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2]
,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사라예보 사건 발발 질후인 다음날, 회첸도르프는 제국의 내무부 장관인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에게 이것을 구실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1. 개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이다.
1차대전에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인물로 그의 군사적인 능력만큼은 독일 제국군의 육군참모총장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소련의 원수이자 이론가인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영국의 유명 군사 역사학자인 시릴 펄스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다만 후술할 이유로 평가는 극과 극이다.
2. 특징
비현실적이고 웅대한 계획을 가진 대전략의 귀재로 유명하였다. 그는 큰 전략적 그림을 그리는 데 재능이 뛰어났으며, 공격적이고 잘 훈련된 보병의 중요성과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공격을 강조했다. 그러나 큰 대국적 비전을 구현할 전술적, 구체적 계획에 수립에서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지형과 기후의 현실을 무시했으며, 기관총과 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기도 하였다.
3. 행적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정작 세르비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 패배했다. 결국 콘라트가 직접 개입하여 10만명을 투입한 대공세에서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의 반격으로 보름만에 세르비아 왕국은 자국의 수도 탈환에 성공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패주하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기세가 꺾였고, 세르비아 침공이 전쟁의 명분이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전투의 실패로 인해 동맹국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라트는 독일 제국의 군사적인 지원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콘라트는 러시아 제국에게도 반격하기 위해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지만, 1915년, 갈리치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0개 사단을 손실했으며,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콘라트는 독일 제국에 의해 동부전선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러시아 제국의 뻔히 보이는 위협을 무시하고, 콘라트는 1915년에 해낸 반격의 대성공으로 러시아 제국이 당분간은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 오판하고 있었다.
때문에 1915년에서 191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간 동안 수십여 겹의 철조망과 삼중사중으로 구축된 참호선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5년에 협상국으로 참전한 이탈리아 왕국에 맞서기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콘라트는 3월 이손초 전투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5번째 공세가 실패하자 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인도 서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계획중이었으므로 이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콘라트는 무리하게 발칸전선과 동부전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정예부대를 차출하였다. 그 병력의 공백은 강력한 방어선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공세 당시 기준으로 39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 약 50만여 명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오헝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5월 트렌티노 공세)를 위해 10개가 넘는 사단을 빼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간파했다. 1916년 6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전 동부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의 일제 포격이 개시되는 것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의 막이 올랐다. 러시아군은 꾸준한 항공정찰과 관측으로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호선의 중요 시설과 취약점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포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호선은 곳곳에서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예비 병력이 제대로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초기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4. 평가
이렇게 그가 육군 원수로 재임하는 동안, 대부분의 주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3]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연달은 패배로 궤멸되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근데 이러면서도 대국적인 전략을 짜는 능력 자체는 인정을 받았다.[4] 어쨌든 동시대 오헝제국군 주요 장성들 중 현대 총력전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뛰어나 끝까지 중임되었다. 웃기게도 실질적으로 대전기 내내 군사적 커리어는 아예 연합군이 심어놓은 트롤 수준으로 엉망이었던 양반이 오헝제국군이 마지막으로 취한 공세였고, 여기서 패전함으로 실질적으로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로 인한 멸망의 발단이 된 피아베 강 공세에서는 결과적으로 이 사람의 진격로가 옳았고, 야전 지휘관으론 오헝제국군 최고 아웃풋이었다 평가 받으며 발칸, 이탈리아 전선에서 회첸도르프가 싼 똥을 치우며 혁혁한 전공을 올린 스베토자르 보레비치가 선택한 길이 틀렸다는 게 입증되었다.
이런 면모 때문에 후대에는 이론상으로는 위대한 전략가였지만 실제 전장에선 완벽한 실패자였던 탁상위 명장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다.
5. 기타
콘라트는 군인 집안 출신으로 1910년에 남작(Freiherr) 작위를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수여받았으며 1918년에 카를 1세에게 백작(Graf)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설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아 이름에서 폰(von)이나 추(zu)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때부터 프란츠 콘라트회첸도르프(Franz Conrad-Hötzendorf)가 되었다. 사실상 콘라트의 성에 회첸도르프가 붙은 기간은 1년도 안된다.
브루실로프 공세의 지휘관이자 콘라트를 완벽하게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는 1살 차이인데, 둘다 향년 72세에 사망한 공통점이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회첸도르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다만 체코의 경우 처음에는 딱히 독립 여론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을 더 원했다.(물론 에드바르트 베네시처럼 분리독립을 원하는 측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차 대전에서 오헝 제국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고 제국이 패망하자 슬로바키아와 연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3]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국은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지고 만다.[4]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개입했던 주요 전선에서 큰 그림은 대충 회첸도르프의 구상안에 따라가긴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독일 제국군의 멱살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