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멸망전

 

'''촉한멸망전'''
'''시기'''
263년 여름 ~ 263년 11월[1]
'''장소'''
한중, 답중, 검각, 음평, 부현, 면죽
'''원인'''
사마소, 황제 시해 후 권력 안정화 도모.
'''교전국'''
'''조위'''
'''촉한'''
'''지휘관'''
<^|1>정서장군 등애
옹주자사 제갈서
진서장군 종회
대장군 강유
우대장군 염우
좌거기장군 장익
우거기장군 요화
보국대장군 동궐
위장군 제갈첨
'''참전 장수'''
'''등애군'''
농서태수 견홍
진서사마 단작
혜당정후 등충
번진
사마 사찬
금성태수 양흔
천수태수 왕기
진로호군 원소
전속#s-3
━━━━━━━━━━
'''종회군'''
중령군사마 가보
낭중 양수
장하독 구건
장군 구안
진서장사 두예
주부 등은
참군 양수
전장군 이보
참군 원정
감군 위관
위흥태수 유흠
장군 전장
아문장 허의
호군 호열
호연
방회
순개
장군 왕매
참군 황보개
진서장군사마 하후함
산장 왕기
<^|1>좌중랑장 부첨
비령 상욱
감군 왕함
황금성도독 유은#s-1
우림우부독 이구#s-3
수무장군 장빈
상서 장준#s-1
아문장 조광
상서랑 황숭
제갈상
마막
장서#s-2
'''병력'''
'''등애군'''▶ 3만 명
━━━━━━━━━━
'''종회군'''▶ 10만~12만 명
━━━━━━━━━━
'''제갈서군'''▶ 3만 명
10만 2천 명 이상[2]
'''피해'''
피해 규모 불명[3]
피해 규모 불명[4]
'''결과'''
촉한 멸망, 264년 성도 대학살 발생.
'''영향'''
사마소, 진왕 즉위. 동오의 영안 침공.
1. 개요
2. 전쟁 발발전
2.1. 사마소의 전쟁 준비
2.2. 강유의 위나라 침공 파악, 그러나...
3. 전쟁 발발
3.1. 1기: 위나라의 침공과 강유의 고군분투
3.2. 2기: 산악인 등애
3.3. 3기: 제갈첨과 개국공신 후손들의 결사항전
3.4. 4기: 유선의 항복과 촉한의 멸망
3.5. 5기: 성도의 난
4. 후일담
5. 평가
6.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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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촉한멸망전(蜀漢滅亡戰), 또는 위멸촉지전(중국어 간체: 魏灭蜀之戰, 정체: 魏滅蜀之戰(중국어 위키백과))
263년, 위나라의 권력자 대장군(정벌 중에 진공으로 승진) 사마소종회, 등애, 제갈서에게 명령해 16~18만의 대군을 편성해 촉한을 멸망시킨 전쟁.
답중에 주둔한 촉한의 대장군 강유가 등애와 제갈서의 방해를 받는 틈에 종회가 한중의 양안관구를 돌파했으나 강유가 제갈서를 따돌리고 검각에서 농성하며 종회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방비에 성공할 뻔했다. 이에 정서 장군 등애가 험지 중의 험지인 음평에서 강유관[5]으로 진격, 수문장 마막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고 곧이어 등애가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해 낙현에서 촉한의 수도 성도를 노렸다.
이에 촉한의 황제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하고 필사적으로 처현의 도로를 따라 성도로 달려오던 강유도 유선이 항복하자 동광한군 오성(五城)현에서 역시 항복했다.

2. 전쟁 발발전



2.1. 사마소의 전쟁 준비


삼국시대(중국)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대한 조위촉한동오를 상대해야 했는데, 실제적인 삼국 정립 후 실제적으로 위를 괴롭히는 것은 촉한이었다. 256년 등애에게 내린 조서를 보면,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중에서 조조를 이겨 그곳을 차지하고 한중왕을 선언하며 한실 부흥을 외친 유비, 한때 번성양양으로 진격해 화하를 진동시킨 관우, 명제 조예가 서쪽의 일은 사마의 당신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위나라를 밀어붙인 제갈량, 장완비의 시대부터 적은 병력으로 계속 위나라의 신경을 건드리고 자신이 병권을 잡고나서는 옹주 전체의 병력을 박살내 옹주가 넘어갈 뻔한 피해를 입히고 단곡에서 격파되기도 하는 강유 등 양국 간에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어쨌건 피해를 안 입고 간에 변경에서 계속 적이 준동하고 농서에 주로 살던 강족 등 이민족들을 포섭하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사마소는 내심 촉나라를 오나라보다 먼저 쳐서 없앨 계획을 가졌다. 이 때 대장군 사마소는 자신에게 반항하던 위나라 황제 조모를 시해하고 어린 허수아비 황제 조환을 올려 위나라를 사실상 멸망시켰으나, 자신이 새로 황제로 등극할 진(晉)을 건국하기엔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위나라 허수아비 황제의 구석과 진공(晉公) 하사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측근인 종회와 함께 몰래 촉한을 멸할 계책을 세웠다.[6]

그리고 기만책으로 사마소는 자신의 뜻을 따라줄 종회를 진서 장군, 가절 도독 관중 제군사에 임명하고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등 모든 주에 배를 만드라는 명령을, 특히 큰 전함을 따로 만들라는 주문까지 했다. 이 지역에서 위나라가 배를 타고 칠 만한 나라는 물론 오나라밖에 없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사마소가 곧 오나라를 치는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오나라를 친다고 해도 분위기 상으로는 이상하지 않았는데, 손휴가 승상이었던 손침을 주살하고 거기에 얽힌 혼란, 복양흥에 의한 포리당 건설 사업과 그 복양흥이 승상이 된 일 등으로 인해 굉장히 분위기가 불온했던 상황이기 때문.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장대한 훼이크로, 오를 치는 척하며 촉으로 진군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렇게 장장 일 년간 오나라를 친다는 시늉을 하던 사마소는 꼬박 1년이 지난 263년 여름, 문무 중신들을 모아놓고 갑자기 폭탄선언을 한다. "우리는 오나라가 아닌 촉한을 친다!" 사마소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며 중신들에게 말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수춘 평정(제갈탄의 난) 이후 6년간 전쟁이 없었다. 이제 다시 군사를 일으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 그런데 오나라를 친다고 하면,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러면 10만 군사를 동원해 백여 일이 넘게 전투를 치뤄야 하고 또 그 군사를 지원하기 위해 천만 명이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북방인 출신 병사들은 역병에 고생할 것이다.
  • 촉을 먼저 치고 3년 정도 잘 준비한 뒤 파촉을 통해 수륙 양용으로 오나라를 치면 전투는 훨씬 쉬울 것이다.[7]
  • 촉을 먼저 쳐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고, 그러면 이제 촉나라의 상황을 보자. 촉의 군사는 대략 9만 명 정도 된다. 이 중에 일부는 성도를 지켜야 하고, 다른 일부는 오나라와의 국경선 등 다른 곳에 배치되어야 하며, 막상 전투에 내놓을 수 있는 실제 전력은 딱 5만 정도다![8]
  • 강유가 문제인데, 강유는 답중에 있다. 대군을 분산시켜 그 강유를 답중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묶어놓은 상태로 한중과 검각을 돌파하면 유선이 멍청하기 때문에, 성도에서는 놀라서 제대로 대응도 못할 것이다. 따라서 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
사마소가 262년부터 촉을 치겠다는 것은 정사 삼국지 종회전에 보이는데 262년부터 '오나라를 노리는 척'하며 분주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고 나중에 종회에 대한 사마소의 평을 보면 "오직 종회만이 나와 뜻이 비슷했다." 고 하는 말로 봐서 종회 정도 외에는 이런 세부적인 계획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사마소와 종회의 대전략은 한마디로 '강유를 묶고 단숨에 촉한의 요지를 돌파해 성도를 취하자!'이다.
다른 중신들은 적극 찬성까진 아니어도 그냥저냥 동의하는 쪽으로 갔으나, 다만 대촉 전선 담당이였던 등애만은 이 전역이 어렵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촉 전선의 전문가이자 명성 높은 등애의 의견인 만큼 당시 촉한의 대비 태세를 살폈을 때 촉한을 치는 것은 해당 전선 실무자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 모양이다. 이런 등애를 배제하면 아예 작전 수행이 어려워지므로 주부(主簿) 사찬(師纂)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거듭 설득하고 등애 역시 결국 마지못해 동의한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동의를 얻은 사마소는 전국에 군사 동원령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병력의 숫자는 무려 16만 명(정사 삼국지)~18만 명(진서). 정말로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이라는 느낌이 확 들 정도로 엄청난 병력을 모은 사마소는 그해 가을 8월 낙양에서 대규모 진열식을 가지면서 필승을 기원했다. 이때 등돈(鄧敦)이라는 장군이 촉 정벌은 불가하다고 하자, 사마소는 바로 등돈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시신을 사람들 앞에 조리돌림 했다. 사마소가 이 전쟁에 대하여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며, '''사마소의 뜻을 거스르고 이 전쟁을 방해하면 곧 죽음뿐'''이라는 메시지를 만천하에 보인것이다.
이렇게 진용을 짠 후 사마소는 병력을 세 군데로 나누었다.
  • 정서 장군 등애: 그동안 대촉 전선에서 강유의 공격을 막아내던 대촉 전선 베테랑. 3만 군대를 이끌고 적도에서 답중으로 침공하여 그 곳에 있는 강유를 붙들어놓는 임무를 맡음. 금성 태수 양흔, 농서 태수 견홍, 천수 태수 왕기 등이 이 군대에 포함된다.
  • 옹주 자사 제갈서: 역시 3만 대군을 이끌고 기산 방면으로 진군해서, 등애와 맞붙는 강유가 퇴각하여 다른 전장으로 구원을 가려고 하면 퇴로를 막아 저지하고 시간을 끄는 임무를 맡는다. 즉, 앞에서는 등애가 강유를 치고 뒤에서는 제갈서가 퇴로를 막아 강유를 고립, 섬멸한다.
  • 진서 장군 종회: 현장의 지휘관 중 이 계획에 가장 이른 시기부터 가장 깊숙히 개입되어 있던 인물이자 총 사령관. 18만 대군 중 본대인 10만(혹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포야-당락-자오 세 갈래 잔도로 병력을 이동하여 한중을 침공하는 계획.
대전략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이렇다. '등애와 제갈서가 강유의 군대를 묶어놓고 있으면, 그 사이에 종회가 촉의 중심을 돌파하여 속전 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한다.' 그냥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가는게 아니라, 전략 - 작전술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테마가 잘 잡혀있는 행보였다. 이를 요약하면 '우월한 숫자를 이용해 일부 군대로 강유를 저지한 뒤, 남은 병력으로 빈집을 턴다' 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원자에서 원준도 당시 위나라도 앞에 수춘전투가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고 했으며, 오나라 인물들도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지경이니 위나라 역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촉한도 나라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촉한이 이기면 오히려 역전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2.2. 강유의 위나라 침공 파악, 그러나...


