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 부대

 


유가족으로부터 입수한 684부대 훈련병과 기간병, 간부들의 원본 사진. 사각 나무판 위에 인골[1]과 우리의 신조 표어가 박혀있다.
1. 개요
2. 창설과 비극적인 종말
3. 신설 보복부대들의 진짜 창설 의도는?
4. 부대원들의 출신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6.1. 다큐멘터리
6.2. 창작물


1. 개요


1968년 북한에서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게릴라(124군 부대)를 침투시켜 박정희 암살을 기도한 1.21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몇 개의 북파공작원 부대가 창설됐는데 이 중 하나가 공군 산하[2]의 684부대이다.

2. 창설과 비극적인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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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벌어진 1.21사태는 당시 정권 핵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군에 기존의 첩보부대(HID, UDU)와는 별도로 후방에 침투해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를 암살하거나 보복행위를 가할 목적의 새로운 북파공작 부대를 만들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응징보복 목적 부대'''가 갑작스럽게 군별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68년 4월 창설이 결정되어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공군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소속, "마니산 까치부대(MIU)"는 해병대 소속이었다. 침투 용이성을 위해 북한 지역과 매우 가까운 서해 섬에 하나씩 자리한 형국이었다. 제2325전대가 훈련을 담당했던 실미도 부대에게 부여된 정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였다. 이렇게 새로이 창설된 보복목적 부대들의 훈련을 총 책임졌던 건 조천성 HID 대장[3] 이었다.
각 부대들의 인원은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각 3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렇듯 각 군이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중복 편성한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각 군의 충성경쟁'''이 한몫했다는 게 같은 시기 AIU에 참여했던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수 회장의 평가다.
그러나 당초엔 훈련을 마친 후 실전 투입되어 보복작전을 완수하려는 계획이었으나, 1.21사태 때문에 흥분해서 서둘러 만들었던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작전계획이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이후 극단적인 상호 보복보다는 남북대화와 화해 쪽으로 가야한다는 기류가 우세해지면서 이들 네 개의 보복부대들(실미도부대, 선갑도부대, 장봉도부대, 까치부대)은 '''사실상 버려져 방치된 채 수뇌부로부터 점점 잊혀져갔다'''. 아무 기약없이 몇년째 대기만 하고 있고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며 그저 내팽겨쳐진 신세가 되자, 이에 극심한 불만을 품은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대방동에서 군에 의해 저지당하고 자폭했다. 놀란 중앙정보부와 각 군 수뇌부는 실미도 부대 뿐 아니라 나머지 세 부대들도 차례로 해체했다. 침투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은 이 자폭과 이후의 사형으로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들을 교육하고 부대를 관리하던 기간병들만 일부 생존해있다고 알려져 있다.

3. 신설 보복부대들의 진짜 창설 의도는?


이 부대가 '공작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형태하고는 상당히 다르고 관리도 워낙 부실했기 때문에 이 부대의 실체에 대한 파악과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이들 보복목적 부대들이 실제 김일성 암살 등의 '''현실적 목표가 아니라''' '''상징적인 준비를 통해 대통령에게 충성심 보여주기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부에서 진짜로 작정하고 김일성을 암살하려 했다면, '''굳이 신생부대를 급조할 게 아니라 이미 수많은 훈련을 받고 북파 경험도 많은 기존의 HID [4]의 베테랑 대원들에게 보복임무를 내리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5] 상식적으로 적국의 원수를 암살한다는 엄청난 작전을 실행하는데, 신출내기들을 데려다가 무인도에서 겨우 몇 개월 훈련시키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다.[6]
북파공작 전문가들이고 수많은 북파경험을 가지고 있는 HIDUDU요원들조차도 주로 변방 지역 침투임무였지 평양 등 핵심부 침투는 성공하기 힘든 어려운 임무인데, 겨우 몇개월 특수훈련을 시키고 사전 실전경험도 없는 병력을 투입한다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미국의 넵튠 스피어 작전만 해도 684부대 이상의 훈련을 받고, 수많은 실전경험을 거친 베테랑 요원들이 투입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어려운 난도의 임무를 수행하는데도 앞서 말한 베테랑 요원들보다 훨씬 기량이 뒤쳐지는 부대원들을 보내는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군에서 새로운 부대들을 만들어 창설식까지 열고 충성경쟁 법석을 떨었다는 건 역시나 박 대통령에게 보여주기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기존의 부대(HID, UDU)를 시키는 것보다, 새로운 부대를 여럿씩 만들어야 더 뭔가 열심히 하는 것같은 티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각 부대의 대원 숫자도 '''김신조 부대원의 숫자와 똑같은 31명씩으로 딱 맞춘 것도, 이 부대들이 실질적인 임무보다는 보여주기용 상징적인 존재의의'''가 컸음을 시사한다.
즉 1968년에 1.21사태가 발생하자 대응하기 위해 이 4개의 보복목적 부대를 창설한 이유는, 정말 북 수뇌부에게 보복을 하려는 현실성 있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치밀한 계획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적 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뚫고 들어온데 대한 '''대통령 등 통치자들의 분노와 충격, 불안을 일단 달래기 위해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보복 준비를 하는 모양새는 만들어야 한다'는 보여주기 충성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는 당할 뻔 했어도 적 수뇌부를 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미리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당시 절대권력자인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쿨타임이 올 몇 개월 뒤엔 분위기가 달라져서 실행명령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각 군에게 경쟁적으로 응징보복부대 명목으로 만들어 놓는 '''충성용 쇼'''를 해야만 하는 게 군 수뇌부와 중정의 입장이었을 것.

