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1. 소개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축구선수로, 현 몬테네그로의 티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았으며, 유럽의 왕에게 32년만에 빅 이어를 선사한 선수로 유명하다.
2. 클럽
2.1. 유고슬라비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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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88 시즌 부두치노스트 포드고리차에서 미드필더로 데뷔한 미야토비치는 ''' 31경기 '''를 뛰며 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89-90 시즌이 한창일 무렵, 하이두크 스플리트의 스포츠 디렉터 주리카 제르코비치가 사전에 50000마르크를 선지급 한 끝에 입단이 성사되나 싶었으나, FK 파르티잔의 회장 미르코 마르자노비치가 이 이적에 개입했고 베오그라드에서 직접 와서 그를 설득한 끝에 1989년 겨울 100만 마르크에 FK 파르티잔으로 이적한다. 후에 미야토비치는 인터뷰에서 크로아티아 클럽으로 가지 않은 이유가 유고슬라비아의 악화되는 정치상황과 안보때문이라고 밝혔다.
1989-90 하반기 FK 파르티잔으로 이적한 그는 데뷔전에서 자신의 친정팀 FK 포드고리차와의 데뷔전에서 득점을 거두어 좋은 시작을 알리나 싶었지만 이후 14경기동안 쭉 무득점(...)행진을 하면서 좀 안습하게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1992-93 시즌 까지 세 시즌동안 두자릿수 득점을 꾸준히 거두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1991-92 시즌에는 FA 컵을 우승하고 1992년 유고슬라비아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다. 이후 1992-93 시즌에는 17골을 득점해 커리어하이를 찍고 리그 우승을 거두는데 큰 기여를 함으로서 1993년 연속으로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고 자국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유벤투스 FC,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의 여러 유럽 유수의 클럽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딱히 제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 1993년 여름 발렌시아 CF로 이적한다.
2.2. 발렌시아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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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여름 이적한 미야토비치는 1993년 9월 5일 레알 오비에도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다. 이 후 그는 리그에서 35경기 16골, 경기당 0.5골 가까운 득점력으로 팀내 최다 득점자에 선정되는 등 이적하자마자 대활약을 한다. 이후 1994-95 시즌 29경기 12골로 다소 주춤했으나, 1995-96 시즌 ''' 40경기 28골 '''로 득점랭킹 ''' 2위 '''에 선정되고 팀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4점차로 아쉽게 준우승을 달성하지만, 라리가 올해의 선수상등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순간을 보낸다. 한편 1위는 CD 테네리페의 후안 안토니오 피찌로 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다.
박쥐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던 미야토비치는 이후 1995-96 시즌 5위로 떨어진 이후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리나 미야토비치가 인터뷰에서 `나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본인이 스스로 밝혔고, 발렌시아 CF과 레알 마드리드 CF의 사이를 고려해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팀에 잔류할거라고 생각했으나...
2.3. 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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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다음날 레알 마드리드는 미야토비치의 영입을 발표 '''했으며, 레알 마드리드에 가기 위해 본인이 ''' 이적료의 일부를 본인이 충당하면서까지 이적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 분노한 박쥐들은 미야토비치를 ''' 유다토비치 '''라고 부르며 그와 레알 마드리드를 원망했으며, 그의 이적으로 레알과 발렌시아의 사이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박쥐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레알로 이적한 그는 라울 곤살레스, 다보르 슈케르와 함께 공격진 트리오를 형성해 시즌 59골을 합작해 레알 마드리드 CF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하고 1997년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그 해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한다.
1997-98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수페르코파 에스파냐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캄 노우에서 열린 1차전에서 1-2로 패배하지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 라울의 멀티골, 미야토비치와 세도르프가 각각 1골씩 득점하면서 바르셀로나를 4-1로 묵사발을 내버리고 우승해 괜찮은 시작을 했으나, 라이벌이자 그 해 우승팀 바르셀로나와 리그에서 승점 11점차로 3위에 랭크되어 체면을 구겼다. 그래도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까지 8경기 동안 19득점을 하는 등 파죽지세로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준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2-0으로 꺾고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지네딘 지단, 에드가 다비즈,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안토니오 콘테 등 화려한 선수진을 보유한 유벤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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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챔피언스리그 내내 쭉 무득점이었으나, 이 경기에서 후반 21분 결승골을 기록하면서 미야토비치는 32년만에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빅 이어를 선사했다. 참고로 그 해 라이벌 팀은 어느 우크라이나 축구클럽의 22살 선수에게 안방에서 헤트트릭을 허용하는 등 홈, 원정에서 7-0이란 충격적인 스코어로 제대로 도륙당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후 98-99 시즌 미야토비치는 라울-모리엔테스 투톱에 밀려 서브로 기용되거나 윙어로 주로 활약했고, 99-00시즌을 앞두고 계약이 만료되면서 FC 바이에른 뮌헨, 아스톤 빌라 FC, ACF 피오렌티나 등지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결국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한다.
