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근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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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arde Impériale
Imperial Guard of French Empire
1. 개요
2. 역사
3. 편성
3.1. 보병
3.1.1.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
3.1.2. 중견 근위대(Moyenne Garde)
3.1.3. 청년 근위대(Jeune Garde)
3.2. 기병
3.2.1. 중기병
3.2.2. 경기병
4. 포병
5. 해병
6. 참고


1. 개요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행진곡. La Victoire est à Nous(이제 곧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프랑스 제1제국황제 나폴레옹 1세근위대이자 당대 프랑스 육군의 최정예부대, 그리고 '''프랑스 제국의 인간흉기 집단.'''[1] 나폴레옹의 전략 예비대&비장의 카드였다. 이들의 행진곡이 들리면 어지간한 독일 지역 소국 군대들은 모랄빵이 나고 혼비백산해서 당나라 군대로 전락해 달아났을 정도.
군주의 자리에 등극한 나폴레옹이 본인과 기타 프랑스 제국 수뇌진의 신변을 보호하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육군 장병들을 차출해 구성한 정예부대였다.
문자 그대로 소수(보병 5개, 기병 2개 연대)였던 영국군 근위대와 달리, 제국 근위대는 단순한 육군 내 정예부대가 아니라 자체적인 포병까지 갖추어 거의 독자적인 군대 수준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숫자 자체도 나폴레옹 전쟁 중후반기에 가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거의 70개에 달하는 연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늘어난 부대는 대부분이 징집병으로 구성된 청년 근위대였고 나폴레옹 전쟁 초~중반기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한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는 그 수가 매우 적다.[2]
나폴레옹은 이들을 보수나 보급과 같은 부분에서 특별히 대우했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아꼈다. 문제는 이들을 너무 아껴서 항상 예비대로 빼두고, 어지간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투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쉽게 이길 싸움을 어렵게 이긴다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위대가 한번 투입되기만 하면 결과는 확실했다. 가령 아일라우 전투의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괴멸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기마척탄병부대의 돌격과 그에 이은 척탄근위대의 적절한 투입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반면 워털루 전투에서는 미셸 네가 기병의 우발적인 돌격으로 영국 육군 포병대를 잠시 무력화시킨 틈을 타 보병지원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근위대 보병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박만 주고 보내지 않아 결국 포대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 포대를 내주지 않았다면 전투의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3]
말하자면 수는 적지만 제값은 확실히 하는 장병들이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프랑스 근위대의 규모는 타국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원래 지상군 규모가 대놓고 소수정예를 표방하는 영국은 물론이요, 프랑스 대육군이 국민군의 속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정예부대인 근위대를 나폴레옹의 프랑스처럼 다양하고, 거대하게 유지한 경우는 유례가 없었다.

2. 역사


혁명 직후 프랑스 총재정부 휘하에도 근위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통령정부가 들어선 이후 통령 근위대로 재편되었다. 적은 수로 인해 대규모 전투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으나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을 보호하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부대다. 후에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제국을 선포하면서 대규모 증편이 실시되고 고참, 중견, 청년 3개 등급으로 정리된다.
규모만 해도 전성기 때는 10만에 육박했고, 보병대전열보병, 경보병, 척탄병기병대경기병, 중기병, 창기병 등을 갖췄다. 심지어 포병대까지 있어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최정예 전략 예비 부대였다.
1814년 나폴레옹 퇴위 때 해산했다가 백일천하 때 재집결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로 다시 해산한다. 근위대원들은 복고 부르봉 왕가에서 계속 복무하거나, 전역하거나, 미국 이민을 떠났다.
1840년 12월, 나폴레옹의 관이 프랑스로 돌아오자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은 옛 군복을 꺼내 입고 그를 맞았다.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으며, 이장식이 끝나자 "이제, 집에 가서 죽자."고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는 1852년 제2제정을 연 뒤, 1제정을 모방해 1853년 제국 근위대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들 역시 제국의 최정예였지만 1870년 보불전쟁 패배와 제2제정의 몰락 후 공화정에서 폐지된다.
현대에는 프랑스 국가 헌병대의 예하 부대인 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명맥을 잇고 있다.