4. 부대원들의 출신


영화 실미도의 영향으로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 없는 이 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사형수, 조폭, 흉악범 등을 포섭해 특수부대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원한 것이다. 모집과정은 북파공작원이랑 똑같이, 물색관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젊고 혈기 좋은 남자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조건으로 제안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거나,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나, 저학력자들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시골의 순박한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를 비롯하여 운동선수, 요리사, 서커스 단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백동호의 소설에서는 강인찬 같은 범죄자들도 있는 반면,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한 집안의 가장도 있던 것으로 나온다.[8]
실제로 범죄자 출신을 모아서 만든 부대는 실미도 부대가 아니라, 같은 성격을 지닌 육군 소속의 선갑도 부대이다. 이 부대는 이 실미도 사건의 결과에 놀란 군 수뇌부가 해체해버렸다.

영화 실미도는 대원들을 구제불능 범죄자들로만 묘사했는데, 실제로 실미도에는 범죄자 출신들의 수가 적었으며 대부분 형량이 낮은 수준이고, 농민, 노동자 같은 일반인 출신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애초에 무고한 일반인들이 끌려가서 만들었다는 실제 사건을 그대로 가져가면 사건을 더욱 비극적이고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사건을 바꿨을까요?

(왜긴 왜야, 이래야 캐릭터 설정이 편하기 때문이지.)

거의없다 영화 걸(乞)작선

흔히 있는 선입견과는 달리 조폭이나 흉악범죄자는 군인으로서 영 아닌 놈들이다. 조폭이나 흉악범죄자들은 대개 반사회 성향을 보이는데, 반사회 성향은 사회 규범조차 대놓고 무시할 정도라는 소리다. 기본적인 사회 규범조차 지키지 않는 놈들이 군대에서 버틸 리가 없다. 모두 알다시피 군대는 철저하게 명령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며 더욱이 민간사회보다 규율이 빡쎈 곳이다. 사회에 그럭저럭 적응하는 선량한 사람들조차 군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격임이 명백하면 대한민국 국군처럼 인구 대비 과도한 군병력을 유지하는 곳이 아니면 징병제하에서조차 대체복무로 가능한 빼려고 드는데 범죄자는 말할 것도 없다.[9][10]
그러나 이러한 최근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실제로 1950년대의 북파공작부대들에는 고아나 무기수 중에서 선발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1960년대에는 '건달'이 주 물색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으며, 힘의 논리에 누구보다 철저하게 굴복했기 때문이다.[11] 또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달들에겐 그들만의 애국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1974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을 땐, 조일환 등 조폭들이 "국모의 원수를 갚자"며 손가락을 자르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파적 애국심이란 감정은 꽤나 격렬하고 과격해서, 시설폭파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공작원에게 의외로 어울린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684부대원의 출신은 그 누구도 확답하지 못한다. 그들 중에는 노동자도 있었을 것이고, 농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달 출신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걔들 범죄자 모아서 만든 집단이잖아"라며 도매급으로 치워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5. 기타


  •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부대 창설식은 7월 7일에 있었다. 김일성 암살이라는 특수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행운의 숫자 7이 겹치는 7월 7일에 실미도에서 자체적으로 창설식을 가졌다고 한다. 결국 68년 4월부터 부대는 존재하였지만, 실질적인 창설일은 7월 7일이 되는 셈이다.
  • 김일성 암살작전이 미뤄지게 된데는 닉슨 독트린과 관련된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북한에게 전면전의 명분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베트남에서 전쟁 중인 미국에게는 또다른 전쟁이 발생하여 한 번에 2곳에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또, 실패하더라도 당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한 미 해군 장병들의 귀환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 미국에서 작전을 수행치 못하게 하였다는 설이다.
  • 실미도 부대가 북파공작임무를 수행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정확한 지칭은 아니고 실제로 실미도부대 창설보다 앞선 사건들이다.#
  • 참고로 공군 생환교육대(SERER)는 공군 첩보부대 산하로 1953년 인천에서 창설되었고, 제6탐색구조비행전대(SART)는 1958년 8월 1일 제33비행구조대대로 창설되었다. 공정통제중대(CCT)는, 1978년 4월에 창설되어 784부대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684부대처럼 북파공작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역할 자체가 다른데, 한국의 CCT는 아군 특수부대나 기동부대들이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적 후방쪽에 들어가서 아군 수송기가 아군쪽에 보급품을 정확히 투하할 수 있도록 항공관제하는 역할을 한다.