한편 강유는 이미 심상치 않은 위나라 측 전선 반응을 뻔히 눈치채고 있었고 곧 자신이 깔아둔 첩보를 이용해 위나라 대군이 얼마있지 않아 촉 침공 움직임을 취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낸다. 강유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성도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듣기로 종회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진취(進取)할 틈을 엿본다고 하니 의당 장익요화를 아울러 보내 제군을 감독하며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

즉 258년에 강유가 변경한 한중-답중 방어선의 변용이다. '우선 장익을 지원군과 함께 양안관구에 보내 한중 방비를 굳건히 하고 258년 당시 강유가 지어놓고 보강해 둔 한중 각 요새에 식량을 거두어 종회군이 현지조달로 보급을 해결할 수 없게 하며 자신은 답중에서 등애를 막는 한편 요화는 음평 교두에 주둔하여 뒤에서 제갈서가 강유군을 고립시킬 수 없도록 하고 병력을 막으며 한중이 위급 시 지원한다. 이렇게 세 전선에서 시간을 끌면 위군은 보급로에 차질이 생기게 되고 특히 한중의 본군은 10만이 넘는 대군이라 소모하는 군량이 엄청난데 보급선이 길어진 탓에 낙곡 대전 이상으로 군량이 빠르게 소진될테니 이렇게 약해진 위군을 요새에서 장익이 명령을 내려 병력을 내보내 일거 섬멸한다.' 는 계획이었다.
이는 강유가 몇 년 전에 아예 한중 험요지에 병력을 배치해 위군이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하는 방어체계를 변경한 것이었다. 비록 기존 체계로 낙곡대전에서 큰 전과를 거뒀으나, 그는 조상이 불리해졌음에도 퇴각하지 않다가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당시 한 무리의 군대를 이끌던 곽회는 큰 손실 없이 퇴각하였다. 강유가 촉한의 신권 1인자일 당시 위의 대촉전선은 진태 - 사마망 - 등애, 종회, 제갈서로 이어지는 유능한 장수들이라 낙곡대전 같은 전과를 기대하기 어려웠고 적도, 조수 전투로 강유는 위에 삼국시대에 손꼽을 만한 대승들을 거두고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20만의 진압군을 동원했음에도 하북과 중원을 차지한 위는 그 전력의 공백을 복구하였다. 따라서 강유는 위에게 낙곡대전을 능가하는 피해를 입혀야 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이 방어체계였다. 즉, 험요지를 방어하지 않고 열어줘서 대규모 위군을 들어오게 하고 대신 한중 자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한 요새를 많이 쌓는 것이었다. 한편 자신은 답중에 있는 주력을 이끌며 한중 점령에 실패한 위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는 강유가 제안했을 당시만 해도 촉한 조정과 군부에서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일어나자 이 방어체계 가동의 핵심인 강유의 원군 요청은 묵살 당한다. 이는 바로 황호 때문이었는데, 이때가 되기 얼마전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단해야 한다." 는 제안을 했지만 유선은 "황호 걔 별것도 아닌 소인배인데 뭘 그리 위험하다고 잡으려고 하냐." 이렇게 넘겨버렸고, 강유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답중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황호가 고의적으로 강유를 방해한 것이다. 그리고 황호가 '''무당을 불러 쇼를 하고 유선은 무당의 말을 믿고 위나라가 안 처들어온다고 생각해 아예 의견 자체를 묵살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는다.'''[9]
후일 진짜로 등애의 위나라 군대가 촉 내지로 진격하자 촉한 내부에서 우왕좌왕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예 군주부터가 '대비를 안 해도 된다.' 라며 전쟁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는데 신료들이고 백성들이고 아무런 소식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뒷통수를 맞은 격이 아니던가. 결국 이 상태로 강유는 내부에서는 전쟁 걱정 없이 대비도 안 하는 군주 덕분에 답중에서 고립되어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대비가 되지 않았다는 대표적인 증거는 군수물자의 준비다. 촉은 유장때부터 군자금의 개념으로서 중앙에 의존하는 대신 근처의 민간에서 필요한 거래할 수있도록 비단을 뿌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장이 성도에서 항전을 고심할 때 강경파의 주장에서 비단이 주요비축물자로 언급된다. 적에게 세력 중심지가 공성당하는 상황에서도 비단이 보급품과 교환 가능한 재화로 여겨진것. 후주의 전쟁 등한시로 인해 성도에는 막대한 양의 금,은,비단 등 금전이 군수물자로 변환되지 못하고 있었다.[10] 촉 멸망 당시 사민부의 지표는 얼마나 후주가 전쟁에 나태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때 '강유가 차라리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면 미리 답중[11]을 포기하고 양안관구[12]를 바로 지원하는게 어떻냐, 이 부분은 강유의 판단미스다'는 의견도 있다.[13] 그러나 이 의견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간과하고 있다. 만약 강유가 전쟁전에 요청한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답중을 미리 포기하고 양안관구로 이동하면 농서에서 대기중인 '''등애와 제갈서 군에게 답중부터 검각까지의 길이 일사천리로 뚫리게 되는데''' 만약 요화, 장익의 군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검각이 돌파당하면 다른 쪽에서 종회의 군대를 격멸해도 게임오버, 즉 소용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유가 촉한 최고의 정예군인 답중군을 쪼개서 상대시킬수도 없다. 등애, 제갈서 군대만 해도 6만으로, 이들이 앞뒤로 포위하면 쪼개진 소수의 군대가 버틸 만한 군세가 아니다.
더군다나 답중이 뚫리면 역으로 한중에서 포위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검각에서 음평으로 가는 길과 한중으로 가는 길으로 두 갈래길이 나있는데 검각 쪽에서 장익, 동궐의 군사가 미리 양안관구에 와있지 못하거나 하다못해 뒤늦게라도 검각에서 출발해 강유의 백업으로 등애, 제갈서의 뒤를 노리지 못하면 음평방면에서 치고 내려온 등애군이 한중쪽으로 길을 잡았을때 그대로 한중 안에 갇히게 되는 꼴이 되버린다. 실제로 장서의 배신 이후 강유는 답중이 뚫린 상황에서 장익, 요화와 함께 검각으로 퇴각했다. 거기다 양평관을 포기하고 요화, 장익의 군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검각이 돌파 당하면 다른 쪽에서 종회의 군대를 격멸해도 게임오버, 즉 소용없는 것이다. 또 강유가 지원군이 없다고 생각해 미리 답중을 포기하고 검각에서 병력이 마련될때까지 수비한다고 후퇴해버리면 이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한중을 포기하고 지원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한중 쪽 요충지들이 위험해진다. 이러면 등애와 제갈서가 굳이 검각에 갈 필요 없이 종회를 도와 한중 쪽 양안관구로 가버리면 그만이라 만약 양안관구가 바로 함락되면 위군이 곧장 아직 촉의 병력이 집결하지 못한 검각으로 진격할 수도 있다.[14]
무엇보다도 당시 최전방 답중에 주둔한 강유 입장에선 후방 성도에서 후주가 일개 무당의 말만 믿고 자신의 의견을 아예 씹은채 조정 신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본토 방어에도 그냥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인것을 알기가 쉽지 않았으니 언제 각지에 지원군이 올지 모르는 판국에 요충지인 답중을 함부로 버리고 양안관구로 이동하거나 한중을 버리고 검각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지원군이 언제 올지 계속 신경쓰고 있었을 강유가 이 막장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등애의 군사와 막 맞서 싸우려 했을 무렵 종회의 대군이 이미 한중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소식은 한중에서 전해졌을 것이고, 더불어 '위군이 한중에 도착했는데도 양안관구에 가 있어야 할 장익의 지원군은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고 소식도 없다'는 한중 지역 아군의 막장상황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며, 그래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강유가 답중을 버리고 전력으로 퇴주해 어느쪽을 지원할지 결정했을 것이다. 실제로 종회전과 자치통감에는 '강유는 답중에서 돌아와 음평에 도착하여서 병사들을 모아 합쳐서 관성으로 가려고 했다.'라 하여 퇴주하여 음평에 도착한 후 강유의 목적이 (장익이 없는) 양안관구(관성) 구원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15] 이때 음평에서 요화의 군세와 합세한 강유는 요화와 같이 출발한 장익과 동궐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사실을 요화에게 들었을테고 그렇다면 장익, 동궐이 등애, 제갈서가 검각으로 가던지 한중으로 가던지 파악하여 검각에서 수비를 하거나 한중으로 진격해 등애와 제갈서의 뒤를 끊어 상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일단 가장 시급한 쪽인 한중쪽, 관성(양안관구)로 진격하기로 확실히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갈것도 없이 결국 그렇기 때문에 진작에 강유가 파악한 촉한정벌의 첩보를 듣고 그의 요청대로 미리 대비를 하여 '''강유는 처음부터 답중에서 위군을 막고 요화는 제갈서를 비롯한 위군의 음평진격을 막고 장익은 양안관구에서 종회를 상대'''했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앙군 지원이 묵살당한 상황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강유는 1)답중에서 등애, 제갈서군과 싸우며 퇴각하면서 혹시나 올지도 모르는 지원군이 오는 시간을 벌어주는 동시에 2)절대로 등애와 제갈서 군에 포위당하지 말고 3)(아직 양안관구가 함락되지 않았다면)무사히 양안관구를 신속하게 지원해야 하는 어러운 임무를 떠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유는 내부의 배신으로 양안관구가 무너져서 검각으로 후퇴한 것을 빼면 이 모든 것을 해냈다.''' 장익, 동궐의 군대가 강유가 검각에 도착할 무렵에 검각인근인 한수에 간신히 이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퇴각하는 와중에도 타이밍을 세심하게 잡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3. 전쟁 발발