3. 편성


제국 근위대는 시기에 따라 숫자가 많이 달라졌다. 시작시엔 8천 명이었던 것이 1812년 이후에는 근위대원의 수만 거의 10만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으나, 대다수가 비교적 신참병들로 구성된 청년 근위대였다. 러시아 원정 이후는 물론 심지어 백일천하 도중에 새로 편성된 부대(제4척탄보병연대, 제3/4샤쇠르보병연대 등)도 있어서 일일히 나열하기는 어려우므로, 비교적 전통 있는 부대들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3.1. 보병



3.1.1.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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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의 얼굴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자들은 이마를 찡그린 채 시야를 가리려고 곰가죽 모자를 눈 위로 덮어썼고, 또 어떤 녀석들은 경멸과 분노에 차 입을 삐죽거렸다. 호랑이처럼 코밑 수염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내밀었을 때, 그것은 공포의 순간이었으며 무기의 시끄러운 소리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

''' "한때 유럽의 정복자인 이 척탄병들은 얼굴이 흉터에 뒤덮였고, 뚱뚱하고 늙고 병든 무능한 왕에게 경례를 하도록 강요받자 이들은 어이가 없다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오히려 경례를 대신하여 이 늙은 왕이 보는 눈 앞에서 걸쭉한 가래침을 바닥에 힘차게 뱉고 이 늙은 왕을 위로 올려다 보면서 낄낄 거려댔다." '''

문자 그대로 당대 프랑스 육군의 최정예 중의 최정예이며 최강의 장병들을 모아놓은 부대. 다수가 과거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기 전, 집정근위대 시절부터 복무한 베테랑 병사들이다. 고참 근위대에 들어가려면 사병들도 나이 35세 미만, 복무기한 최소 10년 이상에 3개 이상의 전역 참가[4], 읽고 쓸 줄 알아야 했으며 키 제한도 있어 샤쇠르의 경우 172cm, 척탄병의 경우 178cm 이상이어야 했다.[5] 용감하다는 평가가 붙으면 가산점.
결국 전투 경험, 복무 성적, 지적 능력[6], 우월한 체격 조건까지 모두 들어맞아야만 근위대원이 될 수 있는 셈이었다.
당대 프랑스군의 '크림 중의 크림'(Crème de la crème, 최고 중의 최고.)이라고 불리던 제국근위대 중 최강부대. 정예부대인 만큼 이것저것 불평불만이 많고 그것을 나폴레옹에게 숨김없이 말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Les Grognard(불평쟁이)"라는 애증 섞인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워털루 전투에서 고참 근위대가 영국 전열보병의 일제사격에 격파되었으나, 그것은 사실 이 1연대가 아닌 2연대와 3연대였다. 1연대의 경우 나폴레옹이 전장을 무사히 탈출할 때까지 후위를 엄호하다 최후를 맞았다. 당시 지휘관이던 피에르 캉브론이 항복을 거부하고 남긴 마지막 말이 이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7]
제복은 독수리 플레이트와 매듭으로 장식된 곰가죽, 역시 화려한 튜닉과 바지. 물론 실전에 들어가면 그런 거 없고 그냥 파랑 그레이트 코트다. 상징색은 빨강.
위의 척탄병과 제복은 동일하지만 샤코에 독수리 플레이트가 안 붙어있다. 같은 1연대인데도 척탄병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역시 훌륭한 부대이다. 스커미시에 투입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잦았다. 상징색은 초록.
고참 근위대는 나폴레옹의 아끼고 아꼈던 정예부대였고, 또 그들도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1814년 나폴레옹이 하야하면서 한 고별 연설식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으며 많은 이들이 전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가는 길에 마주치는 왕당파들을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8]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복귀하였다.
그들은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부르봉 왕가에게 충성을 바치며 얌전히 살기보다는 기회가 허락된 새로운 세계, 즉 미국루이지애나로 단체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9]

