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터 존의 전설

 

1. 개요
2. 소개
3. 진위 여부
4.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 대한 중세의 전설. 한국말로 고쳐쓰자면 '사제왕 요한의 전설'

2. 소개


이 전설이 언급된 시기는 십자군 전쟁이슬람교 세력의 반격으로 기독교 성지가 위험에 처하던 1145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이 새로운 십자군을 알리는 칙서를 발표할 때, 바이에른의 역사가 오토(Otto von Freising)가 <두 도시의 역사> 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최초로 사제왕 요한의 기록을 서양인이 기술[1]한 것이다.
이전에 인도기독교도가 있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위의 기록을 통해 위그 주교가 전해준 것은 상상을 초월 -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인근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소문 - 하였기에 서양인들에게 큰 흥분과 환상을 불어넣었다.
소문이 계속 돌아서 요한의 군대가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왔다가 회군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는 무슬림의 압박을 받던 십자군에게 아쉬운 소식이었고 서구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아 교황 중심의 유럽 단합을 촉구하게 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제2차 십자군을 소집하나 실패. 이런 상황에서 사제왕 요한이 동로마 제국황제마누일 1세 콤니노스에게 보냈다고 하는 편지가 유포된다. - 연도불명(황제 재위기인 1143~1180년으로 추정)
하지만 그 내용은 상대를 폄하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외교 격식이 없고 서구에서 유행하던 관념이 그대로 반영[2]된 것으로서 동방의 군주가 아닌 유럽인의 작품이 분명했으며, 동로마에 적개심을 가진 서구인이 썼다고 여겨진다. 작자는 요한의 이름을 빌려서 유럽의 상황을 질타, 화해와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흔히 말하는 정치적 풍자라고 할 수 있다.
1215년 제5차 십자군이 결성, 전쟁 중이던 1221년에 프랑스 출신의 사제 자크(Jacques de Vitry)의 <인도의 왕 다윗의 행적>을 통해 경교를 믿는 인도의 왕 다윗이 이슬람 세력을 공격, 바그다드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1222년부터 유럽은 몽골의 침입에 경악, 서구인이 가진 사제왕 요한에 대한 희망은 무너지고 말았다. 1243년 교황의 친서를 가진 수도자들이 몽골 세력을 방문(볼가 강가에서 바투와 접견)한 후,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이는 '대인도의 기독교도들이 타타르를 막아냈다'는 '''사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칭기스 칸은 사제왕 요한이 아닌, 그와 결전을 치르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한편 중동으로 파견된 수도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수도자를 통하여 1202년경 칭기스 칸이 요한(또는 다윗)왕을 죽이고 그 딸과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1248년에 페르시아에 주둔한 몽골인 장군 엘지기데이가 보낸 네스토리우스파 사신들이 키프로스에서 프랑스 루이 9세를 접견했다. 그들은 루이 9세에게 요한 왕의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몽골이 기독교도들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편지를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유포한 데에는 몽골인들이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제왕 요한을 누른 것이 자신들이라고 강조하여 서구의 자발적 복속을 유도하려는 의도와 동시에, 이슬람을 상대하기 위해 서구의 연대가 필요한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즉, 사제왕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은 몽골이 세계정복 과정에 서구를 대상으로 만들어낸 교묘한 정치적 선전이었고, 이를 위하여 종교적 관용을 표방하며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3]
이후 수도자 뤼브룩의 기욤(Guillaume de Rubrouck)이 요한 왕의 진실을 밝히려는 여행을 떠났는데, 마르코 폴로의 기행문에도 언급되었다.
하여간 동방에 파견한 수도자들을 통해서 교황청은 동방의 기독교 군주 요한 왕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그런데 1324년에 요르다누스 카탈라누스(Jordanus Catalanus)가 요한은 에티오피아에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견해는 많은 유럽인에게 받아들여졌다.[4] 그러나 에티오피아로 가는 육로는 무슬림 국가에 가로막혀 있어서 해로를 찾아야 했다. 해로 탐색은 희망봉 개척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는 출항 당시 요한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휴대할 정도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침내 요한의 왕국을 발견하나, 현실은 '토착민' 가운데 하나... 이로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사라지고, 13세기 사제왕 요한을 찾으려는 서구인의 노력은 300년만에 에티오피아에서 끝을 맺는다.
서구인들이 이렇게 전설에 열광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몇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되며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무너질 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뒷편에 이슬람보다 강한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헛소문'''은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당시 서구인들에게 큰 위안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3. 진위 여부


