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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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한신공영 주식회사
'''한문 명칭'''
韓信工營 株式會社
'''영문 명칭'''
Hanshin Engineering & Construction
Co. Ltd.
'''설립일'''
1950년 3월 5일
'''업종명'''
건물 건설업
'''아파트 브랜드'''

'''기업규모'''
중견기업
'''주소'''
경기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덕평로 82
'''대표자'''
태기전, 최문규
'''도급순위'''
20위
'''홈페이지'''
홈페이지
1. 개요
2. 연혁
3. 여담
4. 대표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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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건설사이다. 2020년 기준 도급순위 20위를 기록하였다.

2. 연혁


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급성장한(신반포 한신아파트로 유명함) 회사로 한신더휴(THE HUE)라는 아파트 브랜드로 유명하다. 8~90년대에 한신코아(현 세이브존)라는 백화점도 운영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를 맞고 흑역사가 되었다. 한신코아 브랜드는 백화점 뿐만 아니라 잠실 한신코아 같은 일부 고급아파트나 오피스텔에도 사용된 바가 있는데 한신코아 브랜드는 비록 아파트에서는 널리 쓰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파트 업계에서는 이른 시기에 고급 브랜드 마케팅을 도입한 것으로서, 이 브랜드의 파생형으로 부산지역 향토기업과 합작하면서 부산지역 한정으로 쓰이던 그린코아도 있다.
한신공영의 창업주이자 회장은 김형종이었는데, 이 김형종은 1970년대에 한 능력있는 사원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 그 사위는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좋아 반포한신아파트 단지 개발을 주도했으며 반포한신아파트에 슈퍼마켓을 차렸고 이게 당시 기준으로 하루에 1000만원[1]을 벌어들이면서 아예 유통업으로 빠졌다. 그 사위의 이름은 김의철. 김의철이 주도하던 유통부문은 빠르게 성장하여 뉴코아그룹으로 발전했다.[2]
이후 김형종 회장이 1983년에 사망하였고, 1993년에 김의철은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유통부문을 가지고 분가하여 뉴코아그룹을 만들었다. 뉴코아는 뉴코아백화점(현 뉴코아아울렛/NC백화점), 킴스클럽 등을 세우며 재벌이 되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때 부도가 나고 결국 대부분의 계열사가 이랜드그룹에 인수된다.[3]
한 편 1983년에 김형종 창업주가 사망하면서 그룹의 모태이자 핵심사업이었던 건설부문은 외아들인 김태형에게 승계되었다. 김태형은 이후 여러가지 사업에 진출하면서 한신공영을 무난히 이끄나 싶었지만, 1996년에 '''브니엘학원 이전사업'''이라는 희대의 사업을 수주하였고 결국 외환위기로 재벌그룹들이 쓰러질 때 브니엘학원과 같이 도산하고 만다.[4]
그러다가 2002년에 한신공영의 건설부문만 따로 분리되어 코암시앤시개발이라는 중견기업[5]에 팔려가면서, 2010년대 현재는 아파트 건설과 도로 등 각종 공공인프라의 건설 수주를 받는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코암시앤시개발로 인수될 당시에 언론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평하였으며, 한신공영에 오랫동안 있었던 중역들은 그래도 한때는 대기업이었단 자부심 탓이었는지 몰라도, 지방 중견기업에 인수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는 말이 있다.
1970~80년대 당시에는 강남개발을 주도하면서 현대, 우성, 삼익, 삼호, 한보, 한양 과 더불어 잘나가는 1군 메이커 아파트로 유명했고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 중산층들과 부유층들을 공략하여 1977년 신반포 1차 아파트 부터 1996년 한신타워아파트(신반포 28차 아파트) 까지 무려 19년간 신반포로 불리우는 대규모 브랜드 타운이 만들어지기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중동진출 실패로 인해 휘청거리기도 하고 산업합리화 대상업체로 지정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1990년대 초반에 겨우 정상화 되어 흑자를 보나 싶었는데 IMF 사태때 부도 나면서 중견기업으로 팔려갔다. 그 와중에 삼성물산 래미안, GS건설 자이 같은 후발주자 대기업 아파트 브랜드들이 고급화로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전성기때 라이벌이던 주식회사 한양과 함께 현재는 평범한 브랜드 이미지가 되어버렸고, 요새는 주식회사 한양과 비슷한 도급 순위 까지 보여주고 있다. 도로, 교량 건설과 같은 공공인프라 수주 공사도 지금도 계속하고 있고. 그래도 아예 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잊혀진 우성, 삼익[6], 삼호, 한보보다는 상황이 낫다. 하지만 한신공영이 최전성기에 만들었던 신반포 한신 타운은 부촌의 대명사 중에 하나로 한신공영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한때나마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신공영의 부도 후 주인이 바뀌고 정상화 되는 과정에서 사세가 많이 기울어버렸으며, 2000년대 이후 이곳이 재건축 될 무렵 한신공영이 자사에게 있어서 상징성이 강한 신반포 한신타운 재건축 사업에 다시 참여하려 했으나 이때는 한신공영의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탓에 입주자들이 재건축 수주 업체로 언급조차 안 해주거나 반대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부도 이후로는 서초구 반포동을 포함한 소위 말하는 강남 권역에 재진출은 번번히 실패하게 되는데, 얼마나 오죽했으면 한신공영에서 신반포 한신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이라도 수주 하려고 입주자 2만 가구에 호소문을 보냈지만, 입주자들은 하나같이 쿨하게 무시했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 # 어찌보면 아파트계의 대우 로얄 자동차 시리즈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

