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쇼크

 

1. 개요
2. 상세
3. 불안한 출발
4. 충격의 12월 14일
5. 쇼크 이후...
6. 예상되었던 참변
7. 중국발 태국 쇼크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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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마르세유의 치욕에 이어 터져나온 또 하나의 충격적인 패배.'''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8강전에서 당한 충격적인 경기, 다른 쇼크들과 함께 거론되는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당년 아시안 게임 전체로 따지면 타종목의 선전에 따른 종합 2위라는 호성적 탓에 묻힌 것도 있고, 아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나름대로는 조용(?)하게 넘어간 쇼크'''이지만... 만일 당신이 그때 열렬한 축구 팬이었으며 상대가 '''한 수 아래'''인 태국이라는 점, 그리고 경기 내용을 고려한다면 넘어갈 수 없는 쇼크라 할 수 있다.

2. 상세


1998년 12월 6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13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안 게임에서의 선전을 다짐하기 위해 중국, 일본과 함께 많은 선수들을 보냈고 그 중 축구 대표팀[1]도 역시 이들과 함께 방콕 현지에 입성하였다. 특히 대회에 나서는 대표팀으로서는 이번 대회가 비교적 남달랐는데 바로 그해에 열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문이었다.
대표팀은 '''이번에는 16강에 간다!!'''라는 외침으로 개최국인 프랑스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에서 맞이한 것은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당한 1:3 역전패[2]였고 이어진 2차전에서는 '''하필 제대로 삘타다 못해 아예 우승하려고 미쳐 날뛰었던''' 네덜란드[3]였고 그런 네덜란드에게 0:5로 대패를 당하면서 결국 조기 귀국이 확정되었다.[4]
그나마 마지막 3차전 벨기에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간신히 1990년 월드컵처럼 전패를 면했지만 경기 내용이나 점수를 본다면 '''끝까지 투혼을 보여줘 인상을 심어준 바로 전 월드컵'''보다도 못 나온 수준이어서 한국 축구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이 때문에 방콕에 들어온 아시안 게임 대표팀은 프랑스에서의 악몽을 떨쳐내기 위한 모습으로 굳은 결의를 다짐하였고 무엇보다 서울에서 열렸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이후 12년 만의 금메달 획득을 위한 여정이기도 하여서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을 드러내었다.
무엇보다 조 편성도 나쁘지 않았다. 조별리그 방식으로 1라운드, 2라운드 체제로 하는 방식이 걸리긴 하였지만 상대에 나선 팀들 중 일본, 중국 등의 팀들을 제외하면 한 수 아래의 실력을 가졌고 월드컵을 4회 연속(1986, 1990, 1994, 1998) 진출한 저력을 가진 팀이었으니 우리로서는 유리함 속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도 1라운드 조별리그는 무난하게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도 조 1위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표팀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불안한 출발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 대표팀은 투르크메니스탄, 베트남과 함께 A조에 편성되어 경기에 나섰다.[5]
12월 2일, 첫 경기인 '''약체''' 투르크메니스탄전과 경기를 치뤘다. 출발은 좋았다. 전반 1분 만에 공격수 최용수가 선제골을 터트려 기선을 제압했고 이어 44분에 다시 한 번 추가골을 성공시키면서 대표팀은 2:0까지 점수차를 벌려 나갔다. '''하지만...'''
후반 59분, 최윤열[6]의 자책골로 한골을 내준 것을 시작으로 후반 85분과 89분에 연달아서 동점골과 역전골을 내주면서 충격적인 '''2:3 역전패'''를 당했다.[7]
우리로써는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던 경기였지만 자책골 이후 무너진 팀플레이를 교묘히 노린 투르크메니스탄의 패기가 그대로 적중한 점에서는 뼈아픈 패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베트남전에서 한풀이하듯이 김은중, 최용수(2골), 윤정환의 연속골로 4:0 대승을 거두었고 1승 1패를 기록한 채 2라운드에 진출했다.
이후 정신을 잘 잡았는지 2라운드에서 대표팀은 같은 조에 속한 아랍 에미리트, 일본, 쿠웨이트를 연파해 '''3전 전승 5득점 1실점'''이라는 눈부신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 8강에 진했였다. 1라운드에서 보여준 충격의 역전패를 딛고 일어난 모습이었고 숙적 일본을 누르고 진출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위안거리를 삼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약체인 팀에게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한 부분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분위기였고 다음 상대인 태국도 역시 개최국이라는 이점이 큰 부담요소여서 우리로서는 태국을 어떻게든 꺾어야 다 살아난다는 상황이었기에 8강전에 임하는 자세는 그 어느 때보다 남달랐었다.
'''그것이 곧 펼쳐질 최악의 쇼크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충격의 12월 14일