2.4. ACF 피오렌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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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렌티나로 이적한 미야토비치는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 아래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2000-01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를 우승했다. 이 후 1시즌을 더 활약하다 2002년 여름 세군다 리가의 레반테 UD로 이적한다.
2.5. 레반테 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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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레반테 UD로 이적한 그는 21경기 3골을 득점하면서 황혼기를 보냈고, 이 후 중동에서 오퍼가 들어왔으나 제안을 거절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3. 국가대표
3.1. 청소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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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쉽[2] 에 같은 팀 동료 브랑코 브르노비치와 함께 FK 포드고리차 소속으로 출전한 미야토비치는 모든 경기에 출전했고 토고를 상대로 2골, 브라질전 동점골로 총 3골을 득점해 유고슬라비아의 우승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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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우승 당시 스쿼드.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를 4강으로 이끌고 득점왕과 실버볼을 수상한 다보르 슈케르, 쾌걸 조로 즈보니미르 보반, 동유럽의 마술사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로베르트 야르니[3] ,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레전드이자 유고슬라비아의 슈퍼스타 블라디미르 유고비치,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 중 한 명인 시니샤 미하일로비치까지 매우 강력한 스쿼드를 보유했다.
3.2.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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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23일 핀란드를 상대로 국가대표에 데뷔한 미야토비치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UEFA 유로 1992 대회 예선에서 뛰었다. UEFA 유로 1992에서는 대회 진출을 확정하고 대회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하필이면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발발로 결국 출전이 무산되었다.[4] 이어서 1994년 미국 월드컵과 유로 1996도 출전금지를 당하면서 더욱더 안습하게 됐다...
3.3. 보스니아 내전 이 후
보스니아 내전 이 후 1994년 브라질, 아르헨티나 와의 친선경기와 1995년 그리스와의 경기에 출전한 미야토비치는 이후...
3.4. 1998 WC 예선,그리고 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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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미야토비치는 12경기 14골을 퍼붓는 ''' 충격적인 활약 ''' 을 보여주었다.
6월 2일 몰타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시작으로 파로 군도, 체코, 스페인, 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총 10경기 7골을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998 월드컵 헝가리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미야토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함으로서 ''' 원정 '''에서 ''' 7-1 '''이라는 미친 스코어를 만들어내며 말 그대로 헝가리를 문자 그대로 ''' 개박살 ''' 내버렸다.
홈에서는 무려 ''' 4골 '''을 넣으며 유고슬라비아는 2차전에서 5-0으로 완승을 거두며 ''' 총합 12-1 '''의 스코어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총합 ''' 12경기 14골 '''
이 때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냐면, 유고슬라비아 팬들은 '''"카나리아 군단에 호나우두가 있다면, 우리에겐 미야토비치가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월드컵 예선에서 미야토비치는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었다.
이란전에서는 득점은 없지만 풀타임 활약을 했으며, 독일을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페널티 라인 바깥에서 전반 13분경 골을 기록했는데, 이게 얼핏보면 데얀 스탄코비치가 넣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스탄코비치가 수비수를 마크하고 그 사이 쾨프케가 공을 놓치면서 득점으로 연결되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부상으로 조기교체 되었으며, 16강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동점골을 만드는 세트플레이에 파울을 얻어 나름 기여를 했다.
그러나 페널티 킥에서 재수없게 골대를 맞고 나왔고, 유고슬라비아는 에드가 다비즈의 버저비터골로 16강에서 탈락한다.
여담이지만 본인도 이 페널티 킥을 본인의 축구인생 최악의 pk라고 한다.
3.5. 유로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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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0 예선에서는 8경기 3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2000 직전에는 대한민국과 평가전을 치르기도 했다.
유로 2000 본선에서는 전 경기에 출장했으나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3.6. 유로 2000 이후
2002 월드컵 예선에 참가한 미야토비치는 감독 밀로반 마라냐와의 갈등으로 2001년 4월 25일 국가대표 출장을 거부했고, 그의 사임 이 후에 데얀 사비세비치 감독대행 체제에서 복귀하였다. 하지만 팀은 3위로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다.
UEFA 유로 2004 예선에서 3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이어갔으나 팀은 뜬금없이 약체 핀란드와 아제르바이잔에게 패배를 당했고[5] 미야토비치는 2003년 6월 11일 아제르바이잔과의 유로 예선 경기 직후 은퇴를 선언한다.
4. 플레이 스타일
교묘한 발재간, 빠른 발, 강력한 슛팅력 등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를 펼쳤다.
[1] 현 포드고리차[2] 現 FIFA U-20 월드컵의 전신[3]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결과는 3-0으로 크로아티아의 완승.[4] 그리고 대신 참여한 덴마크는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1991년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유러피언 컵 우승과 위에서 언급된 1987 FIFA 유스 챔피언쉽에서의 멤버를 볼 때 정말로 아쉬운 편.[5] 후에 웨일스와 이탈리아를 상대로 2승 1무를 거두지만 이 두 경기에서의 패배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UEFA 유로 2004 진출에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