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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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서11남으로 어머니 온빈 한씨에겐 2남이다. 친남매로는 형 흥안군과 여동생 정화옹주, 남동생 영성군이 있다.
2. 생애
1600년(선조 33년)에 태어났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에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1. 사건사고
성격이 좀 괄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특히 사람들을 잡아다 감금하고 폭행한 게 많았다.
- 형 흥안군과 함께 새 궁궐 부지에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가옥들을 마음대로 철거하거나 노비들에게 시켜서 빼앗았다. 그리고 늙은 부녀자를 구타하고 과부들을 능욕하는 행위도 저질렀다.# 그래서 1616년(광해군 8년) 음력 4월 1일에 사간원에서 탄핵을 받았다.#
-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빈궁[1] 의 하인 임백(林栢)을 붙잡아 끌고 가 감금한 뒤 거의 죽을 때까지 폭행했다.# 뿐만 아니라 3년 뒤인 1621년(광해군 13년)에도 하인들을 시켜 활인서의 별제로 있던 이제인을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팼고#, 그 다음 해인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한 금리와 그의 아내를 잡아다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
- 강가에다 정자를 지어놓고 무단으로 낚시터를 빼앗은 뒤 그 지역의 백성들을 고기잡고 나무하는 일에 부려먹었다.
- 관상감의 공물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3. 사망과 이후
1674년(현종 15년) 1월 4일[5]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6]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에 있다.
4. 여담
- 경평군의 탯줄을 묻은 태실이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의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있다. 원래는 갑천 인근의 한 야산에 있던 것으로, 1991년 대전 - 논산간 국도 확장 공사 때 출토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1991년 10월 24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5. 가족과 후손
삭녕 최씨 부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이름 모를 소실 3명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딸 둘은 각각 주부 권엽과 직장 황윤정과 결혼하였다.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은 영양군 이현(嶺陽君 李儇)이며 서자는 영흥군 이창(嶺興君 李倀), 영주군 이파(嶺洲君 李𠐌), 영림군 이희(嶺臨君 李俙)이다. 영양군은 효종 때 1품에 가자되고 사은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다.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경평군의 5대손인 이택수(李澤遂)와 이양수(李養遂), 이회수(李會遂)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이 사사될 때 연루되어 1777년(정조 1) 이택수는 사형당했고, 이양수와 이회수는 각각 추자도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택수와 이회수는 1851년(철종 2년)에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