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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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fff> 한신대학교
韓神大學校
HANSHIN UNIVERSITY

[image]
<colbgcolor=#472f91><colcolor=#ffffff> 교훈
진리, 자유, 사랑
교색
HSU BLACK
슬로건
다르게 보고 바르게 간다
국가
[image] 대한민국
분류
사립대학
교단
[image] 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자
김대현
개교
1940년
총장
연규홍
재단
학교법인 한신학원
주소
<colbgcolor=#472f91><colcolor=#ffffff> 경기
경기도 오산시 한신대길 137 (양산동)
서울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수유동)
재적생
학부
7,359명(2019년)
교직원
교원
164명(2012년)
직원
89명(2012년)
대학기본역량진단
자율협약형 선정대학(2019)
링크
/ /
1. 개요
1.1. 연혁 및 역사
2. 학부 및 대학원
2.1. 학부
2.1.1. 기조 모토
2.2. 대학원
2.2.1. 신학대학원
2.2.2. 교육대학원
2.2.3. 정신분석대학원
2.2.4. 사회혁신경영대학원
3. 캠퍼스
4. 교통 및 주변 환경
5. 진보적 학풍
6. 학생 활동
7. 여담
8. 같이보기
9. 출신 인물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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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시대를 앞서가며 세상을 이끄는 진보대학

민주화와 인권, 인문학을 위해 헌신한 진보대학

대한민국사립대학. 개신교 장로회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학교법인 한신학원[1][2] 소속 4년제 종합대학교이다.
  • 전교생을 지칭할 때 칠천한신이라고 한다.
  • 교육부 국제화 역량 인증대학 평가에서 연속 선정되어 2020년까지 유지된다. 현재 11개국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어학당과 학부에 재학 중이다.
  •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 시 자율개선대학 선정의 성과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1.1. 연혁 및 역사




2. 학부 및 대학원



2.1. 학부




2.1.1. 기조 모토


한신대 총학은 2017년 기점으로 70대 총학생회의 역사를 가짐으로서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 중에서 최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로 총학생회 자체가 NL계열에 의해 이어진 전통이 강하기에, 한신대학교 총학생회 자체의 기조로는 '민족한신'이라 부르고 있다. 원래 PD계열이 집권할때는 이 기조를 폐기하기도 하였지만 2012년의 경우 총학의 성향이 PD계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상관없이 쓰였고, 비권을 지향한다는 총학 집권기에도 쓰이고 있다. 선배들에 의해 유지된 전통이 강하거나 운동권 학생들이 대대로 과 학생회를 맡는 경우 꾸준히 계승되어 오지만, 실제론 졸업할때까지 "그런거 처음 들어본다."라는 식으로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통 과의 기조는 (기조)+(학과명의 두문자)의 4글자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대체로 호칭문제에 있어서 나이제보다 학번제를 채택하는 과들이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둘 간의 상관성은 얼마나 예전의 관습이 많이 남아있는가의 차이이다. 여기서 예전의 관습이란 학생운동적 색채를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운동권의 색채나 사회문제의식과는 거리가 먼 전공들은 현재 기조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일종의 '급훈'이나 '좌우명' 처럼 쓰이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교수진에서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있지만, 사실 과거에는 '"운동권 색채가 없는 과가 존재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기조를 교수진이 장려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 신학대학
    • 신학부
      • 신학과 : 통일신학
      • 기독교교육학과 : 민족자주교육의선봉
  • 인문대학
    • 국어국문학과 : 민중의벗국어국문
    • 영어영문학과 : 하나영문
    • 독일어문화학부(독어독문학과)
    • 중국어문화학부(중국문화콘텐츠학부)
    • 철학과 : 한신철학
    • 한국사학과(국사학과) : 변혁국사
    • 종교문화학과 : 혁명종문
    • 문예창작학과 : 진보문창
    • 디지털문화콘텐츠전공 : 청춘디문콘
  • 사회과학대학
    • 국제관계학부(국제관계학전공, 정치학전공) : 청년국관
    • 사회학과 : 선각사회
    • 경제학과 : 정치경제
    • 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 : 최강광홍
    • 국제경제학과 : 전진국경

