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시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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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당 터 추정지
1. 소개
2. 역사
3. 구조
4. 부속 건물
4.1. 진수당
4.2. 장경각


1. 소개


昌慶宮 時敏堂
창경궁동궁이다. 왕세자공부방이자 공식 의례를 행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동궐도》에 따르면, 지금의 낙선재 권역에 있는 수강재의 동남쪽, 창덕궁창경궁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다.
건물이름인 시민(時敏)은 ‘때(時)에 민첩(敏)하기를 힘쓴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1] 편에서 유래했다. 즉, 세자가 배울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공부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2. 역사


창덕궁을 세운 것은 1405년(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세자궁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 시기 원자 이융세자를 책봉한 후 창덕궁에 세자궁이 필요하자[2], 1485년(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인 건양문 밖에 동궁을 지었고 시민당도 이 때 건립하였다. 창덕궁의 동궁으로 지었으나, 위치 때문에[3]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탔다. 이후 언제 다시 지었는 지 알 수 없으나 1611년(광해군 3년)에 왕세자 가례 행사의 일부를 이 곳에서 했다는 기록을 볼 때, 그 이전에 재건한 듯 하다.# 이후 인조반정이괄의 난 등으로 창경궁이 불탔으나 시민당은 무사하였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잃어버린 세조영정을 잠시 여기에 모셨고,# 인조임경업을 이 곳에서 직접 친국하기도 하였다.#
1647년(인조 25) 8월에 당시 세자[4]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아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을 다시 지었는데, 공사 중에 저승전 뿐 아니라 시민당 처마 아래의 섬돌에서도 흉물이 발견되어 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강빈 옥사 관련사건으로 조작하기도 하였다.#[5]
숙종 때는 복위된 단종 - 정순왕후 송씨민회빈 강씨의 신위를 이 곳에 잠시 모셨다. 숙종 말기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대리청정을 하면서 정사를 돌보고 조회를 여는 정당(正堂)으로 활용하였다.# 숙종이 죽은 후에 숙종의 혼전[6]문정전으로 정하면서 문정전에 있던 인현왕후의 혼전을 여기로 옮겼다. 경종은 이 된 이후에도 이 곳에서 나랏일을 보았고#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 역시 대리청정을 할 때, 이 곳에서 정무를 보았다.#[7]
사도세자 사후 세손이던 정조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즉위 후 창덕궁, 창경궁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세자가 없어 시민당은 비어있었다. 그러다 1780년(정조 4년)에 [[화재|불탔다.# 바로 다시 지으려 했으나, 막 흉년을 벗어난 어려운 시기였기에 공사를 취소하였고# 끝내 조선왕조멸망할 때까지 재건하지 못하였다. 시민당 이후 창덕궁, 창경궁동궁 정당 역할은 정조문효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중희당이 대신하였다.
순종 때 제작한 《동궐도형》을 보면 시민당 터에 창고가 있었다. 이마저도 일제가 철거하였고, 지금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이 되었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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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시민당 일대
순조 때 제작한 《동궐도》에서 터만 남아있는 시민당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계단의 위치로 보아 동향을 하고 있고, 동쪽에서 바라볼 때 기준으로 ‘ 」 ’ 자 형태를 하고 있다. 계단은 3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건물 앞과 남쪽엔 넓은 월대가 있었고 남쪽 월대엔 덩쿨 담장이 있었다. 그리고 서남쪽에(그러니까 건물 좌향을 기준으로 뒷 편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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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당야대지도》
《시민당도》
1658년(효종 9년) 당시 세자시강원 찬선[8] 송시열 등이 야대[9]한 것을 기념하여 1663년에 그린 《시민당야대지도》와, 1670년(현종 11년) 왕세자였던 숙종관례를 거행할 때의 모습을 담은 《시민당도》를 보면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은 3칸이었다. 그러나 이 것만 가지고 건물 전체의 모습이 어땠는 지 가늠할 수 없다.

4. 부속 건물



4.1. 진수당


昌慶宮 進修堂
시민당 영역에 있는 건물로 남향이었다. 시민당, 저승전과 같이 성종 연간에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 때 재건하였고, 이후 임금세자신하들을 불러서 만나 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였다.
1728년(영조 4년) 11월에는 영조큰아들 효장세자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으로, 지붕은 팔작 지붕이다. 남쪽 전면에 퇴간이 7칸 있고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그 뒤로 동, 서 양 쪽에 온돌방이 각각 있으며 온돌방은 대청 쪽으로 큰 하나와 쪽방 2개이다. 시민당과 달리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4.2. 장경각


昌慶宮 藏經閣
서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진수당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이었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으로, 지붕은 맞배 지붕이었다. 시민당과 달리, 진수당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1] 원래 발음은 ‘설’이나 이 때는 ‘열’로 읽는 것이 맞다.[2] 당시 성종창덕궁에 거주하였다.[3]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4] 여기서 말하는 세자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사망.[5] 당시 강빈은 멸칭 ‘역강(逆姜, 역적 강씨)’으로 불렸다.[6] 왕비의 신위를 임시로 모시던 전각.[7] 하지만 을 핑계로 일을 안할 때가 훨씬 많았던데다, 그나마도 영조사도세자를 세워놓기만 하고 자기 맘대로 다 했기 때문에 실제로 정무를 본 적은 별로 없다.[8] 세자시강원은 왕세자교육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찬선은 그에 속한 정3품 벼슬이다.[9] 이 밤 중에 신하를 불러 공부하는 비정규 경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