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리나 레네르트

 

[image]
Pascalina Lehnert
(1894.8.25 - 1983.11.13)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여교황" 파스칼리나
2.2.1. 왜 이례적이었는가?
2.2.2. '여교황'으로서의 행적
2.3. 요한 23세와의 갈등
2.4. 말년
3. 기타등등


1. 개요


독일 출신의 수녀바이에른의 에베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요제피나 레네르트다.
흔히 수녀님이라고 하면 연상되기 쉬운, 인자하고 훈훈한 이미지와는 꽤나 거리가 먼 '''가톨릭계의 여장부'''. 이른바 '''여교황'''(La Papessa)이라는 후덜덜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20세기 중반의 바티칸의 거물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image]
1894년에 바이에른[1]의 에베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요제피나(Josephina). 1917년 성 십자가 멘칭겐 수녀회[2]에 입회하여 파스칼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무렵 이탈리아의 파첼리 추기경의 가정부 겸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3] 이 사람이 바로 뒷날의 교황인 비오 12세였다. 이때부터 파스칼리나 수녀는 파첼리 추기경과 친밀하게 지냈고, 1939년콘클라베에서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2세라는 이름으로 등극하자, 그를 따라 바티칸으로 가서 직무를 수행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비서 수녀의 평범한 일생인 듯 싶지만…

2.2. "여교황" 파스칼리나


파스칼리나 수녀가 본격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교황 비오 12세 재위 기간부터이다. 비오 12세는 신경쇠약이 발병하여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비오 12세의 치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겹쳤던지라, 전쟁 말엽에 콧수염난 또라이나치 독일군을 이끌고 와서 바티칸을 포위하는 위험한 상황도 겪은 바 있었다. 게다가 신경증이 발병한 시기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였으니, 직무를 수행하기엔 참으로 피곤한 시기였다.
결국 비오 12세는 '''일개 수녀'''에 불과한 비서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정치적 실무를 맡기고 자기는 종교적인 업무에만 전념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자연스레 바티칸 내에서의 파스칼리나 수녀의 입김은 매우 커졌고, 추기경단은 수녀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좌지우지되는 사태를 보고 충공깽에 빠졌다.
다만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데, 후술할 파스칼리나의 화끈한 일화와 성격 때문에 비오 12세가 즉위 전부터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교황 자리나 겨우 지키다가 파스칼리나에게 권한을 맡기고 뒷방 늙은이가 된 인사로 여길 수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비오 12세는 정무 감각과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교황 대사, 국무원장, 궁무처장 등 교황청 내 고위직들을 역임하며 즉위 전부터 교회법과 바티칸 외교 분야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한 인사였다. 또한 교황 즉위 후에도 매우 깐깐하고 권위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활동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요약하자면 당시 파스칼리나 수녀의 전례없는 권한 행사는 비오 12세가 교회 내에서 확고한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임을 보장받은 대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비오 12세의 신임이 없었다면 파스칼리나는 자신이 바티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진작에 비오 12세에 의해 쫓겨났을 것이고, 다른 고위 성직자들도 그녀의 행보를 그저 무시하거나 집단 행동을 통해 몰아냈을 것이다.

2.2.1. 왜 이례적이었는가?


천주교 성직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보충하면, 천주교에서 수녀(여성 수도자)는 공식적으론 수사(남성 수도자)[4]와 함께 수도자이며 엄연히 성직자(주교[5]>신부>부제, 남성만 됨)[6]보다 아래의 위치에 해당한다. 군대 조직으로 굳이 비유하면 수도자부사관, 성직자는 장교에 해당한다. 즉 파스칼리나 수녀의 등장은, 아무리 군 경험이 많고 직접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사단장이 사단 지휘에서 손을 떼고 주임원사가 대신 영관급 장교들을 지휘한 셈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해하기 쉬우라고 해놓은 비유고, 군대와 천주교가 1대 1로 대칭되는 조직은 아니므로, 이것이 정확히 일치된다고 할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 수도자는 성직자(주교>신부>부제)와 구분되는 신분이다. 따라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상하 계층으로 나눌 수가 없다. 성직은 위계 서열이 있지만, 수도자는 그 위계 서열에 들어가지 못한다. 수도자는 성직자, 즉 7성사와 사제만 집전 가능한 준성사[7]를 집전하도록 축성된 신분이 아니다.
그리고 수도자라는 신분도 상당히 폭이 넓어서, 무조건 성직자보다 수도자가 하위 신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성직자와 구분되는 신분이라, 성직자의 위계 서열(주교>신부>부제)에 수도자를 끼워넣어서 우열 관계를 가릴 수도 없고. 예를 들어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 신분으로 소속 수도회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충족하여 사제서품을 받을 경우,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성직자이다. 이런 수사신부는 가톨릭에 매우 많다. 따라서 무조건 "성직자 > 수도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수사신부는 주교서품도 받을 수 있다(동방정교의 주교는 100% 수사신부 출신).
실제로 가톨릭에 무수히 많은 수도자 신분의 주교,[8] 심지어는 수도자 신분의 교황까지 있었는데,[9] 이 경우에는 수도자가 성직에서도 정점에 오른 경우이니, 오히려 "수도자 > 성직자"가 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지 않은 일반 평수사라도, 자신이 속한 수도 공동체에서 장상직을 맡고 있으면 해당 공동체의 수사신부보다 수도자 신분으로서 더욱 우위에 있게 된다. 이런 경우는 예수회와 같은 성직 수도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처음부터 평수사들이 세운 수도회, 가령 베네딕토회 같은 수도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녀는 수도자라서 결혼하지 않고 평생 수녀원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제약이 있는 데다가 남성 수도자와 달리 성직을 맡을 수도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신분은 평생 평신도와 동급이 된다. (즉, 종신 서원 하기 이전의 수련 단계의 수녀든, 나이 든 원장 수녀든 신분은 다 똑같다.)
파스칼리나 수녀의 사례가 당시 가톨릭계에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무래도 "사제가 될 수 없는" 여성에게(남성이라면 위에서 설명했듯이, 수도자라도 성직자가 될 방법이 충분히 존재하겠지만) 교황청의 주요 행정, 권력 관련 기능들에 관한 재량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여성 사제나 목회자가 허용되는 성공회개신교였다면,[10] 상대적으로 덜 이례적인 현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2.2.2. '여교황'으로서의 행적