  • 휴먼서비스대학
    • 사회복지학과 : 민중복지
    • 재활학과 : 실천재활
    • 특수체육학과
    • 심리•아동학부 : 소통심아
  • 글로벌협력대학
    • 중국학과(중국지역학과) : 대동중국
    • 일본학과(일본지역학과) : 한빛일본
    • 경영학과 : 혁신경영
    • IT경영학과(e-비즈니스학과) : Hard&Smart e-business
    • 글로벌비지니스학부 : 선진글비
  • IT대학
    • 컴퓨터공학부 : 비상컴공
    • 정보통신학부(디지털융합학부) : 자주정통
    • 수리금융학과(수학과) : 선봉수학
    • 응용통계학과(정보통계학과) : 한얼통계

2.2. 대학원



2.2.1. 신학대학원


서울캠퍼스에 위치하고 있다.

2.2.2. 교육대학원


현직교원의 재교육 목적을 중점으로 두고 있는 특수대학원이다. 같은 재단 산하인 영생고등학교의 교원이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 교육학과
    • 역사교육전공
    • 체육교육전공
    • 교육행정전공
    • 상담심리전공
    • 한국어교육전공

2.2.3. 정신분석대학원


  • 심리학과
    • 정신분석전공
    • 임상심리전공

2.2.4. 사회혁신경영대학원


서울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학대학원과 함께 캠퍼스를 공유하고 있다.

3. 캠퍼스




4. 교통 및 주변 환경




5. 진보적 학풍


한신대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대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신대학교는 그 어느 대학보다도 위대한 대학이고, 평화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한 대학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신대학교 학생들은 스승들과 더불어 자유를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희생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한신대학교의 위대한 공헌에 대하여 항상 존경과 흠모의 정을 갖고 있습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2005년 한신대 방문 강의 소회

애초에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기독교 교단의 신학이 진보적인 편이었고, 종합대학 설립 당시에는 5.18 민주화운동 또는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80년대 대학생들이면 한번씩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 해봤다고 치더라도, 타 대학교 보다 평균 그 이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하였다.[3] 당시의 재학생이었던 동문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교 정문 진입로는 연일 최루탄 냄새와 전경들이 가득 메웠고 꽤나 살벌한 풍경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87년 체제 이후, 형식적이나마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채 구태만 답습하던 운동권들의 각종 병크로 인한 반감과 IMF이후 취업문제 등으로 관심사가 옮겨지면서 진보의 색이 다소 퇴색되었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적인 성향의 학생은 학교가 전반적으로 너무 좌파 지향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신대학교가 타 대학교와 대비되는 특징은 학교를 소유한 재단이 진보적이라는 점이다. 오리엔테이션이나 강의에서 한신대의 역사를 설명할 때, 문익환, 장준하 등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교수진들의 전반적인 성향은 사회평균에 비해 진보적인 편이며, 학생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학생들의 성향 역시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다.
다른 대학들처럼 학생회가 진보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라면 학생회의 정권교체로 이러한 분위기는 사그러들 가능성이 있겠으나, 한신대의 경우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한신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한신대를 선택하는 이유 중 상당수가 진보적인 학교라는 이유에서 한신대를 선택하기도 한다.[4] 이러다 보니 소속 교수진도 진보적인 지식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1980년대 정운영, 김수행, 박영호 트로이카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기 위한 좌파적 방법론이 한신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들이 대한민국 좌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마르크스 경제학의 1세대이고 그 모든 게 한신대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벨기에 루뱅대의 정운영과 런던대의 김수행, 괴테대의 박영호가 1980년대 한신대 경제학과의 교수로 부임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의 토대가 된 것이다. 영(김수행), 불(정운영), 독(박영호) 계열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세 명이 모인 한신대는 이 분야의 아성이 되었다. 1990년대에 한신대가 마르크스 경제학파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많은 학생과 연구자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버렸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가 비봉출판사에서 간행한 "자본론"은 그야말로 경제학과 학생들의 바이블, 전설과 같은 책이 되었고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많은 지식인들의 나의 베스트 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아울러 한신대는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울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학교로 남게되었다. 2008년 박영호 교수가 떠난 뒤에도 그 분야를 전공하는 7명의 교수들이 건재하고 한신대가 계속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의 유일한 '센터'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한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지만 자유주의 자본시장론자로 전향한 이영훈 교수도 잠시 한신대 경상학부 교수로 재임하였다. 현재에도 국제경제학과(구 무역학과)와 경제학과에 내로라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교수로 재임중에 있다.