3.1. 1기: 위나라의 침공과 강유의 고군분투


8월, 위군은 마침내 도합 16만(혹은 18만) 대군이 3군으로 나뉘어 가히 장대한 스케일로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동쪽 방면에서 종회가 이끄는 주력군이 야곡, 낙곡, 자오곡 등으로 들어와 왕함이 지키는 낙성, 장빈이 지키는 한성, 장서와 부첨이 지키는 관성, 즉 양안관구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9월, 한중의 촉한군은 각자 지키고 있던 보루[16]에서 물러나 한성과 낙성으로 들어갔고, 종회는 낙성과 한성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질 못했다.
종회군이 한중 지역으로 진입하던 이 무렵, 서쪽 방면에서도 숙명의 맞수, 등애와 강유의 교전이 펼쳐진다. 강유는 종회군이 한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원래 수비하던 답중을 버리고 전력을 다해 퇴각하는데 등애 휘하의 양흔(楊欣)이 이를 추격해 강천구(彊川口) 에서 크게 싸우고 강유는 패주한다. 당시 강유는 종회가 이끄는 위의 주력에게 공격받고, 원래 있어야 할 장익이 없는 한중을 대신 지원해야 했으며 후술하겠지만 제갈서에게 한중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고 등애와 제갈서의 협공을 받는 시나리오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등애군에게 발목이 잡힐 시간이 없었으므로 대충 등애군을 따돌리고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17]
한편 '''위나라 병력이 이미 국경을 넘었을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사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파악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성도에서는 그제서야 강유가 원하던 지원군을 파견한다. 요화는 음평을 향해 답중으로 강유를 지원하러 나아가고, 장익과 동궐은 동쪽 한중 방면으로 나아가 종회의 부대와 싸우는 쪽을 지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의 서술이 갈린다.
≪자치통감≫ 78권에서는 장익과 동궐(이하 장동)이 음평에 이르렀을 때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포를 기다렸다.
≪삼국지≫ 44권 강유전에서는 강유가 음평으로 퇴각하고 양안관구에 위치한 관성이 함락될 즈음에야 장동이 한수현(옛 가맹)에 이르렀다.[18]
당시의 지형과 관련 기록들을 살펴볼 때 자치통감이 오류인 듯 보인다.
일단 장익과 동궐의 목표 지점은 무조건 양안관구다.(강유전) 그런데 음평은 양안관구가 아니라 답중으로 가는 길목이며, 음평에 이르러야 하는 장수는 목표 지점이 답중인 요화(강유전)가 분명하므로 장익과 동궐은 일단 제갈서가 건위로 오더라도 요화를 믿고 양안관구로 나가야 한다. 따라서 장동이 음평에 이르렀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이에 대해선 강유전의 구절이 '比至陰平 聞魏將諸葛緒向建威 故住待之'인데 이때 정사 삼국지가 요화의 화(化)를 比로 오기하면서 자치통감을 쓸 때 이걸 잘못 보고 음평으로 가는 쪽이 요화가 아니라 장익과 동궐로 본 오류가 생겨난 것 같다는 지적이 있다.
결정적으로 ≪화양국지≫ 7권 유후주지 주석에는 정사 삼국지 강유전을 보충하는 서술로 강유전의 기록이 맞음을 증명하고 있다.

요화[19]

가 음평(陰平)에 이르었는데, 듣기에 제갈서(諸葛緒)가 건위(建威)로 항하였다 하여, 이에 한 달 동안 (그곳에 머물러서) 기다렸다. 강유가 등애에 의해 깨뜨려지자, 강유는 음평(陰平)으로 돌아왔다.