이에 고무된 파스칼리나 수녀는 추기경들을 자기 맘대로 구워삶기에 이른다. 이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보면 엄청났는데... 일단 파스칼리나 수녀는 대주교 임명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뉴욕 대주교 자리에 당초 유력시됐던 맥니콜라스 대신 스펠만이 임명된 사건, 훗날 바오로 6세로 등극한 성직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가 밀라노 대주교[11] 시절 직책에 비해 발언권이 약했던 것도 비오 12세 교황의 신임을 등에 업은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밀렸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2]
또다른 공포스런 일화로는, 프랑스 출신 티스랑 추기경이 당시 바티칸 국무원장인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과 함께 교황 알현을 요청했으나 파스칼리나 수녀가 이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티스랑 추기경은 화가 나서 파스칼리나 수녀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였는데, 파스칼리나 수녀는 근위병들을 호출한 후, 티스랑 추기경을 밖으로 모시라고 명령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티스랑 추기경은 물론이고 근위병들도 모두 벙쪘을 정도... 결국 티스랑 추기경은 근위병들이 강제로 붙잡고 나갔는데 화가 난 나머지 파스칼리나를 죽여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또한 파스칼리나 수녀는 뒷날 요한 23세 교황으로 즉위하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클라크 게이블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오 12세 모두 게이블의 팬이었다. 그런데 파스칼리나 수녀가 스케줄로 잡혀 있었던 론칼리 추기경의 교황 면담을 취소하고, 게이블의 교황 알현을 스케줄에 넣어 론칼리 추기경을 바람 맞힌 것이다. 파스칼리나 수녀는 연예인의 알현과 같은 갖가지 이유로 추기경들의 교황 알현을 방해하는 식으로 추기경들을 길들였다.
참고로 뒷날 게이블의 알현으로 밖에서 바람을 맞는 안습한 일을 당한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요한 23세로 등극하자, 파스칼리나 수녀는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될 줄 알았더라도 그를 바람맞혔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예"'''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상당수 추기경들이 이런 식으로 알현이 지연되거나 아예 거부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위에서 서술한 티스랑 추기경은 교황 한 번 알현하려고 60일이나 대기한 적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이러니 추기경들과 파스칼리나가 언쟁을 벌이는 건 아예 예삿일 수준이 될 정도였다.
이러는 사이, 비오 12세의 신경증은 더욱 심해져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을 때, 신경증으로 인한 딸꾹질로 인해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직무 중에 파리라도 날아다니면 그 파리를 잡을 때까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 때의 비오 12세의 주치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인성도 막장이었는지, 파스칼리나 수녀를 대상으로 파파라치 짓을 하다가 의료계에서 매장당하는 막장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교황의 여름 별장인 간돌포 성에 머무르던 비오 12세는, 여름 기간이 끝나도 그곳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끝내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이때 그의 유언으로 교황의 중요한 메모를 소각했다가 추기경단의 수석인 티스랑 추기경[13]과 키배를 뜨기도 했다. 평소의 비오 12세는 무척이나 권위주의적이고 고집스러웠고, 이는 그의 오랜 친구인 파스칼리나 수녀도 그러하여, 이에 질린 추기경들은 이제 좀 쉬자는 의미에서 콘클라베에서 조용하고 야심이 없어 보이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한다.
'''그러나 뒷날 그가 가톨릭 교회에 핵폭탄을 떨구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교황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실각한 파스칼리나 수녀는 쫓겨나듯 바티칸을 떠나 스위스의 한 수녀원에서 몇 년간 유배에 가까운 생활을 보내다 이후 자선 사업가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2.3. 요한 23세와의 갈등