또한 1973년 독일의 튀빙겐 대학의 강돈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송영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송두율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 주도한 반유신 투쟁 조직을 결성, "민주사회건설의회<약칭 민건회>"를 조직하여 독일에서 민주화투쟁을 했던 철학자들이 귀국하여 한신대 철학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런 경향성이 한신대의 반독재 투쟁의 선봉 학교로의 역사로, 이전의 박정희 시대의 신학과 교수들의 투쟁과 전두환 시대의 철학과 교수들의 투쟁이 합쳐졌다. 그 교수에 그 학생들이라. 당시 한신대 담당 진압 경찰대장이었던 표창원 전 의원이 말했듯이 ' 한신대의 투쟁력은 전국 최고의 어마어마한 독종들이었다 '고 유희열의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여 언급한 바있다. 그 데모하던 학생 중의 한명이 영화배우 '우현'이다. 한신대에 입학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자각이 생겼다는 우현은 정작, 친구를 위해 대리시험을 치러주어 83년에 퇴학당했다. (재수하여 연세대 신학과 입학, 연대에서도 엄청난 투쟁을 하여 불후의 데모사진을 남겼다. 영화 1987에 나온다.) 강돈구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송영배는 중국사상을, 송두율은 경계인으로의 독일학자로, 저항철학자로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윤평중 철학과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으로 한신대 내의 보수적 위치에 서있다. 나름 한신대의 정치 스펙트럼도 넓다 할 수 있다. 다 진보가 아니란 말이다(특히 학생들의 구성 안에서도). 국제관계학부(정치외교학), 사회복지학과 등에 소속된 대부분의 교수들은 민교협 등의 진보 학술 단체와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의 중역을 맡아왔다.
미션스쿨이므로 채플 강의를 의무수강 해야한다. 비 신학과생의 경우 학기 당 1회씩 4학기 수강해야한다. 신학과 및 기독교 관련학과의 경우 주 2회채플을 이수해야 하는데(일반채플+신학대학채플) 1,2학년때는 주2회 3,4,학년때는 주1회(신학채플)만 의무수강하면 된다. 한번에 0.5학점씩 부여된다. 학점이 0.5학점인 것을 보면 알겠지만 1주에 하루 1교시만 들으면 된다. 평가는 Pass/Non Pass. 출결에 따라 평가하며, 지정좌석제를 이용하여 좌석에 따라 출결을 확인한다. 수업 중 교목실 측에서 출결은 알아서 확인하고 결석자는 수업 종료 직후 빔프로젝터로 고지하여 이의에 따라 수정한다. 이 외에도 지각 시간이나 횟수에 따라, 수업 태도에 따라 결석 처리가 되기도 한다. 수업태도에 관해서는 자거나 딴짓을 하면 결석처리 시키겠다는데, 실제로는 눈치껏 딴짓이 가능한 편. 그 이전 까지만 해도 4번 결석시 Non Pass 였지만,2015년 기준으로 3번이상 결석할 시 Non Pass가 부여된다.
채플의 주된 내용은 목사들의 설교나 교리를 배우는게 아닌 외부강사를 초빙해 강연을 한다. 주로 졸업생 위주로 초빙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이하게도 한신대에 음악과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음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심심치 않게 초빙된다. 강연 자체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들을만 하지만, 일부 학생을 제외한다면 신학과 채플을 제외한다면 학과 상관없이 원하는 시간에 채플 수강이 가능하다. 다만 원칙적으로는 학과 별로 배정된 요일 및 시간대에 신청하는게 맞다. 이는 인기 시간대에 사람이 몰려 채플을 들을 수 없게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시간대에 강의를 듣느라 어쩔 수 없는 경우 다른 채플을 신청할 수 있다. 채플의 경우 졸업 전까지 들어야하는 만큼만 들으면 되므로 공강이나 원하는 강의가 있다면 다음 학기에 듣기로하고 미뤄도 되지만, 저학년(1~2학년) 동안에 듣는 것이 권장된다고 학교 측에선 안내하고 있다. 물론 강제성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수강신청은 학생의 편의에 따른다. 학과에 따라 채플이 영어채플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실제로 외국에서 온 선교사/목사님이 영어로 강의한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한국어를 아주 잘하셔서(...) 한국어로 설명하며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다 강의하는 내용의 수준도 교인이 아닐 것을 전제하고 하므로 매우 낮은 편. 강의 내용 및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은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로도 왠만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

