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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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 8월 7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7인조 보이밴드이다.
2015년, 13년 만에 드디어 7명의 완전체로 재결합했으나 이후 다시 사실상의 무기한 활동 중지에 들어갔다.[1]
DSP 미디어에서 기획된 팀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H.O.T.에 맞서 젝스키스를 만들었고 S.E.S.에 맞서 핑클을 만들었듯이, 클릭비는 신화의 라이벌 격으로 만들었던 그룹이다.
이른바 ''''SM+1''''이라 하여 젝스키스가 6명 (H.O.T.+1), 핑클이 4명 (S.E.S.+1) 으로 멤버를 구성했듯이, 클릭비 역시 7명 (신화+1) 으로 멤버를 구성했다.
팀명의 뜻은 성공, 히트하다, 의기 투합한다라는 뜻의 Click과고 Band, Boy's, Best 등 B로 시작하는 여러 긍정적인 낱말의 이니셜이다.
한국식 아이돌 밴드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그룹으로, 초기에는 기타,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s-2가 모두 갖추어진 밴드의 형태를 띠고 락과 댄스가 조합된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2]
이후 3명의 멤버가 탈퇴하면서 음악적 전환이 불가피해 지자 4집 이후부터는 밴드 없이 댄스 그룹으로만 활동했다.[3]
아이돌 밴드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그러하듯, 이들 역시 실력은 준수했으나 활동에 있어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악기 연주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애들이 어설프게 흉내만 낸다는 비난과 비아냥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클릭비 활동이 중단된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밴드 활동을 이어가거나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나가는 멤버들의 행보들을 보면 멤버 본인들은 악기 연주와 무대에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당시 1세대 아이돌 중에서는 멤버들의 평균적인 비주얼이 가장 준수했던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 클릭비는 7인체제 밴드로 시작해서 꽃미남 아이돌로 팬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7인 체제 밴드와 댄스의 조합. 그리고 예능이면 예능. 얼굴이면 얼굴. 노래. 춤 모든 게 완벽했기에 많은 소속사들의 경계대상이었으며 특히 H.O.T.의 토니 안은 클릭비를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저렇게 예쁘고 잘생긴 애들로만 7명을 모아놨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특이사항으로는 방송국에서 동시간대 예능은 허용이 안됐으나 유일하게 클릭비만 허용이 되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4인 체제의 첫 앨범 4집 <Cowboy> 로 활동할 당시 NRG와 라이벌 기믹이 섰다.[5]
공식 팬클럽의 이름은 '''니지(虹)'''.
일본어로 '무지개'라는 뜻으로 멤버가 일곱 명이라 그에 맞게 지어졌다.
풍선 색은 초록색이다.
여담으로 노민혁을 제외한 멤버들 모두 여동생이 없다.
클릭비는 사실 활동 당시보다 해체한 뒤 더욱 노래가 인정받은 케이스다. 활동 당시에는 아이돌이라는 한계로 인해 그들의 음악성과 무대에 대한 비아냥들이 많았으나 이후 작곡가 주영훈은 복면가왕에 오종혁이 나오자 클릭비가 여러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노래들을 했던 그룹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심폐소생송에 완전체로 등장했을 때는 대선배인 가수 이현우가 이들은 춤과 밴드를 합친 정말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음악을 했던 재미있고 매력 있는 팀이었다고 극찬을 했다.
2. 멤버
3. 활동
3.1. 역사
1999년 8월 7일 1집으로 데뷔했고, 2002년 3.5집까지 발매하며 7명의 멤버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후 밴드 포지션의 핵심이었던 하현곤, 노민혁을 비롯해 에반까지 세명이 계약만료로 탈퇴하면서 4인조로 재편된다.[10] [11][12]
클릭비 7명 마지막 무대
이후 남은 우연석, 김태형, 오종혁, 김상혁의 4명으로 댄스 그룹으로 전환해[13] 4집 <Cowboy>를 발매하며 댄스 그룹으로써의 존재감을 알린 뒤, 계약 만료와 함께 DSP미디어에서 키스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겨 활동했고, 이후 김상혁이 라디오DJ와 버라이어티 활동으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룹의 존재감을 계속 알리게 된다.[14]
또 이 시기에 같은 소속사였던 제이워크와 함께 JNC라는 프로젝트 그룹도 결성했다.