6. 대중매체에서



6.1. 다큐멘터리


  • 그것이 알고싶다(SBS/ 2회/ 다큐멘터리) - 백주의 총성, 8.23 실미도 군특수범 난동사건(2004/2/7) / 죽음의 섬, 실미도 II (2004/3/13)
영화 실미도가 흥행에 성공한 후 많은 실미도에 관한 방송, 신문 등의 보도가 있었는데 그에 편승해 나온 것이었다(시간상으로...). 다만, 부대원 중 7명이 충청도 옥천 출신인 것을 밝혀내는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매체에서는 최초로 공론화 시켰고, 많은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또한 생존자들을 찾아 증언을 듣고 함께 실미도를 찾아 위령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6.2. 창작물


  • 실미도 (백동호 작가/ 소설/ 영화의 원작) - 실제 훈련병 생존자는 없으나, 서울로 가던 중 2~3명의 부대원이 이탈하여 생존해 있다고 주장한다.
  • 실미도의 증언(황상규 작가/ 2003년 / 소설) - 실제 생존자인 김방일 소대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실화 소설이며, 영화 촬영이 인연이 되어 출판기념회에 유명 배우가 참석하기도 했다.
  • 야망의 전설(KBS/ 1998년 / 드라마) - 주인공인 두 형제중 동생인 최수종이 맡은 이정태가 사형 당하기 직전에 작중 사미도라는 섬에 있는 684부대와 비슷한 부대로 끌려와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이 나온다. 단 유동근이 맡은 형 이정우가 힘을 써서 마지막에 생존하는 걸로 끝난다.
  • 지옥의 실미도(박인권 작가 / 만화) - 백동호 작가의 소설을 기초로 그렸다.

[1] 2005년 국방부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T/F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공작원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자 담력 배양 겸 민간요법으로 실미도 내에 있던 중국 선원의 묘지를 파헤쳐 해골물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수 공작원들을 양성하려면 기간병들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골을 빻아서 소주와 섞어 기간병들에게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 또한 남은 유골은 내무반 앞에 걸었고 그게 부대 표지가 되었다고...[2] 684부대는 공군 AISU의 제2325전대 소속으로 관리받았다. 영화 실미도의 중후반부에서 최재헌 준위의 언급도 그렇고 후반부에서 중정부장(이후락으로 추정)의 언급을 봐도 공군 소속이었임을 알 수 있다. 최재헌 준위와 조돈일 중사가 방문한 곳도 공군본부였다.[3] 육사8기, 제2대 육군특수전사령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역임.[4] 1971년 이전에는 UDU가 북파공작을 담당했다.[5] 심지어 이 때는 KLO 시절 때부터 작전을 뛰어온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전문화된 대원들이 많았을 것이다.[6] 68년 4월에 창설되어, 9월에 작전을 실행할 계획이었다.[7] 하다못해 미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그게 바로 피그만 침공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카스트로가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하는 빌미를 주었다.[8] 이 사람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매혈로 돈을 챙기다가 피를 뽑을 수 없게 되자 돈도 많이 벌고 대우도 좋다는 684부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9] 게다가 범죄자들은 반사회적인 성격 때문에 반항적이며, 절제력이 약하고, 규칙을 어기기 일쑤다. 군대는 순종적이고, 절제력이 강해야 하며, 규칙을 칼같이 준수해야 한다. 실제로 범죄자 집합소로 민간에 유명해진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는 인터폴에게 협조까지 받아가며, 지원자들 신원을 보고 범죄자가 들어올 여지를 아예 막았으며 경범죄 전과도 확인되면 그 즉시 입대는 불허된다. 게다가 입대 후 훈련과정에서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계속 걸러내고 최종 임관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훈련기간동안에는 군복무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엄선한 인원만으로 부대를 돌리고 있는데도 프랑스 외인부대는 똥군기내무부조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10] 진짜 범죄자를 받는 부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프리카의 군벌군이나 진짜 개나 소나 받는 북괴군. 시리아 내전 당시 활동하던 정치깡패 샤바하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특히 샤바하는 조폭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하라는 반군 진압은 제대로 안하고 여기저기서 친반군 성향 민간인만 닥치고 학살, 약탈, 강간하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 바샤르 알 아사드가 내전중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해체시켜버렸다.[11] 다만 50년대에는 너무 잃을 것이 없던 부랑인들을 훈련시켜 침투시킨 결과 북한 사회에 동조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60년대에는 체격이 좋고 두뇌회전이 빠르며 일종의 명령-복종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 중에 선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일반인 중에 모집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