한편 제갈서는 기산에서 음평교두로 가는 것이 작전 계획인데(종회전, 진서 문제기 등) 건위는 기산과 역성 주변의 길목에 자리한 곳이다. 즉 촉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거짓 정보 같은 게 아니라 '''원래 거쳐야 하는 곳'''이며 거기에 있던 요화로서는 제갈서의 기동으로 인해 성도에서 내린 최초의 명령인 답중까지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강유의 처음 전략대로 요충지인 음평을 지키고 있어야만 제갈서군을 저지하고 강유군의 퇴로를 확보할 수가 있다.
강유전에도 (翼、厥甫至漢壽,維、化亦舍陰平而退,適與翼、厥合,皆退保劍閣)이라 하여 강유와 요화가 음평에서 합류했다 적혀 있고 장익과 동궐은 백수에서 합류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음평에서는 요화가 제갈서의 진격로를 파악하여 강유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고 장익과 동궐은 아직 오고 있는 중이었다는 이야기가 아귀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제갈서가 음평 교두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봤을 때 요화가 달포를 기다리며 강유군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들이닥친 제갈서군에 패한 것이 분명하다. 요화는 제갈서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촉의 주력인 강유군은 협공 위기에 빠졌으며 양안관구는 뚫렸는데 장익과 동궐은 아직 전장에 합류하지도 못한 총체적 난국, 이는 100% 앞에서 언급한 성도 측의 대응 미스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촉한 조정에서 증원군을 급하게 편성한 시기는 종회, 등애, 제갈서가 가을(종회전, 등애전)에 국경을 이미 침범하고 난 이후이다. 사마소의 촉 정벌 명령이 떨어진 건 여름.(삼소제기, 진서 문제기) 강유가 사전에 그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각 요충지에 전력 배치를 건의하지만 위에서도 봤듯 황호와 무당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씹혀버린다. (강유전) 즉 장익, 동궐이 고작 한수현까지밖에 못 간 것, 요화가 제갈서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 모두가 그만큼 대군을 너무나 뒤늦게 편성한 탓이다. 달포를 음평에서 기다리며 강유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백전노장 요화지만, 급하게 편성되어 빈약한 전투력의 군대로 제갈서를 상대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리하면,
  • 음평에서 제갈서에 대비하던 것은 장익과 동궐이 아니라 요화인데, 너무 급하게 편성된 병력이라 전투력이 약해 제갈서군에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 장익동궐 역시 바로 양안관구를 향해 갔지만, 전투가 벌어진 시점에서 고작 한수현에 다다르고 있었다.
  • 촉나라 중앙부의 대응이 이 모양으로 늦어지고 대응이 허술해진 건 다 유선과 황호 때문이다.
라는 노답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제갈서는 이미 음평교두를 점령한 상황이었고 강유와 그가 이끄는 촉한의 주력군은 종회와 사마소의 처음 계획대로 등애와 제갈서의 협공으로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강유는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공함곡(孔函谷)을 따라 북쪽 길로 옹주 방면으로 30여 리 진격했고, 당시 옹주자사 신분이었던 제갈서는 기겁하여 점령한 교두를 비우고 강유를 추격하지만 이것은 바로 강유의 페이크 기동이었다. 강유는 북쪽길로 30여 리를 가다가 제갈서군이 퇴각한 것을 듣고 되돌아가 비어 있던 교두를 통과했고 제갈서가 이를 뒤쫓았으나 약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즉 '''이 시점에서 최초로 기획된 '강유가 이끄는 촉의 주력부대를 섬멸한다.'라는 사마소와 종회의 대전략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20] 강유는 약 한 달간 등애군에게 쫓기고 제갈서군을 따돌리는 고군분투를 통해 음평에서 요화와 합세한다. 등애와 제갈서의 병력이 합계 6만에 강유 자신의 병력도 퇴각하면서 꽤나 상했었던 걸 생각하면 요화의 지원은 정말로 소중한 병력 지원이었을것이다.
어쨌든 강유는 음평에서 요화와 군을 수습하고 바로 관성(양안관구)로 떠나려했다. 이때 한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 양안관구가 아직 촉군의 손아귀에 멀쩡히 있으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 강유, 요화, 장익 이렇게 촉한 최고의 숙장 셋이 각각 유격대, 검각 방어, 관성 방어에 투입되면 위군은 보급은 보급대로 안 그래도 한중 내에 확보한 거점도 없고 한중 지세가 험한데 유격대까지 있으니 안 되고, 전력 우세로 공격을 통해 활로를 찾는 것도 양안관구나 검각은 공격해도 끄떡없을 테고 전쟁이 길어지면 성도에서 제갈첨이 추가 지원병을 이끌고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경우 굶주림에 지친 16만 위군은 언제 어디서 촉군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 애당초 원래 역사에서 검각에서 촉군이 막아야 했던 십수여만 대군(제갈서군 + 종회군)이었으나 양안관구 때문에 종회가 검각으로 진격을 못 하면 검각으로 진격한 위군의 규모는 그 절반 정도인 6만 명 정도니(등애군 + 제갈서군) 검각에 가해지는 부담감은 확실히 줄어든다. 일단 양안관구를 아직 촉군이 잘 보전하고 있으면 종회는 검각은 커녕 한중에서 촉한 내지 쪽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등애와 제갈서를 버리고 도망하면 유격대, 검각 방어군, 양안관구 방어군이 사방에서 등애와 제갈서군을 물어뜯어 전멸할 테니 돌아가자마자 진짜 사마소한테 자기 목이라도 내놔야 한다. 그렇게 낙곡대전 겨울판으로 서서히 위군 본대는 말라죽는 것이다.
  • 일단 한중의 주요 3요지만 강유와 요화가 지키고 종회 상대로 버티면 그 사이 장익동궐은 등애와 제갈서의 진격 경로는 검각 쪽이 뻔하므로 대처가 쉽다. 검각 쪽으로 오면 촉군 입장에선 너무너무 고마운 것이 검각 자체가 천혜의 요새여서 뚫릴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데다가 한중보다 더 깊숙한 검각까지 제갈서와 종회가 간다면 그들도 종회보다 보급이 좋은 상황은 절대 아닐 것이다.
  • 검각에서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역사처럼 등애가 산(...)을 타면? 그냥 각개격파를 당하고 싶어 환장한 미친 짓이다. 원 역사에선 등애가 강유가 검각에서 지휘하는 촉의 정예군을 성도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종회가 이끄는 위나라 십수만 본대가 검각을 통과하게 해서 촉 본토로 진격하게 만들 목적으로 그런 짓을 했던 것인데, 그건 종회가 양안관구를 뚫어 보급 면에서 한숨을 돌렸고 제갈서가 종회와 합류할 수 있어서 그나마 선택할 수 있었던 전략이고 종회, 제갈서, 등애군 모두 보급이 안 되는 형편에다가 종회가 양안관구에 막혀 검각에서 제갈서와 합류할 수도 없는데 등애가 제갈서와 갈라져 산을 타면 제갈서군은 절반인 3만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촉의 유격대와 검각에서 나온 촉군의 협공을 받게 된다.[21] 검각에서 편히 있던 컨디션 좋은 촉군이 전력이 약해진 제갈서군을 먼저 작살내고, 검각으로 돌아온 후 등산으로 기진맥진한 등애군 잡으러 강유관으로 가면 된다. 병력상으로 종회의 주력군이 양안관구에 막혀 있다면 위의 조공이 촉의 주력과 싸우는 상황인데 그나마 그 조공군을 반으로 나눠버리는 것은 위군이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전략이다. 쉽게 말해서, 6만 대군을 각개격파로 촉에게 헌납하는 것이다.
  • 제갈서는 종회를 지원하러 관성을 공격하고 등애가 원래 역사처럼 산을 타면? 실제 역사상 등애가 산 넘느라 거의 한 달을 썼다. 그 동안 촉의 유격대와 검각 방어군은 제갈서군을 공격해서 각개격파당할 것이므로 위 사례랑 그다지 다를 것은 없다.
  • 만약 등애가 검각으로 가지 않고 제갈서와 같이 양안관구를 친다고 한다면? 이게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인데 촉의 유격대와 검각 방어군이 계속 그 6만 군사들의 뒤를 잡고 양안관구만 안 뚫린다면 꼼짝없이 한꺼번에 포위되어 몰살당한다. 낙성과 한성을 지키던 왕함과 장빈이 고작 5천 군사로 10만 이상의 종회의 대군을 막아냈는데 그 5천 명보다 넉넉한 병력으로 장익이나 요화 같은 숙장이 양안관구에 들어갔으면 성이 함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종회와 제갈서의 대군이 양안관구에 비축된 곡식으로 어느 정도 버텼으므로 관성 내에 곡식이 다 떨어져서 성이 함락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 등애와 제갈서가 후퇴하는 것처럼 속이고 병력을 나누어 등애는 산 타러가고 제갈서는 숨어서 기다렸다가 등애가 하산하면 제갈서가 검각 안쪽으로 진입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기는 개뿔. 제갈서의 군대가 수백, 수천도 아니고 3만인데 등애가 1달 동안 산을 넘을 동안 촉군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제갈서는 등애가 산을 타면 어떤 시나리오라도 각개격파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굳이 군사를 동원해 제갈서군을 전멸시키지 않더라도 보급만 끊어놓으면 자연스레 무너질 테고 솔직히 등애군은 잡으러 부리나케 달려갈 필요 없이 성도에 있는 유선에게 전령 하나 보내서 등애가 산 넘으니까 제갈첨만 강유관으로 보내달라 하면 그 체력 바닥에 공성 무기도 못 챙겨온 등애군을 공성전으로 막아내는 것은 마막 같은 한심한 인간이 아니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침 강유의 의도대로 몰려드는 위나라의 대군을 막고 있는 한중 3곳의 요충지, 낙성과 한성 그리고 관성(양안관구) 중 낙성과 한성은 종회가 직접 공격을 퍼부어도 요지부동으로 버틸 뿐이었다.[22] 그 외에 유은이 지키고 있던 황금성 같은 다른 한중의 요충지에서도 방어가 충실하게 이루어져 그야말로 우주 방어가 지속되고 있었다.
결국 시작부터 좀 꼬이긴 했어도 만회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장서부첨이 지키던 관성에서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그런데 그것도 위나라군이 잘 싸워서가 아니라, 촉군 내부에서 사건이 발생한 탓이었다.
관성은 부첨장서가 지키고 있었는데 장서는 성 밖에서 위군과 싸우자고 하고 부첨은 임무대로 성을 사수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장서는 고집을 부려 밖으로 나가나, 이는 자신이 촉한에서 중히 쓰이지 않은것에 한을 품고 위나라에 항복하기 위함이었다. 장서의 배신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부첨은 준비가 안 된 상태임에도 위군이 쳐들어오자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위군에서도 부첨을 의롭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자치통감의 음주를 단 호삼성은 '장서가 군사를 이끌고 꼭 이길 거라고 부첨은 생각했단 말인가? 장서가 이기지 못할때를 대비를 하지 않은 부첨도 죄가 있다'라고 평가했지만, 부첨이 나가서 싸우자는 장서와 반대로 성을 지키자는 주장을 내놓았다는 것은 성 밖으로 나가 싸우는 것이 이득이 적고 손실은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텐데 장서가 나가서 승전할 줄 알고 대비를 안 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합리적으로 추론하면 장서가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질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을테니 전투를 대비해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수성전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장서가 나가자마자 바로 배신해서 계획이 꼬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장서와 그 군사들이 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패잔병을 맞아들이기 위해 성문도 닫아둘 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던 종회는 대군을 이끌고 한중의 거점들을 공략하는 것을 포기하고 강유보다 먼저 검각에 도착하기 위해 진격한다. 만약 강유가 요청한대로 양안관구에 원 계획대로 장익이 병력을 충원해 도착했있었다면 그는 우거기장군으로서 장서와 부첨의 상관이므로 이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게되고 방어는 장익의 손에 이루어져 관성이 이렇게 함락되진 않았을 것이나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고 종회는 관성의 곡식을 얻어 한숨 돌린 후 원래 계획대로 검각으로 진격한다.[23]
얼마 후, 강유는 음평에서 요화와 군을 수습한 뒤 관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 듣고 백수(白水)로 퇴각. 강유는 요화와 함께 마침 한수로 꾸역꾸역 오고 있던 동궐, 장익 등과 합세해 검각으로 향했고 간발의 차로 종회보다도 먼저 검각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이미 양안관구가 뚫렸다면 음평 내지 교두에 그대로 있어보아야 등애, 제갈서, 종회에게 포위당하기에 고립되므로 강유군은 검각으로 철수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며, 실제로 강유군은 검각을 종회보다 먼저 취해 방어를 굳건히 했다. 이로서 '''강유를 묶고 빠르게 검각을 뚫어 성도에서 유선의 항복을 받는다.'''는 사마소-종회의 유려하기 그지 없는 대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쨌거나 촉 내지로 위군을 들이지 않았고 관성 외에 함락된 한중의 중요 요충지가 없는데다가 검각은 본래도 천혜의 요새, 강유의 군대가 살아남아 험요지를 벌려 지키고 있자 종회는 10만 대군을 가지고도 검각에서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떄문에 종회가 강유에게 회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당연히 묵살. 이에 제갈서의 군대도 등애를 무시하고 지원을 오지만 그런다고 검각이 뚫리지는 않았다. 한편 종회는 자신이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갈서를 모함, 제갈서는 본국으로 송환된다.
그러나 지휘권이 일원화되었다 하더라도 종회+제갈서의 10여만 이상의 대군 전체가 꼼짝없이 한중과 검각 사이에서 겨울철 추운 날씨에 갇혀 얼어죽고 굶어죽을 판인 상황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위나라군의 거대한 규모는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한다. 적국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 있는데 본국에서 보급하기는 어렵고,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해도 식량은 다 촉한의 요충지에서 거두어갔다. 그냥 관성이 항복해서 거기의 식량이라도 얻었으니 망정이지 관성조차 뚫지 못했다면 진짜로 한중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제갈서의 3만의 병력이 더 추가되니 군량 소모가 더욱 심해졌다. 워낙에 대군인지라 보급에 한계가 있고 그냥 검각만 보고 내달린 탓에 제압하지 못한 한중 촉군 때문에 뒤통수는 간지럽고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이렇게 되면 오래 죽치고 있는 것도 불가능한데, 만약 여기서 물러난다면 18만 대군을 이끌었던 종회는 배고픔과 추위에 허약해진 군대를 이끌고 뒤에서는 검각에서 치고나올 강유의 공격, 앞에서는 남아있는 한중 촉군의 공격을 받게 됨은 뻔한 이치거니와 이러면 모르긴 몰라도 작전을 강행했던 사마소도 타격이 불가피할 테고 위나라 군도 한동안은 큰 군사를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안솔하여 물러났다.
그러나 70여세의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고 굳이 침공할 필요가 없다는데도 강행해서 이 꼴을 만든 종회를 보던 한 남자는 그런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난국의 순간에, 그에겐 일발역전의 패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등애는 10월 사마소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상소를 올린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길이 없어? 그러면 길을 만들면 되지!"'''
즉, 종회가 검각을 뚫지 못하자 등애는 상소를 올려 한덕양으로 나아가겠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이 면죽으로 들어가 강유가 검각을 포기하고 부를 지키든지 부를 위험에 처하게 방치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3.2. 2기: 산악인 등애


