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연표

 




1. 개요


탐라국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한 문서.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2. 삼국시대


  • 476년 4월 문주왕 시기 탐라(躭羅)가 백제에 방물을 바쳤다. 탐라국 사신은 백제로부터 은솔에 임명됐다.[A]
  • 498년 8월 탐라에서 백제에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 동성왕이 직접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죄를 빌었다.[A]
  • 508년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와 통교했다.[C]
  • 589년 수나라의 전투선이 표류해 탐모라국(躭牟羅國)에 닿았다. 전투선은 탐라에서 백제를 거쳐 수나라로 돌아갔다.[1]

3. 삼국통일전쟁


  •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 항복했다.[A]
  • 661년 5월 23일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C] 8월 탐라국의 조공 사절이 당나라에 이르렀는데[2], 탐라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3]가 직접 입조해 방물을 바쳤다.[4]
  • 662년 2월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해 탐라국은 신라의 속국이 됐다.[A] 고을나왕의 15대손인 고후(高厚), 고청(高靑) 등 삼형제가 탐진을 거쳐 신라에 입조했다. 문무왕은 고후를 성주, 고청을 왕자, 그리고 막내를 도내라고 불렀다.[5]
  • 663년 8월 13일 주류성 전투에서 패한 백제인들과 인들이 당나라에 항복할 때 탐라국 사신들도 포로로 잡혔다.[D]
  • 665년 8월 탐라 사신이 신라, 백제, 왜의 사신과 함께 유인궤를 따라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여했다.[A][D] 왜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C]
  • 666년 1월 11일 왕자 고여(姑如)가 왜국에 공물을 바쳤다.[C]
  • 667년 7월 11일 탐라에서 좌평 연마(椽磨) 등을 보내 왜국에 공물을 바치고 11월 11일 비단 등을 받았다.[C]
  • 669년 3월 11일 왕자 구마기(久麻伎)가 왜국에 공물을 바쳤다. 18일 오곡의 종자를 받고 귀국했다.[C]
  • 674년 윤6월 8일 왕자 구마예(久麻藝), 도라(都羅), 우마(宇麻)가 왜국에 조공했다. 8월 25일 탐라국왕과 구마예 등이 대을상[6]의 작위를 받고 츠쿠시(筑紫, 구마모토현)를 통해 귀국했다.[C]
  • 675년 9월 29일 신라가 매소성 전투에서 당에 승리했다.
  • 676년 8월 1일 왜국에 공물을 바치러 간 왕자 구마기가 츠쿠시에 도착했다. 9월 27일에는 탐라왕 고여(姑如)가 나니와(難波, 오사카시)에 도착했다.[C]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당군을 격퇴했다.
  • 677년 2월 24일 탐라 사신이 왜국에서 배 한척을 받았다. 7월 8일 탐라 사신이 돌아갔다.[C]

4.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


  • 678년 8월 28일 왕자 도라가 일본에 조공했다.[C]
  • 679년 1월 22일 탐라인이 일본의 수도로 향했다.[C]
  • 679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했다.[A]
  • 680년 9월 23일 탐라에 왔던 일본 사신이 돌아가 일본 조정에 인사했다.[C]
  • 685년 10월 3일 일본에서 사신을 보냈다.[C]
  • 686년 8월 20일 일본 사신들이 탐라에서 귀국해 본국에 도착했다.[C]
  • 688년 8월 25일 탐라왕이 좌평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9월 23일 츠쿠시관(筑紫館)의 연회에서 물품을 받는다.[C]
  • 778년 11월 10일 탐라도(耽羅嶋) 사람들이 일본 견당사를 노략질하고 억류했다. 녹사 등 40여명이 일본으로 도망쳤다.[E]
  • 779년 2월 일본에서 태재부(太宰府) 관원을 신라에 보내 탐라도에 억류된 견당판관(遣唐判官) 등을 데려가려 했다.[E]
  • 801년 10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A]
  • 918년 6월 15일 왕건고려를 건국했다.
  • 925년 11월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935년 12월 12일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다.[B]