3.1.2. 중견 근위대(Moyenne Garde)


  • 제2 척탄병연대[10]
베어스킨 사용. 상징색은 빨강
  • 제2 샤쇠르연대[11]
곰가죽을 사용하지만 독수리 플레이트는 부착되어있지 않았다. 상징색은 초록
  • Fusiliers-Grenadiers
직역하면 전열보병-척탄병연대. 조금 다듬어서 번역하면 전열 척탄병연대쯤 된다. 매끄럽게 번역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첫번째 하야 때 해체되어 1815년 전역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곰가죽은 쓰지 않았지만 대신 독수리 플레이트, 각종 끈과 매듭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샤코에 기다란 폼폼을 달았는데, 상징색이 빨강인지라 이게 굉장한 멋을 자랑한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후퇴할 때 러시아군 야영지를 밤중에 기습하여 야영지에 있던 러시아군을 작살냈지만, 그 과정에서 1대대의 반이 날아가버렸다.
  • Fusiliers-Chasseurs
직역하면 소총엽병연대. 위의 퓨질리어-그레네디어 연대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샤코를 쓰는데 전투복은 마찬가지로 칙칙한 그레이트 코트다. 역시 첫번째 하야 때 해체되었다. 상징색은 초록
  • Turin Velites
황제의 여동생의 경호부대. 문제는 이들을 끌어다 근위대로 실전에 투입했다는 것.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다.

3.1.3. 청년 근위대(Jeune Garde)


처음엔 각각 4개 연대뿐이던 것이 각각 12개로 늘었다가, 결국엔 13개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급조된 땜빵용 부대들이다. 하지만 근위대는 역시 근위대이고, 신병들중 가장 우수한자들만 뽑아다 만들었기에 자체 전투력은 상당하다. 라이프치히에서 엘스터강의 퇴로를 뚫은 것도 이들이다.[12]
뤼첸 전투에서는 카야 마을을 강습, 점령한 프로이센 근위 경보병대대를 몰아내고 마을을 탈환한 이야기가 에 실려있다. 블뤼허에게 다이렉트로 명령을 받은 프로이센 근위 경보병들이 카야 마을에 총검돌격을 가해 프랑스군의 탄막을 뚫고 처절한 근접전끝에 마을을 점령했고, 청년근위대가 다시 반격하여 마을을 탈환 해버렸다.[13]
  • 1~13 저격병연대 (Tiralleures)
라이프치히에서 모르티에 사단에 대다수가 편성되었다.
견장은 술이 달린 정예병용 견장이지만 숏소드를 패용하지 않고 있기에 스트랩은 1개뿐이다. 상징색은 빨강.
  • 1~13 전위병연대 (Voltigeurs)
복장은 상술한 티라예르와 같다. 상징색은 초록.

3.2. 기병


'''고참 근위대는 볼드체로 표시'''

3.2.1. 중기병


  • 기마척탄병연대(Regiment de Grenadiers-à-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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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근위대의 기병연대 중 가장 오래된 부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창설된 기병부대를 모체로 한다.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활약이다. 아일라우에서 기마척탄병연대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군 전열로 돌격했으나 이내 수적으로 많은 적군에게 포위당하고 항복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지휘관인 루이 레픽 대령은 거부하고 바로 돌격을 감행하여 적 포위망을 깨뜨리고 동료 기병부대와 아군 진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아일라우 전투에서 기마척탄병연대를 묘사한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드타유의 작품으로, 당시 레픽 대령은 기병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개를 들라, 제군! 저건 총알이지 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 정예헌병대(Gendarmerie d'Élite)
  • '황후의 용기병연대(Regiment de Dragons de l’Impera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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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근위대가 아니라 일반 드라군연대였다가 1805년 독일 전역에서 괄목할 만한 전공을 세운 후, 1806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근위기병대로 승격되었다. 정식 명칭은 단순히 근위용기병연대지만, 부대의 후원자가 바로 황후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였던지라 "황후의 용기병대"로 더 유명하다. 복제상의 특징은 표범 무늬가 들어간 투구.
나폴레옹은 이들에게 정예병의 상징인 흑마를 태우려고 했지만, 검은 말은 흉갑기병대나 척탄기병대 것이라며 반대한 모르티에 때문에 무산되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그녀가 죽고 나서도 부대원들은 그녀를 존경했던 듯 그 이후에도 이 기병대의 대원들은 매해 조제핀의 기일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3.2.2. 경기병