이렇게 등애는 강유를 쫒아 음평으로 가서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한덕양으로부터 강유와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직접 성도로 향하여 제갈서와 함께 전진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당연히 거절하는데 대체 무슨 깡으로 등애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사천 지형상 영향으로 이 지방은 강수량이 많다. 습기를 머금은 구름이 산맥을 지나가면서 눈이라도 내리면 위군이 눈사람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또 보면 이런 험지를 걸을때는 당연히 낮에는 움직이고 밤에는 휴식을 취해야 정상인데 촉한, 즉 익주는 산간 지형의 특징 때문인지 해가 비교적 빨리 넘어가 일조량이 적으며 여기엔 또 자주끼는 안개등의 이유도 포함된다. 또 하필이면 이때는 밤이 긴 한겨울인 음력 10월이다, 산과 길이 너무 험하고 계곡도 깊은데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급도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 등애군은 남은 식량도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비전투로 인해 손실된 병사들, 물자들이 많았으리라 봐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사람이 안 살다보니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을테고 원래 내켜하지 않던 사람이 작전이 다 망해가니까 즉흥적으로 계획을 내놓은 셈이라 등애군은 사전 조사 없이 산간 지대에 들어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혼란해하거나 사기가 떨어져 제대로 진군이 안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4] 밤에는 별자리, 낮엔 태양의 움직임을 그냥 대략적으로 파악해 감만 잡을 수준일 것이다. 혼천의? 총사령관도 양탄자 둘러싸는 마당에 그런게 남아날 리가...거기다 날씨라도 나쁜 날이면 이런 고초는 더했을터이다. 그러니까 원래 험지긴 했지만 등애군이 700리나 진군하게 이유 중에선 '''"얼레? 여기가 이 산이 아닌가 벼?"'''라는 상층부 및 병사들의 판단 착오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그냥 하는짓만 보면 별 다른 계획 없이 무작정 산을 타고 밀고 들어와 깽판을 쳐서 상대적으로 약한 촉한 서부 지역을 접수하고 이러면 검각 수비가 풀릴 거라고 장담했다는 것인데 대체 그 전까지 '촉정은 불가합니다!라고 뻣대었던 사람이 이런 쪽에서 제대로 준비를 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이 전쟁을 계획한 사마소 자체도 촉군 병력 자체를 잘못 계산해서 방어 병력은 얼마 안 될거라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까지 했으니...
어쨌거나 만약 양안관구가 뚫리지 않고 예비대 촉군이 음평과 양안관구 사이에서 서쪽의 등애-제갈서군을 견제하는 상황이었다면 등애도 함부로 그쪽으로 갈 생각을 못했겠지만[25] 결국 촉군의 대부분은 검각에 몰린 상황이니 그의 등산을 알아도 막을 수가 없었다. 사서의 표현을 빌리면 이때의 등애군은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고, 계곡에 다리를 만들고, 장수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이동했다. 등애 자신도 70 노구를 이끌고 모전(양탄자)로 몸을 감싸고 낭떠러지를 구르면서 내려왔으니...게다가 이 표현도 실제 지형을 감안하면 상당히 순화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등애군이 돌파한 산길은 이 따위였기 대문이다. 게다가 그냥 산을 타고 온 것도 아니고 산을 깎고 험한 계곡에 다리를 놓는 극한의 작업까지 진행해야 한다. 저기도 언급했듯이 현대에 저런 잔도가 생기기 이전엔 저기에 저런 것도 없었다. 여기에 총사령관이라는 양반도 칠순 나이에 양탄자 하나에 목숨을 걸었으니... 아무리 완만한 계곡이라고 몇백미터는 굴러서 떨어져야 했을텐데 조금만 실수해도 최소한 큰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이때부터 상식적인 판단으로 '더 이상 진군할 수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부하를 격노하면서 죽이려하거나, 제갈첨 낭야왕 드립, 경관 쌓기, 쓰잘데기 없는 자기 자랑, 이미 경계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소에게 편지를 보내어 '익주 내 마음대로 하는게 무슨 잘못?'이라고 자기 목숨을 결과적으로 버리게 된 측면을 보면, 등애라는 인물이 원래 이런 인물이었나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큰 공을 본인조차 제대로 소화 못 시킨 셈.
그러나 이 길을 돌파하는데 상식적으로 보급이 아예 불가능하고, 중장비는 들고 올 수 없으며, 최대한 장비를 가볍게 하고 왔어야 할 지경이었음에도.어쨌든 결국 근성으로 등애군은 거지꼴이 되어가며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산을 거의 넘는데 성공했다, 원자나 진서 문제기에선 이 당시 병력이 1만여명이라고 하나 화양국지에선 강유관에서 쏟아져 나온게 2만이라고 한다. 다음은 해당기록.

11월 등애가 만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음평(陰平)으로부터 험저한 지형을 넘어 강유(江由)에 도달하여 면죽(緜竹)에서 촉나라 장군 제갈첨(諸葛瞻)을 패배시키고 목을 베어서 무리들에게 보였다.

진서 문제본기

바야흐로 등애(鄧艾)가 1만 명으로 강유(江由)의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때 종회(鍾會)는 20만 군사로 검각(劍閣)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등)애가 비록 전승(戰勝)하여 장수를 이겼으나 만일 유선(劉禪)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軍)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정사 삼국지 등애전 주석 원자

등애(鄧艾)는 피곤한 병사(疲兵) 2만(二萬)을 이끌고 강유(江油-지명)에서 쏟아져 나왔다(溢出)

화양국지

어쨌거나 해당 기록만 봐도 등애가 700리, 291km의 위험한 산지형에다가 병사들을 밀어넣았다는 뜻이다. 대체 얼마나 병사들의 목숨을 깎아 먹었는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최소 이러다 죽은게 수천명 이상인 것은 거의 확실한듯.
그리고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 '''그들의 앞에는 강유(江由)관이라는 요새 성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치고 죽고 다친 사람도 한둘이 아니며 산 사람도 죽을 지경에다가 식량도 거의 없는 등애군이 성채를 보고 망연자실하는것은 당연했다. 체력이나 식량은 차치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몸이랑 개인 무기만 넘어왔지 큰 공성장비를 가져 올 수 없었으니 성을 점령할 가능성은 갑자기 적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는 이상 없었다. 그런데도 등애는 휘하의 전속에게 강유관 공격을 지시했고, 자살 명령이나 다름없는 공격 지시를 받은 전속은 등애에게 항명한다. 노한 등애가 전속을 죽이려 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용서받았고, 한진춘추에 따르면 이 때 전속은 도망쳤는데 당연히 이 일로 전속은 등애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된다.
어쨌거나 부대의 부장까지 도망간 마당에 일단 강유관으로 가 보기로 한 등애군의 선두 진영이 강유(江由)에 도착하자, 촉나라 수비 대장 마막이 '''거지꼴인 등애군을 보고도 싸우지도 않고 그냥 항복한다.''' 덕분에 등애군은 강유관에서 잠시 재정비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등애가 등산을 하기 전에 '검각의 병력이 빠져서 부현으로 지원가면 그만큼 검각이 약해져서 종회가 격파할 수 있을 것이고, 검각 병력이 빠지지 않으면 부현의 병력이 적을 테니 등애가 성도로 내려가면 된다'는 (등애전), 등애 본인의 발언을 보면 촉나라의 병력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당장 급한 불은 종회(약 10만~15만 추산)였으니 거기에만 집중하면 나 때문에 망하게 할 것이며 그렇다고 검각 쪽을 빼도 자신이 토벌되는 그 사이 종회가 검각을 통과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하고 역사책에서 '70나이에 병사들 억지로 끌고가다가 병사들에과 같이 아사 및 동사한 인물'로 기록이 될 찰나에 이렇게 쉽게 험요지의 요새가 넘어가다니, 등애 입장에선 로또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전투기의 저자 최훈은 '왜 하필 장서가 거기 있었고 왜 하필 마막 같은 인간이 거기에 있었나...단지 운이 없어서라기보단 황호나 유선이 나라꼴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기에 그런 중요한 곳에 그런 인간들만이 배치되었던 것'이라고 논했다. 그러나 장서가 있던 곳에서는 부첨이 있었고 이 두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걸출한 장군들이 지키고 있던 것을 보면 운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등애가 강유관에서 막혔다면 적국 한 복판에서 보급선이 없는 등애군은 전멸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이미 보급에 곤란을 겪던 종회는 총퇴각말고는 달리 선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강유가 지키는 검각을 뚫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종회군은 한성과 낙성 등 요지들은 남겨둔 채 그저 검각으로 닥돌했던 것이라서 퇴각도 곳곳에 있는 촉군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중의 산맥들을 넘어 퇴각하는 것도 들어올 때는 강유가 일부러 작전상 열어줘서 어려움 없이 들어왔던 것이고 작정하고 방해하면 산맥 통과도 상당히 힘들다. 이렇게 퇴각에 어려움을 겪을 때 검각의 강유군, 한중에 남아 있던 한성, 낙성, 황금성의 촉군들이 길을 막고 종회군을 사방에서 들이치면 종회군은 강유가 방어 계획을 변경했던 본래의 의도대로 섬멸될 것이다. 촉군 입장에선 그저 한중 수복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위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실패가 아니라 정치의 실패로 인해 그 기회는 사라지고 촉한에게는 등애군이라는 칼날이 목에 다가오고 있었다.

