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식 총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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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十年式銃剣 (さんじゅうねんしきじゅうけん)
삼십년식 총검
일본 육군이 1897년(메이지 30년)에 채용하여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제식 총검으로 계속 쓰였던 대검이다.
2. 개발 및 운용
메이지 30년인 1897년 구식이 되어버린 무라타 소총(村田銃)의 후계 화기로 등장한 30년식 소총이 채택되자 이와 함께 개발된 것을 시작으로 약 840만개가 제조되어 총검 생산량으로는 세계 최대량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의례용 성격이 짙었던 탓에 실용성이 떨어졌고 단조 처리도 거치지 않은 육군강(군납용 철)으로 단순히 제작하였다. 또한 도신에는 칼날이 없어 전투 직전에 숫돌에 날을 갈아두어야 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단조 처리가 안된 강이라 재질 자체가 물러 찌르기용으론 적합하지 않았고, 가늘고 긴 형상때문에 구부러지거나 꺾이는 경우도 많은 것도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그다지 개량이 가해지지 않은채 종전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야습시 칼날에 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신에 흑색 도료가 칠해지면서 우엉 칼(ゴボウ剣)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외견상 특징은 일본도를 모방한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신으로 구미 열강들의 양날 총검들과는 문화적인 차이를 보인다. 도신에는 좌우 윗쪽에 혈장(血裝)이라 불리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다. 길이는 51.4cm로 지금 보면 상당히 길지만 개발 당시엔 그냥 평범한 길이의 총검이었다.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이후 독일군의 영향을 받아 조직되어 태평양 전쟁당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활약했던 공수부대[1] 에게 지급하기 위해 길이를 약 20cm가까히 줄인(실제 길이는 32.3 cm) 2식 총검(二式銃剣)이 제작되어 지급되기도 하였으나, 총검을 사용하던 일본군의 공수부대가 워낙 소수에 불과했던 만큼 25000자루 가량의 소량만이 제작되었다.
30년식 총검은 본래 고쿠라 조병창에서 생산되었는데, 일본제국의 세력팽창이 심해짐과 함께 총검의 수요량이 늘었던 쇼와 시대에 들어서는 나고야 공창, 마쓰시타 금속, 토요타 자동기기 등 민간업체에 위탁하여 생산되어 제조처에 따라 도신의 길이나 새겨지는 각인등 여러가지 부분에서 크고작은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채용되어 태평양 전쟁 이후까지 일본군의 보조병기로 쓰인 무기인만큼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당장 3.1 운동하면 생각나는 일본군의 폭력 진압이 이 총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민족말살통치당시에는 곡식을 징발(공출)하던 일본군과 일본인 관료들이 착검을 한 소총이나 장대 끝에 총검을 달아 쌀이 숨겨져 있을법한 자루를 쑤셔보기도 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하거나 몰수한 물량을 조선경비대에 보급해 사용했고, 미군정시기와 6.25 전쟁으로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미군의 물자 공여가 이루어지면서 소총 자체가 미국제 M1 개런드나 M1 카빈으로 교체된 이후에는 2선급으로 돌려진 아리사카소총과 함께 경찰이나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2선급 병력에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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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식 총검을 허리에 차고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조선경비대대원. 쓰고 있는 방탄모는 1930년부터 일본군의 제식 방탄모로 쓰이던 90식 철모이며, 무릎앉아를 하고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대원들이 신고 있는 전투화 역시 일본 육군의 기병용 부츠이다.
그외 4.3 사건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대, 또는 본토의 빨치산이 사용하거나, 1960년대 살인사건에 쓰였다는 증언도 있다.
3. 여담
난징 대학살 당시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들이 중국인 아기를 붙잡아 하늘에 던진 다음 총검으로 받아 찍어내는 짓을 저질렀고 그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진 주의) 임산부를 붙잡아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냈다는 증언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때 사용했던 총검도 이것일 것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