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병

 

1. 개요
2. 역사
3. 가상 매체에서의 창병


1. 개요


槍兵
Spearman.
을 쓰는 병사,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창을 든 보병을 뜻한다.

2. 역사


보통 대량의 저숙련도 병력을 긴급히 무장해야 할 경우 창이 주요 무기가 되었으며, 길이가 긴 창의 경우 대규모로 밀집해서 전개하면 쓸만한 전투력을 가졌다. 창과 대비되는 검의 경우 검술을 일정이상으로 익히기 위해서는 담대한 강단과 자기확신에서 나오는 패기가 필요하며 신체의 반응속도가 빨라야했다. 그리고 군대는 빠른시간 내에 집단전에 쓸만한 병사들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군대에서 신병양성에 허락된 시간만으로는 제식훈련과 체력단련, 충성과 복종심, 행군을 가르치는 데에도 빠듯하므로 전투기술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과 밀집대형을 통해 일신의 무예가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무기의 리치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검술을 익힌다면 다른무기와는 달리 냉병기끼리의 근접전투에서 다른 종류의 무기를 찾지않고 싸울 수 있고 승률도 높지만 개개인 마다 편차가 커서 지휘관들이 지휘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군대란 집단은 어느정도 기준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검도 작정하고 카운터를 칠려면 쿼터스태프 같은 봉을 사용하면 되지만 이것은 평복일 때의 이야기이고 전쟁터 처럼 최소한의 방어구라도 걸치지 못해 안달난 곳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창과 곤봉은 다르다. 실제로 무비지 등 대다수의 무예서나 전쟁사 기록에서는 도곤 같이 짧고 굵은 자루를 가진 장대무기와 찌르는 창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창 같이 길고 무겁다면 진퇴가 빠르지 못해서 검에 당하겠지만 곤봉은 또한 같은 부류로 생각해서 논의할 것이 아니다." -소림곤법 문답편

카운터로는 방패를 쓰는 팽배수[1][2], 레기온, 도펠죌트너같은 검병들과 투사무기들을 사용하는 원거리 병종들. 창을 최고로 여기던 명나라의 창술가들이 일본의 검술에 명나라의 창술이 농락당하자 경악을 하고 연구해서 만든 검술이 단도법선이고 단도법선의 머릿말에 그 이야기가 쓰여져 있을 지경이다. 다만 검병들의 경우 특성상 다용도로 쓸 수 있는 특성으로 인해 기동전을 펼치며 싸워야 하고, 병과 특성상 무언가를 더 쥐어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보조무기까지 익히느라 오랜 양성기간이 필요했고 장병개개인들의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 충성도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쉽게 양성이 되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럽은 소속감이나 충성도 따윈 개나 줘버린 상황이라 단순 직업전사들 중심의 전쟁이 아닌 대규모 인원의 전쟁이 된 이후부터는 복잡한 소부대의 전장이나 전역 내 기동보다는 병력통제가 가능한 대부대들에 의한 기동과 전투를 했었고 이런 특성상 탈영병 발생 억제를 위해서라도 창병들을 많이 쓰게 되었다. 이 흐름은 전열보병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로마가 무너진 뒤에는 동양수준은 커녕 로마시대 정도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도 따위도 아예 기대를 하지말아야 하는 체제가 된 유럽에서는 직업전사들이 주로 검을 썼고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주로 창을 썼다. 당시 문학이나 기록, 당시 분위기를 낸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자기네의 군세가 강하다는 증거로 긴 검과 강한 방패를 가진 전사가 몇 명인지를 드러내는 어구가 자주 보인다. 물론 직업전사들이 검만 쓴게 아니고 보조무기로 창과 도끼 등을 상황에 따라 썼다. 직업전사들이라 개인단위로도 강력한 무위를 내어야 하는데다가 사람이 없는데 한가지 역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 통제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비인간적인 전열보병시대의 가혹행위로 그 이름을 떨쳤으며 현재도 똥군기를 비롯해 각종 부조리와 악습으로 내려오게 된다.
투사무기류들은 무기와 궁시, 탄약류의 확보부터 운용인력 유지, 병력배치와 진형유지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쉬운편은 아니었다. 당장 사료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현지에서도 있는지도 제대로 몰라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총기가 등장한 후에 창은 이전시기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초기 머스킷은 장전시간이 미친듯이 길었기 때문에 머스킷 사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동식 방벽 역할을 위해 창병의 입지가 이전 시대보다 더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총검이라는 희대의 발명품이 나오면서 굳이 창병을 투입하지 않아도 근접전과 대 기병 방진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창병은 옛날 병종으로 전락했다. 그 전부터 총기와 운용법의 발달로 총을 비롯한 원거리 무기로도 효과적인 방어를 한 사례가 있고[3] 점점 머스킷의 물량이 늘어나며 가격 면에서도 장점이 사라지기 시작해 결국 퇴출되었다.
또한 창도 엄연히 숙련도가 요구되는 무기였기 때문에 장창병의 경우 5년은 해야 쓸만하다는 소리를 듣고 10년 정도는 복무해야 고참병 소리를 들었다. 스웨덴에서는 전쟁이 많아지자 외국에서 군사 고문관들을 데려왔는데, 이들은 스웨덴군 창병들이 파이크도 제대로 집지 못하고 방진도 제대로 못 만든다며 혹평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사수들에게도 검을 쥐어줘서 근접전을 수행하게 한 적이 있다. 다만 이것은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속감, 충성도가 높아야 하고 집단 상층부가 하층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이 높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으며, 그래서 이쪽 저쪽을 오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전국시대 일본은 테르시오마냥 창병의 비율을 높게 유지하였다.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우선 창에 대한 하드카운터였던 폴암과 검의 대결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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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공간을 가진 폴암의 우위(좌)[4]