6. 학생 활동


재단을 소유중인 교단 및 학교 교수진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라 하여 총학생회와 원만하게 지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강의나 학내 활동에서 이념적으로 부딪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최근 재단 측의 학교 경영 방향에 있어 총학생회와의 갈등이 심하다.
최근 10년 동안 등록금은 꾸준히 올랐고 등록금 의존율은 약 80%에 달한다. 비축 적립금 200억을 만들고도 2011년에 또 다시 5% 대의 등록금 인상을 결정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그나마 1.9%의 인상률로 내렸다. 미리 거둬간 등록금은 다시 돌려줬다. 60주년 기념관을 짓고도 또 70주년 기념관을 짓겠다는 계획은 만우관 옆에 늦봄관을 짓는 것으로 축소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은 2011년 6월 2일 동맹휴업을 추진했다. 자발적으로 수업을 쉬고 한신대를 비판하는 행사를 열자는 취지였다. 전국에서 최초로 하는 것이었으나, 학생들의 참여율은 상당히 저조하였다. 일단 기말고사 직전시기였다는 점이 있는데다, 동맹휴업 자체가 상당히 저조한 투표율 아래에서 간신히 통과가 된 사안이었다. 또 등록금 문제를 둘러싸고 학생회와 등록금투쟁위원회의 알력다툼이 있어서 투쟁과정에 있어 일원화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당시의 64대 총학생회는 전 대 학생회가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2010년 말에 후보가 출마하지 않아 보궐로 간신히 선출된 학생회인데 반해, 등록금투쟁위원회는 학생회 선출 이전부터 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던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슈선점의 문제 등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이전부터 총학생회 집권을 둘러싼 NL파와 PD파 양측 대립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사실상 두 쪽 모두 흔히 생각하는 정체성은 많이 흐려져 이제는 그냥 이전에 어느 쪽이었던 선배를 따라 활동하던 학생들의 모임 수준이다. 아무튼 뭐 이러니 동맹휴업이 잘 되었을리가... 이 모습은 현재 1.9% 인상률이 확정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다.
또한 등록금 인상 문제 뿐 아니라 대학 측의 경영 방향에 있어서도 총학생회측과 갈등이 많았다. 날로 빡세져가는 교육부의 대학평가에 호응하고 대학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2011년 이래 각종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 일부 인문대 학과들의 정원 감축이나 전과 조건의 완화 등 인문대를 축소하고 교직과정을 폐지하는 방향의 구조조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학생 및 교수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지지부진하나 2015년 현재까지도 구조조정안에 대한 학교 측의 의지가 완전히 꺾이지 않아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있다.
결국 컨설턴트 회사의 여러가지 학교경쟁력 강화안 중 학내 반발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은 학과명칭 변경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제기가 아예 없지는 않은데, 학과 명칭을 너무 심하게 자주 바꾼다는 것. 어떤 학과는 몇년 사이에 학과 이름이 두세번 바뀐 경우도 있었다.
2013년에는 제한적 절대평가제 와 75분 강의블록제가 시행되었다. 당초 강의블록제는 처음 시행된게 아니다. 이미 2007년 2학기부터 3학점(3시간)짜리 수업을 시행할 경우 반드시 1,2,3 / 4,5,6 / 7,8,9 교시로만 편성하게끔 제정되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이것을 다시 75분단위로 이틀씩 수업하게끔 만든게 현재의 강의블록제이다.
이 때문에 기존의 3시간 연달아 하는 수업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연초부터 많은 혼선이 빚어졌고, 21학점[5] 수업을 들을 경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주 5일 수업이나 1교시 수업을 넣어야 하기도 하였다. 다만 여전히 일주일 중 화, 목요일은 오후에 3시간 연강수업이 가능하며 금요일은 하루 종일 연강수업 편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이는 다소 여지가 있는 것이, 최근 대학 교육계는 학생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75분제를 실시하는 것이 대세다. 한신대는 비교적 75분 블록제 강의 도입에 늦은 편이다. 게다가 아예 3시간 연강수업 자체가 없어지고 1주일 내내 75분 블록제 강의를 강제하는 대학도 적지 않다.
