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
1. 개요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이후 첫 우승이자 '''역대 최고 승률 우승'''으로, 이 해에는 규정상 전반기와 후반기를 모두 1위로 마쳐서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이 확정되었다'''. KBO가 포스트시즌 규칙을 어떠한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더라도 한국시리즈를 생략할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유형의 우승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시즌 최고 승률인 0.706을 기록'''했다. 시즌 전 스프링캠프를 당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훈련지였던 베로비치에서 가졌고, 다저스와 경기도 가졌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통합우승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시리즈 규정 변경
이미 1984년에 져주기 경기의 폐해를 경험한 KBO는 1985년 시즌에 앞서 규칙을 개정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규칙으로 바꾸어서 져주기 경기 사태를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한 팀이 전, 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할 경우 '''한국시리즈 없이 해당 팀을 우승팀으로 결정한다'''는 규정을 남겨놨다는 점이다. 이는 리그가 출범한 1982년부터 존재하던 규정인데, 예나 지금이나 포스트시즌 흥행에 민감한 KBO가 애초에 이런 룰을 왜 만들었는지 의문.1) 연간 승률 1위팀이 전기리그 혹은 후기리그 한쪽만 제패하고 다른 기 리그의 우승팀과 연간 승률 2위팀이 다를 경우에는 그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한국시리즈 진출.
2) 연간 승률 1위팀과 2위팀이 각각 전, 후기리그를 우승하는 경우 두 팀끼리 한국시리즈.
3) 1984년의 OB 베어스처럼 연간 승률 1위팀이 전후기리그 어느 쪽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는 연간 승률 1위팀이 한국시리즈에 자동 진출하고 전, 후기리그 우승팀이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한국시리즈에 진출.
3. 전개
1985년 프로야구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전년도보다 10경기 늘어난 55경기씩 총 110경기를 치렀다. 때문에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뤘다.
그런데 1984년 한국시리즈 때 최동원 하나를 못 이겨 우승을 놓친 삼성 라이온즈가 1985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휩쓸게 되자 룰상 삼성 한 팀 빼고 전멸하게 되면서 경기할 방법이 없으니 플레이오프는 물론, 한국시리즈마저 소멸됐다. 이 사례는 김시진과 김일융 2명이 나란히 25승씩 50승을 합작했던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완전 우승을 달성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4. 시즌 후
1985년에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아 낭패를 보게 된 KBO는 결국 1년 만에 다음해 한국시리즈에서 규칙을 바꾸게 된다. 본래 전기에 우승한 팀은 후기에는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염두하는 쪽으로 선회를 했는데 삼성이 이 불문율을 깬 것.
이 때 삼성은 한국시리즈 규정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제안을 내놓는데 다름아닌 플레이오프 4강으로 치르는 것을 내놓았다. 사실 당시의 전력으로 볼 때 삼성은 4강에는 들 수 있는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5. 평가절하된 영광
하지만 한국 야구팬 모두가 한국시리즈 우승이 진정한 우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우승은 KBO 역사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게 된다. 2002년 우승할때까지 모두가 삼성이 우승기록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1985년의 우승은 사실상 한국시리즈 없는 반쪽 우승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삼성도 모두가 인정하는 제대로 된 우승을 원하였고, 2002년 우승할때까지 절치부심 하게 된다. 나중에 정규리그 우승의 가치가 상승하며 그나마 재평가 되었던 적도 있지만 오랜기간 1985년의 우승은 논외로 철저히 무시받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통합우승도 엄연히 KBO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우승이라는 것이다.'''[1] 삼성이 규정을 만든 것도 바꾼 것도 아니고 그냥 매경기 최선을 다해서 규정대로 우승을 인정 받았으니 문제는 전혀 없다.
80-90년대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으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하면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이전까지는 타 팀팬들로부터 우승 한 번도 못한 팀이 무슨 명문이냐는 조롱과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또, KBO 회의 등에서 삼성이 의견을 내면 다른 구단들이 우승 한번 못 해본 구단이 설친다며 면박을 당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모두가 인정을 안하는 우승이였기에 삼성 내부에서도 이 우승은 곧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이후 삼성은 2001년까지 해태에 3번이나 호구잡히고 준우승 횟수는 1986년부터 이때까지 5회였다. 또한 1999년의 참사 및 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실점[2] 의 피해자가 되는 등 전형적인 콩라인이 되었다. 그렇게 '''17년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루어냈다. 이 우승때도 전국민이 삼성의 첫 우승으로 알고 있었으며 모두가 그렇게 말하였으며 1985년의 우승은 언급도 되지 못하였다. 당연히 삼성구단도 1985년 우승을 번외로 취급하였다. 이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만수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 한 것이 은퇴할 때까지 큰 한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며. 양준혁은 2002년에 와서야 삼성이 진정으로 우승을 맛봤다는 논지의 말을 남긴적도 있었다. 사실 한국시리즈 기준으로'''만''' 보면 삼성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원년 창단 멤버 구단들 가운데서 가장 늦은 우승이다.
그래서 2002년 우승 당시에도 캐스터나, 해설진들은 모두 첫 우승이라고 했을 정도로 1985년 우승은 철저하게 묻혀 있었으며, 이것은 2005년에야 캐치프레이즈에서 '''V3'''를 언급하면서 정식으로 우승을 인정했다.