  • 근위 기마샤쇠르연대(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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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척탄병과 마찬가지로, 기원이 제정 이전의 통령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기병대. 수렵기병, 엽(獵)기병, 추격기병 등으로 번역된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에서, 혹시 나폴레옹 주변에 삐뚜름한 돌만(dolman) 재킷을 걸치고 콧수염을 기른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칼을 빼들고 호위중이라면 그들이 바로 이 근위 샤쇠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도 나폴레옹의 경호 임무를 자주 수행했다. 이들이 전장에 나서면 적의 기병과 충돌하기 직전에 상대의 면상에 권총부터 갈기고 붙었는데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 기병대와 교전시 두려웠던 것이 면상에 권총을 맞을까봐 그랬다고.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은 이 기마샤쇠르연대의 녹색 군복을 가장 좋아해서 그들의 제복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나 워털루같은 영화를 보면 녹색 제복에 훈장을 달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 기마샤쇠르연대의 군복. 그중에서 대령제복. 프랑스군 제일의 용사이자 제일의 멋쟁이였던 조아킴 뮈라가 이를 두고 나폴레옹의 패션 센스가 촌스럽다고 뒷담화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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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창설된 기병대. 프랑스인이 아니라 폴란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었다. 1809년에 고참 근위대로 승격되어 서열로 근위 기마샤쇠르연대 다음인 세 번째가 되었다.[14] 기병은 근접전 병과라는 특성상 개개인의 무예가 중요시됐는데 이들은 프랑스군의 기병대 중에서도 특히나 뛰어났다. 나폴레옹의 참관 아래 고참근위대의 용기병들과 대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폴란드 기병 한 명이 창 한 자루 만으로 프랑스 용기병 2명을 관광 태웠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그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으나 반도 전쟁 소모시에라 협곡 전투[15]를 보고선 '프랑스군의 모든 기병을 통틀어 가장 용감한 기병대'라고 치하했고 이 전적으로 고참 근위대로 승격하였다.[16] 러시아의 전투종족 카자크 기병들도 얘네를 보면 후퇴하기 바빴다. 이후 나폴레옹이 하야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갈 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기병을 120명만 데려갈 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프랑스 기병들은 다 제쳐두고 120명 전원을 폴란드 창기병연대로 구성했다. 폴란드인들 역시 자신들 나라로 돌아가도 무방했으나 단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이들은 워털루 전투까지 줄곧 나폴레옹을 수행하였다.[17]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뒤, 살아남은 폴란드 창기병들 역시 몇 개월 후 전부 프랑스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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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원정 때 맘루크들의 용맹에 주목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프랑스까지 그를 따라온 맘루크들을 근위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따라온 맘루크 기병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 보니 실제로는 원조 맘루크보다 프랑스인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18] 저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다른 근위대 기병들과 함께 돌격해 그 명성을 널리 알렸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시미터의 흔적은 아직도 미군이나 영국군의 제식용 예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스페인있을 때에는, 그들의 복장이 스페인인들에게 무어인 정복자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폭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1815년까지 존속했는데 훗날 부르봉 왕가가 복고된 뒤, 이들에게 아랍인이 있는지 물었으나 전부 프랑스인이라는 대답만 들려왔다고 한다.

