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1969)/선수 경력
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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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김기태보다 더 몸 좋은 분은 장훈 선생.
1991년 신생 팀 특별우선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쌍방울은 구단 차원에서 첫 시즌부터 투수 김원형, 조규제, 타자 김기태 구도로 팀의 간판으로 만들었다. 입단하자마자 팀의 4번타자라는 중책을 맡았으나, 5월까지 홈런 0에 타율도 2할 턱걸이라서 초창기 전주아재들이 김기태가 타석에 나오면 욕을 엄청나게 해댔다. 이 기간 본인도 마음고생이 굉장히 심했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믿고 계속 4번타자로 기용한 김인식감독 덕택에 5월부터 홈런을 쳐가면서 부진에서 탈출하여 이후 쌍방울의 중심타자로 자리매김한다. 1991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262, 27홈런으로 35개를 친 장종훈의 뒤를 잇는 홈런 2위를, 그것도 신인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신인왕은 팀 동료였던 좌완투수 조규제가 구원왕 타이틀을 앞세워 차지했다.
이후 이승엽 이전까지 좌타 최다 홈런(31홈런, 1992년)[1] , 3년 연속 골든 글러브(1992~1994. 지명타자) 수상으로 가난한 쌍방울의 핵심 선수이자 타선의 해결사로 활약했다. 1993년에는 타율 0.240에 홈런이 고작 9개라 골든글러브 받기엔 민망한 성적이었지만(...) 당시 타격왕과 홈런/타점왕을 차지한 양준혁, 김성래가 둘 다 1루수 후보로 가버리는 바람에 김기태가 그대로 지명타자 부문을 지켰다. 1994년에는 25개의 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도 차지하였다. 25개라는게 투고타저를 감안해도 적은수치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시 김기태는 방위병 신분으로 원정경기에 제약을 받아 당시 126경기체제였던 리그에서 18경기를 결장한 108경기를 뛰고도 홈런왕을 따냈으며 앞으로 나올수가 없는 방위병 홈런왕'''을 이뤄냈다. 게다가 프로야구 최초의 좌타 홈런왕이 되었다. 1997년에는 타격왕(.344)을 차지하기도 했다.[2]
특히 박경완과 심성보, 조원우가 같은 팀 동료로 있던 1997 시즌 쌍방울 레이더스의 타선은 공포 그 자체였다. 넘사벽이였던 삼성을 제외하면 해태랑 비교했을때 팀 타율 및 출루율, 장타율, ops가 전체 2위로 해태보다 우위였다. 득점만 3위. 도루수가 해태 148, 쌍방울 81로 당시 쌍방울감독 김성근은 도루를 자주 시도하지 않았고, 이게 득점 저하로 이어졌던 것.[3] 쌍방울에서 김기태를 제외하면 그리 큰 타자가 없었던 관계로 타 구단 감독이 '''"쌍방울은 김기태만 조심하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항상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는데, 15시즌동안 사사구 '''975개'''를 얻어낸 것도 이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무려 '''한 시즌당 평균 65개'''다! 그것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굳이 집중 견제를 할 필요가 없어져 저기서 멈췄지 쌍방울 시절에는 시즌 100사사구를 무려 3번이나 기록했을 정도이다. 쌍방울이 해체되지 않고 은퇴할 때까지 뛰었으면 통산 1000개는 가볍게 넘었을 것이다.
1996~1998년까지[4]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쌍방울의 주장을 맡으며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다. 오죽하면 당시 김성근 감독이 "구단이 아무리 어려워도 김기태만은 절대 팔지 말아달라", "김기태는 미래의 감독감"이라 했을까.[5] 훗날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 주최를 주도한 두 제자가 바로 김기태와 이연수[6] 였으니 쌍방울 시절의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01 이후의 행보를 보면 홍현우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 역시 먹튀의 모습을 보였다.