'''뼈저리게 반성하고, 다시 한국 축구가 일어서기를 여러분과 함께 바라마다하지 않습니다. 한국 축구 파이팅을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외쳐보고 싶습니다.'''

아시안 게임 소식을 전하던 최승돈 KBS 아나운서의 클로징 멘트. 진짜 충격적인 역전패를 보고 느껴지는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 멘트이기도 했다.

무슨 말로는 형용하기 힘들지만... 그냥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패배였다.
간신히 체면을 세우고 다시 나아간 대표팀은 12월 14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 위치한 라차망갈라 경기장에서 개최국 태국과 운명의 8강전에 나섰다. 당연히 예상을 해도 경험 많고 실력이 우수한 대표팀의 완승이 예상되었지만 홈 이점을 살려 기적을 바라던 태국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는 점에서 대표팀은 심기일전으로 경기를 치러야 '''했지만...'''
승리는 커녕 패배를 하는 대굴욕을 맛보며 '''아시안 게임 8강'''에서 내려오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경기 내용은 역전패를 당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대표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경기 초반부터 실력이 우세한 대표팀 선수들을 막기 위해 과격한 수비를 펼친 태국 선수들이 너무 과한 플레이를 한 나머지 '''한 명이 퇴장'''당하는 실수를 자초해 경기에 막대한 손해를 받았다.
이어 대표팀 선수들이 유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경기 승기를 잡은듯 보였지만... 계속해서 대표팀의 공격을 막아낸 태국의 수비가 두껍게 펼쳐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후반 중반까지 이렇다 할 득점을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후반 80분(영상에서는 후반 35분경), 세트피스 상황에서 짧게 올라온 크로스를 태국의 키아티삭 세나무앙[8]이 그대로 득점을 성공시켜 선제골을 터트렸고 이 한 방을 내준 대표팀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연출해내면서 경기를 어렵게 풀기 시작했다.
당황한 대표팀은 계속해서 공격 기회를 만들어가며 나섰지만 두터운 수비벽을 내세운 태국의 수비벽은 선수들에게는 버거울 정도로 힘에 겨웠고 경기도 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듯 보였다. 그러나 후반 86분(영상에서는 후반 41분경) 태국이 또 다시 저지른 과격한 반칙으로 얻어낸 프리킥[9]유상철이 골로 성공시켜 균형을 맞췄고 승부를 연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연장전에서도 득점을 내지 못해 어려운 경기력을 보여준 대표팀은 연장 95분(연장 전반 5분경으로 추정) 태국의 타와차이 옹트라쿨 선수가 프리킥 '''골든 골'''[10]을 내주면서 태국이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사실, 골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태국의 프리킥 골 자체가 거의 막기 힘든 야신존 각도의 슛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카메라 각도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던 슈팅은 제아무리 유명한 잔루이지 부폰같은 골키퍼가 와도 못 막을 정도로 어려운 슈팅이었고, 당대 최고 전성기의 기량을 갖고 있던 주전 골키퍼 김병지마저도 꼼짝 못하는 슈팅이었으니 말 다한 골이라 해도 무방했다.
우리로써도 완승을 기대할 것이라는 그 꿈은 다시 봐도 환상적인 프리킥 골든 골 앞에서 무참히 깨졌고 12년 만의 금메달은커녕 8강에서 떨어지는 성적을 받으면서 안 그래도 무참히 깨져서 위기였던 한국 축구에 또 한 번 큰 시련을 닥치게 만든 패배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상대팀 선수 두 명이 퇴장'''당한 유리한 상황을 잘 활용하지 못한 점과 그러한 부분을 파고드는 전술 운영이 완전히 나타나지 못한 점은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유리한 고지를 잡지 못한 책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책임의 당사자이기도 한 허정무 감독의 능력은 '''평화왕 조광래의 원조격'''이라 할 만큼 지도력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어서 대표팀에게 또 한 번 우려의 눈빛을 날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11]
그 뒤 이 경기에서 한국을 극적으로 꺾고 4강에 진출한 태국은 이 경기에서 모든 힘을 다 쏟은 탓이었는지 쿠웨이트와 중국에게 각각 0:3으로 완패하면서 4위로 대회를 마쳤다. 금메달은 결승에서 쿠웨이트를 2:0으로 꺾은 이란에게 돌아갔다.
여담으로 MBC에서도 이 경기를 중계했었는데,[12] 웅트라쿨의 프리킥 골든 골이 들어가자마자 '''믿기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한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상 방송사고나 다름이 없었지만 참으로 환장하는 경기 내용 때문에 별달리 이슈가 되지 못했다. 결국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중계를 마치겠다는 형식적인 클로징 멘트만 남긴 채 곧바로 중계를 끝냈다.