3.3. 3기: 제갈첨과 개국공신 후손들의 결사항전


검각에만 시선이 쏠려 있던 촉한의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진다. 물론 유선이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면 좋았겠지만, 최소한 전쟁이 일어난 후에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등애의 침공은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남중에는 내항 도독 곽익[26]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반란을 진압하고 그 대장의 목을 벨 정도의 인물이었다. 위군이 침공하자 성도로 지원을 가려 했으나 유선은 성도 방비에 문제가 없다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하면서 이를 거절한다. 강유가 검각에서 위군을 저지하자 방심한 것으로 추측되나, 당장 적군이 아군보다 훨씬 많은데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있음에도 동원하지 않은 유선의 행동은 도저히 옹호할 여지가 없다. 한편 영안의 염우[27]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유선의 명령으로 서쪽으로 갔으나 참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늦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촉한 조정은 10월에서야 동맹인 오나라에 구원 요청을 했고, 오나라 역시 한쪽으로는 수춘을 치면서 다른 쪽으로는 촉한을 지원할 병력을 보냈다. 10월 22일, 오나라 황제 손휴는 촉을 구원하고자 군대를 세 방향으로 보내니, 이 중 둘은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대장군 정봉은 수춘을 공격하게 하고 장군 정봉(丁封)[28]손이(孫異)는 면중(沔中)을 공격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유평을 남군에 주둔한 시적에게 보내 진군 방향을 논의하게 했다.[29]
할 수 있는 대비도 안 하다가 등애가 경곡도(景谷道)를 지나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한나라의 위장군이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자신의 아들 제갈상, 황권의 아들 황숭, 이회의 조카 이구, 장비의 손자 장준과 함께 등애를 막으러 군대를 지휘해 부(涪)에 머물렀다. 상서랑 황숭이 제갈첨에게 빨리 나아가 험지에 의지하여 적을 평지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으나 제갈첨은 망설이면서 황숭의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황호와 초주 등의 존재로 속전속결로 등애군을 제압하지 않으면 유선이 항복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황숭은 다시 한 번 눈물로 제갈첨에게 간언하여 결국 제갈첨도 그 전략을 채택했으나 이미 늦어 제갈첨의 선봉은 격파당해, 제갈첨은 면죽으로 퇴각했다. 등애는 제갈첨을 회유해 낭야왕(琅邪王)으로 삼겠다 고 했고[30] 제갈첨은 노하여 등애의 사자를 죽이고 남은 모든 전력을 긁어모아 등애의 아들 등충사찬군을 한번 격퇴하는 최후의 기염을 토했지만, 다시 전열을 수습한 등애군이 재차 공격하자 급조 전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면죽에서 아들 제갈상, 황숭, 이구, 장준과 함께 전사했다.

3.4. 4기: 유선의 항복과 촉한의 멸망


당시 검각에서 종회군을 막고 있던 강유는 등애군이 나타나자 제갈첨이 면죽에서 패사하기까지는 일단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에는 맞는 판단이었는데 강유가 상대하고 있는 종회군은 십수 만여명에 달하는 위의 주력이자 대군이고, 보급로가 위태로워 군량 부족으로 퇴각을 논의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으므로 조금만 시간을 끌면 물리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등애군은 비록 산을 넘고 운 좋게 강유관도 접수했지만 최대 2만 정도이고 공성 무기가 없고 보급은 꿈도 못 꾸며 매우 지치고 상한 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곽익과 염우 등이 성도를 지원하고 제갈첨 등 중앙의 인물들이 힘을 보태면 충분히 등애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판단이었고, 반면에 등애를 잡겠다고 자신이 검각을 버리고 남하하면 10만 이상의 종회군이 검각을 통과하여 촉한 내부로 진입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종회를 막는 데만 집중했으나 마막은 거지꼴인 등애군과 교전 한 번 안 해 보고 항복, 곽익은 지원 가겠다는데 유선이 거절(...), 제갈첨은 경험 부족으로 인해 패사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등애군이 험난한 산들을 넘어 중장비로 공성전을 할 만한 병력이 아님에도 등애군이 성도 근처 낙현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부터가 패닉에 빠졌고 조정은 갈팡질팡했다. [31]
따라서 강유는 제갈첨의 패배 소식을 듣자 어쩔 수 없이 등애의 의도대로 검각을 버리고 유선을 구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 때 강유의 병력을 종회전에서는 4~5만 정도라 하였고 화양국지에서는 10만이라 했는데 아마 검각 방어군과 더불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촉군이 강유에게 합류해 불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천과 계곡을 막으며 진군했다는 내용으로 봐서 강유는 그냥 빨리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종회군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여 시간을 벌고, 종회군이 지체되는 사이에 등애군을 제압한 다음 다시 종회군과 겨루어보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유에게는 유선에 대한 소문이 3가지나 들렸는데 그것은
1. 성도 항전
2. 남쪽으로 피난
3. 오나라 쪽으로 피난
이었는데, 강유로서는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내려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일단 움직이는 것을 선택, 성도 동북쪽 인근의 처현을 향했다. 성도 인근이므로 유선이 그대로 농성할 경우 즉시 구원할 수 있고, 유선이 동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할 경우 자연스럽게 북쪽의 위군들을 가로막으면서 유선의 후방을 지켜주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
강유는 처현의 도로를 따라 동광한군 오성(五城)현에 도착했는데 화양국지에 적힌 왕숭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 강유가 오성에 이르렀으며 등애를 사로잡고, 종회를 상대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의 사천성 덕양시 중장현(中江县)으로 현재의 사천성 광한시이자 당시 등애가 주둔하고 있던 광한군 낙현(낙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현재의 광한시와 중장현의 위치 그러나 유선의 선택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낙현까지 온 등애군에게 항복해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촉한 조정은 제갈첨의 패배 이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 대책이 전술한 3가지 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초주가 주로 남중으로 피난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으로 봐서 당시 조정의 중론은 남쪽으로 피난이었던 듯 하다. 험요지가 많았던 남쪽으로 가면 지리에 밝지 못한 등애군이 유선과 촉한 조정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한 제갈량의 정벌 이후 남쪽에서 반란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억이나 마충 같은 촉한 관리들이 그곳을 잘 지배해 민심이 그렇게까지 흉흉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장억이 성도로 불려가자 만족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였으며, 마충은 그가 죽자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기릴 정도였다.
한편 성도에서의 결사항전도 채택해 볼 만한 전략이었는데, 성도로 접근하고 있는 등애군은 강유관에서 비록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나 험지를 넘어오느라 많이 상하고 지쳤으며[32] 병력 수도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강유관에 도착 당시 최대 2만 정도였다. 또한 제갈첨과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으나, 3번이나 싸우고 그 중 1번은 졌다고 하니 10%만 병력이 소진되었다 추정해도 성도로 진격하고 있는 등애군은 최대로 잡아도 18000명 정도이다. 제갈첨이 3번이나 교전했는데 등애군의 규모를 성도에서 모를 리 없지만, 백 번 양보해서 몰랐다고 해도 조금만 생각하면 등애군의 상황이 열악함을 알 수 있다. 휴식으로 산 넘어오느라 쓴 체력은 회복할 수 있어도 안 가져온 공성무기를 만들 수는 없었고, 결정적으로 보급은 꿈도 못 꿔서 100% 현지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청야만 해도 전투 한 번 없이 등애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뒤도 없으니 민심은 무시한다 쳐도,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가 아니라 약탈을 해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기 사람인 원준의 경우엔 '유선이 조금만 더 버텼어도 걔들(등애, 종회) 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었을걸?'이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비록 제갈첨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긁어모아 면죽을 방어하다 패전한 것이므로 성도에 병력은 적었겠지만 그래도 치안 유지나 황궁 경비를 위한 기본적인 금군은 있었을 것이고, 후주전(유선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를 보면 촉한이 항복하자 파악한 인구[33]의 수가 남녀 합쳐 94만 명이었는데 수도였던 성도에 5~6만 정도만 거주한다해도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가 최소 1만은 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을 징발해서 시간을 조금만 끈다면 전술했듯이 공성 무기도 없는 등애군을 상대로 성도를 사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왕은의 촉기에서 항복할 때 창고에 식량이 40만 섬이었다는 내용을 볼 때 식량 부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술할 유심의 결사항전 주장이 절대 객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강유군 뿐만 아니라 대오 전선의 염우도 유선의 명령으로 나헌에게 일부 군사를 맡겨둔 채 성도로 가는 상황이었고 동오도 촉한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간접적으로는 위를 공격하여 위군이 촉한으로 더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또한 거리가 있다 해도 곽익에게 전령을 보내면 곽익도 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유선은 이러한 주변 상황들과 조정의 중론을 무시하고 초주 단 한 사람의 의견만 듣고 항복을 결정한다. 초주는 오로가 봐야 어차피 위가 오를 먹을 것이므로 남의 신하가 되는 건 똑같고 남쪽으로 가는 것은 제갈량이 정벌했으나 민심이 불안정해 이미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으니 역시 안 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쉽게 말하면 '나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 포기하고 유선의 안위에 대해 협상하자'는 말이었다. 문제는 유선이 조정의 중론을 어겨가면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에 유선의 아들 유심은 격분하여 항복을 반대한다.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화란과 실패가 임박했다면, 응당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사직을 위해 함께 죽고 저승에서 선제(先帝)를 만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어떻게든 성도에서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유선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복 절차를 그대로 진행했다. 비서령 극정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하고, 초주와 시중 장소, 부마 도위 등량을 등애에게 보내 항복 문서와 옥새와 그 끈을 바치게 하였다. 이에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유심은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유비의 종묘에서 자살했으며 낙현에서 유선의 항복 서신을 받은 등애는 매우 기뻐하였다. 유선은 당시 중국의 항복 절차를 따라 수레에 관을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 몸을 묶어 등애에게 나아갔다. 등애는 유선의 결박을 풀고 구슬을 거두고 관을 불태우며 항복을 받아들였다.
등애는 유선을 행표기 장군으로 삼고 유선이 원래 지내던 궁궐에 머물게 했으며, 태자 유선(劉璿)은 봉거 도위로, 다른 여러 왕들은 부마 도위로 삼았다. 옛 한나라의 관리들은 예전에 황제의 관리이던 것을 원래 지위 고하에 따라 왕의 관리로 삼아 임용하고 일부는 등애 자신의 관속을 겸하게 했다. 사찬은 익주 자사를 겸하게 했고, 견홍 등은 촉의 각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또 유선은 상서랑 이호(李虎)에게 사민부(士民簿)를 보내니, 촉 지역 28만호, 남녀구 94만 명, 또 장수와 군사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창고의 식량 40만 섬, 금은 4000근, 금(錦),기(綺),채(綵), 견(絹), 각 20만 필과 그 외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태복 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하도록 칙서를 보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강유는 미친 듯이 남하하면서도 각지의 촉군을 최대한 규합하고 있었고, 오의 지원군도 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일단 시간을 끌어 종회의 남진을 최대한 늦추며 등애군을 먼저 제압해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고, 염우, 오의 지원군, 가능하다면 곽익 등의 촉군과 모두 합쳐 대규모 병력으로 뭉쳐 종회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종회군이 수는 더 많으나 길고 불안정한 종회의 보급선과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정벌군 측의 약점을 생각해 보면 전혀 못 이길 싸움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성에서 유선이 보낸 장현에게 항복 칙령을 받고 전 촉군에 항복할 것을 명한다. 이 때, 촉군들이 억울함과 분노로 칼로 돌을 마구 내리쳤다고 한다.
강유는 종회에게 나아가 투항했고, 종회는 강유를 후대하여 옛 한나라 장수들이 항복하며 바친 장수의 표식들을 모두 돌려주었다. 한성을 지키던 장빈도, 낙성을 지키던 왕함도, 황금성을 지키던 유은도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회에게 투항했다. 염우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파를 거쳐 움직이던 강유군에 합류했다가 같이 항복했을지도 모르고 그 이후로 은거하거나 후술할 성도의 난 때 살해당해 기록이 없어졌거나 했을 것이다.
이로서 '''소열제 유비가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세웠던 나라 촉한은 2대 42년 만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3.5. 5기: 성도의 난


