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에케하르트 봅
'''한스-에케하르트 보프(Hans-Ekkehard Bob : 1917년 1월 24일~2013년 8월 12일)'''
1936년에 제3전투비행학교의 생도(Fahnenjunker) 자격으로 루프트바페에 입대한 한스-에케하르트 보프는 1937년 6월 1일에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1938년에 견습 생도로 비스바덴(Wiesbaden)에 주둔하고 있던 제133전투비행단(Jagdfliegergruppe 133)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나치 독일이 허울좋은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주데텐란트를 할양받아 점령했을 때 구식 복엽 전투기인 아라도 Ar 68에 탑승해 출격했다. 햇병아리 생도였던 그에게는 전투기 소탕 임무가 아니라 수송기나 폭격기 편대 상공을 날면서 호위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의 루프트바페는 전력 배치 연구와 군사 보안을 위해 일부러 전투기와 폭격기 부대 명칭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가 첫 자대로 배치받은 JG 133이나 곧 옮겨간 혼성부대인 제334전투항공단(JG 334)도 그 일환이었다. 가브링엔(Gablingen)으로 전속을 오면서 그는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최신예 전투기 Bf 109가 맡겨졌다.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에 한스 소위는 새롭게 구성된 제21전투항공단 제3비행중대(3./JG 21)으로 전근되었고, 1940년 6월 6일에 이 부대는 훗날 "녹색 심장(Grünherz)"이라 불리며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 중에서 전과 2위라는 기록을 달성하게 되는 제54전투항공단(JG 54) 제9비행중대(9./JG54)로 개칭되었다.
슈밤 리더(4기 편대장)이 된 보프 소위가 처음으로 격추 경험을 하게 된 전역은 이어진 프랑스 침공 기간으로, 1940년 5월 10일에 벨기에의 통게렌(Tongeren) 상공에서 구식 복엽 전투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가 그 제물이었다.
독일 기준이 아니라 영국 기준으로 한스-에케하르트를 에이스로 만들어준 적기는 6월 26일에 로테르담 서쪽 60 km 상공에서 발견한 브리스톨 블레니엄 폭격기였다. 그가 다섯 번째 격추로 주장하는 그 폭격기는 그 날 작전에 나간 영국 편대에서 잃은 유일한 블레니엄이었던 제110스쿼드론의 R3776호기일 가능성이 높다. 밥에게 피격된 그 기체는 곧바로 불시착을 시도했지만 지면에 충돌하여 폭발해버렸고, 타고 있던 3명의 승무원 - 시릴 레이(Cyril Ray) 일병과 제럴드 P. 게인스포드(Gerald Patterson Gainsford) 상사, 케네스 쿠퍼(Kenneth Cooper) 상사 - 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같은 해 8월에 중위로 승진한 한스-에케하르트는 10월 10일에는 제7비행중대(7./JG 54)를 이끄는 비행중대장(Staffelkapitän)으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제9중대장(9./JG 54)으로 보직을 옮기게 된다.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 동안 9./JG 54는 도버 해협을 오가는 선박을 공격하는 전투폭격기(Jagdbomber) 부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프 소위 또한 적기와 싸울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소규모 편대로 해협을 초계비행하는 영국 공군기와 간헐적인 교전이 벌어졌고, 11월까지 보프 중위의 격추 기록은 19대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듬해인 1941년 5월 7일에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보프 중위의 목에 기사철십자 훈장을 걸어주었다. 5월 21일에는 연습기인 뷔커 Bü 131을 기량 유지 핑계로 몰고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쉘부르 해안에 불시착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치열했던 배틀 오브 브리튼 이후에 휴식을 취하던 보프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연이어 발칸 반도 전투에 참가했고, 중대장은 이 전역에서 20번째와 21번째 전공을 기록했다.