하지만 김상혁이 전대미문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망언으로 인해 나락에 빠진 뒤, 활동이 흐지부지 되더니 실질적인 해체 상태로 돌아섰다. 김태형은 해체는 아니라고 못 박았지만, 각자 뿔뿔이 흩어져 활동을 이어간 탓에 다시 뭉칠 일이 없어 보였다.
이후 사실 2011년에 이미 재결합을 한번 하긴 했었다. 개인 활동이 바빴던 김태형을 제외한 6인조로 다시 재결합을 했었으나 디지털 싱글 두 장만을 발표하고 인터뷰를 몇 번 진행한 것 이외에는 방송활동과 공연 등이 전무했기 때문에[15] 대중들은커녕 팬들조차도 재결합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그냥 묻혀버렸다...
그리고 이것을 끝으로 역사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3.2. 공백기와 재결성
2013년 12월 14일 열린 DSP 페스티벌에 우연석, 김태형, 오종혁, 김상혁, 하현곤, 노민혁이 참가했다.[16] [17]
2015년 8월 27일, 모든 멤버가 참여한 완전체로 컴백한다는 기사가 나고 SBS 파일럿 프로그램 심폐소생송에 완전체로 등장했다.[18] [19] 멤버들이 전부 30대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를 빡세게 했는지 훈훈한 비주얼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다. #
이윽고 2015년 10월 21일 타이틀곡 '''<Reborn>'''을 내세운 컴백을 예고하고 10월 12일 오전 9시 9분을 시작으로 14일 오전 9시 9분까지 티져를 공개했다.
그리고 10월 21일 정오에 해당 싱글이 공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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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0일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대구와 부산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이후 팬미팅도 진행했다.
3.3. 클릭비의 월차
2017년 11월 28일 클릭비의 월차가 원더월TV의 SNS를 통하여 공개 되었다. 클릭비의 멤버 중 우연석, 김태형, 김상혁, 노민혁만 참여하였으며, 하루의 월차를 내어 강화도 곳곳을 여행을 하는 힐링 예능이다.
3.4. 사실상의 재결성 무효
앞서 말했던 대로 2015년에 드디어 재결합을 했지만 13년 만의 완전체 재결합이 무색하게 더 이상의 완전체 활동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단 기껏 재결합을 해놓고도 싱글 한 장 발표 후 다시 5년을 아무런 활동 없이 감감무소식인 상황이다. 2015년 재결합 당시에는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했다. 앞서 말한 싱글 발매는 물론이고 비록 방송 출연은 없었으나 콘서트와 팬미팅도 여러 번 진행했으며 심지어 90년대 아이돌로써는 생소할 수도 있을법한 플랫폼인 V LIVE 방송도 굉장히 여러 번 하는 등 정말 제대로 된 재결합이라 하기 손색이 없을 만큼 활발히 팬들과의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잠시였고 이후 2020년까지 다시 무려 5년째 새 앨범은 커녕 공연이나 팬미팅 등 팬들과의 만남조차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재결합을 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
팬들 사이에서도 재결합이래놓고 다시 3년을 잠수를 탈 거면 이게 어딜 봐서 재결합이냐는 볼멘소리도 나오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2018년, 오종혁이 인터뷰에서 직접 이와 같은 발언을 하며 사실상의 활동중지 오피셜을 내버렸다. 오종혁 "클릭비, 활동 기약 無…추억으로 남기고파"
아무래도 긴 시간의 개인 활동 이후에 다시 재결합을 했다 보니 멤버 간에 이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멤버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이후의 활동은 백지화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엑's 인터뷰 (2018.05)'''
▶ 지난 2015년 '심폐소생송'으로 다시 만나 13년 만에 완전체 활동도 했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다시 활동이 잠잠하기도 하다.