5. 쇼크 이후...


태국에서 발생한 예상 밖의 쇼크에도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 감독을 그대로 신임한 채 2년 뒤에 열린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나섰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도 그 믿음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올림픽 축구 본선을 이끌며 잘 되나 싶었지만, 본선 첫 경기인 스페인전 0:3 완패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표팀의 8강 진출을 이끄는데 실패하였고 이어 열린 2000년 AFC 아시안컵 4강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패해 단순히 감독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억울한 소지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게 8강전에서 대표팀은 '''정말 만나기도 싫은''' '''이란'''을 또 다시 만나 혈전을 펼쳤다.
물론 이란 쇼크로 비견되는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는 우리가 털렸지만 4년 뒤에는 우리가 연장전까지 피말리는 승부를 펼치며 이란과 대등하게 나왔고 마침내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승부의 쐐기를 박는 골든 골을 터트리며 2:1로 승리, 4강전에 합류했다. 하지만 8강전 연장 승부로 인해 선수들의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고 그 여파로 사우디와의 4강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1:2로 패하면서 아시안컵 정상 탈환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그때 이란을 만나지 않고 어느 정도 쉬운 상대를 만났더라면 2015 AFC 아시안컵 호주에서 나온 결승 진출도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란은 이후 열린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다시 맞붙어 우리와 혈전을 펼치는 명승부를 연출하였다. 허정무 감독은 대회 3위의 성적을 뒤로 한 채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했다.[13]
그리고 이 태국 쇼크도 이후에 나타난 ''''''''''''와 ''''''''''''들의 영향으로 묻혀지면서 지금은 거의 잊혀진 쇼크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러다 2016년 3월 27일, KBS가 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이날 경기 영상을 다시 올리면서 또 한 번 주목받은 적이 있다.
이 사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가 1998 프랑스 월드컵 직후 불어닥친 K리그 붐으로 축구계가 나름 특수를 누리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야말로 축구 팬들에게 찬물 쫙 끼얹을 참사가 터졌으니... 다행히 시즌 중은 아니라서 직접적인 타격까지는 없었고 1999년 K리그는 일단 당시 사상 최대, 역대로 따져도 5위에 랭크되는 275만 명의 관중을 끌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14] 이후 지속되는 국가대표의 졸전은 결국 K리그의 흥행까지 말아먹고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 K리그를 쥐어짜내가며 국가대표팀의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극약처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쓰게 되었다.