JG 54는 신형 기종인 Bf 109F를 수령하고 러시아 침공 준비를 위해 프러시아 지방의 비행장으로 이동 했다. 1941년 6월 23일, 바르바로사 작전 이틀째에 한스-에케하르트 중위는 쌍발 폭격기 투폴레프 SB-2를 격추시키면서 러시아 영공에서 첫 전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격추의 기쁨도 잠시, 그가 탄 Bf 109F-2는 다른 적기로부터 역습을 받아 최전선의 적진에 동체 착륙해야만 했다. 전쟁 포로가 될 운명에 처한 보프 중위였지만, 민가를 피해다니며 꼬박 이틀을 걸어서 원대에 복귀했다.
7월 13일부터 10월 30일까지 보프 중위는 3번이나 더 피격되어 적진에 불시착했지만 세 번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적 후방에서 추락하면 생환하기가 몹시 어려웠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고생을 겪으면서도 사지가 멀쩡했던 보프 중위는 1942년 9월 23일에 50대째 적기를 격추시키면서 연말에는 대위로 진급까지 하게 된다. 이때부터 후방으로 돌려진 그는 전투기 총감(General der Jagdflieger) 아돌프 갈란트가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26전투항공단(JG 26)으로 가서 예하 비행단 중 하나를 맡으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그와 JG 54 제 III 비행단(III./ JG54)의 동부전선에서의 활동은 1943년 2월부로 끝났다.
그러나 곧 이 명령은 철회되어 III./JG 54는 그륀헤르츠로부터 분리되어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제1전투항공단(JG 1)과 함께 북부 독일의 영공을 지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1943년 4월 17일에 Bf 109G-6에 올라 탄 보프 대위는 브레멘 근교에서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 보잉 B-17 편대를 덮쳐 57대째의 전공을 세웠다.
무리에서 뒤처진 4발 폭격기를 쫓아 홀로 날고 있던 한스-에케하르트 보프 대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고 B-17의 꼬리날개로 돌진했다. 그가 탄 메서슈밋 전투기의 프로펠러는 1,400마력으로 돌면서 폭격기의 듀랄루민 외피와 뼈대를 갈갈이 찢어버렸다. 그 충격으로 엔진이 떨어져나가면서 비행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대위는 비상 탈출했지만, 적기 또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억세게 운수 좋은 사나이 한스-에케하르트 대위는 무모하고 저돌적인 충돌 공격을 걸면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낙하산으로 착지했는데, 이번에는 적진이 아니라 독일 땅이었다.
8월 1일, 한스-에케하르트에게는 소령 계급장이 붙여지면서 제4비행단(IV./JG 54)의 지휘관이 되었고 또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동부전선으로 돌아온 그는 추가로 2대의 소련 공군기를 더 격추했지만 이미 이때 전선은 쪼그라들며 밀리고 있었다. 1944년 5월에 보프 소령은 노르망디에 발을 내디딘 연합군을 막기 위해 또다시 최전선 지역이 된 프랑스로 돌아갔고, 재편성된 제3전투항공단 제 II 비행단(II./JG 3)의 지휘관이 되었다. 서부전선의 본토 방어전(Reichsverteidigung) 부대를 떠맡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8월에 그는 제262실험부대(Erprobungskommando 262)로 이동해 완전히 새로운 신병기인 메서슈밋 Me 262의 조종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초에는 여러 전역을 전전하며 얻은 다양한 경험을 인정받아 야간 전투기부대를 총괄하고 있던 요셉 캄후버 장군의 참모가 되었고, 거기에서 새로 조달한 신형 전투기들을 루프트바페 각 부대로 공급하는 결정을 내리는 업무를 보게 된다.
그 후에는 제2예비전투항공단(EJG 2)를 끌어모아 이전에 폭격기를 몰던 조종사들을 재교육시켜 Me 262에 숙달하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한스 소령은 '''전투기 조종사의 반란''' 사건으로 좌천된 아돌프 갈란트가 새롭게 자신과 함께 싸워줄 베테랑 파일럿을 모집한 제44전투단(JV-44) 대원으로 선발된 에이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패색이 짙어진 제3제국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한스-에케하르트 소령은 인스브루크 비행장의 활주로를 Me 262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확장시키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던 순간, 그는 잘츠부르크 근교의 작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1,400 km의 거리를 6주일 동안 걸어 고향 첼레(Celle)로 되돌아갔다.
