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드 니로
[clearfix]
1. 소개
미국의 영화 배우. 드니로 어프로치의 창시자이자 뉴욕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긴 세월 동안 명연기를 해낸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When I was growing up and somebody like Robert De Niro had a movie come out, it was a cultural event.'''
'''내 어린 시절,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배우의 영화가 개봉하면 그건 문화행사나 다름없었다.'''
로버트 드 니로는 '''역사상 최고의 연기파 배우'''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전설적인 배우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서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5] 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명작들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동시에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이자 뉴욕파의 거두라고 불리기도 한다. 할리우드와 뉴욕 두 개의 지역에서 모두 최고로 인정받았다는 셈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배우로 기억되며 현재도 꾸준하게 활동하는 다작 배우이기도 하다.
전성기였던 '''1970년 ~ 1990년대에는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메소드 연기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드니로 어프로치의 창시자'''이자 '''수많은 명연기를 선보인 대배우'''로 평가받는다.
트라이베카 영화제의 수장으로 유명하며, 자신의 제작사인 트라이베카 프로덕션을 소유하고 있다.
2. 경력
뉴욕의 저명한 예술가 부부 로버트 드니로 시니어와 버지니아 애드미럴 사이에서 태어난 드 니로는 아버지의 뒤늦은 커밍아웃으로 인해 편부가정에서 자라났다. 이탈리아계로서 마초적인 환경 속 복잡한 반항심이 있었으나, 후에 성공한 후로는 아버지가 살던 소호의 아파트를 다시 사들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릴 적 수줍음이 많았으나 학예회에서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를 연기한 이후부터 연기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얼마 못 다니고 중퇴한 드 니로는 거리의 풋내기 건달들과 어울리는 한편, 연기 준비를 계속하여 알 파치노 등을 배출한 HB 스튜디오와 액터스 스튜디오에 합격하며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신인 시절에는 당대 떠오르던 아메리칸 뉴웨이브 감독들과 열악한 작업을 하였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초기작에 등장한 이후로 평생의 인연이 될 마틴 스콜세지와 알게 되면서 그의 커리어는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스콜세지는 당시 뉴욕대 영화과를 갓 졸업한 생짜 신인이었고, 드 니로야 말할 나위 없는 애송이였으나 둘은 뒷골목에서 험하게 자란 이탈리아계라는 동질성이 있었고, 빠르게 친해졌다고 한다. 이런 환경은 두 사람의 커리어에 평생 예술적 자양분이 되었고, 둘 모두 예술과 성공에 대한 강박이 대단했기에 둘은 의기투합하여 작업을 도모한다.
결국 이탈리아계 젊은이들의 뒷골목 삶을 담아낸 <비열한 거리>로 스콜세지와 드 니로 모두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드 니로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희대의 또라이 '쟈니 보이' 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다.
그 후 끈끈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영화인 인맥을 타게 된다. 스콜세지의 추천으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5년작 <대부2>에 출연하며 명성을 더한다. 비토 콜레오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여 결코 말런 브랜도에 뒤쳐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주고, <대부1>의 오디션에서 소니 콜레오네역에 떨어졌던 안 좋은 추억을 보기 좋게 털어버렸다.
사실 이 때의 탈락은 대부 메이킹 필름에도 나오지만 절대 드 니로가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다. 당시 오디션 장면을 보면 소니가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는 마이클을 비웃는 장면을 연기하는데, 이때 제작진들은 그의 연기를 보며 소름이 돋았으나 소니란 캐릭터가 너무 냉혈한처럼 보일 것을 우려해 좀 더 친숙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연기한 제임스 칸으로 갔다고 한다.[6]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소니라는 캐릭터는 감정적이고 다혈질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가족애가 끈끈하며 동시에 든든하고 다정한 맏형이라 냉혈한들이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오히려 튀어보인다. 소니가 마이클을 비웃는 장면도, 실제로는 진심으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허허.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 귀엽게 덤비네. 이런 건 든든한 우리 형님들에게 맡기거라.'라고 놀리는 형태에 가깝다.드 니로의 소니 연기 실제 영화에서의 제임스 칸의 연기
다만 이런 드 니로 특유의 살벌한 카리스마는 커리어 내내 양날의 검이 되어서, 푸근한 역이나 인간미 있는 역에 도전할 때마다 별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었다. 말년에 코미디물을 도전할 때에는 이런 살벌한 카리스마를 역이용하는 식의 연기를 보이기도 하였다.그런데 이게 오히려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미트 페어런츠>가 있다.