66대 총학생회 선거가 보궐로 진행되면서, 한신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비권(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섰다. 다만 이는 학보사의 견해이다. 물론 이 견해는 현 학생회장단의 성향 등으로 보아 적절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굳이 나누고자 한다면 NL쪽이다. 그러나 강경한 의미의 NL파가 아니라 이전에 그쪽 계열의 사람들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NL파 사람들과 교분은 있었지만 확실한 비권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이 NL을 싫어했고, 스스로를 중립, 혹은 비권이라 말하고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때문에 기회주의자란 비난도 많이 받았는데, 진보 계열에 속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뒤에 스스로를 비권이라 주장하고 학내운동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
더군다나 졸업 후에는 민주당 캠프에 참여해서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여건만 된다면 어느 진영이든 들어가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주의자다. 애초에 민주화운동이 매우 격렬했던 역사가 있어 학생운동계의 숫적 주류였던 NL과의 최소한의 연결고리는 끊기 어렵다. 80년대 학생운동계는 어떤 학생회/단체건 강온의 차이만 있을 뿐 절대다수는 (큰 틀에서 볼 때) NL이었다. PD파는 끝내 학생운동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했다. 다만 PD/NL의 파벌 구분은 이념/사상으로 구분해야 마땅하겠으나 실제로는 인맥/소속/출신/계열에서 따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해당 학생회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NL계열 사람들과 인맥이 맞닿아있다는 것이지 그 자신이 NL이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분류된다는 것이 아니다.
2015년 현재 68대 총학생회를 기준으로 근 6년간 단일후보로 입후보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의 투표 참여율 저조로 단일후보조차도 투표기간 연장으로 간신히 통과시켰던적이 적지않다. 상술한 66대 학생회부터는 비운동권이니하여 학교측의 운영에 대한 투쟁동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잖이 나오는한편, 또 한쪽에선 나날히 저조해지고있는 일반학생들의 교내활동 참여율이 문제가 되고있는 것이 실정.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래 학교 분위기상 2015년 현재까지도 해당 사고와 관련하여 총학의 또는 총학이 아닌 여러가지 단체의 여러가지 교내외 활동이 산발적으로 이어지고있다.
2015년 초(1학기 시작 전) 컨설턴트 회사의 충고를 받아 학과별로 조교를 두던 것을 각 단과대가 공통으로 조교 및 행정직원 인원을 두는 구조조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각 사무실도 통합되었다. 학교 측의 설명으로는 각 과별로 조교를 두면 과별 상황의 차이로 인해 업무의 질의 차이가 있고 현황파악은 어려워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각 단과대의 규모에 따라 조교와 담당 행정직원이 배치되어 종래와 비교했을 때 담당인원에선 별 차이가 없고 업무효율성은 더 뛰어나질 것이라고 설명하나 학생회 측에서는 단과대별로 업무를 보면 각 학과별 행사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실제로도 시험같은 중요한 업무에서도 학과 조교의 부재로 인해 대학원생들을 시험 부감독으로 쓰고 (해당 학과 시험과 전혀 상관없는 학과의 대학원생을 쓰는게 함정. 말 그대로 정말 알바처럼 시급 1만원 주고 쓴다.) 기존에 조교들이 해오던 업무의 일부를 정교수가 직접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7. 여담