6. 예상되었던 참변


어떻게 보면 이 참변은 예상된 바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아시안 게임 경기일정은 2, 4, 7, 9, 11, 14일로 이어졌다. 즉, 8강까지 포함해서 12일 동안 6전을 치렀다는 것이다. 체력소모가 엄청났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허정무가 제출했던 엔트리는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이 당시만 해도 아시안 게임은 선수 나이 제한이 없어서 성인선수들이 자유롭게 출전했다.
그런데 한국팀에는 총 선수 20명 가운데 만 19세 선수들이 5명이나 들어가 있었다. 만 21세 이하로 따져보자면, 20명 가운데 12명이나 들어가 있었다. 대학교 선수들도 10명이나 됐고, 프로 초년생들도 수두룩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가 만 28세의 김병지였고, 그 다음이 27세의 유상철, 그리고 25세의 윤정환과 최용수, 이병근, 김현수였다. 프로다운 경기 체력도 완성되지 않은 애송이들에 심지어 선수들의 절반이 만 21세 가량의 대학생으로 프로도 아니었는데, 김병지, 유상철, 윤정환, 최용수, 이병근, 김현수만을 쐐기 삼아서 12일 동안 6전을 치르게 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지나친 오만한, 그야말로 미친 꼴통짓이었다.
심지어 당시의 홈그라운드가 태국 방콕이었다. 아무리 12월이라 해도 태국 방콕은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일도 적지 않다. 설사 독일이나 브라질이라고 할지라도 우승까지 방콕에서 17일 동안 8전을 치러야 하는 가혹한 일정에 대학교 선수를 10명이나 집어넣는 이 따위로 생각없는 선수 구성이라면 우승을 장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수비수 7명 가운데 5명이 대학생, 나머지 2명은 상무 소속의 선수였다.''' 실제로 2016 리우 올림픽의 와일드카드 중 한 장이자 주장이었던 멤버는 이미 병역특례를 받았던 장현수였는데, 수비수 가운데 5명을 대학생, 2명을 상무로 구성하는 이와 같은 선수 구성은 만용이라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허정무는 이 대회가 끝난 후 패인은 선수들의 정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하는데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정무 본인이 선수 생활하던 시절이라도 저렇게 빡센 일정을 소화하면 당연히 체력적으로 퍼져버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태국은 주최국이었던데다 선수들의 평균 연령도 대충 26세일 정도로 신-구 조화가 엄청나게 잘 된 팀이었다. 애초에 처음 시작하는 엔트리에서부터 확실히 한국이 이긴다고 승부를 장담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타국과 비교하면 명확하다. 허정무와 같은 어리석음은 사실 한국만 범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 더 심각했는데, 이들이 전원 프로 선수를 데려오긴 했으나 이들의 평균 연령은 19.65세밖에 되지 않았고 베테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일본 역시 1, 3, 7, 9, 11 10일 동안 5경기라는 강행군 끝에 한국과 쿠웨이트에게 2차 조별리그 1, 2위를 내주며 8강에서 짐을 쌌다. 이 때 정식 A매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오히려 더 크게 세계라던가 2002년과 같은 제대로 닿지도 않을 피상적 개념을 의식하다 경을 치른 것이었다.
반면, 태국을 누르고 동메달을 수상한 중국 선수층의 평균연령은 22.35세로, 한국의 평균연령인 22.05세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모든 선수를 프로 선수로 데려왔다. 비록 중국이 2차 조별 리그에서 밑에 2팀이 오만과 타지키스탄이라는 확실한 3, 4위 국가가 깔리고,[15] 8강은 투르크메니스탄, 동메달 결정전은 태국이라는 엄청난 대진운이 따랐지만 한국과 일본보다 더 대비가 잘 된 덕에 동메달이라도 차지한 것이다.
준우승 국가인 쿠웨이트는 23.35세로 전원이 프로선수였고, 30대의 베테랑이 2명이나 있었다. 우승을 차지했던 이란의 경우 25.45세라는 신구 조화가 잘 된 팀이었다. 게다가 자바드 자린체, 마다비키아, 나데르 모하마드카니, 모하마드 카크푸르, 카림 바게리, 하미드 에스틸리, 자히드 하세미안, 알리 카리미, 알리 다에이라는 이란의 레전드들에다가 알리레자 만수리안, 알리 무사비, 마무드 페크리 같은 국가대표팀의 중견들을 앞세웠다. 사실 엔트리 제출 시점부터 강력한 스쿼드의 이란의 우승이 정해져 있었고, 한국의 8강 패퇴는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었다.
결국, 이 대회는 잘 준비한 이란이 A 매치 실적과 더불어 A 매치 대회였던 마지막 아시안 게임을 우승으로 장식했고 한국이 얻은 건 결국 2002년은 허정무 감독으로는 더 이상 무리라서 경질해야 한다는 판단의 단초 정도밖에 없었다.