2차 대전 동안 온갖 전선을 누비며 700회 이상 출격을 거듭하며 적기 60대를 떨군 전쟁영웅 한스 소령이었지만, 독일이 모두 승전국들에게 점령되자 패전국의 퇴역군인에 불과했다.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에 낡은 미제 트럭 한대를 불하받아 조그만 운송 회사를 차렸다. 독일인들은 근면했고, 파괴된 조국을 금새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운수업체가 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의 회사는 대형 트럭 수 백대를 거느린 큰 회사로 성장했고, 사업가로서 수완을 보인 보프는 1956년에는 전동공구 제작회사인 BOMAG(Bohrmaschinen und Geräte GmbH)도 설립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넉넉해진 그는 같은 해에 고향 첼레에다 비행클럽도 만들었다. 틈만 나면 경비행기로 비행을 즐기던 그는 92세까지도 자신의 전용기를 탔었고,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종면허 보유자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 실리기도 했었다.
보프의 은퇴 생활은 과거 자신이 복무했던 독일 공군에 대한 기록 발굴과 연구, 그리고 각종 2차 대전 관련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2000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서 열린 배틀 오브 브리튼 60주년 행사의 초청객 중에는 보프도 끼어있었다. 그는 96세를 넘긴 2013년 8월 12일 아침에 45년 이상 함께 해로한 아내 크리스타(Christa)와 맏아들과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 입대 초기
1936년에 제3전투비행학교의 생도(Fahnenjunker) 자격으로 루프트바페에 입대한 한스-에케하르트 보프는 1937년 6월 1일에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1938년에 견습 생도로 비스바덴(Wiesbaden)에 주둔하고 있던 제133전투비행단(Jagdfliegergruppe 133)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나치 독일이 허울좋은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주데텐란트를 할양받아 점령했을 때 구식 복엽 전투기인 아라도 Ar 68에 탑승해 출격했다. 햇병아리 생도였던 그에게는 전투기 소탕 임무가 아니라 수송기나 폭격기 편대 상공을 날면서 호위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의 루프트바페는 전력 배치 연구와 군사 보안을 위해 일부러 전투기와 폭격기 부대 명칭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가 첫 자대로 배치받은 JG 133이나 곧 옮겨간 혼성부대인 제334전투항공단(JG 334)도 그 일환이었다. 가브링엔(Gablingen)으로 전속을 오면서 그는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했고, 최신예 전투기 Bf 109가 맡겨졌다.
2. 개전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에 한스 소위는 새롭게 구성된 제21전투항공단 제3비행중대(3./JG 21)으로 전근되었고, 1940년 6월 6일에 이 부대는 훗날 "녹색 심장(Grünherz)"이라 불리며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 중에서 전과 2위라는 기록을 달성하게 되는 제54전투항공단(JG 54) 제9비행중대(9./JG54)로 개칭되었다.
슈밤 리더(4기 편대장)이 된 보프 소위가 처음으로 격추 경험을 하게 된 전역은 이어진 프랑스 침공 기간으로, 1940년 5월 10일에 벨기에의 통게렌(Tongeren) 상공에서 구식 복엽 전투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가 그 제물이었다.