  • 5.18 민주화운동 때 희생자를 낸 학교다. 당시 1학년이던 유동운시민군이 되어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5월 27일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과 곤봉에 맞아 사망했다. 향년 19세.
  • 근처의 병점역은 한신대를 병기하고 있다. 이는 2006년 실시된 코레일의 역명 병기 사업의 결과. 당시 3년 사용에 5천 2백만원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후 기간이 만료되는 2009년에 연장이 확정되어 2019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있는 상태. 참고로 이 가격은 비싼 편은 아니다. 역 근처에 학교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던 경우 억단위로 가격이 치솟은 경우도 있었다.
  • 국내 대학 중 가장 처음으로 교수평의회를 만들었으며 교수들의 힘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들의 연봉도 세다.[6] 대표적인 예로 모 학과는 학교 측에서 합격규정을 만들 수 없다며 특기생 입학을 거절하려하자 학과장이 나서서 기준을 만들어 학교측의 반발을 이기고 그 학생을 합격시켰다고 한다. 즉, 학교와 교수의 관계에서 학교가 일방적 우위는 아니다. 단, 최근 교수임용에 있어서 세례자만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에 일부에서는 교수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 아니냐고 말이 나온다. 물론 교수들은 반발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이 되려 교수의 힘이 비대화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2013~2014년 인문대장을 강제로 취소시키고 총장 권한으로 임명시킨다거나, 교수의 재량으로 수업 정원 외 추가로 넣는 것도 힘들어지는 등 교수의 힘도 다소 약화되고 있다.
  • 교단, 학교 운영 측, 교수진 측, 총학 측 모두 사회활동면에서 진보적인 학교지만 의외로 또한 군종 목사 선발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지정 학교 중 하나이다. 다른 몇개 학교들과 더불어 거의 초기에 군목 선발 시험 응시 가능 학교로 지정된 곳이다. 신학과 재학 중 2학년에 시험을 치거나 전역한 후 35세 미만에 한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라면 응시 가능하다. 2007년엔 군종장교 선발시험 전체 1등[7]도 나왔다. 현 한신대 신학대학원장도 군목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25대 공군 군종병과장(현재는 전역)도 한신대 출신 목사였다. 가끔 군선교신학 심포지엄 같은 것도 수유리 캠퍼스에서 열리곤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험이다보니 애초에 입학성적이 높은 학교의 학생들에게 치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선발은 꾸준히 되고 있는 편.
들어봐
같이가요 한신
꽉잡았니 정신
점수 따라가는
젊은이들 대신
참교육을 통해
참인재를 길러
한신대학교에
너의 미래를 맡겨
여기서 넌
따뜻한 마음을 가져
실력과 소양을
바탕에 갈고
가 가 같이가요 함께
모두가요 한신대학교
  • 예전부터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이면 부르던 노래가 있다. 제목은 "민족한신 진군가"이다. 주로 집회/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렀고, 제목이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민족주의+운동권 색채가 강하다. 이 노래는 과 단위로 신입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위에도 서술했듯 학생사회의 많은 변화로 인해 현재는 총학생회나 몇몇 운동권을 제외하고는 아랫 학번으로 갈수록 잘 모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노래는 채플실에 비치된 성가 가사집에 있다. 원래 NL계열 운동권을 상징하던 노래로서, 총학생회에서 PD계열이 당선되면 인터네셔널가를, NL계열이 당선되면 민족한신 진군가를 부르는 전통이 있었다.
항전의 역사를 일군 선배들의 숨결 안에
민족한신 이름높이 투쟁속에 살아온 우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보아라 조국이여 통일의 새 역사여
단결의 교훈으로 큰 물결을 이루니
투쟁의 함성 조국을 흔들어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한신이여
역사 위에 영원하라
민족! 한신! 투쟁! 투쟁! 투쟁!
민족한신 진군가
위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이미 80년중반부터 90년 중반까지 학생들 사이에 거룩하게(?) 불렸던 아래와 같은 노래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억압과 가난 분열에 싸여
이제는 이 사슬끊고 나가야 해
웅크린채 결코 시들지 않으리
갈라진 이 땅 하나됨 위해
용솟음쳐라 민족 한신여
우리 함께 사는 세상 다시 만들자
이 땅 위에 살기 위하여
민족한신가
(2절이 존재한다 추가하기 바람)
  • 학교에 괴담이 존재한다. 특히 만우관은 그 구조가 복잡하고 항상 어둡고 음침하고 습기가 차 있어서 건물과 관련된 괴담이 몇 있다.