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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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로 모기업이 부도난 쌍방울은 결국 핵심 선수인 조규제, 박경완(현대) 김현욱, 김기태(삼성)을 팔아치워 구단 운영비를 대야만 했다. 특히 김기태의 경우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쌍방울이 IMF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때 선수단에서 가장 힘이 되었던 선수가 김기태였고, 쌍방울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998년 시즌 끝난 뒤 팔려 나갔으니...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모든게 다 끝났다.' 라고 말하며 실의에 빠졌다. 전 해 6위팀의 중심타자+중심 중간계투를 빼앗긴 건 그팀에겐 사형선고였다. 김기태의 존재가 쌍방울에 있어서 매우 컸다는것을 의미한다. 쌍방울 시절 문서에 서술되어있다시피 쌍방울 선수단에서 김기태는 선수단을 하나로 뭉치는 데에 매우 큰 공헌을 한 선수였다.
1998년 겨울 임창용과의 3:1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에 팔려간 양준혁 대신 삼성에 들어와 이적한 첫해에 수비 포지션을 좌익수로 옮기는 등의 대란에도 불구하고[7] 괜찮은 활약을 보여 줬고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으로 뽑힐 정도였었다. 그러나 김응용 감독과의 마찰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당시 이승엽을 불참시켰다는 이유로 좋은 이미지를 다 깎아 먹이는 바람에 삼성 팬들에게 실망만 남겼으며, 이후 이적하기 전의 팀이 하필이면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였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언급이 잘 안되는 편이다. [8]
선수협 관련 활동이 있던 이 시기에 선수협을 주도했던 동갑내기 좌타자[9] 양준혁과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10] 그렇긴 한데, 사실 김기태도 선수협 창단 자체에는 우호적이였다. 그런데 양준혁은 선수 노조를 원했고, 김기태는 구단에게 인정을 받는 조직을 원한 것이 차이점이자 갈등의 시작. 다른 건 둘째치고 '''선수협 참가 선수들과 팬들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대치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선수협 오적 중에서도 수위권에 든다는 평가. 물론 무노조 원칙을 주로 했던 삼성이라는 환경, 그리고 삼성 입단 직후인 불안한 입지를 생각할때 그가 어느정도 윗선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선수협에서도 삼성 라이온즈의 모든 선수는 선수협에 호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훗날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에 출연한 김기태는 '부자구단 삼성으로 이적을 했는데 삼성은 모든 것이 우월한 환경인데도 선수들은 불평불만을 하더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11] 간접적으로 선수협을 디스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본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야구 시켜주는 데 감사할 줄 모르니 구단 편에 선 것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김기태는 은퇴 후 아이 러브 베이스볼과의 인터뷰에서 쌍방울은 계속 이길 수 없는 팀이었는데 반해 삼성의 경우 계속 이길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서 이적했다고 한다. 허나 립서비스에 가깝고 애초에 쌍방울의 자금 사정 문제와 삼성의 양준혁을 대체할 장타자 구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억지로 팀을 옮긴 거라 새 팀인 삼성에서의 적응은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그 처참한 수비력으로 좌익수까지 해야 했다. 2001년에 취임한 김응용 감독 역시 김기태에 이어 마해영까지 오자, 거포들 기용문제를 두고서 골머리를 앓았고, 포지션이 겹쳤던 이승엽 때문에 지명타자, 외야수로 뛰면서 하락세가 시작되었고, 좌익수로 뛰던시절 그의 수비는 폭탄수준이었다.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와 롯데에서 이적해 온 마해영에 밀려 결국 김기태는 주전급 기량은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벤치 신세를 지게 된다.
비록 선수협 5적 파동과 막판에 김응용 감독과의 마찰로 인해 이미지가 흠집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고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었을 당시에도 맏형 이미지가 있었다. 삼성 구단 사상 첫 이적생 출신이 주장을 맡은 사례기도 하다. 특히 이승엽은 대놓고 그를 '''보스'''라 칭하였다고(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인터뷰 중). 포지션이 경쟁에서 이승엽에게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투수가 아닌 타자로 뛰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엽에게 '너같이 재능있는 타자가 방망이를 놓는 건 한국프로야구계의 큰 손실이다'라며 달래던 것이 김기태였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과도 큰 마찰은 없었다는 듯. 최근 올라오는 기사나 사진을 보면 양준혁하고도 앙금은 많이 풀린 듯 하다.