독일 기준이 아니라 영국 기준으로 한스-에케하르트를 에이스로 만들어준 적기는 6월 26일에 로테르담 서쪽 60 km 상공에서 발견한 브리스톨 블레니엄 폭격기였다. 그가 다섯 번째 격추로 주장하는 그 폭격기는 그 날 작전에 나간 영국 편대에서 잃은 유일한 블레니엄이었던 제110스쿼드론의 R3776호기일 가능성이 높다. 밥에게 피격된 그 기체는 곧바로 불시착을 시도했지만 지면에 충돌하여 폭발해버렸고, 타고 있던 3명의 승무원 - 시릴 레이(Cyril Ray) 일병과 제럴드 P. 게인스포드(Gerald Patterson Gainsford) 상사, 케네스 쿠퍼(Kenneth Cooper) 상사 - 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같은 해 8월에 중위로 승진한 한스-에케하르트는 10월 10일에는 제7비행중대(7./JG 54)를 이끄는 비행중대장(Staffelkapitän)으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제9중대장(9./JG 54)으로 보직을 옮기게 된다.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 동안 9./JG 54는 도버 해협을 오가는 선박을 공격하는 전투폭격기(Jagdbomber) 부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프 소위 또한 적기와 싸울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소규모 편대로 해협을 초계비행하는 영국 공군기와 간헐적인 교전이 벌어졌고, 11월까지 보프 중위의 격추 기록은 19대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듬해인 1941년 5월 7일에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은 보프 중위의 목에 기사철십자 훈장을 걸어주었다. 5월 21일에는 연습기인 뷔커 Bü 131을 기량 유지 핑계로 몰고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쉘부르 해안에 불시착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치열했던 배틀 오브 브리튼 이후에 휴식을 취하던 보프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연이어 발칸 반도 전투에 참가했고, 중대장은 이 전역에서 20번째와 21번째 전공을 기록했다.
3. 러시아로
JG 54는 신형 기종인 Bf 109F를 수령하고 러시아 침공 준비를 위해 프러시아 지방의 비행장으로 이동 했다. 1941년 6월 23일, 바르바로사 작전 이틀째에 한스-에케하르트 중위는 쌍발 폭격기 투폴레프 SB-2를 격추시키면서 러시아 영공에서 첫 전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격추의 기쁨도 잠시, 그가 탄 Bf 109F-2는 다른 적기로부터 역습을 받아 최전선의 적진에 동체 착륙해야만 했다. 전쟁 포로가 될 운명에 처한 보프 중위였지만, 민가를 피해다니며 꼬박 이틀을 걸어서 원대에 복귀했다.
7월 13일부터 10월 30일까지 보프 중위는 3번이나 더 피격되어 적진에 불시착했지만 세 번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적 후방에서 추락하면 생환하기가 몹시 어려웠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고생을 겪으면서도 사지가 멀쩡했던 보프 중위는 1942년 9월 23일에 50대째 적기를 격추시키면서 연말에는 대위로 진급까지 하게 된다. 이때부터 후방으로 돌려진 그는 전투기 총감(General der Jagdflieger) 아돌프 갈란트가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26전투항공단(JG 26)으로 가서 예하 비행단 중 하나를 맡으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그와 JG 54 제 III 비행단(III./ JG54)의 동부전선에서의 활동은 1943년 2월부로 끝났다.
4. 폭격기 요격
그러나 곧 이 명령은 철회되어 III./JG 54는 그륀헤르츠로부터 분리되어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제1전투항공단(JG 1)과 함께 북부 독일의 영공을 지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1943년 4월 17일에 Bf 109G-6에 올라 탄 보프 대위는 브레멘 근교에서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 보잉 B-17 편대를 덮쳐 57대째의 전공을 세웠다.
'''그날 두 번째로 마주치게 된 B-17은 전투기 이상으로 끈질긴 강적이었다. 내 거듭된 공격으로 엔진 한 개가 멎어버린 그 폭격기는 속도도 떨어져 편대의 뒤로 쳐졌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 했다. 그 폭격기의 조종사는 마치 전투기를 몰듯이 거대한 B-17로 이리저리 하늘을 휘저었고, 고슴도치처럼 돋은 기관총들이 모두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마침내 나는 탄약이 모두 떨어져버렸지만, 그놈은 여전히 날고 있었다.'''