어쨌든 이때 드 니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제작진은 후속작에서 그를 캐스팅한다. 그러한 제작진의 선택에 화답하듯 드 니로는 여기서 영화사에 남을 명연기를 선보인다. 드 니로는 본래 1편에서 운전수 폴리 역을 맡으려다 출연 못했는데 대부 2편에 출연한 것을 보면 오히려 잘 된 경우다. 대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마틴 스콜세지와는 호흡이 특히 잘 맞는데, 드 니로가 없다면 지금의 스콜세지가, 스콜세지가 없다면 지금의 드 니로가 없었을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언급하지 않고 로버트 드 니로의 커리어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73년부터 1995년까지 22년간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 자리를 꿰찼다. 스콜세지와 함께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공동으로 작업하여 시대의 걸작으로 길이 남은 영화는 <택시 드라이버>(1976년), <분노의 주먹>(1980년), <코미디의 왕>(1982년),<좋은 친구들>(1990년), <케이프 피어>(1991년), <카지노>(1995년) 등이 있다. 훗날 뤽 베송 감독의 <위험한 패밀리>(2013년)에서 동료를 배신한 죄로 쫓겨다니는 마피아 두목을 연기했는데, 마을 영화 상영회에서 본 <좋은 친구들> 속 소년이 자신이라는 암시를 하며 냉혈한 마피아로서의 과거를 회고한다.
또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1984년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 마피아 영화 장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의 아픔을 표현한 <디어 헌터>(1979년), 백인 침략자들의 인디오 학살에 맞서 싸우는 선교사들의 모습을 그린 <미션>(1986년), 오페라의 유령의 무대를 야구장으로 옮겨, 광기 어린 야구팬을 열연한 <더 팬>(1996년) 등 진중하고 무거운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미드나잇 런>, <미트 페어런츠> 등 코미디물에도 출연하는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는 입체적인 커리어를 구축했다.
<케이프 피어>(1991년)에선 복수심에 불타는 전과자 맥스 케이디 역을 맡았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악역 연기를 보여주었다.
1995년작 <히트> 이후에는 예전만큼의 신들린 연기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저 그런(평작 내지는 졸작) 영화들에 조연 역으로 곧잘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 입지가 예전만 못해졌다.[7] 그 대신 <굿 셰퍼드>(2006년)에서와 같은 감독직에 더 정력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드 니로의 감독 처녀작인 <브롱스 테일>(1996년)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했던 탓인지 마틴 스콜세지의 냄새가 물씬 풍겼고, 반면 <굿 셰퍼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스타일이 조금 난다.[8] 감독 실력은 중후한 편.[9]
이걸 꼭 나쁘게만 볼 게 아닌데, 60이 넘은 나이까지 카리스마 있는 주연만 하겠다고 버티는 일부 배우들보다는, 늙어가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가며 젊은 주연배우들의 모자람을 옆에서 연기력으로 커버해 주고, 그게 작은 배역이라도 원숙한 연기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훨씬 대인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 먹어서도 조연이든 주연이든간에 나올 때마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지금도 젊을 때만큼이나 사기적이다.[10] 또한 드 니로가 구축한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와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기질은 여전히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미 젊은 시절에 보여준 명연기들과 굵직한 커리어만으로도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의 상징으로 손꼽히기에 여전히 영화계에서 그의 존재감과 네임밸류는 영구결번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영화팬이라면 자신이 보러 간 영화에서 예상치 못하게 드 니로가 나올 때마다 친숙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image]
데이비드 O. 러셀의 2013년 작인 <아메리칸 허슬>에서 '''아랍어를 구사하는 이탈리아계 마피아 보스'''로 한 장면 등장하는데,[11] 엄청난 존재감과 위압감을 보인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는데다 크레딧에도 이름이 오르지 않지만 특유의 악센트 덕분에 알아볼 수 있다. 5분 밖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빅터 텔레지오라는 마피아 보스를 매우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2014년 5월 <라스트 베가스>의 패디 역으로 등장하며 그야말로 의리 있는 노년의 상남자를 보여주었다.
