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1. 개요
일본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3남 2녀 중 차남(셋째). 아키히토 상황의 사촌 동생이다. 살아 생전에는 황위계승서열 순위 7위였다. 형 토모히토 친왕이 먼저 사망한 후에는 6위로 조정되었으나, 2년 후에 본인도 사망했기에 큰 의미는 없다. 후순위 계승자는 남동생 노리히토 친왕이 있었으나, 노리히토 친왕이 2002년 요절하면서 요시히토 친왕의 후순위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2. 생애
1948년,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 비의 셋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누나 고노에 야스코, 형 토모히토가 있고, 여동생 센 마사코, 남동생 노리히토가 있다.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했다. 그후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간 NHK에서 근무하다가 일본농협, 일본산림박람회, 일본공예회 등에서 이사로 일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독신'''으로, 만 40세가 되기 직전인 1988년 1월 1일에 자신의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로부터 '가츠라노미야(桂宮)'[1] 라는 궁호(宮號)를 하사받았다. 경칭은 전하이며 영어로는 "His Imperial Highness Prince Yoshihito of Katsura"라고 한다. 가쿠슈인 재학시절에 친구들은 그를 '미카사'로 불렀다. 황족이라 성씨가 없어서 아버지의 궁호를 대신 사용했던 모양.
미야케#s-3(宮家)를 창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5월 26일, 자신의 침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급성경막하출혈'''이 발병한 것으로 침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것으로 추정된다.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8월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11월에 퇴원하였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1989년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재활 치료를 받아 1991년 11월부터 휠체어를 타고 공무를 하였다.
한국에서 요시히토의 존재는 듣보잡이고, 형 토모히토가 재일교포에게 했던 일에 비해 요시히토는 친한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 망언을 하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일본 황족 중 가장 지명도가 낮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입장이지만, 일본에서는 그래도 자기 나라 황족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인들이 기억하는 요시히토의 모습은 오른쪽 눈을 찡그린 채[2] 안경에 콧수염을 기르고 휠체어를 타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데, 이건 요시히토가 쓰러진 후 공개활동을 재개한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모습이고, 쓰러지기 전 그의 모습은 수염이 없고 휠체어 없이 잘 걸어다니는 모습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다소 의아해한다. 사진에서 보듯 당뇨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형 토모히토 친왕과 마찬가지로 암 발병으로 인해 성대를 적출하면서 목소리를 잃기까지 했다. 게다가 2008년 패혈증이 발병하면서 요시히토는 집에서 거의 누워지냈고, 2014년 죽을 때까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3. 내연 관계??
보통 결혼하면서 궁가(미야케#s-3)를 창시하는 게 통례임에도, '''독신'''인 상태에서 궁가를 창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하녀를 건드려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었다(…). 최근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일본 피겨 스케이팅 연맹 임원 아리자카 아키코(有坂昭子)와의 내연관계가 거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 야후에서 아리자카 아키코를 치면 바로 연관검색어로 가츠라노미야가 나올 정도. 1988년 5월에 요시히토가 혼수상태로 아리자카를 찾았고, 이때 소식을 들은 아리자카는 삿포로에서 단신으로 상경하여 이때부터 병수발을 들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리자카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가츠라노미야의 고용인. 사실 공식적으로 교제했더라도 결혼까지 가는 데는 매우 힘든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아리자카가 요시히토보다 3살 연상에 '''아들 하나 딸린 이혼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 이상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 이와 별개로 설령 그들 사이에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고 해도 현행 황실전범에서는 사생아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큰 의미는 없다.
4. 사망
2014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급서(急逝)하였다. 아울러 그의 부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모친 유리코 비 부부는 아침에 가벼운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금슬이 좋은데 아들 3명을 '''모두 먼저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왕실에 남은 왕족 21명 중에서, 이제 남성은 5명뿐이다. 남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딸 3명[3] 만 남겨두고 2002년에 사망, 형 토모히토 친왕도 2012년에 딸 2명[4] 만 남겨두고 사망하였고, 두 사람 모두 '''아들이 없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절손된다.
2015년 6월 8일, 황실과는 별도로 1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2016년 10월 27일,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사망했다. 향년 100세.
2019년 6월 8일, 나루히토 덴노 내외[5] 등의 황족[6] 및 구 황족들의 참배 속에서 5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1] 에도 막부 시대의 4대 세습친왕가의 하나인 가츠라노미야(桂宮)와는 이름만 같을 뿐 무관하다. 이는 요시히토 친왕의 개인문장인 계수나무(桂, 가츠라)에서 이름을 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 요시히토처럼 병으로 실명할 경우,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각막이 투명해지기 때문에 눈이 점차 감겨지고, 나중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 한정) 완전히 눈이 감겨지게 된다.[3]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4]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5] 덴노 내외는 관련 규정에 의해 추모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추모식이 끝난 후에 묘소를 방문하여 참배하였다.[6] 단, 미카사노미야 가문과 사이가 안 좋은 노부코 비는 불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