다.
인도에서는 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실제 2010년대 들어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허황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소설 <비단공주>가 인도 현지에서 출간되기도 했고, 뮤지컬 제작 논의도 있었으나 현재는 감감무소식인 듯. 전 인도 대사 인터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 당시에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인도 공주가 한국에 와서 수로왕과 혼인해 일가를 이뤘고,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는 아주 많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라는 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인도 외교부 산하 단체인 인도문화교류위원회(Indian Council for cultural Relations, ICCR)에서도 허황옥을 주제로 2015년 7월 14~15일 간 컨퍼런스를 연 적이 있다. 사무총장 사티시 메타(Shri Satish C. Mehta) 사무총장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인도와 관련이 있는 분[9] 이 '''1,000만명'''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양국 관계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며, 이번 컨퍼런스는 인도가 한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고 했다.
2015년 9월에 김해시와 부산광역시는 허황옥이 배를 타고 인도에서 김해로 오는 과정을 재현한 허황후 신행길 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앞으로도 매년 개최하여 특색 있는 전통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2018년 11월 2일(현지시간)에 영국의 BBC는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허황옥 황후 관련 이야기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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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0일에 한국과 인도에서 허황옥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가 공동발행되기도 했다.
2019년 10월 5일 김해에서는 허황옥 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또한 주한인도대사가 참관하고 주한인도대사상 경우 인도대사가 직접 수여했다.
요즘 올라오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아요디아 지방과 관련도 없는 타밀어와 한국어 비교 영상에 인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허황후 드립을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타밀어를 쓰는 지역은 인도의 남쪽 지방이다. 실제로 해당 영상에서는 힌디어 화자인 인도인 유저가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란 댓글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정말로 인도 국내에 허황옥 신화가 많이 퍼져있기는 한 듯.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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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위치한 섬.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시가지와 붙어있다. 근처에 대한제국 순종때 허왕후 전설을 전하기 위해 만든 유주비각이 있다.[2] 참고로 위 지도는 인도 혈통의 중국인 허황옥이 대륙을 건너 다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딱히 명확한 물증은 없다.[3] (『조선고고학개요』).[4] 그래서 허황옥이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 중에는 아예 허황옥이 타밀 지역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타밀어와 한국어가 유사하다는 둥 현재 학계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을 덧붙이는 것은 덤.[5] 물론 '이러한 전설이 있다.' 정도는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조차 안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승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 유학자라 불교를 배척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이 적은 삼국사기는, 주로 한국 본토에서 기록된 글과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옮겨 적은 삼국유사와 다르게, 중국 기록을 많이 참고하여 옮겨 적은 부분이 많다. 또 승려 일연 입장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허황옥 얘기는 꼭 쓰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6] 오히려 투란도트 문서를 보면 이 이름은 이란어와 더욱 연관이 깊은데, 몽골인이나 거란, 여진족이 중국 땅을 지배한 적은 있어도 이란계가 중국을 지배한 적은 없다. 그나마 후조의 석씨 왕조를 배출한 갈족 정도가 이란계(정확히는 소그드인)로 추정되긴 하지만 이쪽은 이란계가 아니라 토하라계나 튀르크계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어서 딱히 어느 쪽 혈통이라고 단정짓기 힘든 상황이다.[7] 한역된 불교 인명을 보면 난디미트라-경우慶友, 나가르주나-용수龍樹, 마하나마-대명大名 등 의역된 이름도 많은 데다 황옥이라는 이름도 매우 흔한 한자라서 그 자체는 의역으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교의 중국전래이전에 왔으니 그럴 확률이 희박해서 문제. 인터넷에서는 본명이 슈리라트나라는출처불명인 이야기도 퍼져 있다.[8] 다만 김해 김씨 문중내에서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논개처럼 전설이 있다 정도로만 언급하고 기념해도 될 것을, 확실하지도 않은 설에 너무 오버한다는 것.[9] 김해 김씨·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가락종친회’ 회원.[10] 서지혜는 2005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신돈에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노국대장공주 역을 맡은 바 있었기 때문에 김수로에 출연하면서 외국인 출신 왕비를 2번이나 연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