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토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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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Taranto
1. 개요
2. 배경
3. 과정
3.1. 양측의 상황
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
3.3. 타란토 공습
3.4. 공습 결과
4. 뒷 이야기
5. 매체에서의 모습
6. 같이 보기


1. 개요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이었던 타란토에 공습을 가한 전투이다. 타란토 전투는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와 전함이 맞붙은 사건이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지중해에서는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프랑스 해군 지중해 함대, 이탈리아 해군 3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 전투가 끝나면서 이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서유럽을 거의 석권하여 영국 본토가 침공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본토 해역 함대가 지중해 함대를 증원하기 곤란한 상황이 닥쳐왔다. 게다가 유사시 지중해에서 영국과 협력하며 이탈리아를 견제할 수도 있었던 프랑스 해군마저 독일에 항복하면서 '''영국의 지중해 함대가 이탈리아 해군에 대해 전력의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6척, 순양함 21척, 구축함 52척, 잠수함 106척 등을 보유하여, 커닝햄 제독의 영국 지중해 함대(전함 4척, 항모 1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5척, 잠수함 10척)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영국군은 전적으로 바다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몰타섬을 둘러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는 해로가 최단 거리의 보급로였다. 대안으로 희망봉을 경유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도는 항로도 있었지만 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효과적인 보급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지브롤터 ↔ 몰타 ↔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 항로를 수호해야 할 영국 해군은 상대인 이탈리아 해군에 비해 숫적 열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및 몰타 섬을 중간에 두고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 양쪽의 세력이 분리되어 서로 작전 협조가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불과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몰타 기지의 영국군은 오직 구축함1척, 잠수함6척, 대공포42문과 전투기12대만을 보유했을 뿐이었고, 따라서 예상되는 이탈리아 해공군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저항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탈리아군이 함대를 투입하여 깽판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몰타 기지는 물론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까지 위기에 처할 상황이었다.

3. 과정



3.1. 양측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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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정면 결전을 펼칠 경우 영국 지중해 함대까지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 육군은 아직 물자와 장비 양면에서 적절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고, 특히 무솔리니의 이집트 침공 준비를 위해 추가적인 대규모 보급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해군은 당분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 행 보급선단의 호위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지중해 함대도 몰타 기지의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한 호송 선단을 호위하여 서로 진로가 엇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0년 7월 9일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반도 근해에서 푼타 스틸로 전투(Battle of Punta Stilo, 영국 측 기록)-칼리브리아 조우전(Battle of Calabria, 이탈리아 측 기록)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전투 자체는 양측이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각각의 목적지로 가다가 우연히 맞딱뜨린 사건이었지만, 이탈리아 공군 폭격기 72대가 투입되고 순양함과 전함들이 서로 포격을 교환하는 등 대규모 해전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는 전함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소파, 중순양함 볼차노(Bolzano)가 대파되었으며, 영국은 경순양함 넵튠(HMS Neptune), 글로스터(HMS Gloucester), 구축함 헤리워드(HMS Hereward), 디코이(Decoy)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전함 줄리오 체사레와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는 서로 '''역사상 최장거리의 포격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26,000야드(24km)''' 거리에서 줄리오 체사레가 워스파이트를 상대로 지근탄 2발을 내고, 워스파이트의 15인치 포탄1발이 줄리오 체사레의 후방 갑판에 명중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해군은 리비아의 자군에게, 영국 해군은 몰타 기지를 위한 재보급에 집중하면서 가끔씩 조우전이 발생할 뿐이었다. 그러나 본토에 안전한 항구 타란토를 보유한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 측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 자체가 이탈리아 육군의 침공 위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함대(전함 6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가 집중 배치되어 있는 타란토 항을 직접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타란토 항은 '''대공포101문, 기관총 193정의 막강한 화력'''을 위시하여, 서치라이트22대, 저공 비행하는 항공기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한 방공기구(barrage balloon) 87대, 어뢰 공격을 막기 위한 대어뢰 저지용 그물망 4.2km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이탈리아 해군 나름대로 철저한 방호책을 강구해둔 상태였다.[1]