접근을 허용했을 때 검의 우위(우)[5]
이들의 전투에서 보듯이 검이든 폴암이든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찌르는 데 특화된 창은 적이 방진을 해체하지 못하도록 서포트를 해 주고 먹잇감들을 몰아주는 망치 역할을 해줄 다른 병종의 도움을 받는다면 같은 공간에도 여럿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좁은 공간에 우루루 들어가 순간적인 다굴로 간단히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농사짓는 아무개를 데려다가 창만 쥐어주고 몇 가지 훈련만 시키면 바로 실전에 투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전근대 군대에서 이 점에 주목해 창을 애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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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병의 대표 아이콘인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한 손에 큰 방패, 다른 손에 2.5m가량의 창을 든 모양이지만, 필리포스 2세가 개량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방패를 가죽끈으로 팔뚝에 묶고[7] 사리사라고 불리는 길이 '''6.5m'''가량의 긴 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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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의 팔랑크스. 그림에 묘사된 병사들은 가로 16줄 세로 16줄에 총 256명으로, 사리사 보병의 기본 부대 단위인 신타그마 하나가 전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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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창병방진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제철기술의 발달로 검의 성능이 일신되자 검이 주력인 로마군이 창을 주력으로 쓰던 그리스 문화권의 국가들을 전부 패배시키고 무릎을 꿇렸으며, 이 때부터 창은 보조무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전투를 뽑자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는 측면공격으로 무너뜨렸고 피드나 전투에서는 전면에 생긴 틈을 통해 무너뜨렸으며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는 아예 대놓고 정면에 싸움을 걸어 무너뜨렸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냐면 먼저 창병방진은 창의 밀도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앞 창날과 뒤 창날 간의 간격이 80cm~1m정도 되기 때문에 실력이 되는 검사들은 충분히 파고드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집단으로 뭉쳤을 때 창은 검보다 유기적으로 활동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20명 정도의 마니풀루스나 100명 정도의 백인대 단위, 정 뭐하면 8명 단위의 콘투베르니움으로도 흩어져서 싸울 수 있는 로마군에 비해 그리스의 팔랑크스들은 그러질 못했다.
결국 이는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에 로마군이 그리스군에게 과도한 기동을 강요받게 한 후 빈틈을 만들어 파고들어 돌파하는 것을 막지 못해 대패하는 원인이 된다.[8] 유일하게 이긴 게 피로스인데 그 피로스마저도 출혈이 엄청났다. 애초에 중장보병 회전은 무조건 평야에서 일어났지 구릉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단 것을 고려하면 무겁고 느린 마케돈식 팔랑크스는 날아다니는 로마의 레기온에게 매우 약했다. 이미 초창기 그리스식 팔랑크스를 운용해본 로마는 전열도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켈트족과 삼니움족과의 싸움을 통해 팔랑크스가 가진 한계를 경험했다. 켈트족은 전열대형이라 해도 상당히 띄엄띄엄 있거나 아예 진열을 구성하지 않았기에 훨씬 유동성이 좋아 팔랑크스의 측후면을 노리기 쉬웠고 삼니움족은 뛰어난 게릴라전술로 절대 팔랑크스가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결국 고전기 팔랑크스의 이피크라테스 개혁과 디아도코이 시절에 왜 팔랑기타이의 창이 더 길어지고 중무장화가 진행되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짧은 창을 들었던 고전기 팔랑크스든 마케돈식 팔랑크스든 디아도코이 왕조들의 팔랑크스든 창을 들고 측면을 노리는 기동을 요구하느니 차라리 창의 길이를 늘리고 떡장을 입혀서 정면 힘싸움에서 승리하는 쪽을 택했으며, 심지어 유연한 기동이 가능했다고 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도 측면 기동은 대부분 팔랑기타이들의 역할이 아니라 보조 보병들과 기병의 몫이었다. 즉 창 자체의 한계인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스파르타에선 다른 폴리스 군인들이 진형 유지 훈련하느라 날 다 보내는 동안 진형 유지따윈 이미 처음 몇 년 만에 다 떼놓고 개인 무술이며 기동훈련, 제식에 임무형 지휘체계까지 훈련한 강군이었으며, 그래서 진형이 깨지면 그대로 패주하는 다른 그리스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일부러 진형을 해체하고 흩어졌다가 적이 추격하느라 길게 늘어지면 순식간에 재집결하는 식의 기동전술을 펼쳤다고 한다. 이게 가능했던건 다른 폴리스들은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병으로서 1년에 십수일에서 30일 정도의 훈련을 받을 때 병영 국가인 스파르타는 거의 1년 내내 군사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팔랑크스를 쓰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폴리스나 국가들의 팔랑크스나 별 다를 게 없었다. 다층으로 이루어진 이 대형은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을 가졌지만 반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정교한 전술을 발휘할 여지가 적었고, 이 탓에 고위 장교들도 대열에 끼어서 그냥 묵묵히 전진해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열은 빨리 움직이면 전열이 무너지므로 천천히 전진해야 했는데[9] 이는 이 전술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팔랑크스는 측면과 후방에 대한 공격, 특히 무기를 들되 방패를 들지 않은 오른쪽에서 기병이나 경보병이 투사무기를 이용해 공격해오면 상당히 취약했다. 기원전 391년에 벌어진 레카이움 전투(Battle of Lechaeum)에서는 아테네군 경보병대가 스파르타군 왼편에 매복해있다가, 스파르타군 중보병대가 보급품을 호송하고 방향을 바꿔 돌아올 때 오른쪽이 노출되자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해서 투사 공격만으로 집요하게 추적하며 공격해대어 600명 중에 250명을 사살해내기도 했다.
팔랑크스에선 대대나 연대는 존재하지 않고 병사나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한덩어리로 직사각형의 대열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편제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명목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쓸려면 쓸 수 있었던 로마군과 달리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쓸려해도 쓸 수 없었다. 적은 인력풀과 적은 훈련 시간만으로 쓸만한 병사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팔랑크스와 창의 문제점이며 한계이다.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도 팔랑크스의 단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장에서는 모든 전투의 시간, 장소, 상황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이 모든 중요한 조건 하나하나에 따라 전투의 결과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팔랑크스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상황에서만 무적이다. 팔랑크스에 유리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이에 대적하는 한 이 가공할 대형을 무너뜨릴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팔랑크스가 불리한 시간, 장소, 상황이라면 그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팔랑크스를 유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쉽게 사라지는 경우는 있어도, 팔랑크스를 불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이 유명한 전투대형이 로마인들이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보다 왜 열등한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준비한 계획은 5분만에 휴지조각이 된다는 후대의 명언처럼 전장은 변수와 싸우는 곳인데, 극도로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제 위력을 발휘하는 팔랑크스는 어찌보면 없어지는 게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창병 교육이 쉽다 쉽다 하는데 막상 제대로 된 창병을 양성하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다. 조선 후기인 1625년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는데,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수들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이나 장검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언급이 없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드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경기도의 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 나무를 써야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식물의 특성상, 같은 품종이라 해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좋은 목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더 문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다.