5. 고려시대


탐라국이 국가로서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시점을 언제로 보는가 하는 견해는 938년설부터 1104년설까지 다양하다.
  • 938년 12월 탐라국 태자 말로가 고려에 입조하고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았다.[B]
  • 1011년 9월 15일 탐라에서 고려에 주(州)·군(郡)의 예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주기를 요청했다.[B]
  • 1012년 8월 7일 탐라인이 고려에 큰 배 두척을 바쳤다.[B]
  • 1019년 9월 15일 고려의 중양절(重陽節) 연회에 탐라 사람들이 송나라 사람, 흑수인등과 함께 초대받았다.[B]
  • 1021년 7월 3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2년 2월 9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4년 7월 27일 고려에서 추장 주물(周物)과 그 아들 고몰(高沒)을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했다.[B]
  • 1027년 6월 15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9년 6월 26일 세자 고오노(孤烏弩)가 고려 조정에 입조하고 유격장군의 관직과 관복 한벌을 받았다.[B]
  • 1030년 9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34년 11월 4일 송상, 여진의 동번, 서번과 더불어 탐라국에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14일 고려에서 베푼 팔관회에 (탐라국의 사신이) 참석했다.[B]
  • 1036년 11월 15일 고려에서 팔관회를 열자 방물을 바쳤다.[B]
  • 1043년 12월 27일 탁라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加利)가 고려에 왕자를 새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했다.[B]
  • 1049년 11월 13일 진위교위 부을잉(夫乙仍) 등 77명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52년 3월 27일 고려의 삼사#s-2에서 탐라국이 매년 바쳐야 하는 귤의 양을 정해 제도화했다.[B]
  • 1053년 2월 7일 왕자 수운나가 아들을 고려에 보내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았다.[B]
  • 1054년 5월 16일 사신 13명을 고려에 보내 태자의 책봉을 축하했고 사신들은 관직을 받았다.[B]
  • 1055년 2월 20일 한식#s-3을 맞아 고려에서 외국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수령 고한(高漢) 등 158인이 조종관(朝宗館)에서 음식을 대접받았다.[B]
  • 1056년 2월 27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57년 가을 고려에서 탐라의 목재를 베어 바다 건너에 을 새로 지었다.[B]
  • 1062년 2월 27일 고협(高叶)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10월 6일 성주 고일(高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63년 3월 9일 탐라의 새 성주 두량(豆良)이 고려에 입조해 명위장군의 관직을 받았다.[B]
  • 1068년 3월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加也仍)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77년 12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86년 2월 7일 선종사숙태후에게 책문을 올리고 건덕전에서 베푼 잔치에 유격장군 가어내(加於乃)가 가서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다.[B]
  • 1090년 1월경 성주 유격장군 가양잉(加良仍)이 죽고 배융부위 고복령이 뒤를 이었다. 고려에서는 전례에 따라 부의품을 보냈다.[B]
  • 1092년 2월 26일 성주 의인(懿仁)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고려에서 의인을 정원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관복과 의대를 하사했다.[B]
  • 1094년 6월 19일 탁라에서 고적(高的)등 194인이 헌종의 즉위를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B]
  • 1095년 7월 20일 고물(高勿) 등 80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96년 9월 12일 탁라 성주가 고려에 사람을 보내 숙종의 즉위를 하례했다.[B]
  • 1100년 11월 16일 송상, 여진과 함께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1년 10월 8일 고려에서 탁라의 새 성주 배융부위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에 임명했다. 11월 14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4년 고려가 탁라(乇羅)를 탐라군(耽羅郡)으로 고쳤다.[B] 제주도에 처음으로 한반도 종주국의 군현이 설치됐다.

5.1. 탐라현 시기


  • 1153년 11월 15일 탐라현의 도상 인용부위 중련(中連), 진직(珍直) 등 12인이 방물을 바쳤다.[B]
  • 1168년 11월 20일 양수(良守)가 반란을 일으켰다.[B]
  • 1202년 10월 번석(煩石)과 번수(煩守)가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5일 탐라안무사가 진압하고 수괴를 처형했다.[B]

5.2. 원간섭기


  • 1272년 원나라 중서성과 추밀원에서 일본보다 탐라를 먼저 정벌할 것을 제안했다. 그 근거는 탐라국왕에 대한 의리[7]였다.[F]
  • 1273년 6월 원나라가 적당들을 토벌하고 탐라국초토사를 세웠다. 탐라국은 매년 모시포 100필을 원나라에 진상했다.[F]
  • 1275년 6월 29일 손탄(遜攤)이 탐라국 다루가치에 임명된다.[F]
  • 1281년 5월 18일 원나라가 이 해애 바쳐야 하는 백저포(白紵布)를 면제해줬다.[F]
  • 1284년 1월 21일 원나라에서 탐라국군민안무사를 세웠다.[F]
  • 1298년 5월 24일 탐라국에서 원나라에 방물을 바쳤다.[F]
  • 1372년 7월 25일 고려 공민왕은 탐라국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탐라국에 몽골인이 많이 사는데 이들을 옮겨야 하며, 난수산(蘭秀山)에서 도망친 도적들이 무리를 이뤘다는 이유를 들어 탐라국을 토벌해줄 것을 명나라에 요청했다.[G]
  • 1375년 4월 탐라에서 고려에 금 허리띠(金帶) 2개와 은그릇(銀器)을 바쳤다.[B]
  • 1386년 7월 고려에서 전의부정 이행, 대호군 진여의를 파견해 성주 고신걸과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데려갔다.[B][8]
  • 1387년 탐라국에서 명나라에 말을 조공했다. 명나라에서는 앞서 말을 조공한 고려의 경우와 같은 값을 줬다.[G]
[A] A B C D E F G삼국사기』.[C]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일본서기』.[1]북사』. 『수서』에서는 탐모라(𨈭牟羅)라고 한다.[2] 『당회요』.[3] '유리'가 성이고, '도라'가 이름이다. (『당회요』)[4] 『책부원귀』.[5] 이원진(李元鎭), 『탐라지』.[D] A B구당서』 유인궤전.[6] 본 사료에서는 그 나라 좌평에 해당한다(當其國之佐平位)고 서술했는데, 사실 대을상은 19관등 중 15위로 낮은 편이다.[E] A B속일본기』.[B]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 \ ] ^ _ ` a b c d e f g h고려사』.[7] 탐라국왕이 원나라에 입조해 황제를 뵌 적이 있는데, 반적이 군주를 내쫓고 성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탐라국왕이란 탐라 성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F] A B C D E F원사』.[G] A B 『명실록』.[8] 고려사 이행 열전에서는 "탐라가 (고려에) 귀순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耽羅歸順始此) 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