요한 23세라는 이름의 교황으로 등극한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은 즉위하자마자 가톨릭교회의 대개혁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의 내용이 너무나도 방대하여 여기에 다 적을 수 없으므로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교황의 진보적 행보에 분노한 파스칼리나 수녀는 요한 23세가 과거 자기가 추기경이었을 적에 그녀가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하는 의미에서 위로하려고 그녀 자신을 불러낸 자리에서 교황과 설전을 하기까지 했고, 이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노선이 다른 것도 있고 해서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도 못했다.[14]
다만 요한 23세는 끝까지 자신과 키배를 뜨는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화 한번 내지 않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건 아니어서 파스칼리나 수녀가 진행하는 자선 사업을 요한 23세가 돕기도 했다.
[image]
1963년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직후, 장례미사 참례를 위해 비행기로 도착하는 파스칼리나 수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사람의 생전 관계를 아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


2.4. 말년


[image]
만년(晩年)의 모습. 오른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말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원을 받아 자선 사업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3년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

3. 기타등등


엄청난 일 중독으로 유명했는데, 한창 권세를 휘두르던 시절에는 '''바티칸 최고 권력자 역할과 교황 비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두 가지 일 모두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할 정도. 심지어 말년에 자선사업을 할 때도 선종 직전까지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나머지 시간은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장수한 것을 보면, 그야말로 타고난 워커 홀릭이었는 듯.
바티칸 권력자로서 유명하지만, 신학에도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다. 비오 11세의 연설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처음 발견하고, 즉각 이 사실을 보고하여 연설 전에 연설문을 수정하게 만든 사례가 있다.
바티칸의 몇 안되는 정치적 동지였던 스펠만 추기경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다.
이처럼 상관의 신임을 등에 업고서 권력을 누리는 측근 실세라면 수장에게 맹목적으로 충성, 아부하면서 권력을 누리는 경우가 많지만, 파스칼리나 수녀는 다른 바티칸 성직자는 물론 직속 상관인 교황 비오 12세에게까지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매우 강직한 인물이었다. 비오 12세도 유능하며 고집 센 인물이다 보니 파스칼리나 수녀와도 종종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서로 고성이 오가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비오 12세가 파스칼리나 수녀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는 증언까지 있다.
[image]
비오 12세 교황이 등장하는 가톨릭계 전기 영화 등에서 히로인(?) 역할로 나온다. 배경은 주로 2차 대전 시기의 바티칸.

[1] 당시에는 바이에른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의 일부였다.[2] 1844년에 스위스 멘칭겐(Menzingen)에서 복녀 베르나르다 하임가르트너(Bernarda Heimgartner)가 창설한 수녀회.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다.[3] 일반적으로는 공무 수행에 바쁜 고위 주교들이나 추기경들을 위해, 집안일을 처리하고 자산관리를 해주는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수녀들이 붙는다.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곁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수녀가 있었다. 여담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수행비서였던 수녀의 말에 의하면, 김 추기경은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아서 통장의 잔고는 늘상 바닥을 보였다고 한다.[4] 수사 중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성직수사와 그렇지 않은 평수사가 있다. (전자를 수사신부, 수도사제라고도 함) 가톨릭정교회는 여성의 서품을 불허하나, 성공회에서는 여성의 서품을 허용하여, 성공회 수녀들 중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도 있다. 대한성공회에서는 2007년에 첫 여성 수도사제를 배출했다(성가수녀회 오인숙 가타리나 수녀).[5] 교황추기경주교에 해당.[6]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가톨릭교회법 제1024조)."[7] 모든 준성사가 사제만의 고유 권한은 아니지만, 일부 준성사는 사제와 부제만이 집전할 수 있다.[8] 한국 가톨릭에서는 천주교 의정부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낸 예수회 출신의 이한택 요셉 주교가 첫 사례다.[9]프란치스코 교황예수회 출신의 수도자였다.[10] 그나마 성공회도 1990년대에나 여성 사제를 인정했을 정도였고, 반대의 목소리도 극심했다. 여성 성직 허용에 반발하여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11] 이를 '한직', '좌천'으로 묘사하는 이들도 있지만, 밀라노는 인구 기준으로 이탈리아 내 최대의 천주교 교구이며, 이곳의 교구장은 이탈리아 전체 주교회의 의장을 겸한다.[12] 몬티니도 바티칸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원에서 근무하며 나름 비오 12세와 오래 근무했지만, 아무래도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함께 했던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할 만큼은 못되었을 것이다.[13] 위의 교황 알현을 거부당한 그 프랑스인 추기경이다.[14] 파스칼리나 수녀는 요한 23세의 진보적 행보에 대해 굉장히 큰 불만을 품고 있었고 죽을때까지도 이를 지지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