총알이 날아오든 포탄이 터지든 묵묵히 걸어가는 전열보병을 보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하는데, 창병도 절대 진형을 흐트리면 안 되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화살이나 투창, 그 외의 투척무기들을 맞고 죽을지언정 절대 진형을 이탈해서는 안되었다. 타 병종과 달리 창병은 진형을 흐트리는 순간 그 존재가치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 기예로 창술을 익힐 수는 있겠지만 척 봐도 창 들고 날뛰는 원맨쇼는 전장에서 창이 요구하는 포지션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익혀봤자 다른 무기들에게 취약한 점은 변함없다. 창의 주 공격수단인 찌르기는 아주 짧은 무기인 단검이 아닌이상 선딜과 후딜이 길어서 단독으로 했다가 실패하는 경우 미래가 없는, 난이도 높은 공격이었다. 이건 1kg 남짓이었던 레이피어들도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일본에서도 칼이 없으면 봉을 들고 봉이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주요 부상 원인 보병이 기병을 상대 할 때의 팁
풀어서 쓰자면 Nihayat al-Su'l wa'l Umniyaya fi Ta'lim A'mal al-Furusiyya, 맘루크들의 훈련교범에서는 당시 기병의 주류인 검으로 무장한 기병(sword-armed cavalry)들이 보병들의 대열 내로 들어오려 할 때는 철퇴나 검을 쓰는 것이 좋으며 활, 투창, 창으로는 접근거부를 노려 볼 수 있을 지언정 기병을 제압할 수 없다고 써놓았으며 동시에 가까이 접근해서 교전하라고 훈련교범에다가 썼다(Infantry armed with mace or sword. one cannot stampede horses with arrows, javelins or spears. Rather one should try to get close to them and among them).
명나라의 병서인 무비지에서는 중군(中軍)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갑옷을 입은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으로 기병을 상대하라 했으며 효종실록 14권, 6년(1655 을미년, 청 순치(順治) 12년) 6월 17일(경오) 3번째기사에서도 "고교보(高橋堡)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잡혀간 사람을 만났는데, 교하(交河)의 사노(私奴) 응상(應祥)이었습니다.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었더니, 그가 갑군(甲軍)으로서 지난해에 남방의 싸움터에 따라갔는데 남군이 패한 체하고 북군을 유인하여 협격해서 북군이 전멸하고 왕자(王子)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남군은 태반이 보졸(步卒)인데 철갑으로 머리와 몸을 싸고 손에는 큰 칼을 들고 몸을 굽히고 곧바로 달려가 말의 다리만을 찍으며 선봉에는 코끼리를 탄 자가 많이 있었다 합니다."라는 증언을 내세운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무로마치시대의 전사상자 비율을 본다면 스즈키 마사야는 화살 87%, 칼과 나기나타 8%, 투석 3%, 창 1%라고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토머스 콘랜은 말은 화살 61%, 칼 35%, 창 3%이고 사람은 화살 73%, 칼 25%, 창 2%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덤으로 백병전에서 칼에 의한 부상 비율은 92%라고 콘랜은 설명하였다. 게다가 당시 전장은 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였다.
길고 좁은 곳은 교전에 필요한 면적이 적어서 좁은 곳에 대량의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는 창병들이 활약할 여지가 많은 곳인데 제대로 활용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주로 4~5m되는 장찰을 든 창병이 4~5열 이상 두툼하게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 창병들이 일제히 공격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창을 전방으로 세운 진형에서도 보통 앞 창날과 뒤 창날 간에 0.8-1m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창날을 하나씩 피하거나 15~17세기마냥 창 밑으로 침투하거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서양 양손검병 묘사화에서 나온 것 마냥 아예 검으로 창대를 잘라가며파고드는 것이 가능했다. 앞의 레기온 vs 팔랑크스 경우말고도 15세기말~17세기 중반까지 있었던 장창방진끼리의 싸움에서 란츠크네히트의 경우 투핸드소드나 할버드를 든 병사를 앞쪽에 배치했고 검술자료들을 비롯해 당시 사료나 군대끼리 서로 싸우는 당시 그림을 봐도 서로 검들고 싸우는 도펠죌트너 같은 검병들이 앞에서 현대의 전차마냥 백병전을 하며 장창방진을 무너뜨렸고 뒤에서 파이크병들이 현대의 보병마냥 뒤에서 지원 및 잔적 처리방식으로 싸웠었다.
중세시대에도 비싼 장비와 훈련비를 부담 가능했던 기사나 전사들의 존재로 인해 입지가 별 나아지진 않은데다가 사슬갑옷트랜지셔널 아머의 등장으로 점점 유효타를 먹이기 힘들어졌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4~5m되는 장창을 든 창병이 4~5열 이상 두툼하게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 창병들이 일제히 공격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창을 전방으로 세운 진형에서도 보통 앞 창날과 뒤 창날 간에 0.8-1m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창날을 하나씩 피하거나 15~17세기마냥 창 밑으로 침투하거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서양 양손검병 묘사화에서 나온 것 마냥 아예 검으로 창대를 잘라가며파고드는 것이 가능했다. 앞의 레기온 vs 팔랑크스 경우나 15세기말~17세기 중반까지 있었던 장창방진끼리의 싸움에서 란츠크네히트의 경우 투핸드소드나 할버드를 든 병사를 앞쪽에 배치했고 서로 싸우는 당시 그림을 봐도 서로 검들고 싸우는 도펠죌트너 같은 검병들이 앞에서 백병전을 하고 뒤에서 파이크병들이 뒤에서 화력지원하는 방식으로 싸웠었다.
검이 다른 냉병기들에게 가지는 또다른 강점은 무게중심이 칼자루 쪽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 휘두를 때의 빈틈이 적다는 점이다. 반면에 둔기는 무게중심이 끝에 있기 때문에 휘두르는 데에 완력이 필요했고 잘못 휘둘렀을 때의 빈틈도 컸다. 단순한 타격무기로는 서로 손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의 카운터성 공격과 클린치 레슬링에 대한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에 갑옷을 입은 중장병들 간의 백병전에서도 범용성이 높은 검이 자주 사용되었고, 검 대신 둔기로 무장한 병사들에게도 단검은 필수품이었다.
같은 연유로, 부피 대비 살상력은 무기 종류 막론하고 검이 가장 뛰어나며, 이로 말미암아 휴대성이 좋았던 것도 검이 동서고금 막론하고 각광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은닉무기 중에서는 검을 따라올 냉병기가 없다. 둔기나 도끼류는 휘둘러서 운동에너지로 공격하는 구조 상, 일정크기 이상이 넘어야 위력이 나오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서는 실용성을 기대할수가 없으며 또 그만큼 전투반경이 넓기 때문에 초근접전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못한다. 반면에 검은 초근접전 상황에서도 그냥 사용자의 체중을 실어 상대방을 찔러버리거나 베면 그만이기 때문에, 소매속에 숨길 수 있을정도로 작은 폴딩 나이프로도 허구한날 사람이 다치고 죽는게 일상이다. 이 점이 검을 냉병기 중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무기를 다루는 기교 면에서도 검은 냉병기들보다 우위에 있다. 다른 냉병기들은 배우기는 쉬우나 운용 방식이 한정적이다. 이에 비하여 검은 범용성 덕분에 형태가 바뀌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스쿨이나 유파 등에서 검을 기본으로 교습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오랜 기간을 배워야 그 기교를 활용할 수 있기에 검술은 오랜 기간 지배계급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Akademia Szermierzy의 피오레 롱소드 검술 시연
여담으로 칼에만 칼집이 있어 보관 때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명백한 오해다. 도끼도 창도 폴암류 무기도 모두 날 쪽에 씌우는 형태의 덮개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모두 통틀어 Sheath라고 한다.
검에게는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뚜렷한 강점이 없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처럼 휘둘러 찌를 수 있고, 도끼처럼 찍어 벨 수 있고, 철퇴처럼 후려칠 수 있고, 단검처럼 당겨 썰거나 눌러 찌를 수 있다. 무언가 특수한 목적과 방향을 가진 다른 무기들과 달리 검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에 강점이 약점으로 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상기에 언급한 장점 이외에도 검은 한가지 더 장점이 있는데 바로 다양한 보조무기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총, 활, 쇠뇌, 폴암, 투척무기 등을 적극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로마 레기온도 투창이나 다트같은 보조무기들을 썼으며 독일의 도펠죌트너도 할버드나 총, 쇠뇌 같은 것을 보조무기로 썼다. 그러나 창은 그 길이와 무게로 인해 보조무기 선정에 큰 제한이 있었다.
여기서 앞서 언급된 것과 다른 사료들을 보인다면 선조실록과 왜란 시기 의병장들의 기록에도 조총과 왜검이 일본군의 주력 무기로 묘사돼 있고 인조실록에는 왜병들이 모두 검술을 배웠기 때문에 조선군을 단병전에서 압도할 수 있었으며 전투의 승패는 결국 단병전에서 결정이 나고 단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술이라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궁병(射者)·창병(槍者)·총병(銃者)·기병(騎者)이 모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을 차고서도 그 기술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절강병과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법을 알고 있는데,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10]