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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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시즌 종료 후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은 뒤 트레이드 시장에 나오자 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가 김기태를 얻으려고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결국 6:2 현금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게 된다.[12] 애석하게도 김기태는 예전의 김기태가 아니었다. 2002~2003년은 많은 타석을 제공받으면서 홈런수도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2004년 SK에서 126경기에 출장, 3할에 복귀[13] 하며 지명타자 부문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2005년 시즌에는 부상으로 1군 54경기에 그쳤고, 타율 또한 2할 5리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은퇴한다. 동갑이면서 1년 후배인 양준혁이 30대 후반에 나이에도 3할을 치며 42세까지 롱런해서 비교되긴 하는데, 사실 이건 양준혁이 터무니없이 오래 버틴 거고 김기태도 37세에 은퇴면 지금 기준으로도 그다지 이르지 않은 은퇴로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여담으로 마지막 시즌 중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었는데, 몸 상태 체크를 위해 당시 같은 팀 소속이었던 신승현과 라이브 배팅 훈련을 했다고 한다. 당시 김원형과 선발 원투펀치로 활약하면서 절정의 기량을 보이던 신승현의 강속구를 받아쳐 좌익선상으로 날아가는 빨래줄 안타를 쳤는데, 이로 인해 복귀를 서두르다 일주일 만에 부상을 당하면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은퇴의 단초가 되었다 회고한 바 있다.[14]
4. 총평
3000 타석 이상 기준 누적스탯을 보면, wRC+, 출루율, 장타율, OPS, 볼넷이 모두 10위권 내에 랭크되어 있고, 15시즌 6000여 타석 동안 통산 wRC+가 150대, 통산 warbat이 70에 근접한 역대급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타자이다. 발이 아주 빠른건 아니었지만 주루센스가 준수했고 도루도 두자리 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비는 뛰어나다곤 할 수 없었고 1루 수비는 곧잘하긴 했지만, 삼성시절 잠시 뛰었던 외야수비는 20시즌 이전의 나지완을 떠올릴 정도로, 95-117-95의 작은 구장이었던 대구에서도 좌익수로 나가면 불안정한 수비를 보였다.[15] 타구판단도 타구판단이지만 어깨는 그 이대형, 박용택 에 비교될 정도로 소녀어깨였다.[16]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S급이라곤 그 혼자인 약체타선에서 견제받으면서도 화려한 성적을 쌓은 선수로, 90년대와 쌍방울 대표하는 선수이며, 프로야구 역사에 남기에 충분한 선수이다. 기록면에서 김기태 이상인 좌타자는 양준혁, 장효조, 이승엽 외엔 없다. 10년대를 대표하는 타자였던 최형우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듯 하다.[17]
[1] 그 최다 홈런도 31개로 1992년과 1998년 2번을 기록했다. 이승엽이 1997 시즌 32개로 경신한 이후 1999년 '''54개''', 2003년 '''56개'''로 한참을 넘어 버렸다![2]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홈런왕과 타격왕을 모두 수상해 본 선수는 김기태를 제외하면 이만수와 이대호, 김태균, 최형우 뿐. 즉, 이만수 이후로 최초의 홈런왕과 타격왕을 동시에 차지한 선수이다.[3] 쌍방울에 발 빠른 선수가 없는건 아니었고 1998~1999년에는 쌍방울 팀 도루가 늘어났기 때문에 그냥 이 기간동안만 도루를 적게 했을 뿐이다.[4] 1998년에는 삼성으로 팔려가기 전까지 주장직을 수행하였다.[5] 그리고 2015 시즌 당시 감독과 미래의 감독감은 각각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서 만나게 되었다.