무리에서 뒤처진 4발 폭격기를 쫓아 홀로 날고 있던 한스-에케하르트 보프 대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고 B-17의 꼬리날개로 돌진했다. 그가 탄 메서슈밋 전투기의 프로펠러는 1,400마력으로 돌면서 폭격기의 듀랄루민 외피와 뼈대를 갈갈이 찢어버렸다. 그 충격으로 엔진이 떨어져나가면서 비행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대위는 비상 탈출했지만, 적기 또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억세게 운수 좋은 사나이 한스-에케하르트 대위는 무모하고 저돌적인 충돌 공격을 걸면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낙하산으로 착지했는데, 이번에는 적진이 아니라 독일 땅이었다.
8월 1일, 한스-에케하르트에게는 소령 계급장이 붙여지면서 제4비행단(IV./JG 54)의 지휘관이 되었고 또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동부전선으로 돌아온 그는 추가로 2대의 소련 공군기를 더 격추했지만 이미 이때 전선은 쪼그라들며 밀리고 있었다. 1944년 5월에 보프 소령은 노르망디에 발을 내디딘 연합군을 막기 위해 또다시 최전선 지역이 된 프랑스로 돌아갔고, 재편성된 제3전투항공단 제 II 비행단(II./JG 3)의 지휘관이 되었다. 서부전선의 본토 방어전(Reichsverteidigung) 부대를 떠맡게 된 것이다.
5. 지상 근무
그로부터 석 달 후인 8월에 그는 제262실험부대(Erprobungskommando 262)로 이동해 완전히 새로운 신병기인 메서슈밋 Me 262의 조종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초에는 여러 전역을 전전하며 얻은 다양한 경험을 인정받아 야간 전투기부대를 총괄하고 있던 요셉 캄후버 장군의 참모가 되었고, 거기에서 새로 조달한 신형 전투기들을 루프트바페 각 부대로 공급하는 결정을 내리는 업무를 보게 된다.
그 후에는 제2예비전투항공단(EJG 2)를 끌어모아 이전에 폭격기를 몰던 조종사들을 재교육시켜 Me 262에 숙달하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한스 소령은 '''전투기 조종사의 반란''' 사건으로 좌천된 아돌프 갈란트가 새롭게 자신과 함께 싸워줄 베테랑 파일럿을 모집한 제44전투단(JV-44) 대원으로 선발된 에이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패색이 짙어진 제3제국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한스-에케하르트 소령은 인스브루크 비행장의 활주로를 Me 262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확장시키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던 순간, 그는 잘츠부르크 근교의 작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1,400 km의 거리를 6주일 동안 걸어 고향 첼레(Celle)로 되돌아갔다.
6. 종전 후의 삶
2차 대전 동안 온갖 전선을 누비며 700회 이상 출격을 거듭하며 적기 60대를 떨군 전쟁영웅 한스 소령이었지만, 독일이 모두 승전국들에게 점령되자 패전국의 퇴역군인에 불과했다.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에 낡은 미제 트럭 한대를 불하받아 조그만 운송 회사를 차렸다. 독일인들은 근면했고, 파괴된 조국을 금새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운수업체가 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의 회사는 대형 트럭 수 백대를 거느린 큰 회사로 성장했고, 사업가로서 수완을 보인 보프는 1956년에는 전동공구 제작회사인 BOMAG(Bohrmaschinen und Geräte GmbH)도 설립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넉넉해진 그는 같은 해에 고향 첼레에다 비행클럽도 만들었다. 틈만 나면 경비행기로 비행을 즐기던 그는 92세까지도 자신의 전용기를 탔었고,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종면허 보유자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 실리기도 했었다.
보프의 은퇴 생활은 과거 자신이 복무했던 독일 공군에 대한 기록 발굴과 연구, 그리고 각종 2차 대전 관련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2000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서 열린 배틀 오브 브리튼 60주년 행사의 초청객 중에는 보프도 끼어있었다. 그는 96세를 넘긴 2013년 8월 12일 아침에 45년 이상 함께 해로한 아내 크리스타(Christa)와 맏아들과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