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접전해 볼 겨를도 없이 먼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으니, 검술이 전쟁(戰陣)에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진정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기사)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기사)

심지어 창을 만병지왕이라고 추켜세웠던 명나라에서도 일본검술에 지속적으로 패하자 창술가들이 일본검술을 연구하기까지 하였다.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그 용법은 좌우로 도약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의도를 숨기니 인력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병기가 항상 짧은 칼에 패배하였다.

『단도법선』 단도설(单刀说)

조선의 경우 이 근접전을 수행하는 병과의 중요성이 드러나는데 관료들의 수를 빠른 속도로 늘리다보니 국가의 지방장악력은 높아졌지만 땅은 유한하다는 과전법의 한계로 기존 관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토지를 겸병하자 신규 임용된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땅이 모자르게 되어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까지 주다보니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은 훈련만으로는 기르기 힘든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병력 수급이 점점 힘들어진다.
게다가 조선군은 초기부터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는데[11] 봉족은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보니 아예 정군이 봉족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떠넘기는 행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오죽하면 태종이 1407년에“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군역 운영상의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정군의 수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세종 23년(1441)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구분 없이 건강한 자를 택하여 정군으로 삼고, 솔정(率丁)의 수에 따라 봉족을 주도록 하여[12] 전력누수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그것이 안되어서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전버전에서는 조선군 30만 운운을 하면서 원래부터 강했다고 우기지만 그걸 그대로 믿으면 조선 말기에도 조선은 110만 대군을 가진 군사강국이었다고 우길 수 있다. 사실 세조를 비난하는 대부분의 글은 뇌피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반박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거짓말의 근거를 찾아내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조선 초기의 군제에서는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나 장도류들을 든 도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도펠죌트너처럼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실제로 조선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드려고 하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을 할 정도.
그러나 팔랑크스이후 창의 비중이 낮아졌지만 창이 완전히 강판당하지는 않았다. 창은 특화무기로서 자신의 장점에 해당하는 영역에서는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제국군도 팔랑크스들을 보조병으로 직접 편성하거나 동맹들에게서 지원받아 보조병으로 사용하였고 동로마제국군도 주력 중보병인 스쿠타토이들의 제 1선에는 창을 든 병사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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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타티 또는 스쿠타토이(Skoutatoi). 제국 역사상 스쿠타토이로 불렸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기에 스쿠타티로 일컫는 게 때문에 보다 적합하다는 의견이 있다. 어차피 학계에서도 완전히 고정된 것도 아니고 여기는 학계도 아니니 맥락에만 맞으면 그만이므로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도 된다.
비잔티움 보병의 중추이며 명칭은 이들이 사용하는 타원형, 연 모양 대형 방패인 스쿠톤(Skouto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스쿠톤은 각 부대마다 장식이 달랐다고 한다. 투구는 대체로 단순하고 위쪽이 뾰족한 철제로 목 보호대가 추가되는 정도였다. 린넨이니 양모 옷을 입은 위에 흉갑을 덧입고 그 위에 가죽이나 천으로 된 패드 등으로 고정시키는 게 보통의 갑옷이며 그 외에 하반신 보호를 위해 두꺼운 천을 받쳐입기도 한다. 대대의 앞열은 2~3m 정도의 장창과 대형 방패로 무장해서 후위를 보호하며 그 외에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다. 검은 장검과 곡도를 쓰는데 장검은 전형적인 스파타지만 후기로 가면 가드 등이 중세형 장검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그 외에 검과 투창 또는 검과 활로 무장한 경보병인 프실로이를 포함해 대략 1000명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보통 중보병 650명에 경보병 350명을 편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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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총병을 보조하는 테르시오 진형과 카라콜을 하는 기병의 모습
이렇게 테르시오의 등장으로 장창이 총병의 보조 병과로 전쟁 전면에 나오면서 다시 창병의 중요성이 올랐다. 중국의 기록이나 맘루크들의 전투경험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병자체를 척살하는 데에는 창은 효용이 매우낮고(특히 중국기록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오히려 검이나 다른 단병을 든 병사들이 효과적임이 드러났으나 돌진을 효과적으로 거부 방법은 단병들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어차피 총병들이 딜링을 넣어 적들을 꼬꾸라트리니 창병들은 고기방패가 되어 1차적인 접근거부만 해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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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오른쪽 스코틀랜드 병사가 든 긴 창이 파이크이고, 왼쪽의 짧은 쪽이 잉글랜드에서 많이 썼던 폴암, 이다. 일단 저 그림에서 묘사된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창날 안쪽으로 파고들어온 을 든 병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513년 플로든 전투에서는 위와 같이 잉글랜드의 빌과 스코틀랜드의 파이크가 맞붙었는데, 전장의 언덕 지형과 늪지대 때문에 파이크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총기의 득세로 이후 전장에는 파이크를 든 창병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후대에 'pike and shot'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창의 전성시대를 열어졎혔다.
그리고 기병도 갑옷을 입어도 총에 어차피 뚫리는 판이니 비싼 전신 갑주 대신 중요부위만 방호하거나 아예 갑옷을 얇게 입기 시작했기에 창병에게 본격적으로 데미지를 입게 되어 창병은 총병과 함께 제 2의 전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지속적인 발달로 창병의 보조가 없이도 총병만으로 충분한 저지력을 가지게 되었고 창병이 막아야하는 충격기병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테르시오로 대표대던 방어력은 좋은데 돌격력이 애매한 장창기반의 밀집방진을 잡기위해 사격전에 치중한 선형진(Line formation)이 나타나고 장창 방진은 날이 갈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와 총으로 인하여 도태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기병이 사라진 전장에서 창의 역할을 대부분 대신해줄 수 있는 총검의 개발로 전장에서 보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다만,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총검술은 세이버 검술의 방계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총검술이 아니라 자돌격(찌르기 돌격)과 거리벌리기만 있는 창술과 별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들도 창으로 구분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찌르기에만 모든 것을 건 스파이크식 총검은 아니었으므로 창이라고 보기엔 좀 난감하다는 주장도 있다.
기관총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백병전까지 걸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그림으로 남길 정도로 백병전비중이 의외로 높았던 중국전선에서는 일본도와 착검돌격한 일본군에게 지지 않기 위해 중국군에서 항일대도를 만들었는데 중국군 자체에서 항일대도용 검술은 만들지 않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민간 무술가를 초빙하여 연구와 교육을 맡기는 방식으로 항일대도술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군이 통합된 국군이 아니라 군벌군대의 연합체에 가까웠으므로 이 항일대도용 검술도 군벌마다 부대마다 각기 다른 것을 사용하였다.
가령 1920년 하남의 풍옥상 군벌에 가담한 섬서성 마씨통비문의 마봉도는 명나라 시대의 교범인 단도법선(單刀法選)의 기술을 차용해 파봉팔도(破鋒八刀)로 정립해서 가르쳤다.재현영상 형의권의 한씨 성을 가진 협객을 초빙하여 형의육합도법을 기본으로 8가지의 총검 파훼법을 창안한 것이 파봉팔도로 불리웠다는 이설도 존재하며, 이 역시 풍옥상 군벌의 29사단 서북대도대에 교습되었다고 한다.