*오종혁 : "사실 아무 준비를 안 하고 있어요. 언제 나올 거라 확답을 못 드리거든요. 오랜 기간 동안 각자 활동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왔고, 이견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누군가는 조금씩 희생해서 타이밍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워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없는데 팬들을 기대하게 하는 게 맞는 건가' 고민도 돼요. 오히려 좋은 추억으로 남겨드리는 게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활동하는 게 우리 욕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몇몇 멤버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해왔어요. 팬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말씀드릴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7인조 활동이 끝난 이후 무려 13년간 멤버들이 각자의 길을 걷다보니 이제는 사실상 본진 및 개인 사업이 따로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멤버들 모두 오로지 클릭비에만 올인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20]
때문에 팬들은 아쉽겠지만 현 상황은 멤버들로써는 지극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만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될법한 상황이다.
결국 2015년에 야심차게 발표했던 재결합은 다시 사실상 무효가 되어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러모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2020년 김상혁, 김태형의 유튜브 방송을 통해 유닛 활동 논의에 들어갔으나, 코로나19로 무기한 연기되었음이 언급된다.
4. 음반 목록
5. 수상 경력
5.1. 시상식
5.2. 가요 프로그램 1위
6. 여담
- 4인조로 개편 후 NRG와 함께 예능 '용호상박'을 찍기도 했다.
용호상박 1 용호상박 2 용호상박 3 용호상박 4
용호상박 5 용호상박 6 용호상박 7 용호상박 8
용호상박 9 용호상박 10 용호상박 11 용호상박 12
용호상박 13 용호상박 14 용호상박 15
용호상박 16 용호상박 17 용호상박 18
용호상박 5 용호상박 6 용호상박 7 용호상박 8
용호상박 9 용호상박 10 용호상박 11 용호상박 12
용호상박 13 용호상박 14 용호상박 15
용호상박 16 용호상박 17 용호상박 18
- 멤버들이 다들 신조어를 잘 모른다.
- 멤버들이 다같이 군대 체험을 하러 간 적이 있다.
- 클릭비 83년생 멤버들의 졸업식 영상을 찍은 적이 있다.
- <아주 오래된 연인들>, <사랑의 슬픔>, <보랏빛 향기>,
, <이별공식> 등의 선배 가수들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 했다 《Click-B Remake Album 'Smile'》은 아예 전곡이 리메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 예능 프로그램인 게릴라 콘서트에 출연하여 최초로 도전에 실패했다. 버스에서 MC가 "목표 인원수를 몇 명으로 하겠냐?"라는 질문에, 당시 리더였던 김태형이 매니저에게 전화하는 척을 하며 목표 인원수를 만 명으로 잡았다. 인라인을 타고, 뛰어다니며 열심히 홍보한 결과 7,552명이라는 꽤 많은 사람이 왔으나 결국 실패했다.[22] 후에 방송을 본 배우 고수가 김태형에게 전화하여 젖은 목소리로 "방송 잘 봤다, 얘들아. 힘내라."라고 말했다고. 김태형의 말로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무리하게 인원수를 잡았다고 한다.