[6]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외야수로 선수 생활을 했고, 쌍방울에서 선수단 매니저로 일하다가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1999년에 잠시 선수로 복귀한 바 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이다.[7] 당시 찰스 스미스, 이승엽과 수비 툴이 겹치고 지명타자도 자리가 없어서 결국 누군가는 좌익수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웃긴 건 찰스 스미스도 가끔 좌익수비를 봤다는 것. 체구가 '''이대호'''만 했는데도![8] 그런데 사실 김기태는 해태의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1991년에는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후 신생팀 쌍방울을 위한 10명 특별지명이 있었다. 쌍방울은 1차지명으로 조규제를 지명했고, 해태는 1차지명에서 김기태와 한양대 좌완 투수 에이스 오희주를 놓고 갈등했다. 결국 선택은 오희주였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태에 1차지명되지 못한 김기태는 당연히 쌍방울에 특별지명되게 된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나중에 김응용도 그 때 김기태를 데려왔어야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9] 다만 김기태가 조기입학을 해서 양준혁보다는 1년 선배이다.[10] 다만 주먹다짐을 하긴했는데, 상대는 양준혁이 아닌 유지현. 그 이유는 LG부터 창립총회에 들어가느냐, 삼성부터 들어가느냐인데, 그 뒤로 김기태가 말대꾸를 한다고 유지현을 나무라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기태, 유지현은 구단파로 옮기게되고, 조경택을 제치고 선수협 오적이 된다.[11] 실제로 삼성의 구단지원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풍부했었다. 반면에 해태보다도 가난한 쌍방울은 그런 거 없었다.[12] KIA는 오철민, 최영완에 현금을 더 얹어서 준다했고, 결국 SK가 엄청난 현금으로 트레이드에 성공했다.[13] 작가 김은식의 칼럼에 따르면 김기태 하면 장타력 있는 타자라는 생각으로 수비수들이 후진수비하는 것을 역이용, 컨택에 중점을 둔 간결한 스윙으로 타격을 바꾸면서 3할 복귀에 성공했다고 한다.[14] 그 뒤 신승현과 마운드에서 재회하게 되는 데에는 8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13년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이대형의 보상 선수로 신승현이 선택되면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된 것. SK 시절에는 선후배 관계였던 두 인물이 짧게나마 감독, 선수의 관계로써 재회하였다.그러나 김기태가 고른 신승현은 LG에서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2군에서만 맴돌았고, 김기태가 강력하게 요청해서 2014 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데려온 김선우와 임재철도 팀에서 빅똥만 싼채 둘다 2014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15] 다만 이적 첫시즌인 99시즌만 좌익수로 어느 정도 출전했고 그 이후는 드물게 나왔다. 주로 지명타자로 나오던 00시즌에 어쩌다 좌익수 김기태, 중견수 김종훈, 우익수 프랑코의 역대급 외야진이 나오기도 했는데, 좌익수 경험이 거의 없던 김기태와 주로 내야수를 봤던 프랑코에 김종훈은 좌익수로는 괜찮지만 중견수로는 수비범위가 넓다곤 할 수 없었기에.. 게다가 김종훈, 김기태 모두 어깨가 약해서 좌중간으로 빠지면 주자의 추가 진루의 위험이 다분했다.[16] 최형우와 나지완은 소녀어깨는 아니다. 송구 컨트롤이 안좋아서 소극적으로 송구하는 것일 뿐..[17] 다만 최형우는 커리어 대부분을 코너 외야수로 나오며 주로 포지션 플래이어로 나왔다는 것에 비해 김기태는 1루수도 보긴했지만 지명타자로 더 많이 나왔고 사실상 지명타자로 분류된다는 점이 구분되고, 한 선수는 왕조를 이륙한 팀을 상징하는 선수였고 한 선수는 돌풍의 중심이긴 했지만 우승까진 가지 못한 팀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팀커리어가 크게 갈린다. 이에 이게 구분점이 되어 '''최형우가 더 윗급으로 평가될 소지는 다분하다 못해 확실하긴 하다.''' 다만 순수하게 타격적인 면에서 당시의 최형우 비슷한 위상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