3. 여담


이 기업의 잘 안알려진 또 다른 흑역사로 학교법인 한신학원[7]이 있는데, 1970년대에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 아파트를 대량으로 지으면서 한신공영은 엄청난 부를 쓸어담았지만 그 이면에는 특혜가 있었기에 그에 대한 댓가로 반포동 일대에 초등학교, 중학교 용지를 기부채납하기로 했다. 허나, 막상 기부채납을 하게 되자 그 부지가 아까웠던 한신공영은 꼼수로 그 자리에 사립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만들어서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8] 학교법인 한신학원을 1978년에 설립하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눈가리고 아웅이다보니 얼마 안가 그 속셈이 들통 나면서 결국 1980년경 법인이 해체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부지는 약속대로 기부채납이 이루어지면서 결국 그 자리에 서울반원초등학교경원중학교가 공립학교로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도 남는 부지의 경우는 계속 한신공영이 가지고 있었다가 1990년대 들면서 학교 부지 지정이 해제되어 한신타워아파트(신반포 28차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한신공영의 20여년간의 강남 개발 대여정에 마침표를 찍기도 했다. 그다지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법인이다보니, 그 사립학교들의 설립 인가가 났더라면 그 부분도 특혜시비 같은 문제로 말썽이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삼성물산 건설부문만큼은 아니지만[9] 기업 규모나 수도권에서의 인지도에 비하면 유난히도 부산광역시(특히 동부산 지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던 건설업체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중동지역 진출 실패로 자금난에 빠지면서 1987~1992년에 산업합리화대상업체로 지정되어 부산지역 진출이 매우 지연되었기 때문. 부산광역시에 한신공영이 처음 진출한것은 1985년 분양하고 1987년 3월 입주한 해운대 한신빌리지였으나 이쪽은 3층 규모의 타운하우스에 가까운 빌라였다.
그 후 다음 해인 1988년 11월에 부산지역 향토기업인 주식회사 삼정 및 반도종합건설과 합작으로 서부산권인 만덕에 1468세대 규모 대단지 그린코아 아파트를 공동 건설하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 소규모 저층 임대아파트 단지를 단독으로 건설한 것이 시초였으나(입주는 1990년~1991년), 본격적으로 단독으로 부산지역 아파트 사업에 뛰어든것은 1992년이었으며 그해 하반기에는 부산지역에서 처음으로 1408세대 규모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부곡동 경남한신아파트[10]를 경남섬유로 부터 단독 발주 받기도 하였으며 이때 동부산 지역에 본격 진출 하였다.
1994년에는 부산지역 주택사업을 본격화 하기 위해 부산에 작정하고 현지법인을 만드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으나 워낙 부산 진출이 늦었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한신 아파트는 고급브랜드 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삼익주택[11], 주식회사 한양이나 지금도 잘 나가고 있는 선경건설(현 SK건설), 현대건설(현 HDC현대산업개발), 럭키건설(현 GS건설) 같은 유명 고급 브랜드 아파트들은 