이후 등애는 다소 무난하게 군정관으로서 촉 땅을 일시적으로 다스렸으나[34] 자신의 성공에 취했는지 자충수를 계속 둔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기 위해 경관을 지으며 촉을 이용해 오까지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조정에 계속 하며 위의 조정에 등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강유는 영웅이나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주변에 해 대니 많은 촉한 인사들이 비웃었다.
한편 강유는 위의 정치적인 상황과 종회의 야심을 이용하여 촉한의 부흥을 꾀했다. 종회는 등애를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 장안으로 송환하고 강유를 위시한 촉한의 장수들과 가깝게 지내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위의 장수들을 모두 죽이고 촉을 접수하려는 반란을 도모했는데, 기밀이 유출되어 결국 264년 1월 18일 최후로 촉한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강유마저 촉한의 부흥을 끝내 이루지 못하며 종회와 함께 위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장익 등 성도의 수많은 장수, 관리들이 살해당하여 '''촉한 부흥의 불씨마저 완전히 꺼지고 말았는데 유비가 입촉한 지 50년 만의 일이자, 한고조 유방이 한중에서 초패왕 항우와의 결전중 한(漢)을 건국한지 470년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한제국의 마지막 불씨마저 완전히 꺼지고 만다.

4. 후일담


촉한이 멸망하는 순간 촉한은 단 1개 주(익주), 가구 28만 호, 인구 94만 명, 병력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식량 40만 섬, 금과 은 4000근, 비단 40만 필의 규모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마소 문서에서 나오듯, 사마소는 촉정 중간인 10월에 그도록 사양하던 진공의 작위와 구석을 받았으며 종회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진왕이 되었다. 사마소가 진정으로 원하던 목적,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35]으로부터 시작한다''''[36]가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
등애는 억울하게 반란자로 몰렸지만 종회의 난으로 그 혐의가 풀려 돌아오려 했으나 그에게 강유관의 일로 원한을 가졌던 전속이 역시 등애를 꺼렸던 위관의 부추김을 받아 공격하니 아들 등충과 함께 죽었다. 사마소는 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그의 일족을 죽이니 이로써 촉정의 공은 오로지 사마소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촉이 망하지 않았음에도 사마소는 진공을 그제서야 받아들이고 서촉 동란이 끝나자마자 진왕에 오르고 곧 진왕에 모든 의례와 격식을 황제와 동일하게 했다. 이렇게 황제에 가까운 대우로 상승하였으나 미처 황제가 되지 못하고 죽으니 아들 사마염이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위 역시 촉한이 망한 지 2년 만에 멸망하고 서진이 세워진다. 그리고 15년 후, 마지막 남은 오도 서진에 의해 멸망하고 서진이 삼국을 통일했다. 오 멸망 과정은 오멸망전 항목 참고.
그 후 촉지는 오랫동안 서진의 영토였지만[37] 이웅의 반란으로 성한이 건국되었고 촉지를 잃은 서진의 이후는 팔왕의 난영가의 난으로 이어진다.
성한 정권이 들어선 후 347년경에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손성은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 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촉한이 멸망하고, 강유가 죽은 지, 80년이 넘게 지나서도 촉 사람들은 촉한의 멸망과 그것을 막기 위해 최후까지 분투했던 한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한편 서진이 멸망한 이후에 남쪽으로 이주한 동진 정권은 황권이 실추되었고, 동진의 역사가 습착치는 저서 한진춘추를 통해 사마씨가 서진을 세운 것은 진짜 한의 정통인 촉한을 멸망시킨 공이라고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이런 기조는 후에도 이어졌는지 한 고조의 동생 초왕 유교의 21대손을 칭한 송무제 유유가 사마씨를 쓰러뜨리면서 점차 촉한을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나게 된다.

5. 평가


이제 나라가 일거에 촉을 멸하니 정벌의 공이 이처럼 쾌속한 적은 아직 없었다. 바야흐로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江由)의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때 종회는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등애가 비록 전승하여 장수를 이겼으나 만일 유선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軍)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국가에 앞에 수춘(壽春)의 역(役,사건,전투)이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 그러므로 소국(小國)이 염려할 것은 늘 공을 세워 자존(自存)하는 것인 반면에 대국(大國)이 염려할 것은 승리한 뒤에 역량이 고갈되는 것이니 성공(成功)한 뒤야말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로다. - 원준

옛날 세조(광무제 유수)는 뛰어난 무용과 탁월한 재능을 내부의 자산으로 삼고 밖으로는 이십팔장의 기이한 장수를 뽑아 가히 근면하였기에 성공을 얻을수 있었다. 틀림이 없이 그리하여 수도의 큰 거리에 올랐으니 수레도 임금의 수레에 그치지 아니하였고 자리에 앉아도 편안하지 않았다. 근본이 뛰어나거나 식견이 넓지 아니하니, 중흥의 업적이 어찌 쉽겠는가? 후주 (유선)는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운 군주였으며, 비록 제갈량 한 명의 경위가 있었지만, 안으로는 아랫사람을 잘 통솔하고 윗 사람과 친한것에 대한 지모가 없었고 밖으로는 조아(爪牙,용맹한 장수)가 없었으니, 어찌 천하를 포괄할 수 있었겠는가?

등애는 피곤한 병사 2만을 이끌고 강유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유는 십만의 군대를 일으켜, (사직과 군주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이끌기 위해 남쪽으로 귀환하여서, 등애는 집에서 기르는 (사로잡힌) 동물의 꼴이 되었다. 등애를 사로잡는 것을 이미 끝 마치고, 다시 돌아와 종회를 막아내었더라면, 곧 촉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강유는 파의 도로에 돌아와서, 멀리 오성[38]

에 이르었다.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 해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가 분할되어 도성이 멸하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명백하게 종회의 지략은, 자방의 것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강유는 적이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함락되었는데, (강유와 종회가) 책략, 지모를 서로 맞아 어울려하여 우열을 가린다면 강유가 승리하여 종회를 물리칠 것이다. 아깝도다! - 왕숭

초주가 후주에게 위나라에게 항복하자고 권한 것이 옳은 일인가? 자신이 천자가 되어 항복을 청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치욕인가! 무릇 사직을 위해서 죽으면 죽는 거고 사직을 위해서 망하면 망하는 거지 선군은 위나라의 찬탈을 바로잡고자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 하였는데 그 아버지에게 잘못을 미루고 머리를 조아려 원수를 섬기니[39]

가히 구차하게 살아남았다고 할 만 하다. 어찌 올바름에 처하는 도리를 크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손착[40]

춘추의 대의에 나라의 임금은 사직을 위해 죽고 경대부는 직위를 위해 죽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천자라고 칭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초주는 말하길 만승의 군주가 구차하게 생명을 훔쳐 죽음을 면하고 예법을 잃지만 이득을 구하길 바랐으며 미미한 영예를 기대하길 요구했으니 미혹된 것이다. 또한 일의 시세로부터 보자면 도리에 있어서도 다하지 못함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유선이 비록 무능한 임금이기는 하나 실로 걸왕이나 주왕같은 가혹함이 없고 전투에서 비록 누차 패배하였으나 국토가 완전히 함락당한 것은 아니다. 설령 군신이 굳게 지켜 성을 배후에 두고 결사의 일전을 치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퇴각하여 동부에 진주하면서 이후를 도모해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헌이 중병으로 백제성에 거했으며 곽익이 강졸로 야랑에 진주하였다. 촉의 영토가 험난하고 산수가 격절됐으며 산은 가파르고 물은 격렬하여 보병들이 건널 수 있는바가 아니다. 만약 배들을 모두 취하여 강주를 보전하면서 남중의 병사들을 징집하고 동오에 군대를 요청하면 강유[41]

, 요화 5장이 자연히 구름처럼 몰릴 것이고 오나라의 군대가 명을 받들어 번개같이 달려오면 어찌 몸을 맡길 만한 곳이 없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위나라의 군대가 오는 것은 온 나라를 들어 움직이는 것이라 쫓고 싶어도 배가 없고 머무르고 싶어도 군대를 오래 주둔시키면 여러 가지 걱정할만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굽히고 펴는 데에는 기회가 있고 정세는 번갈아가며 일어나는 것이니 서서히 떨쳐 일어나길 원하는 백성들로 인해 교만하고 나태한 병졸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월왕(구천)이 합려를 공격한 이유요 전단기겁을 꺾은 이유인데 어찌 총총히 급하게도 스스로 포로를 자처하여 견고한 벽을 적군에게 내리고 돌을 쪼개는 것 같은 지극한 원한[42]을 남겼단 말인가?