소림72예로 유명한 김은충(金恩忠)[13]은 1933년 중국 서북군 29사단 대도대의 교육을 책임지고 이 내용을 실용대도술이라는 34페이지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응조번자권의 유법맹(劉法孟)은 1933년 광동군 19사단에서 편성된 대도대의 교육을 맡아 이를 대도술(大刀術)로 정립, 출판하기도 했다.영상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는 이들의 체계와는 확연히 다른 또다른 도법을 훈련하는 당시 영상들도 많이 나오므로, 실제로는 대도술의 종류는 사단별, 군벌별로 제각각 다양했다고 볼 수 있다.
근본 내용 자체는 평범한 중국도법이지만 파봉팔도나 실용대도술은 모두 총검을 상대로 한 내용만을 가르친다. 파봉팔도의 소스가 된 단도법선 자체가 창을 검으로 격파하는 비법을 담은 책이다. 이는 당시 실전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리는 것이 일본군의 총검돌격이므로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빨리 교육해야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봉도가 단도법선을 참고한 것도 총검을 이기는 법을 얻고자 했음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대도술도 그러했는지는 교범이나 관련 자료를 찾아야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은충 실용대도술을 재현한 영상.
창기병의 경우에는 양손으로 잡다가 겨드랑이에 창을 끼우는 카우치드랜스 방법을 도입하여 충격력을 극대화시켜 냉병기 중에서는 비할 데 없는 강력한 정면충격력을 이용, 대 보병전을 수행했었으나 창기병 돌격은 창보병들 처럼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져서 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고 측면이 약하며 상대도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에 돌격거리 계산 잘못하면 죽어나가는 건 창기병들 몫. 거기에 창에 상대가 100%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1509년에 나온 Petri Montii Exercitiorum Atque Artis Militaris Collectanea in Tris Libros Distincta에서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것은 쉽게 할 수 있다. 검 한자루만 가지고 있는 때 일지라도 그것을 말의 목 위에 올려두고 있다가 우측베기(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베어내기)나 올려베기를 한다면 상대의 돌격하며 찌르는 창질을 간단히 받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왼손에 adarga(방패의 일종)를 들고 있다면, 그걸로 창을 오른쪽으로 빗겨내면서좌측베기로 상대의 얼굴을 벨 수 있다.'
'which can easily be done. since even if we have nothing but a sword, if we hold it at the horse's neck,we can easily counter the opponent's encounter from below with a rising or a right-hand cut.If we have an 'adarga', we can give it to the opponent's spear, displacing ourselves on our right side, and then cut to his face with a left-hand b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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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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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백병전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당연히 이런 백병전의 주요 무장은 창이 아니라 검이었다. 1214년 부빈 전투[14]에 관한 연대기에는 양측의 기사들이 서로 창을 겨누고 돌격한 뒤에 칼을 뽑아들어 접전을 벌였으며 잔인한 연합군 기사들이 "길고 가느다란 칼"을 투구의 틈 사이로 찔러 넣어 프랑스 기사들을 죽인다고 비난하는 기록이 있다. 호버크와 방패로 보호받는 상반신은 폴암의 타격과 창의 찌르기도 어렵지 않게 방어해냈기 때문에 가까이 달라붙어서 검, 칼자루로 머리를 마구 내려치거나 투구의 눈구멍과 골반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는 공격이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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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나 허벅지를 찔리고 주저앉은 말, 근접거리에서 목과 눈을 찌르기 위해 검을 높이 든 자세,
칼자루 타격 등 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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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돌격 이후 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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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iath Fechtbuch (MS Germ.Quart.2020)
갑옷을 상대하기 어렵고 내구성이 약해서 군용 무기로는 부적합했다는 낭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갑옷을 입고 싸우는 전투에서도 대체로 둔기보다 검이 우선시 되었다.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을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 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15세기의 용병대장이자 군사학 저술가였던 피에트로 몬테 역시 에스터크를 '전신 판금갑옷을 입은 중기병들이 전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라고 설명했다.
12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는 1167년의 시르미온 전투에 대해, '하루 종일 지속된 전투로 로마군의 창과 검이 모두 부러졌지만 예비무기인 철퇴를 들고 끝까지 싸워서 헝가리군을 격퇴했다'고 묘사했다.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기록된 안방준의 숙부 안중홍와 원균의 대화에서도, 원균은 '백병전에서 칼이 부러지면 철퇴를 들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자신의 용맹을 자랑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이유는 19세기 영국군 내에서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훈련받은 검기병들은 검으로 창의 공격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창기병들도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뽑는다 쳐도 검기병보다 검에대해 숙련도가 떨어져서 발악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와 기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하고 길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기병 전투는 측면 잡히는 쪽이 지게 되어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 밖엔 없었다.
그래도 전장상황은 항상 변화 무쌍하므로 창기병들끼리 맞기창돌격을 했을 때도 당연히 있는데, 대응방법은 이렇다.
출처는 Petri Montii Exercitiorum Atque Artis Militaris Collectanea in Tris Libros Distincta이며 저자는 Pietro del Monte(1457~1509), 출간년도는 1509년이다.
'기병 두 명이 공격할 때, 창으로 첫 교전을 할 때. 그때 너를 지킬 방어장비가 있다면 상대의 말을 조준하는 것이 보통 효과적이다. 창대 중간을 붙잡고 있다가, 상대의 창공격을 비껴내라.'
'When two horsemen come to fight, in the first encounter of the spears, it is often useful to aim our spear at the opponent's horse, as long as we have defensive arms to protect our body. We should hold our spear by the middle, and deflect the opponent's spear-encounter'
다만 기창돌격의 경우 흔히 알려진 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지 못했다.
우선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큰 충격을 줄 때 공격자가 받는 반발력도 엄청나서 이러한 충돌 시의 반발력을 버텨내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리로, 사용에는 상당한 완력과 단련이 요구된다.[15]
또한 갑옷을 뚫지 못해도 충격만으로 직격당한 자가 중상을 입는다는 낭설이 있지만, 일반 창보다 전체 질량이 큰 긴 창이 가진 질량과 말의 속도로 만든 운동 에너지 정도로 즉사할 정도의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내기에는 질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설사 가능하더라도 창을 들고 있는 기사도 같은양의 반작용을 얻어야하는데 차지를 건 기사가 멀쩡할리가 없음으로 불가능하다. 애초에 이런 경우 전체 질량은 무겁지만 부분 질량은 일반 창보다 더 가벼운 기창이 먼저 부러지게 되어 모든 운동 에너지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16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프랑수아 드 라 누(François de la Noue)는 갑옷입은 기병이 랜스에 찔려죽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고, 실제로 창기병들은 시기불문하고 갑옷의 방어력과 전투법의 향상이 있은 후에는 기창으로 적 기병을 상대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무장한 군마를 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명중할 경우에만.''' 대기병전에서 기창돌격의 명중률은 별로 좋지 않다. 그래서 기병전에서는 검의 비중이 높았다.