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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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뮌헨 위기 당시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영국 해군 항모의 생존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우려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해군 대장 더들리 파운드(Sir Dudley Pound) 제독이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지중해 함대의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전단장 리스터 소장(Sir Arthur Lumley Lyster)이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해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바로 항공모함의 함재기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야간에 뇌격을 가하고 함재기를 수용한 후에 전속력으로 후퇴하는 기습작전이었다.[2] 파운드 제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고 1939년에 후임으로 부임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앤드루 커닝햄(Andrew Cunningham) 제독에게 전언하여,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다.[3]
그리고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프랑스의 해군이 동맹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작전에 나설 항모로는 다소 낡았지만 함재기가 모두 소드피시로 구성된 항모 이글(HMS Eagle)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계획은 9월 16일 이탈리아 육군이 시디 바라니(Sidi Barrani)에서 정지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운신의 자유가 확보된 후에나 작성될 수 있었다.
당초 작전은 10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소드피시의 화재 사고가 번져 항모 이글의 연료 시스템까지 파손되는 재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작전 시행일이 11월 11일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항모 이글이 작전 참가를 포기하고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게 소드피시 5대를 인계하여, 항모 일러스트리어스(HMS Illustrious) 전단(중순양함2척, 경순양함2척, 구축함4척이 호위)이 공습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작전 계획에 따라 몰타 섬에서 마틴 메릴랜드 폭격기를 동원하여 타란토에 대한 사전정찰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일러스트리어스 호의 정보 장교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방공 기구(barrage balloon)를 발견하여, 공격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이 무렵 이탈리아 측도 영국측 정찰 비행을 목격하고 경보를 울렸으나, 이탈리아군은 레이더를 보유하지 않아 공습에 사전 대비를 갖출 시간 여유를 갖지 못했다. 또한 영국 해군이 타란토 공습과 동시에 MB8 작전을 실행하면서 몰타로 대규모 함대가 호위하는 호송선단을 파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측은 평상시의 호송 작전이 진행 중일 뿐이라고 단정짓고 말았다.

3.3. 타란토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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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계획에 따라 1940년 11월 11일 밤 9시에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윌리엄슨(M.W. Williamson) 해군 중령이 이끄는 815비행중대의 소드피시12대가 출격하였다. 6대가 대함공격용 어뢰를 장착하였고, 나머지 6대는 폭탄을 장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 뒤에 819비행중대의 소드피시 9대가 2차 공격대로 출격하였다. 4대는 폭탄을, 5대는 어뢰를 탑재한 상태였다.
1차 공격대는 밤10시 58분에 타란토에 도착하였으며, 플레어를 투하하고 유류저장탱크에 급강하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공습을 시작하였다. 곧 윌리엄슨의 편대가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에 어뢰를 명중시켜 흘수선 아래 측면에 직경 8.2미터의 구멍을 뚫었다. 윌리엄슨 중령은 즉시 이탈리아측 대공포에 격추당했고 탑승원 2명 모두 포로가 되었다. 뒤이은 편대는 전함 리토리오(Littorio)에 어뢰 2발을 명중시키고, 순양함 2척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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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헤일(J.W.Hale) 해군 중령이 이끄는 2차 공격대가 진입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어뢰1발이 전함 리토리오에 명중했다. 한 소드피시는 대공포에 2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에 어뢰를 겨냥했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다른 소드피시는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에 어뢰를 명중시켜 선체에 큰 구멍을 뚫고 전방 화약고를 침수시켰다. 그러나 베일리(G.W.L.A.Bayly) 해군 대위의 소드피시가 중순양함의 대공포탄에 맞아 격추당하여 탑승원 2명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15분 늦게 도착한 마지막 공격기는 순양함에 급강하 폭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한 뒤, 새벽 2시39분 일러스트리어스 호에 안전하게 도착했다.[4]
이탈리아 군의 입장에서 평가하면, 타란토의 막강한 대공포대는 공습 도중 총 13,489발의 대공포탄을 퍼부었고, 여기에 함선들도 수천 발의 대공포탄을 추가하여 막강한 탄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방공기구 87대 중 60대는 전날 불어닥친 강풍으로 날아가버린 상태였으며, 어뢰 방지용 그물을 12.8km에 걸쳐 설치해야 완전한 방호가 가능하지만, 4.2km만 설치하는 등 어뢰에 대한 방호책에서 헛점이 존재했다. 또한 일러스트리어스 함장 데니스 보이드(Denis Boyd)는 "2회에 걸친 공습 중 적군이 서치라이트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5]

3.4. 공습 결과


  • 영국 해군
  • 이탈리아 해군
  • 전함 3척의 피해 :
    •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 선체에 12×8미터의 구멍이 뚫리고 착저. 인명 피해는 27명 전사, 100여 명 부상. 이후 인양되었으나 수리 중에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편을 바꾸는 바람에 영구적으로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다.(영구 손실)
    •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 11*7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리고 좌초. 7달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전함 리토리오(Littorio):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수. 인명 피해는 32명 전사 외에 다수 부상자 발생. 4달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트렌토급 중순양함 트렌토 1척 소파, 에마누엘레 페사노, 리베치오 구축함 2척 소파.
  • 항공기 2대 지상에서 파괴
  • 유류 탱크 파괴 및 사용불능
  • 59명 사망, 600명 이상 부상