4. 포병



5. 해병



6. 참고


영국군 근위대[19]
덴마크군 근위대[20]

[1] 당시 이들의 위상을 현재에 대입하면, '''그린베레''' 이 한 마디로 설명 가능하다.[2] 이 영향으로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는 프랑스 제국이 가장 많고, 가장 강력한 엘리트 유닛을 보유한 팩션으로 군림한다. 다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스펙 또한 압도적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1개 풀스텍 근위군단, 그것도 선임&청년근위대 총 12부대+기마척탄병연대 4부대, 아틸리에 아 슈발 2부대+콘벤시옹 포병대의 조합으로 된 부대는 어지간한 타 팩션 군단 2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먹을 정도의 괴력을 자랑한다.[3] 다만 나폴레옹이 단순히 근위대를 아꼈다기 보단 네 원수가 저지른 패착이 워낙 심해서(전부 그의 잘못인 것은 아니지만)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의 효과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이 더 큰 요인일 것이다.[4] 2번 이상의 원정 참가라는 얘기도 있다.[5] 당시 유럽 남성 평균 신장이 162cm 정도였다.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거의 군사경찰대, 의장대 수준은 되어야 된다는 소리.[6] 읽고 쓰는 게 뭐 대단하냐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시만 해도 문해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거기다 현재보다 평균적으로 문장을 이루는 단어의 수가 훨씬 많고 여러운 표현들도 남발되었던 시대다.[7] MERDE. 아르덴 대공세 당시의 NUTS와 비슷한 뉘앙스로, 한국어로 해석하면 대략 '''"좆까"''' 정도로 볼 수 있다.[8] 대불 동맹군은 나폴레옹에게 단 5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 100명의 포병만을 허용했는데 당연히 지원자가 쇄도했다. 심지어 장교들조차 백의종군하여 사병으로 들어가겠다고 지원했다.[9] 나폴레옹 역시 끝까지 그들을 잊지 않았는데, 세인트헬레나에서 임종 직전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 20만 프랑을 워털루 전투에서 팔다리를 잃은 근위대원들의 연금으로 보냈다.[10] 1813년 전역 당시 올드가드로 승격되었다.[11] 1813년 전역 당시 올드가드로 승격되었다.[12] 그런데 엘스터강의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바람에 이들이 뚫어놓은 퇴로도 무용지물이 되었다.[13] 오스프리사의 책 'Armies of NAPOLEONIC WARS', pg292. 평범해 보이지만, 청년근위대에 대한 원문의 서술이 가관이다. 프로이센군이 마을을 점령하는 과정을 여러 문장에 걸쳐 서술해놓고는, 마지막 문장으로 찬물을 끼얹음으로써, 프로이센군의 활약이 수포로 들어가고 이들 근위대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간단명료하게 부각시킨 서술이 되는 것이다. [14] 주무장은 창이지만 전부 창을 든 건 아니고 적과 부딪히는 제일 앞의 1열만 창을 지급받았다. 이유는 뒤에서 창을 들고 돌격하다 앞의 동료를 팀킬할까봐.[15] 125명의 폴란드 기병들이 우주방어를 펼치고 있던 스페인군 포대 4곳을 돌파했다. 폴란드 기병들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이란 걸 알았지만 뭐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이때 지휘관이 '''"개새끼들아, 돌격해라! 황제가 보고 있다!"'''라고 폴란드어로 외치며 돌격했는데 나중에 나폴레옹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16] 이게 좀 흠좀무한 것이, 원래 고참 근위대가 되려면 청년 근위대와 중견 근위대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그걸 한 번에 뛰어넘고 2계급 특진을 시켜준 것.[17] 흔히 워털루 전투에서 닥돌해오는 영국군 스코츠 그레이스 기병연대를 역닥돌로 개발살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일반 경창기병들의 공적이 영화 워털루로 인해 와전된 케이스다.[18] 지휘관급은 맘루크였으나 사병들은 그리스인, 조지아인, 튀르크인, 프랑스인들이 섞여 있었다.[19] 특유의 모자(Bearskin)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척탄병 근위대를 격파한 상징으로서 척탄병 모자를 채용한 것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군 제1 근위보병연대가 척탄병 근위대의 타이틀을 사용한다. [20] 이 쪽은 모자는 물론이고 군도까지도 따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