말은 훈련받았다고 해도 정면에 장애물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옆으로 돌아가거나 정지하며, 아무리 말이 무겁고 빠르다고 해도 빽빽한 보병 방진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창으로 랜스로 보병을 찌른 후에 말이 몸통박치기로 보병방진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16] 기창이 긴 이유는 이러한 말의 본능 때문에 생기는 충돌 순간의 관통력의 감소를 막기 위한 것이며, 실제의 기창돌격은 보병 방진을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일인당 적 보병 한둘을 살상하는 것이 목표였다. 창을 든 기사들은 기창을 적 보병에 꽂아 넣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가 기창을 보급 받아[17] 재돌격을 감행하는 식으로 공격했으며 따라서 기창돌격에 의한 보병방진의 와해는 기병의 관통 때문에 방진 자체가 잘려나가듯 흩어지는 것이 아나라, 거듭되는 돌격으로 인해 누적되는 피해를 견딜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기창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파이크 같은 긴 보병창도 등장했지만, 상대하는 기병창도 그만큼 길어졌다. 물론 이건 소수의 병력들이 스커미쉬를 하던 서양의 이야기이고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다른 곳에서는 기창돌격에 대해 근접전을 강요하여 못돌아가도록 발을 묶고 기병들을 척살했다.
당시의 군마는 품종의 개량을 통해 마구와 마갑의 무게를 견뎌내도록 훈련 받았으며, 현대의 경주마 처럼 속도를 내기보다는 굵고 튼튼한 뼈에 근육이 많은 체형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현대의 대형 노동마인 '샤이어' 정도의 덩치는 아니고, 마갑과 중세 미술사 연구 등을 통해 추정한 결과로는 5~600kg 정도 되는 중형마 체급이었다. 리인액트 등을 통해 기병 돌격의 충격량을 결정하는 데 군마의 무게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전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말의 덩치와 힘이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Ann Hyland 저작의 The Medieval Warhorse: From Byzantium to the Crusades, 1994 등 참조.
중요한 것은 실제 기병은 영화 등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항상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도 생물이고 당연히 무게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군마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도, 말도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는 오래 달리기는 힘들다. 각종 매체에서는 기병이 등장할 때면 어디를 가든 풀 갤럽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사료에 묘사되는 보병방진을 상대로한 충격기병돌격에서 갤럽으로 최고 속력을 내는 구간은 목표물 50m 전방 지점 정도였다.
즉, 기병대가 처음 기동을 시작할 때에는 대열을 맞춰 나아가야 할 필요성도 있고 말의 체력을 보존해야 할 필요도 있었으므로 트롯과 같은 가벼운 속보로 대부분의 거리를 주파했으며, 목표물을 100m 정도 둔 지점에서부터는 캔터로 달리기 시작하여, 그리고 마지막 50m부터는 최대 '스퍼트'인 갤럽으로 질주하여 보병대에게 돌격을 개시했다.
영화에서는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거리를 주파하며 적진에 들이받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한 번의 돌격으로 적 방진을 깨부술 수도 없을뿐더러 말의 체력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놀랍게도 화살이나 총포가 쏟아지는데도 목표물 100m 앞 정도 까지는 조금 빠른 속보 정도로 터벅터벅 이동했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면 기병이 보병에게 가하는 가장 강력한 일격인 기창돌격도 나중에는 약발이 떨어져 갔는데, 그 이유는 보병들도 하도 당하다보니 마차, 거치형 방패, 말뚝, 이동식 목책, 마대자루, 기타 수단을 동원한 야전축성, 투사무기 도배같이 별의 별 대책들을 강구하여 가면 갈 수록 이전에 비해서는 효용이 떨어지다가 아예 화기까지 등장하자 아예 기병의 위상이 이전시대보다 확 낮아졌다.
튼튼한 갑옷과 말의 빠른 기동성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현대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아예 기병자체가 점차 힘을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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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보병들에겐 지옥같던 기병돌격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예시를 든다면,
1503년 4월 28일에 일어난 체리뇰라Cerignola 전투가 있는데 이 전투에서 활약한 에스파냐의 명장인 'Great Captain' 코르도바는 1495년 세미나라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로 아르퀘부스 또는 아키버스라고 부르는(사용 하는 부대명도 각자의 발음차이 덕분에 아케버시어또는 아르퀘부시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부대의 숫자를 크게 늘려놓고 있었던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이 잘 볼 수 없는 위치에 야전 참호와 토담을 만들고 총병과 쇠뇌(크로스보우)병을 다수 배치함으로서 프랑스군 기병대는 지근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고, 총지휘관인 Nemours 공작 루이도 그 피해자 중 하나로 등록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에스파냐군의 야전축성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 에스파냐군의 기보 총돌격은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에스파냐군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그래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는 여전히 기병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병의 위상약화는 백 년 정도 늦출 수 있었다.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이때 부터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기병들이 확실히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았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그 주를 이루다가 30년전쟁에서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1759년 7년 전쟁 당시 민덴 전투에서는 전투 중 명령 착오로 중앙에 있던 영국-하노버군 8개 보병 대대, 대략 5천명이 평지에서 정예 기병대가 버티고 있는 프랑스군 중앙으로 전진하는 자살행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를 보고 7천 5백 명의 프랑스 기병대들이 5천 명의 영국군을 항해 돌진했지만
3번에 걸친 돌격에서 27미터 거리에 들어왔을 때 영국군이 쏜 영거리 사격을 맞고 전부 실패했다. 심지어 마지막 돌격에선 메종 뒤 루아(국왕근위대)기병여단이랑 카라비니에 드 프랑스(프랑스 기총병대)라는 프랑스 최고의 기병 2천을 투입했는데도 대기병 방진조차 짜지 않은 영국군 23보병연대 로열 웰시 퓨질리어한테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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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이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갑옷양식이 유행한다.
이후 창기병은 울란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거진 사라졌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윙드 후사르의 활약을 모은 영상[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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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본
그러나 기병병과 자체가 몰락하던 시절에도 기병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진 않았다. 폴란드 윙드 후사르로 백병전이 아닌,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기창돌격으로 몇 배의 파이크 보병 방진을 돌파해 버리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윙드 후사르가 격파한 파이크 방진이 서유럽의 파이크 방진에 비해 뒤떨어기는 했다.이건 동유럽지역 전체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것이 스텝초원 지형이 많은 동유럽에서는 보병보단 기병이 중심이 된 전투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병에 대한 관심과 양성이 부족했다.[19] 전술 역시 보병과 총기의 화력이 주가 되고 기병은 보조 였던 서유럽에 비해 기병이 주가 되고 보병과 총기의 화력은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그 차이가 심했으며, 폴란드의 경우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7일 정도로 기병 몰빵이 심했고, 보병은 '''포대나 지키는 애들''' 정도로 여겨졌다.[20] 그래서 보병들도 대부분 화승총 등으로 무장했다. 물론 아예 안 쓴 건 아니지만 서유럽과 같은 대규모 운용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면 자신들 사정으론 파이크를 운용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고 그냥 버디슈를 지급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경우 목책으로 기병의 접근을 막는 전술을 쓰거나, 버디슈를 애용하면서도 스웨덴 같은 군사 선진국에게서 파이크 방진을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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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병대
물론 동양의 경우에는 동원되는 숫자가 서양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고 가다가 대량의 병력이 발사하는 투사무기에 의해 이득보다 피해를 더 볼 확률이 많아 창기병이 전열 돌파를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팔기군 재현만 보더라도 갑옷을 충실히 같은건 검을 든 경우고 창을 든 경우는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서양도 울란같이 창기병들은 경기병으로 분류했으니 서로 비슷한 길을 가는 셈이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중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샤쇠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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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병 Dragoon.
Chasseur à ch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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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Keith Rocco 作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그 뒤를 추격해서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 출처: 후기 조선군 기병의 후사르/드래군화가 되어간다는 잡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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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다온다 전투(Battle of Majadahonda)에서 프랑스군의 흉갑기병을 상대하는 영국군 용기병.
Cuiras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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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퀴레시어.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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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 당시 러시아군에게 돌격하는 포즈난 기병대.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과 퀴레시어를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창기병은 따로 익혀야 할 훈련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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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에두아르 드타유(Jean-Baptiste Édouard Detaille) 작,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1891년, 유채화, 445cm x 512.5cm.
프랑스군 소속 제4 후사르 연대(4e regiment de hussards)가 프리들란트 전투에서[21] 돌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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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반 윌리암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대를 향해 돌격하고 있다.[22]