8. 같이보기


  • 이하의 사람들은 한신대학교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 김약연; 일제 독립운동과 한신의 민주운동의 역사, 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독립 운동가 규암 김약연 선생이 세운 명동학교를 한신대학교 정신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김약연 선생은 1899년 중국 만주로 넘어가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고 명동학교와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나라 없이 만주로 온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곳을 북간도의 명동촌이라 불렀고, ‘만주의 대통령’으로 불릴만큼 존경 받던 규암 김약연이 함경도에서 130여명을 이끌고 정착해 민족 운동의 산실이 된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문익환 목사 집안과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한때 안중근 의사가 문 목사 집에 머물면서 총연습을 했다고 한다. 한신대의 초석을 심은 모든 분들이 이 곳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규암의 외조카 윤동주, 문 목사의 형 문익환,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의 설립자 김재준, 향린교회 안병무, 경동교회 강원용 등 기라성 같은 개신교 인물을 낳은 땅이었던 것이다. 캐나다 장로회(한신대학교의 설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의 도움을 받아 김약연은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는 용정의 민족 학교였다. 은진중학교는 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연과 이동휘 등이 캐나다 선교회에 요청하여 설립된 학교로서, 용정의 동산(東山) 일대의 1만평 부지에 600평의 본관과 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갖추고, 본관은 3층 벽돌건물에 스팀보일러로 난방을 할 정도로 교육시설이 다른 학교에 비해서 월등히 선진적이었다. 또한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회가 선교부 구역 내에 설립한 학교여서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덕분에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김약연이 설립한 은진중학교는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 교사로 있었다. 은진중학교 제자인 문익환, 강원용을 품은 한신대의 진보,민주성은 이렇게 연결된다. 명동학교(김약연)->은진중학교(김재준)->한신대학교(문익환,강원용,안병무). 김재준의 지도력은 북간도 1930년대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시작으로 한국신학대학(1940년 설립 조선신학교 후신)과 경동교회, 기독교장로회 등을 통해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민주화,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 분야별 걸출한 활동가들을 배출해냈다. 고지수가 한국 현대사를 바꾼 개신교 사회참여운동의 리더로 꼽은 김재준의 대표적 문하들은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강원용, 장준하, 이우정, 이해영, 김관석, 김윤옥, 이영민, 이상철, 이해동, 김상근 등이다. 여기에 직접 배우진 않았으나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계기로 사회참여 문제에서 김재준의 뜻을 따랐던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한국전쟁기에 김재준이 조선신학교 교수로 채용한 뒤 사회참여적 신학자로 변화해 간 민중신학자 서남동도 들어간다. 이들을 빼고 1960-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얘기하긴 어렵다. 규암 김약연 목사의 증손자인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김약연 목사 생가’를 한신대에 기증한다.
    • 함석헌: 한신대학교는 함석헌 사상 형성과 실천에 도움을 주었고, 또한 영향을 받았다. 2018년도에 '씨알사상연구원'에서 <함석헌과 그의 도반들>이란 정기 강연을 한 바, 7인의 도반 중 4명이 한신대의 사람들이었다. 7명은 그의 스승인 류영모,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장준하,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였다. 한신대에서 발전한 민중신학의 성찰과 씨알사상의 깊이와 폭은 류영모와 그의 제자인 함석헌에서 맥을 같이하고 한신대 학자들인 안병무, 서남동 교수 등이 체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석헌은 한신대 출신인 장준하문익환, 이들 스승인 김재준과 함께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한 동지이기도 하다. (함석헌 집과 문익환 집이 수유리 한신대학교 근처여서 자주 함께 했다고 한다. 고은, 문익환, 김동길, 장준하, 함석헌, 김대중, 강원용 등이 결집하는 민주의 성지가 수유리 한신대였던 것이다.) 함석헌은 한신대에서 출강하며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을 전해주었고, 그의 강의를 듣고자 많은 대학생들과 진보 지식인들이 한신대에 모여들었다. 함석헌 사상의 최고 권위자인 씨알사상연구회장 박재순 교수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함석헌 사상을 공부하러 서울대 철학과 졸업 후 다시 한신대에 입학하였다. 박재순 교수 외에도 김경재 명예교수와 김진 씨알 평화 상임이사와 같은 씨알사상 연구가들이 존재한다.

9. 출신 인물




10. 둘러보기




[1] 수원시에 위치한 영생고등학교가 같은 법인에 속해있다. 한국신학대학시절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위치한 한신초등학교도 한신학원 산하에 있었으나, 1982년 12월 10일 심산학원으로 학교 법인이 바뀌었다. 설립 이념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영생고등학교도 같다.[2] 한신공영과는 관계가 없다.[3] 이 때문에 고신대학교를 기점으로 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이 신사참배 반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에 굽히고 들어간 것을 깔 때 최선두에 섰던 중심축이 되기도 했다.[4] 요컨대 대학원의 경우에는 적지 않은 지방의회 의원 및 기초자치단체장들이 입학하여 학위을 취득했다.[5] 일반적으로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최대 학점이다.[6] 2010년 기준 '''전국대학 34위''', 출처는 교육통계데이터베이스.[7] 1차 필기시험 1등, 2차 면접시험 1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