2015년 9월 개봉한 <인턴> 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고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시니어 인턴으로 30대 여사장을 코치해주는 역으로 등장했다. 푸근하고 인자하며 지적인 간지 노년을 연기한 것. 안경 낀 백발의 수트 신사가 <택시 드라이버>나 <좋은 친구들>에서의 양아치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연상시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의 연기력....[12]
2016년작인 <더티 그랜파>에서는 여태 보지 못했던 드 니로의 저질스러운 변태 할아버지 연기를 볼 수 있다. 작품의 평은 드 니로의 최근 작품들처럼 좋지 않지만 배우의 연기가 꽤나 좋아서 그런지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2019년엔 화제작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이 동경하는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을 연기, 여전히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공교롭게도 영화가 자신의 리즈시절 작품인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2019년 말, 마틴 스콜세지의 역작 아이리쉬맨의 주인공인 프랭크 시런 역을 맡아서 갱스터 영화의 레전드다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앞선 조커와 더불어 노년 커리어의 좋은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배우조합상 평생공로상에 수상하였다.#
3. 가정사
드 니로의 아버지인 로버트 드 니로 시니어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다. 드 니로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CNN과의 인터뷰에서 예술가로서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았고 아버지가 살던 뉴욕 소호의 아파트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화가인 아버지를 알리기 위한 HBO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성애자로 첫째인 로버트가 태어난 이후 커밍아웃을 하고 이혼했지만 아내와는 계속 친구 사이로 남았다. 시인인 어머니 또한 드 니로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도록 해주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첫 아내는 <택시 드라이버>에서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이 포르노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영화관 점원으로 출연하고 코미디의 왕에서 리타로 출연했던 배우 겸 가수 다이앤 애벗(Diahnne Abbott, 1945-)이었다. 1976년 결혼해 1988년에 이혼했으며 드 니로와의 사이에서 라파엘 드 니로를 낳았다. 첫딸인 드레나 드 니로는 로버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아니며 전 애인과 낳은 딸인데 로버트가 입양했다.
[image]
첫 아내인 다이앤 애벗.
[image]
드레나 드 니로. 로버트의 양녀다. 로버트 드 니로와 혈연은 없다.
[image]
로버트 드 니로와 다이앤 애벗 사이에서 난 아들 라파엘 드 니로.
그 후 투키 스미스와 애인 사이를 유지했다. 투키와는 시험관 아기로 대리모를 거쳐 1995년에 쌍둥이 아들 둘을 낳았다.
[image]
투키 스미스(Toukie Smith, 1955-). 직업은 모델이며 패션 디자이너 윌리 스미스(Willi Smith)의 동생이기도 하다.
1997년에는 배우 그레이스 하이타워(Grace Hightower, 1955-)와 결혼했으며 현재도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레이스와의 사이에 아들 엘리엇(1998-)과 헬런 그레이스(2011-)를 두었다. 사실 1998년에 결혼한 뒤 1999년에 헤어졌지만 2004년에 재결합했고 헬런 그레이스는 대리모로 낳은 자식이다.
[image]
그레이스와는 1980년대에 처음 만났는데 만났을 땐 이렇게 젊었지만 현재는 세월이 무상하다...
[image]
2011년 아들 엘리엇, 아내 그레이스와 칸을 방문한 드 니로의 사진. 그리고 같은 년도에 한국나이로 무려 69세에 다시 한번 아빠가 되었다. 물론 80세 가까운 나이에 늦깎이 아빠가 되는 다른 할리우드스타들도 있지만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자식을 여섯 뒀는데 딸은 둘이며 아들은 넷이다.
2018년에 21년만에 다시 결별했다.