3. 가상 매체에서의 창병


역사나 판타지 계열에서 검병이나 궁병과 함께 기본적인 보병으로 등장한다. 대기병에게 강하다는 상성은 있긴 한데 가성비로 따지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극상성이 아닌 약상성인 게임의 경우 중무장한 기병과의 교환비를 보면 어째서 근세 이전까지 기병이 전장에서 그렇게 명성을 떨쳤는지 알 수 있다.
검병이나 궁병, 기병, 심지어 머스킷도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매우 많지만 다른 보병 병종에 비하면 1:1에서는 밀리는 창병이 주인공인 창작물은 거의없다. 아오츠키 우시오아나후세 정도. 실제역사처럼 잘 쳐줘도 주인공에게 썰려 나가는 졸개거나 주인공의 주변을 꾸미는 배경 역할이 많다. 그나마 제성능이 나오는 대규모 교전에서만 실제역사처럼 가장 많은 등장횟수를 보여준다. 역시 병풍 창병 계열 중 주인공급은 켈트 신화의 쿠 훌린 정도. 물론 최강으로 설정된 경우도 있긴 하나 대가가 너무 큰편이니... 사실 창은 일반병들에게 지급되던 기본적인 무기이고 검이나 다른무기들은 공략법만 알면 다른무기들을 쉽게 이기고 몰라도 경험과 재능으로 커버 가능하다보니(반대로 없으면 폴암이나 들어야겠지만) 이야기꾼들에게는 그리 선호할만한 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삼국지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장수가 창병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말을 타고 싸우므로 엄밀히 말해서 창병이라기보다는 기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1. 문명 시리즈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시리즈 대대로 반만년 수행하여 전차건 전투기건 이기는 창병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23] 시스템이 완전히 뜯어고쳐진 문명 5에서는 그나마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불균형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아래와 같이 이론상으로 창병이 탱크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방법은 이전 시리즈들과는 달리 의외로 그럴듯한 편인데, 먼저 탱크(전투력 70)측은 늪지에시 허우적대고(습지지형 전투력-15%) 보급도 못 받아 연료가 다 떨어져 있으며(전략자원부족 전투력-50%) 사기도 바닥에다(불행1당 -2%으로 불행을 13으로 잡을 경우 -26%) 막 뽑아낸 신병인 반면(추가 전투력 보너스 없음. 총합 -91%. 패널티는 90%이상 받을 수 없다), 창병측은(전투력 11) 보급 충분하고 사기도 높으며 오랜 기간동안 복무한 베테랑에(평지지형보너스3단계 +45%) 지원군이 탱크를 포위중이고(측면공격보너스+50%, 인접유닛보너스+15%) 나폴레옹급 지휘관에게 지휘받는 상황(+15%. 총합 125%)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탱크의 전투력은 7, 창병의 전투력은 24.75가 되어 창병이 탱크를 한방에 잡을 수 있다.
다만 전반적인 창병 계열 유닛에 대한 대우 수준은 문명 3까지는 괜찮았지만 문명 4 이후로 쭉 영 좋지 않은데, 문명 5에서는 업그레이드 순서가 창병->장창병->창기병->대전차포->공격헬기. 그냥 무조건 대기병 특수부대 정도의 취급이다. 창병은 전사보다 강하지만 그 이후로부터는 쭉 일반 보병에 밀린다. 패치 전에는 심지어 대놓고 이기라고 있는 '''기병에게도 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버프되긴 했다. 문명 6에서는 그나마 전부 다 보병으로 나오지만 대전차병인 건 똑같다. 전반적으로 전투력이 동시대의 보병에게 밀린다. 물론 창병 유닛이 한 시대 앞선다면 검병 유닛을 이기지만...

3.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의 창병


창병(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항목 참조.