7. 외부 링크
[1]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2] 악기 파트를 맡지 않은 멤버는 에반이 유일하며 메인 보컬과 댄스 or 퍼포먼스만 소화했다.[3] FT아일랜드나 CN BLUE가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4] 애초에 노민혁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기타 신동으로 유명세를 탈 정도로 수준급의 기타 실력을 갖고 있었고, 노민혁과의 연으로 합류한 하현곤도 클릭비에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수준급의 드럼 실력을 갖춘 드러머 지망생이었다. 특히 하현곤은 드럼 이외에도 기타와 피아노 연주도 가능하다. 즉, 클릭비는 기획형 밴드 아이돌이긴 했지만, 팀 내에 밴드 사운드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멤버가 있었다는 소리. 실제로 노민혁과 하현곤은 해체 후 각자 밴드를 새로 꾸리거나, 싱어송라이터 형태로 활동하면서 지금까지도 악기를 놓지 않는 진지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5] 2003년 NRG와 예능 '용호상박'을 함께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아직까지 클릭비와 NRG의 멤버들끼리 친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6] 키보드는 2집 때만 맡았었다.[7] 키보드는 1집 때만 맡았었다.[8] 베이스 기타는 1집 때만 맡았었다.[9] 베이스 기타는 2집부터 3.5집까지 맡았었다.[10] 이에 대해 소속사가 강제로 해체시켰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거짓말이다.[11] 젝스키스 팬덤처럼 막장 수준의 루머 생성은 아니지만, 여기에도 루머가 퍼뜨려져 있었다. 에반과 노민혁의 경우 회사와의 계약이 먼저 만료된 상태였고, 자의로 클릭비를 그만둔 것이었다. 다만 하현곤은 재계약을 하고 싶었으나, 드럼만 치던 하현곤이 춤과 노래를 담당했던 나머지 넷과 합을 맞추기가 어려웠고, 결국 회사의 방침에 따라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탈퇴 과정에서 불화가 있거나 다른 멤버들에게 서운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12] 하현곤의 경우 본인의 의사와 달랐긴 하지만, 회사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댄스 그룹으로 전환한 상황에서 하현곤의 자리가 없던 것이 현실이었다.[13] 애초에 악기를 담당했던 멤버들 중 하현곤과 노민혁은 DSP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드럼과 기타를 공부해왔던 멤버들이었지만 4인조로 잔류했던 우연석, 김태형, 오종혁, 김상혁은 그룹 결성 전부터 악기를 계속 공부해 온 게 아니라, DSP에 들어온 이후 그룹 콘셉트에 맞춰 뒤늦게 악기를 공부하고 소화했던 멤버들이었기에 악기를 내려놓고 댄스 무대만 소화한다는 선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이었다.[14] 이때부터 4인조였던 NRG와 종종 비교되곤 하였다. NRG는 원래 5인조였으나 2000년에 멤버 한 명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사망하여 4인조가 되었다.[15] 이 당시 싱글을 발표하자마자 메인보컬인 오종혁이 바로 군 입대를 해버렸다. 활동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상황. 심지어 두 번째 디지털 싱글은 오종혁의 입대 전 미리 녹음해뒀던 곡을 오종혁이 입대한 이후에야 뒤늦게 발표하었다.[16] 에반은 군 복무 중이라 불참.[17] 사실 2011년 클릭비 음원 발매 (후술할 <말처럼 되지가>. 김태형 불참), 조인트 콘서트, 싸인회 등 팬들과의 교류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18] 클릭비의 심폐소생사로 김태우가 나왔다.[19] 2011년 김태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서 발매한 노민혁 작사, 작곡의 <말처럼 되지가>를 불렀다. 클릭비의 팬인 니지를 향한 팬송이었지만 정작 니지들도 몰랐으며 방송 배경음악 출연횟수 2회의 불운의 곡.[20] 냉정하게 보면 이들은 모두 이젠 곧 40을 앞둔 30대 후반의 성인 남성들이다. 더 이상 10대~20대 시절처럼 패기와 깡으로만 모든 걸 추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현실적인 부분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책임질 것도 많아져 버린 나이다. 그런 사람들이 7명이나 모여 전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무언가를 추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렇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21] 클릭비 활동 시절 초창기에는 김상혁도 흡연자였다. 하지만 현재는 금연한 듯 하다.[22] 다만, 당시 인구수가 적은 춘천에서 콘서트를 주최했고, 하필 때맞춰 열린 마라톤 대회 때문에 춘천 시민들이 다른 도시로 빠져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