4. 여담
- 연기에 대해 매우 집요한데, 첫 상업영화였던 <블러디 마마>에서는 마약중독자인 배역을 위해 30파운드를 감량하는 노력을 했고, <대부2>에서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악센트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몇 달간 생활한 바 있다.[13]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완전히 신이 들려버렸으며[14] , <분노의 주먹>을 연기하기 위해 나이스 바디와 비대한 몸집 사이의 넘사벽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15] 이렇게 연기에 빠져드는 프로다운 정신은 크리스찬 베일[16] , 에드워드 노턴 등 신세대 연기파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 이상형은 only 흑인 여성. 두 번 결혼했는데, 전부 흑인이었고, 사귀었던 애인들도 나오미 캠벨 같은 흑인 여성들이었다. SNL에 출연해서 본인의 이런 성향을 빗대어 토머스 제퍼슨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스스로를 조롱한 드 니로나 미국의 국부인 제퍼슨을 거침없이 깐 SNL 제작진이나 대단하다. 여기서 제퍼슨을 깠다는 건 그가 흑인과 연애를 해서가 아니라 제퍼슨이 자신의 아내 마사 웨일스 스켈턴의 이복자매이자 노예인 샐리 헤밍스를 임신시킨 혐의가 있어서 그렇다는 거다. 제퍼슨과 헤밍스는 서른 살 차이였고 처음 제퍼슨이 헤밍스에 관심을 보였을 때 헤밍스는 10대 중반이었다.
- 대부분의 할리우드 인사, 그리고 뉴욕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미국 민주당 지지자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대놓고 '그가 대선 후보라니 미친 짓이다', '그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같은 자다'라며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자 그의 조상 나라인 이탈리아로 갈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 그리고 2018년 토니상 시상식에 나와서 Fuck을 시원하게 날려주셨다. 2000년대부터 민주당 후보들에 대하여 지지의사를 표하기는 했지만 드 니로가 이정도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2010년대 트럼프의 집권기로 브래드 피트와 함께 할리우드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반 트럼프 인사로 분류된다.[17]
- 2015년에 한 Tisch 예술대학 졸업 연설이 유명하다. 예술대학 졸업 연설 때 박수를 받으면서 나와 첫 문장으로 '여러분, 졸업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X됐습니다'라고 말해주셨다!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 예대 나오면 취업 안 된다고 한 말인데, 물론 웃자고 한 말이고 이후에 계속해서 위트와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학생들에 대한 용기를 독려하는 따뜻한 축하의 말도 섞어주셨다. 국내 KBS 뉴스 9 등 지상파 뉴스에도 보도되었으며, 해당 연설 지문 중 일부가 2017년도 EBS 수능특강 영어 지문에 삽입되기도 했다! 테스트편 3-6번 어조문제인데, 책 맨 끝자락에 있는 지문이라 공부 게을리했다면 몰랐을 수도... 물론 연설 가운데 문제의 fucked 부분은 생략. 다만 니들이 무엇을 하든 예대는 가지 마라. 대신 회계 학위를 따라. 같이 예술 쪽을 지망하는 학생들을 공격하는 문장은 여전히 남았다. 물론 뒷부분에 내 자식이 예술한다면 이런 예대에 보낼 것이며 예술하면 망한다는 소리에 낚이지 말고 용기를 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도 있다. 영상(자막)
- 매우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연기했었다. 아일랜드계, 유대인, 이탈리아인, 미국 남부 촌놈 등등등...
- 씨네21의 프로필에 보면 젊은 날의 마약 복용 의혹도 있다고 한다. 사실 본인은 노 코멘트.
- NYC에 방문하면 로버트 드 니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맛은 평타 이상이고, 분위기는 좋다. 단지 가격은 약간 센 편. #
- SNL에서 트럼프 일가를 수사하는 수사본부장으로 등장하였다. 영상을 보면 알다시피 대본을 외운 게 아닌 프롬프터의 대사를 보고 읽다보니 본의 아니게 드 니로 연기 인생 최초의 발연기를 선보였다. 70이 훌쩍 넘은 고령의 나이이다 보니 시력이 좋지 않아 일어난 해프닝이다. 이건 깜짝 출연이라 그랬던 것이고, 사실 이전부터 SNL에 자주 출연했는데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깨고싶다며 엄청나게 망가지면서까지 코미디를 소화해냈다.(...)