3.3. 토탈 워 시리즈의 창병


대다수의 국가들이 보유한 병과로, 주로 전선 유지와 대기병전을 담당한다. 대개 파이크로 벽을 구성하는 장창병, 중간 정도의 창과 방패로 무장한 창병, 짧은 창으로 무장한 단창병이 있으며, 창병으로 보기는 좀 애매하지만 투창병도 있다.
창병과 장창병으로 나뉘는데, 둘 다 기본적으로 대기병 보너스를 가지고 있어서 기병에게는 강하지만 대보병 보너스를 받는 검보병에게는 밀리는 걸로 나온다. 다만 장창병은 길이를 이용해 정면에서 상대를 압박하는데는 좋으며, 정면 대결에서는 검방보병도 압도한다. 극고증 모드인 EB모드에서는 말 그대로 고기분쇄기[24]. 그러나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당하거나, 혹은 RTW의 떡장 군단병이 비비기로 정면을 뚫어버리고[25] 근접전에 돌입하면 보조무기를 꺼내들기 때문에 허약하다. 따라서 전열싸움엔 강력하지만 측면이나 후방을 엄호해줄 병종을 필수로 동반하여야하며 PVP에서는 그만큼 쓰기 까다로운 점도 있다.
장창병은 미디블2: 토탈 워 기준 대기병전의 스페셜리스트로 장창을 들고 빽빽하게 장창벽을 구성한다. 이들이 대형을 유지하는 한 중기병이 아니라 중기병 할아버지가 와도 들이받는 순간 우수수 쓰러진다. 그러나 대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부무장을 꺼내는 통에 오히려 전투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장창벽을 구성하기 때문에 기동성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고, 종종 유저들이 데이터를 건드려 보조무장을 삭제하는 경우도 있는 편. 그러면 무조건 장창만 들고 있어서 오히려 전투력이 오른다. 기본적으로 장창벽을 구성하면 측면 및 후방이 완전히 무력화되기 때문에 진형을 구성할 때 적이 후방이나 측방을 건드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패도 없기 때문에 갑옷까지 두둑히 갖춘 스코틀랜드의 귀족 장창병대쯤 되지 않으면 사격 병과에도 취약한 편. 가끔 수성전에서도 활약하는데, 성문 바로 뒤나 좁은 회랑에서 이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으면 돌파하기 상당히 곤란하다.
일반 창병은 장창병보다 유틸성이 좋다. 창과 방패로 무장하여 대기병용으로 좋지만 전문적으로 대기병전을 전담하는 장창병들에 비하면 좀 부족한 편. 장창병대는 기병이 들이받는 순간 죄다 거꾸러뜨리기 때문에 장창병대의 피해는 거의 없지만 일반 창병대는 일단 기병대의 돌격을 받아낸 후 돈좌된 기병들을 창으로 쑤셔서 낙마시키는 방식이라 일단 교전에 들어가면 꽤 희생이 나온다. 대신 반대급부로 대보병전이 다소 난감한 장창병들과는 달리 대보병용으로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궁병대의 사격도 꽤나 잘 버티는 편. 그러나 대기병 능력에 비해 보병전에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전문 중보병과 교전하면 대개는 진다. 그러나 방어력이 높아 일방적으로 깨지지는 않고 꽤 오래 버텨주긴 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중보병대와 교전을 시켰다 하더라도 보통 다른 대보병 부대를 불러올 때까지는 버텨준다. 방패를 들고 있는 데다 일부는 갑옷도 두텁게 갖추어 입고 있기 때문에 방어력이 뛰어나므로 모루의 역할을 맡는 데에 최적화 되어 있다. 완전 하급 병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급 병종도 아니기 때문에 가격과 유지비도 싼 편이다. 군단을 구성할 때 2~3부대씩 편성시키면 두고두고 만능으로 잘 써먹는다. 당연하지만 대부분 징집창병대 내지 창병민병대 계열보다는 전문 군인인 서전트 계열이 훨씬 잘 싸우므로 참고하자.[26] 그러나 창병민병대조차도 아래의 단창을 장비한 일반 민병대보다는 훨씬 나으니, 선택한 팩션에 서전트 계열이 없다면[27] 고려할 법한 선택이다. 갑옷 업그레이드를 모두 거치면 사기 정도를 제외하면 창병민병대나 서전트나 큰 차이는 없다.
단창병은 주로 민병인 경우가 많아서 대기병용으로 쓸 수는 있지만 마갑까지 갖춘 후기형 중기병을 상대로는 밀릴 수도 있으므로 지나치게 신뢰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사기도 낮으며 고기방패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 대보병전에도 썩 좋지는 않다. 갑옷도 부족한 편이고.
투창병은 말 그대로 창을 던지는 병과로 궁병대보다 사거리가 짧지만 공격력은 조금 더 좋은 경우가 많다. 코끼리 부대를 상대하기 좋다. 이들은 궁병에 비해 아군 오사가 적고, 장애물을 어느정도 넘겨서 던질 수 있다는걸 이용해 일반 창병, 중보병의 바로 뒤에서 화력 지원을 하는 용도로 쓴다. 기본적으로는 사격 병과로 취급되지만 근접전 능력도 없지는 않다. 들고 있는 투창용 창으로 교전하는데, 대부분 방패가 없고 갑옷도 부실하므로 농민병 수준의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과와 근접전을 벌이면 거의 무조건 진다. 그러나 일단 창은 창이라 대기병 보너스는 조금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팽배수들의 전투능력을 상당히 높게 묘사를 하는데, 장창 5기와 팽배 1기가 붙으면 팽배 1기가 이긴다는 기록이 꽤 흔하다.[2] 또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있다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무과 초장(武科初場)을 친히 시험하였다. 인하여 갑사(甲士)는 목창(木槍)을 가지고, 방패군(防牌軍)은 목검(木劍)을 가지고 서로 겨루게 하고, 다음에 화통군(火㷁軍)으로 하여금 철령전(鐵翎箭)과 석탄자(石彈子)를 놓게 하였는데, 갑사(甲士) 두 사람이 목검(木劍)에 상(傷)하여 이튿날 죽었다.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3월 11일 정축 1번째기사 [3] 파비아 전투처럼 스페인 아르퀘부스의 사격에 기병공격이 막힌 사례가 있다.[4] 여기서의 폴암은 빌이다.[5] 여기서의 검은 아밍소드이다.[6] 재미있게도 호플리타이들이 모두 서로 다른 도시국가의 방패를 들고 있다. 다국적 연합군인 모양. 참고로 왼쪽에서 두 번째의 람다 표시는 스파르타의 상징이며, 그 오른쪽의 트리스켈리온(다리 세 개 그림)은 시실리, 부엉이와 황소는 아테네다.[7] 얼핏 보면 한손에 창, 한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저리 긴 창을 한손으로 드냐는 얘기가 나오곤 하는데, 당연하지만 한손으론 못 든다. 그래서 방패를 팔뚝에 묶고 창을 두 손으로 잡는 것.[8] 이 때 팔랑크스가 레기온에게 마그네시아, 피드나, 키노스케팔라이, 테르모필라이 같은 회전에서 져서 그냥 망했다.[9] 아무리 빨라봤자 빨리 걷는 속도 정도밖에 안 된다.[10] 四技. 앞에서 말한 궁술, 창술, 사격술, 기마술. 기마술을 빼면 모두 원거리 공격을 하는 무기이다.[11] 태종실록 15년 11월 11일[12] 세종실록 23년 6월 8일[13] 놀랍게도 조선 사람이다! [14] 신성 로마 제국 + 노르만 왕조 시절의 땅을 가졌던 잉글랜드 + 포르투갈 + 불로뉴 vs 프랑스의 대립이었는데 슬슬 강해지고 있던 프랑스가 연합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박살을 내며 승리해버렸다. 그리고 이 시기의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드넓은 영지를 야금야금 먹혀가고 있었는데 그 시절 잉글랜드의 수장이 바로 대헌장으로 유명한 존 왕 되시겠다.[15] 기창돌격은 반발력을 팔로만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등자를 이용해서 온몸으로 반발력을 억제시키게 되는데 이때부터 개인의 단순 완력만을 믿지 않고도 기창돌격이 가능해졌다. 등자의 발명 이전까지는 제대로된 차지가 불가능 했는데, 그 시절에는 돌격하여 창으로 찌르는 순간 창에서 손을 놓아 반발력을 최소화 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고 이는 효과적인 공격법도 아니며 묘기 수준의 기량을 요구했다.[16] 중세 전투에 나선 기사들은 지형이 알맞고 장사정무기로 엄호 받아야만 기마돌격을 했다. 출처[17] 말이 지치거나 다친 경우 바꿔 타기도 했다.[18] 가수는 스웨덴 메탈 밴드 새버턴. 노래는 2016년 앨범 'The Last Stand'의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 노래의 언어는 영어고 자막은 폴란드어 자막이다.[19] 파이크 방진을 이루려면 기병의 돌격을 이겨내기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필수인데 서유럽에 비해 가난한데다, 농노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에게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그런 훈련을 시키고 싶지 않아 했다.[20] 실제로도 폴란드 리투아니아군의 주요전술은 마차를 이용해 임시 방어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포병과 보병이 우주방어를 하며 적의 주력을 막는 동안 기병이 우회하여 적들을 격퇴하는 전략이였다.[21]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로, 러시아 기병을 향해 돌격하는 후사르를 그린 그림이다.[22] 이 때까지는 기병이 중요하게 쓰였고, 방진을 짜지 못했거나 뚫렸다면 '''편히 죽기를 기도해야 했다.''' 기병이 파고든다면 그야말로 난전이 된다.[23] 사실 '이긴다'라기보단 '이길 수 있다'라는 개념이다. 전투가 확률싸움이기 때문에, 근소하게나마 창병이 탱크를 격파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 하지만 얼핏 봐서는 창병이 전차를 이긴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는데다, 실제로 게임 중 유리한 상황에서 그놈의 확률 때문에 패배하여 큰 손실을 입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 대표 격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24] 다만 EB모드가 극고증을 추구하긴 하지만 EB의 팔랑크스는 실제 역사보다 너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이건 가에사타이 같은 검방보병도 같지만...[25] 물론 정면에서 검방보병이 장창병을 뚫어버리는건 RTW의 로마 근위대 정도로, 스탯이 어마무시하게 차이나는 경우에 한하며 다른 시리즈나 RTW2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26] 창병 민병대가 서전트보다 좋은 팩션도 존재한다.[27] 예를 들자면 잉글랜드는 단판 전투에서는 서전트가 있지만 정작 캠페인에서는 서전트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