7. 중국발 태국 쇼크


한국이 태국 쇼크를 겪은지 15년 만인 2013년 중국도 태국 쇼크를 겪었다.
2013년 6월 15일, 중국은 태국과의 친선경기에서 1:5 대패를 당했다. 비록 친선경기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겨지는 태국이었고 역대성적에서도 중국이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은 1진 주전급인데 반해 태국은 23세 이하 올림픽 대표급이었으며 경기 장소 또한 중국의 홈이었다. 이런 좋은 조건을 등에 업고도 큰 점수차로 참패했다.결국 경기가 끝나자마자 중국 축구 팬들은 크게 분노해 중국 선수들의 버스를 가로막고 물병을 내던지기도 하고 욕을 퍼부었다. 안 그래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지역예선 광탈로 입지가 불안하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은 이 패배를 계기로 계약기간을 1년 남기고 목이 달아나 버렸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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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독 - 허정무, 코치 - 정해성.[2]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출전해서 선제골 기록. 그것도 '''프리킥'''으로 넣었다. 그러나 골을 넣은 하석주3분 뒤...[3] 이 당시 네덜란드는 유로 2016 예선에서 탈락했던 현재 선수단보다 훨씬 무서웠었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파트릭 클라위베르트, 데니스 베르캄프, 야프 스탐,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시도로프, 프랑크 드보어, 로날드 드보어, 마크 오베르마스, 에드윈 반 데 사르 등이었고 이 선수들은 모두 최절정기의 실력을 갖춘 상황이어서 우리로써는 사실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참고로 이때 감독은 거스 히딩크였다.[4] 이때 대한축구협회는 네덜란드전 직후 차범근 감독을 중도 해임시켰고 남은 벨기에와의 3차전을 김평석 당시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하여 준비하게 했다.[5] 당시 축구는 세 팀이 한 조로 편성되어 대결하는 1라운드 제도와 1라운드에 통과된 팀들끼리 맞붙는 2라운드 제도로 운영되었다.'''(1라운드 - 2라운드 - 8강 - 4강 - 결승전 또는 3, 4위전)''' 이후 조별리그 방식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바뀌다가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6]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전남 드래곤즈, 안양 LG, 포항 스틸러스, 대전 시티즌을 거쳐 2008년 프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2010년에 청주 직지 FC란 아마추어 팀에 플레잉 코치로 나서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 중에 있다.[7] 그 이전에 이병근이 퇴장을 당했던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이 경기가 꼬인 거나 다름없었을 정도였으니...[8] 최근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9] 물론 해당 선수는 퇴장. 이로 인해 태국은 9명의 선수들이 뛰는 상황에 겪게 되었다.[10] '연장 전후반 30분 이내에 골이 터질 경우, 바로 승리로 간주하고 경기를 종료하게 만드는 골'로 선수들의 체력 소모를 줄이고 도박성이 짙게 깔려질 승부차기 대결로 결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리 잡은 규칙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나온 안정환의 골든 골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후 유로 2004를 끝으로 폐지되어 현재는 연장전에서 골을 넣어도 두차례의 연장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승부를 계속해서 이어간다.[11]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지도력에 말들이 많지만 90년대 당시 허정무 감독은 K리그에서도 지도력을 뽐낼 정도로 나름대로는 지도력을 보여줘서 국내 지도자들 중에서는 괜찮게 할 수 있는 감독으로 보여졌었고 '''이란 쇼크'''로 완전히 무너진 박종환 감독과 중도에 경질된 차범근 감독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어서 선임된 것으로 보고 있다.[12] 송재익 아나운서, 신문선 해설위원이 맡았었다.[13] 그 뒤 2008년 대표팀에 다시 돌아온 허정무 감독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본선 진출에 성공, 그리고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끌면서 그간 이어진 지도력 논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14] 참고로 1999 시즌 평균 관중 14,413명은 역대 최다 평균 관중이다. 즉, 2002년 이후의 K리그 붐조차도 이 시기에 못 미친다는 뜻.[15] 2차 조별리그에서 오만과 타지키스탄은 저들끼리는 3:3으로 비겼고, 중국에게는 3실점과 6실점 끝에 패배를 내줬다. 비록 오만이 이란을 한 번 잡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