- 여비서에게 욕설 폭언을 해 논란이 있다.#
- 아이리시맨에 대한 인터뷰 영상에서 밝히길 마틴 스콜세지와 죽마고우라고 한다. 켄메어에 살던 드 니로가 스콜세지가 사는 프린스, 엘리자베스, 스프링으로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공통의 지인, 공통의 작품관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자랐으며, 스콜세지의 영화에 드 니로가 자주 출연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 무명 시절부터 과묵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금하기로 유명했다. 지인들 인터뷰로는 본인을 숨기는데에 굉장한 강박이 있다고 한다. 이는 연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무명 시절 오디션에 계속 낙방하는 연기자 친구에게 '모든 걸 드러내지 마라. 숨길수록 더 유혹적이다' 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5. 출연작
[1] 젊은 시절에는 177cm.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많이 줄었다.[2] 170cm인 알 파치노와 함께 있는 사진들을 보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사진들과 큰 차이가 나는 사진들이 공존하기에 진짜 키가 얼마인지 알기 힘들다. 172cm 정도로 보이는 사진들과 177cm 이상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모두 있다.[3] 첫번째 부인 다이안느 애보트가 다른 사람과 낳은 딸이다. 로버트 드 니로와 혈연이 없으나 입양했다.[4] 애런과 줄리안은 애인이었던 투키 스미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5] 여담으로 택시 드라이버와 레이징 불 둘 다 로버트 드 니로 본인의 절친이자 영화감독계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인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작품이다.[6] 대부 메이킹 필름에 들어간 제작진의 코멘트는 "It was spectacular. But it was Sonny... really like "killer." Nothing we could ever sell." 번역하면 "(연기가) 어마어마했죠. 하지만 그건 마치 소니가 진짜... 킬러 같았어요. 대중들에게 팔 수 있을 만한 건 아니었죠."[7] 사실 지금도 여전히 명연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워낙 젊은 시절에 어마무시한 커리어와 명연기를 보여주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런면이 없지 않아 있다.물론 예전에 비하면 노년기의 커리어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8] 실제로 코폴라가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굿 셰퍼드>의 리뷰를 보시려면 다음 링크를 참조. #[9] <굿 셰퍼드>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0] 실제로 마틴 신의 경우도 마찬가지, 늘그막에도 <게티스버그>에 나올 정도지만 <스폰> 같은 영화에서도 충실한 연기를 보여주었다.[11] 러셀 감독 전작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도 주인공 아버지로도 출연해 호평을 듣기도 했다.[12] 이는 드 니로가 메소드 연기의 신임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이다.[13] 더욱 무서운 것은 말론 브란도가 연기했던 비토 콜레오네의 과거의 모습이라는걸 설명도 필요 없이 바로 떠올릴 정도로 성대모사에 가까운 연기를 펼쳤다는것인데 이것이 단순 흉내 같지 않고 초반에만 보면 이게 진짜 드 니로가 맞나 싶을 정도다.[14] 왼손으로 쓰는 장면을 위해 왼손잡이로 몇 달간 생활하는가 하면, 심지어 거울을 보고 하는 독백은 애드립이라고 한다. 흠좀무.[15] 설정을 설명하자면 <분노의 주먹>의 실제 인물은 권투선수를 하다가 몰락해서 말년에는 밤무대의 뚱뚱보 코미디언으로 유명해진다. 한 작품에서의 이런 신체상의 변화를 대역이나 분장이 아닌 촬영기간 중에 실제로 한 것.[16] 베일은 심지어 경쟁이라도 하듯 작품 배역을 자학적으로 하여 마법의 몸무게를 선보였다.[17] 보통 할리우드가 반 트럼프 성향을 띠는 것은 트럼프의 반중 고립주의 정책때문인데, 드 니로의 경우 수익 문제보다는 흑인 인권문제등으로 인하여 트럼프를 비판하는 편이다.[18]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19]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20] 조 페시, 레이 리오타와 같이 출연.[21] 직접 감독을 맡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