그리고 위에 나온 중세인들의 전설의 진위를 밝히자면...
첫 이야기의 유래는 1141년 셀주크 제국서요의 황제 야율대석간에 중앙 아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카트완 전투로 추정된다. 당시까지 중앙 아시아 및 중동의 패권을 움켜쥐고 있던 셀주크인이 참패한 이 사건은 서양에 큰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실제로 야율대석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이슬람을 적대한 것을 넘어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군주로 여겨졌고, 야율대석의 명칭 '구르 칸'이 일부에게는 중국의 칭호와 합쳐져 '왕칸'으로 불리면서 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요한'으로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전해지고 있다.[5]
1221년 다윗 왕 이야기의 유래는 몽골 초원 서부 나이만족의 족장 쿠츨루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칭기스 칸과 맞서다가 중앙아시아로 도주, 카라키타이(서요)의 군주 '구르 칸' 야율직로고의 신임을 얻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1211년 쿠데타로 황위를 찬탈하고 부인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도로 개종하는 동시에 이슬람을 박해했다. 나이만 족은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를 신봉해왔고, 쿠츨루크 본인도 후에 불교로 개종했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행적을 혼동한 소문과 달리 그는 서쪽을 공격한 적은 없다.[6]
이런 들쑥날쑥한 소문들이 발생한 원인은 1210년에서 1220년까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사건들이 주체의 구분 없이 십자군 측에 전달된 데 있다. 쿠츨루크와 칭기스 칸의 이야기가 뒤섞였거나,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선전용 낭설인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인들이 퍼트린 요한 왕의 죽음에 관한 소문은 칭기스 칸케레이트 부족의 옹 칸(토그릴 칸)의 사건이 와전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몽골 고원의 부족인 케레이트의 옹 칸은 경교도인 유목 군주로서 손녀를 안 주다가 칭기스 칸에게 말 그대로 박살났다.

4.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몇몇 작품 스토리 초반에서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찾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 시리즈에서는 스토리상 떡밥에 불과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중앙아시아보다는 짐바브웨설을 차용한듯. 뜬금없이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트레저 헌트의 테마로 '프레스터 조안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선 케레이트 옹칸 설로 나온다.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바우돌리노에도 나온다. 사제 요한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럽에 존재했던 수많은 떡밥과 소문들을 같이 볼 수 있다.
  • 슈타인호프의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 주인공이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내용이나 주기도문 등을 흘려서[7] 세스페데스는 주인공이 프레스터 존일거라 추측하고 있다. 물론 보고서를 받은 교황청도 믿지 않았고 교황청 특사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님으로 확인되어 세스페데스는 사실상 좌천당한다.(...)
  • 리첼렌의 대체역사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통한 오역의 상승작용으로 인하여 이하응이 사실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이 전설이 여기에 뒤섞여서 미국이 한바탕 뒤집어지게 된다.
  • 국산 모바일게임 라스트 오리진에서 B등급 바이오로이드 프레스터 요안나가 이 전설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과학이 매우 발달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무장은 십자군 특유의 사슬갑옷과 중세식 장검 그리고 방패를 사용하며 말투도 사극체에 2스킬의 대사는 아예 찬송가 한구절을 인용하기도한다. 물론 진짜는 아니고 배경 설정상 중세 십자군전쟁을 소재로한 사극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기위해 프레스터 존이라는 허구의 존재의 기억과 인격을 설정하여 만든 연극용 바이오로이드다
[1] 시리아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장기 왕조에 점령당한 소식을 위그 주교가 교황에 보고하며 오토에게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이야기했다[2] 세 인도, 복류설, 유대의 10부족 등[3] 사실, 당시 중동을 휩쓸고 있던 훌라구는 자기에게 별 쓸모 없는 땅인 성지 예루살렘 일대를 기독교 측에 그냥 넘겨주려는 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그래서 교황도 한동안 매우 설렜으나, 훌라구가 후계자 문제로 인해 돌아가고, 남아 있던 부대가 맘루크들에 의해 관광당하면서 상황은 종료된다.[4] 에티오피아가 기독교 국가란 소문은 이미 유럽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기 때문에 신박한 주장은 아니었다. 1306년에는 무려 에티오피아의 웨뎀 아라드 황제가 직접 보낸 사절단이 서유럽을 방문하기도 했고.[5] 그런데 거란의 야율대석이 아니라 케레이트옹 칸이야말로 금나라로부터 정식으로 받은 왕칸(王汗)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던 인물이다. 옹 칸이라는 이름도 王汗을 몽골어로 읽은 것.[6] 당시 서쪽을 공략하기는 커녕 계속해서 칭기스 칸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럴 새도 없었던 것이 맞다. 결국 이러한 압박 속에 서요 백성들이 주로 믿던 이슬람 핍박까지 가세하여 서요 민심은 쿠츨루크를 원망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끝내 칭기스 칸의 침공을 허용하며 멸망하고 본인 역시 목숨을 잃고 말았다.[7] 선교사가 아시아의 왕이 유럽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 기만하려는 행위를 차단할 목적이었다.

  • 구오의 대체역사소설 조선의 재벌이 되기로 했다에서 주인공이 조선의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프레스터 존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