4. 뒷 이야기


항구의 해저에 착저한 이탈리아 전함 2척은 반년에 걸쳐 수리되었고 1척은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습 다음 날 이탈리아 해군은 피해를 입지 않은 함선을 좀더 안전한 나폴리 항으로 이동시켰다.
하룻밤 사이에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3척을 잃고 일시 영국의 지중해 함대 쪽으로 세력 균형이 이동했다. 덕분에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의 주력함대에 대비해서 단일 부대를 편성하여 뭉쳐다녀야 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각각 항모1척, 전함2척으로 구성된 2개 전투단을 구성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기대한 작전 효과는 완전히 성사되지는 못하여, 타란토 공습 이후 불과 5일 만에 이탈리아 해군의 이니고 캄피오니(Campioni) 제독이 전함2척, 순양함6척, 구축함14척의 대함대를 꾸려 출격하여 몰타행 영국 호송선단을 격침하는데 성공하고, 추축국의 아프리카 호송선단 저지 임무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는 리비아 행 호송선단을 증가시켰다.[6]
또한 이탈리아는 1년 뒤 이탈리아 해군 잠수정 쉬레(Scire)에 탑승한 제10강습부대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밸리언트(HMS Valiant)를 대파하여 복수를 성공한다. 이게 바로 인간어뢰 작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기습 작전이다. 이 두 전함은 각각 9달, 6달씩 전투불능에 빠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의 실패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습격(Raid on Alexandria)가 더 뼈아프다고 보았다. 비록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전함도 무력화되면 전략적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타란토 공습 이후 이탈리아는 패기 넘치게 계속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보급을 하면서도 몰타섬으로 가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내기도 하는 여유있는 척을 했지만, 반대로 영국은 항구에서 무력화된 전함 2척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 한다.[7]
결국 영국 해군 당국은 타란토 공습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녹아웃을 먹이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8] 그리고 1년 뒤, 영국 해군은 Z 함대를 싱가포르에 보내기 위해 함대를 구성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탓에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어 처칠의 안을 수용하고, 말레이 해전을 겪게 된다. 이에 격분한 영국 수뇌부는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기 위해 몰타를 사수하라고 지시하였고, 제 3차 몰타 항공전의 막이 열리게 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란토 공습 이전 항공 어뢰 전문가들은 적어도 수심 23미터가 확보되어야 선박에 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었다. 타란토 항구의 수심은 12미터에 불과했으나, 영국 해군은 어뢰가 지나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제국 해군도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해서 이듬해 미 해군을 겨냥한 진주만 공습에 십분 활용했다.

5. 매체에서의 모습


  • 모바일 게임 벽람항로에서는 '신성한 프렐류드'의 A구역 파트는 타란토 공습을 포함하여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의 전투를 모태로 했다. 실제 역사의 이탈리아 제국을 모티브로 한 사디아 제국의 입장에서 공격을 막아내는데, 공습이라는 점을 반영했는지 지속적으로 비행기가 아군 항구를 노리고 들어온다.

6. 같이 보기


  • 진주만 공습 : 타란토 공습으로부터 13개월 후 벌어졌다. 그럼에도 원조격인 타란토 공습보다도 유명해진, 항공모함에 의한 함대 공습의 대표격 사례가 되었다.
  • 구레 군항 공습[9]
[1] Santoni, Alberto (November 1990), "L'attacco inglese a Taranto" The English attack on Taranto, Rivista Italiana di Difesa (in Italian): 88–95[2] 타격력의 주력은 뇌격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해군이 운용하던 뇌격기는 페어리 소드피시복엽기인데다가 순항속도가 200km가 안될 정도로 느린 기체라서 낮에 투입했다가는 죄다 털릴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야간공습으로 작전을 결정하였으며, 혹시 있을 정찰을 고려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활동범위 밖에서 출격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3] Stephen, Martin (1988). Grove, Eric, ed. Sea Battles in Close-up: World War 2. Volume 1. Shepperton, Surrey: Ian Allanm. pp. 34–38.[4] Sturtivant, Ray (1990). British naval aviation: the Fleet Air Arm 1917–1990. London: Arms & Armour Press. pp. 48–50[5] 서치라이트를 쓰면 자신들의 위치가 더 쉽게 발각될 수 있다는 단점때문에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등화관제가 왜 있는지 생각해보면 꽤나 그럴싸한 이유. 문제는 영국은 항구안에 있는 배를 공격하러 온것이라 찾는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는 점...[6] Bragadin, Italian Navy in World War II, p. 356.[7] 이탈리아는 본토에서 수리하면 되지만 영국은 일단 지중해에서 벗어나 돌아가서 수리를 해야하니 상황이 같다고 볼 수 없긴 하다.[8] Caravaggio, A.N, Lieutenant Colonel, 'THE ATTACK AT TARANTO: Tactical Success, Operational Failure', Naval War College Review, 1997.[9] 구레 군항 공습의 경우는 일본군 전력이 육군이든, 해군이든 거의 거덜나고 있었던 차에 철저하게 은닉된 함정(준요라든지...)을 제외한 잔존 전력에 대한 확인사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