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1600)

 



'''조선 선조의 왕자'''
'''경평군
慶平君'''

'''군호'''
경평군(慶平君)
'''본관'''
전주(全州)
'''이름'''
륵(玏)
'''부왕'''
조선 선조
'''생모'''
온빈 한씨(溫嬪 韓氏)
'''부인'''
군부인 삭녕 최씨(朔寧 崔氏)
'''생몰
기간
'''
'''음력'''
1600년 6월 ~ 1673년 11월 28일
'''양력'''
1600년 미상 ~ 1674년 1월 4일
'''묘소'''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1. 개요
2. 생애
2.1. 사건사고
3. 사망과 이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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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서11남으로 어머니 온빈 한씨에겐 2남이다. 친남매로는 형 흥안군과 여동생 정화옹주, 남동생 영성군이 있다.

2. 생애


1600년(선조 33년)에 태어났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에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1. 사건사고


성격이 좀 괄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특히 사람들을 잡아다 감금하고 폭행한 게 많았다.
  • 흥안군과 함께 새 궁궐 부지에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가옥들을 마음대로 철거하거나 노비들에게 시켜서 빼앗았다. 그리고 늙은 부녀자를 구타하고 과부들을 능욕하는 행위도 저질렀다.# 그래서 1616년(광해군 8년) 음력 4월 1일에 사간원에서 탄핵을 받았다.#
  •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빈궁[1]의 하인 임백(林栢)을 붙잡아 끌고 가 감금한 뒤 거의 죽을 때까지 폭행했다.# 뿐만 아니라 3년 뒤인 1621년(광해군 13년)에도 하인들을 시켜 활인서의 별제로 있던 이제인을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팼고#, 그 다음 해인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한 금리와 그의 아내를 잡아다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
하도 경평군이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니자 일부에서는 "숱한 왕자'''들'''"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2] 그러자 경평군의 친형 흥안군과 이복형 인성군은 자신들까지 싸잡혀 욕먹는 게 억울하다며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1623년(인조 1년) 서조카 인조가 즉위했음에도 경평군의 행동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 강가에다 정자를 지어놓고 무단으로 낚시터를 빼앗은 뒤 그 지역의 백성들을 고기잡고 나무하는 일에 부려먹었다.
  • 그리고 광해군 40결을 빼앗아다 스스로 세금을 징수했는데, 인조반정 이후에 원래 주인들에게 되돌려준 것을 또 빼앗으려 했다.#
  • 보물을 감춰두고는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 무단으로 가두고 구타한 뒤 그 사람의 재산을 다 강탈했다.#
  • 노비를 시켜 소를 훔쳤다가 관원에게 적발되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관원과 그의 가족들을 잡아다 채찍질을 한 뒤[3] 가뒀다.#
  • 자신의 집을 짓는데 관련 부서에서[4] 돈을 안 주었다며 관원들에게서 돈을 빼앗았다.#
  • 자신에 집에 사설 감옥을 만들어 채무자를 가뒀다.#
  • 관상감의 공물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이러한 경평군의 모습을 보고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경평군에게 정신 장애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당장 동 시대를 살았던 인조도 경평군에 대해 "'''이미 실성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3. 사망과 이후


1674년(현종 15년) 1월 4일[5]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6]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에 있다.

4. 여담


  • 경평군의 탯줄을 묻은 태실이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의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있다. 원래는 갑천 인근의 한 야산에 있던 것으로, 1991년 대전 - 논산간 국도 확장 공사 때 출토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1991년 10월 24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5. 가족과 후손


삭녕 최씨 부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이름 모를 소실 3명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딸 둘은 각각 주부 권엽과 직장 황윤정과 결혼하였다.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은 영양군 이현(嶺陽君 李儇)이며 서자는 영흥군 이창(嶺興君 李倀), 영주군 이파(嶺洲君 李𠐌), 영림군 이희(嶺臨君 李俙)이다. 영양군은 효종 때 1품에 가자되고 사은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다.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경평군의 5대손인 이택수(李澤遂)와 이양수(李養遂), 이회수(李會遂)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이 사사될 때 연루되어 1777년(정조 1) 이택수는 사형당했고, 이양수와 이회수는 각각 추자도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택수와 이회수는 1851년(철종 2년)에 복권되었다.#

[1] 嬪宮. 왕세자빈의 궁.[2] 사실 선조의 왕자들 중에 못된 짓들을 하고 다닌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등.[3] 말채찍으로 구타했다고 한다.[4] 실록 원문에는 '해조(該曹, 해당 조란 뜻)'로 적혀있다.[5] 음력 1673년(현종 14년) 11월 28일.[6] 세는나이 7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