물론이고 부산 향토기업으로 홈그라운드 버프를 받던 당대 부산최대 건설사인 자유건설은 물론이고 동원개발, 주식회사 삼정, 반도종합건설에도 인지도에서 밀릴 정도[12]인데다가 이미 부산에는 한신주택[13]이라는 비슷한 사명의 건설업체가 1970년대 후반에 훨씬 먼저 들어와서 연립주택과 아파트를 동부산 위주로 워낙 많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부산 사람들은 한신아파트 하면 한신공영 보다는 한신주택을 떠올릴 정도이며 지금도 부산에서 한신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아파트들은 한신공영에서 만든 것 보다 한신주택에서 만든게 더 많이 남아있다.
그래도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부곡동 대단지인 경남한신아파트(1995년 입주)의 성공 및 부산 중심지인 서면의 대양고무 부지에 서면 한신아파트 발주를 따내서 분양하고, 동래구 사직동에서 사직한신아파트를 분양하면서 부산지역에서 나름대로 메이커 아파트 브랜드로 자리 잡는듯 싶었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IMF 사태로 부도나면서 다시 안습화 되고 말았으며 이 무렵에 부도 사태로 인한 하자 보수 문제로 입주민들이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결국 부산진출 타이밍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 게다가 부산지역 언론사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도 발목을 잡은 원인이었다.
그래도 부도 이후에 워크아웃을 거치고 주인이 바뀌면서 어느정도 재기하여 부산에 재진출해 서부산지역에서 휴플러스 브랜드로 아파트를 계속 짓고 있기는 하지만, 동부산지역에서는 여전히 힘을 못쓰고 있으며 삼성물산이 한동안 부산지역에서 시망 상태가 되었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래미안 해운대, 래미안 장전 등의 분양을 시작으로 부산지역 재진출에 대성공하여 대단지 아파트들을 계속 만들어내는것과 대조되기도 한다. 아마도 주인이 바뀐 이후에는 부산지역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으나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다시 부산지역에서 의욕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듯 하며, 동부산권에도 IMF 사태 이후로는 정말 오래간만에 재진출 하였다. 하지만 2017년 이후 부산지역의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고, 2018년 들어서 부산 지역업체 용적률 인센티브가 20%로 크게 상향적용되는 바람에 부산 지역 건설업체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이 되는 등 암초를 또 다시 만난 상황.
여담이지만 부산 향토기업 건설업체인 주식회사 삼정의 아파트 브랜드 삼정그린코아의 기원이 이 회사이다. 본래는 한신코아 브랜드의 연장선이자 파생형으로 한신공영, 주식회사 삼정, 반도종합건설 3사가 합작해서 만든 만덕 그린코아에서 유래된 부산지역 한정 브랜드였고 그린코아 브랜드를 주식회사 삼정과 공유하기도 했지만, 한신공영이 부도난 이후에 파트너였던 주식회사 삼정 단독의 고유 브랜드가 된것. 아이러니하게도 한신코아 브랜드는 아예 사라지지 않고 다른 회사로 넘어가서 브랜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늦게 나온 한신 오페라하우스 브랜드는 주인이 바뀌면서 두번밖에 안쓰이고 폐기 당했고, 주인이 바뀐 이후에 나온 한신휴플러스도 실적이 신통찮아 결국은 폐기되며 2016년에 '''한신더휴'''로 교체되었다.