6. 기타
- 사실 1982년 당시 OB 베어스가 이렇게 우승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성은 OB전 2연승을 추가하며 후기 우승은 삼성으로 확정되면서 나가리. 그리고 1984년 삼성도 전기리그를 우승한 뒤 후기리그까지 제패해 한국시리즈를 없애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상대 고르기로 선회했는데 그 대가는 망했어요......
- 해외 사례로는 전후기리그 제도를 KBO보다 먼저 채용했던(1973~1982) 퍼시픽리그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바로 1970년대 퍼시픽리그 최강호팀 한큐 브레이브스가 1976, 1978년 전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3] 를 취소시켜 버린 바 있다. 물론 이때는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만 취소되는 거지 일본시리즈 자체가 취소되는 게 전혀 아니니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퍼시픽리그는 가뜩이나 흥행도 안되는데 플레이오프까지 취소되어서 죽을 맛이었을 테지만.
- 통합 우승이 나오고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게 되면서 얼핏 보면 준우승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985년 준우승 팀은 통합 및 후기 2위를 달성했던 롯데 자이언츠로 기록되었다. 이 때가 롯데의 첫 준우승이다. 아직도 많은 롯데팬들이 1995년 OB에게 한국시리즈에게 3-4로 석패할 때를 첫 번째 준우승이라고 알고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아니나[4] 준우승은 준우승이다. 또한 전년도 준우승팀이 전년 우승팀을 2위로 내리고 우승한 최초의 시즌이다. 이 일은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일어났다.
- 상단 사진에 나온 파란색, 흰색 유니폼이 미묘하게 청백전같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1985년도 당시의 원정경기, 홈경기 유니폼이다.
- 삼성이 롯데 원정경기에서 매직넘버를 지웠기에 구덕 야구장에서 시즌 우승이 확정된 유일한 시즌이다. 부산 롯데가 사직으로 옮긴 이후 역사까지 합쳐도 대구 삼성 외에는 부산에서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들어 올린 팀이 없다.
7. 관련 매체
야구 만화가 최훈이 기억하는 1985년의 삼성. 아래에 달린 코멘트는 각 선수들의 이미지를 4 글자에 맞춘 것이다. 원본은 김형준 칼럼
[image]
- 일단뛰어 이해창 : 언제나 어디론가 뛰고 있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 이번특화 허규옥 : 희한하게도 내야수 배대웅 천보성과 세트로 기억하고 있다.
- 타격머신 장효조 : 장효조는 항상 1루에 있다.
- 난교타자 이만수 : 공갈포라고 생각했었다.[6] [7]
- 장타전문 박승호 : 장효조 이만수 잘 넘기고 박승호에게 맞는 일이 꽤 있었다.
- 류수타법 김성래 : 삼성 최고의 타자는 김성래라고 생각했다.
- 사이클링 이종두 : 무조건 3할 치는 줄 알았다.
- 삼루의빛 김용국 : 헬멧이 벗겨졌을 때의 임팩트는 무덤까지 가져갈 것 같다.
- 꽃남유격 정진호 : 얼마전 정진호 코치가 현역 시절엔 꽃남이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정진호 코치의 현역 시절 기억은 없다.
- 원조노예 김시진 : 선동렬, 최동원보다 더 멋있었다.
- 삼색커브 김일융 : 김일륭[8] : 공이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가는 걸 본 기억이 없다. ( -)
- 불굴의지 황규봉 : 이선희와 언제나 세트.[9]
- 초대소방 권영호 : 눈이 나빠도 야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8. 둘러보기
[1] 한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종 순위 1위 ≠ 우승인 경우는 세 차례 있다. 2019-20 KBL의 원주 DB 프로미, 2019-20 V-리그 남자부의 서울 우리카드 위비, 여자부의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이 세 차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시즌이 중단되었고 끝내 재개되지 못한 결과다.[2]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vs 두산) 3회 12실점[3] 이 당시 제도는 전후기 우승팀이 5전 3선승제로 맞붙어서 우승팀이 퍼시픽리그 우승팀이 되고 일본시리즈로 진출하는 제도였다. 참고로 개최구장은 1~2차전은 전기 우승팀, 3~5차전은 후기 우승팀의 홈구장에서 개최하는 제도였다.[4] 그러나 기록상 한국시리즈 준우승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준우승 수상도 했다.[5] 캔자스가 우승했던 1985년 월드 시리즈는 85동기인 삼성이 우승했던 2013년 한국시리즈랑 패패승패승승승 스코어가 똑같다.[6] 최훈이 과거 마구마구의 요청으로 특별 카툰을 그릴 당시 이만수의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이미지와 달리 교타자인데다 볼넷당 삼진갯수도 그 양준혁, 장효조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내용의 포스트를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다. 아마 이만수에게 "난 교타자"라는 설명을 붙인 것은 이러한 감상에서 비롯된 듯 하다. 포스팅 주소[7] '난, 교타자' '교타자다' '교타자임' 등 평범한 표기가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점에서 노리고 썼다는 의심은 가능하다.[8] 당시에 김일륭이라 불렸던 것으로 추측된다.[9] 아마 최훈이 언급하는건 원년인 1982년의 이선희를 뜻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82년 이후 이선희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유동에게 결승 만루홈런을 맞은 심리적 충격 때문이었는지 이듬해인 1983년부터 급격한 하향세를 탔으며 1985년에는 아예 MBC 청룡에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