4. 대표 실적




[1] 지금 시세로는 억대이다.[2] 다만 뉴코아그룹의 부도 후 김의철 회장은 경영권을 상실했으며 뉴코아가 이랜드에게 인수되면서 지금 뉴코아 회장은 이랜드 회장인 박성수이다.[3] 그래서 지금 '뉴코아'의 이름이 붙은 곳에는 애슐리와 같은 이랜드그룹의 계열사들이 들어서 있다.[4] 당시 브니엘학원은 신학대학을 설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금정구의 이상한 부지를 삼성물산에서 사들여 거기로 이전하고, 원래 학교가 있던 부지는 한신공영에 매각하여 이걸로 번 시세차익으로 신학대학을 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후적지는 한신공영이 아파트를 지었으면 나름 윈윈이었겠지만 도로건설 문제와 보증 문제가 엮여있었고 결국 외환위기와 함께 공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5] 전북 소재 협승토건이라는 지역 건설업체(한때 메이커아파트였다가 1996년에 망한 우성건설과 친척관계였다고 한다)가 코암시앤시개발이라는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인수하였다고 한다.[6] 이쪽의 경우도 회사는 1990년대 중반에 폐업하여 사라지고, 우성건설 처럼 브랜드만 수억대의 헐값에 팔려갔다.[7] 특이하게도 법인명의 한자어가 韓信學園이 아닌 韓信學'''院''' 이었다. 일반적으로 학교법인의 한자어는 學院이 아닌 學園으로 끝난다는것을 생각하면...[8] 사립학교 형태로 설립하면 한신공영 입장에서는 추후에 어떻게 해서라도 해당 부지들을 다시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9] 이쪽의 경우는 부산지역에서 그런대로 잘 나가는듯 싶었다가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의 주요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부산에서 한동안 완전히 시망 상태가 되어버렸고 이후에 전개될 부산지역에서의 많은 계획들이 아예 엎어져버렸다. 그러나 수십년후인 2014년에 재진출 하면서 장전 래미안 분양에서 대박을 터트렸다.[10] 지금이야 이 아파트의 과거의 위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나 1992년 분양 당시에는 부산에서 극초기에 20층을 돌파한 대단지 아파트로 부산에서 큰 화제를 모았으며, 1995년 완공당시 금정구 일대에서 단일 단지로는 구서주공아파트(2,180세대) 다음 가는 세대수를 자랑한데다가(민간건설사가 지은 아파트로는 당시 금정구 최대규모), 금정구 최초로 20층을 돌파한 고층 아파트이자 금정구 최초로 지하주차장을 갖춘 아파트로 한신공영이 올림픽선수기자촌의 시공에 참여했을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었고, 2006년 구서 롯데캐슬 골드 입주 이전까지 까지 금정구 대장 아파트로 유명했었다. 1990년대 당시 금정구에서 경남한신아파트의 위상은 지금의 래미안 장전 이상 가는 수준이었다. 이때 한신공영이 기업을 똑바로 운영했다면 신반포 한신아파트의 신화를 부산에서도 늦게나마 경남한신아파트를 필두로 이어갈 뻔 했었다.[11] 1970~1980년대 부산지역에서 가장 알아주던 아파트 브랜드였으며 특히 당시 부산 최고의 부촌으로 통하던 수영구 남천동에 위치한 삼익비치로 대표되는 삼익시리즈는 부산지역 최초의 브랜드 타운이었다.[12] 부산지역 최초 진출때 향토기업과 합작한 전략을 쓴 것이 이러한 이유였다. 울산이나 광주같은 타 지역에도 최초 진출때는 향토기업과 합작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3] 이름은 비슷하지만 이 회사의 마크는 머큐리 자동차 앰블렘과 비슷하기에 눈썰미가 있으며 쉽게 구분 할 수 있었다. 이 회사 역시도 한신공영과 비슷한 시기에 망했으나 한신공영은 그래도 건설사업부만은 매각되어 살아남은것과는 달리 이 회사는 그냥 아예 없어졌다.[14] 동 중앙부가 뻥 뚫린 아파트다. 한신공영 홈페이지 메인에 있다. [image][15] 두산산업개발(현 두산건설)과 공동 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