갈생이 말하길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럴 수도 있으니 그만둔다고 쳐도 어찌 능히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는가!」비장하구나 그 말이여, 가히 겁 많은 사람의 뜻을 세울 수 있다. 옛날의 연, 제, 형, 월의 패배를 보면 혹은 국가가 복멸하고 임금이 죽거나 혹은 물고기가 나무에 걸려 있고 새가 땅바닥에 굴을 파고 숨는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끝내 공을 세우고 일을 해결해 사직을 광복시켰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람의 모략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구차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초주의 말을 받아 들였다면 어찌 나라의 기초를 능히 세우고 아름다운 명예를 얻을 수 있겠는가? 유선은 이미 혼암한 임금이고 초주는 실로 열악한 신하인데 신포서[43]

, 전단, 범려, 대부 종과 비교한다면 또한 차이가 크지 않겠는가! - 손성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조선, 홍대용

군자와 소인 중에 누가 요절하는지 장수하는지를 보면 세도(世道)가 비색(否塞)한지 통태(通泰)한지를 점칠 수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54세로 그쳤고, 법효직(法孝直)은 겨우 45세를 살았으며, 방사원(龐士元)은 가까스로 36세를 살았다. 나이 70을 넘긴 자는 글을 받들고 가서 항복을 빌었던 초주(譙周)였을 뿐이니, 하늘이 과연 한(漢)나라의 덕에 싫증을 낸 것인가. - 조선, 이유원

263년에 벌어진 이 전쟁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재능 있는 인재들은 물론이요 일반인들이 봤을 때도 '설마 이런 일이 생기겠어?'라고 생각할 법한 일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면서 생긴 문제'''가 촉의 패인이었다.
우선 중앙정부부터가 개막장이었는데 강유는 알맞게 서신을 보냈으나 유선은 황호와 아끼는 무당이랑만 논의를 하고 마음대로 일단락낸 뒤 '''다른 중신에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중신들은 등애가 답중으로 제갈서가 음평으로 종회가 낙곡으로 들어갈 때서야 일을 알았을 정도였고 이즈음에야 위기감이 들기 시작해 군사를 보냈지만 이때 너무 급하게 보낸지라 강유가 설계한 방어 전략이 모조리 꼬이게 되고 2차 피해로 강유와 다른 장수들간 연계도 제대로 어우러지지 않게 된다. 실제로 촉 함락에 큰 공을 세우긴 했던 등애 본인도 정벌군에 참여하기 전까진 정촉이 무리라 주장했을 정도로[44] 강유가 짜 놓은 방어 전략은 체계적이었다. 사마소와 종회가 기획한 기습 포위&진격전 또한 강유가 짜 놓은 대로 움직이기만 했었어도 이 정도로 무력하게 털리진 않았을 것이다.
강유의 방어 전략은 간단하고 명료했으며 동시에 효과적이었다. 쉽게 말하면 국력차이가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절대''' 위나라를 뚫을 수 없으니 오히려 상대의 침략을 유도해 그들을 상대로 방어전을 하면서 위나라의 일방적인 소모를 강요한 뒤 그 후 가능한 만큼 치고나가는 걸 반복하는 전법이었다. 실제로 등애가 등산까지 감행해 백도어를 하지만 않았어도 또는 후방을 담당한 마막이 어이 없이 항복하지만 않았어도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중앙정부가 트롤링하는 와중에도 촉나라가 그렇게 크게 밀리는 태세까진 아니었다.[45] 문제는 저게 죄다 꼬여서 결국 털렸단 거지만(...)[46]
심지어 강유 입장에서 억울한 건 강유는 진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반대까지 감안해가며 어떻게든 간청해 방어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데 성공했고 이것만 제대로 실행됐으면 막았겠지만 정작 이걸 제안할 땐 받아들이던 중앙정부는 침묵했고 3연속 중요 거점 항복이라는 병크가 터지면서 망한 거라 사마소가 훗날에 말한 대로 강유가 아닌 제갈량이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던 일이었다. 심지어 전후사정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위나라 군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줄줄이 항복한 장서, 마막, 유선이 제일 문제.
당장 위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촉군 비현(郫縣, 성도 바로 북서부에 인접, 현재의 쓰촨성 성도시 비도구(郫都区))의 현령 상욱(常勗)은 제갈첨이 면죽에서 격파되고 촉한 전체가 놀라 다른 이들이 도주하거나 항복할 때 독자적으로 관리와 백성들을 통솔하여 굳게 성을 지켰으며 유선이 이후 항복했을 때야 투항했고 비현의 재물을 그대로 보전했다. 등애가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낙현까지 진군했을 때 황호 시대 이후 기강이 풀어져 있던 촉한의 관리 대부분이 놀라고 당황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거나 했지만 이렇게 제정신을 차리고 일개 현령으로서 최후의 결전을 위해 굳게 대비하는 데 시간을 쓴 사람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정신을 차리고 관리와 백성들을 진정시켜야 할 명색이 황제라는 작자는 풀어져서 위나라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원군도 거절하다가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정신 못 차리고 한나라의 수도이자 대성(大城) 성도를 버리고 바로 항복하자는 논리에 수긍해버린 것이다. 창고에는 아직 곡식과 비단, 물자가 충분히 남아 있음에도! 아니 황제부터가 대비도 없이 풀어져서는 촉한 전역에 위나라의 침입은 없을 거라고 공표해 사람들을 방심하게 해놓으니 혼란이 당연한 것이다. 이 지경을 당했는데 어찌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제대로 설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위에서 나온 '장익이 양안 관구로 가서 한중을 지켰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을 남긴 것이란 평도 있다. 직책만 해도 장익은 좌거기장군이었으니 대규모의 병력을 통솔해 그나마 나았을 거고 사람 자체가 굉장히 엄격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으니 부하 단속에도 철처했을 것이고... 아니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와 함께 마지막까지 분투한 다른 세 사람들 -강유, 요화, 동궐- 중 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들어갔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황제부터가 글러먹었던 시점이니 아무리 재능 있는 장수가 있다고 해봤자 황제가 항복을 강행하면 뭐 어쩌겠는가...
한편으로 강유 입장에선 일단 황호 같은 간신은 둘째쳐도 성도에 남아있는 제갈첨, 번건 등이 어떻게든 견제해 줄 거라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설마하니 유선이 방비에 문제가 없다고 지방군을 다 끌어들이지 않고 태평하게 놀다가 등애가 낙현까지 오게 만들고 바로 항복할지는 몰랐을 테고... 263년 당시 배신 같은 게 없었던 한성, 낙성의 경우 촉이 망할 때까지 함락되지 않은 걸로 보면 아예 틀린 계책은 아니고 결정적으로 263년 당시엔 낙곡 당시 소수의 군으로 유격전과 기만전을 펼쳐 촉으로 들어로는 통로를 차단한 왕평이 없다.
강유의 입지 자체가 당시엔 군부 이외엔 중앙 정계에서 뭐라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정도로 영향력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수많은 전투를 겪은 베테랑이며 촉한의 군사들을 모두 지휘하는 대장군이다. 반면 황호는 궁에만 있던 데다가 황제와 결탁해 난정을 펼치고 있는 환관이었다. 상식적으로 누구를 믿어야 할지는 뻔한 것인데 결국 한다는 짓이 환관 말 듣고 무당 부르기(...) 그만큼 유선이 이 시기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도 설마 상식적으로 설마하니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황제가 무당의 말을 믿고 방어를 내팽개치고 신하들한테 알리지 않은 정도까지 막 나갈 거라곤 아무리 유선이 문제가 있더라도 예측이 가능한 범위였을리가...
무엇보다 강유가 처음 이 방어선 제안을 했을 당시 촉한의 조정에선 이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즉, 당시 촉한의 조정에서 이 방어 계획은 차질이 없다면 문제가 없다고 여긴 것. 문제는 263년 전역 당시엔 유선이 이걸 중신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강유가 답중에 혼자 고립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거기에 당시 강유가 있는 답중은 대촉 전선 총사령관인 정서 장군 등애와 대치 중인데 여기서 강유가 빠지면 등애를 누가 상대하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니 유선이 강유가 말한 걸 씹은 것은 컸다.
왕평과 강유의 처지가 달랐던 것도 둘이 택한 전략의 차이를 불러왔을 것이다. 왕평은 장완-비의가 안정적으로 대권을 잡던 시기였고, 이때는 국가적인 정책이 무리해서 북벌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시기였으니, 왕평은 역습을 고려하지 않고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자신 외에도 믿을 만한 중앙군인 비의와 강유의 존재가 있었다. 반대로 강유는 북벌을 해야만 하는데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북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약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위군을 전멸시키는 전략을 구사한 것.
그리고 실제로도 온갖 삽질이 있었지만, 마막과 유선의 항복만 아니었으면 위나라의 군량 부족 때문에 강유의 방어 시스템이 성공해서 위나라가 후퇴했을 가능성이 꽤 있었다. 이는 종회전, 등애전, 원준의 원자 등에서도 '종회나 등애나 보급 사정이 최악이었다.' 라고 언급하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원준이 평가하기론 당시 위나라도 수춘 3반 이후로 국가의 창고가 텅텅 빈 상황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위나라가 대규모 원정군을 잃었다면 엄청난 타격이 되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만약 이런 항복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역으로 강유가 노렸던 위나라 주력군의 몰살과 그를 통한 북벌의 조건이 맞춰져 위나라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을것이고, 나아가 사마소의 진나라 건국 역시 무산되는 나비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47]
당시 촉한 조정에서는 일단 성도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싸우자는 의견이 많았고 항복을 논의했던 초주 같은 경우엔 대놓고 예전부터 제대로 된 기량이 없다고 생각해 많은 사람이 무시하였다는 기록이 대놓고 있기까지 하니 분해하는 사람들이 한둘은 아니었을 것이다. 괜히 옛 사람의 시에 '어리고 몽매한 놈이 천 리 강산을 경솔히 하니, 한촉(漢蜀)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원망하였다'라는 얘기가 나온것은 아닌 것이다. 손성 역시 본인이 직접 환온 따라 성한을 치러 종군하여 촉 땅에 들어선 적이 있어, 촉 땅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아니 거기가 강이 몇 개고 방어할 만한 곳이 얼마나 되는데 파 땅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위나라 방어가 가능한 상황에서 저러다니 장난하냐?'라는 평가를 남겼다.
사서에 보면 황호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이후 설후의 평가에 군주는 암약하고 신하들은 눈치만 보면서 옳은 말을 하길 꺼린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설후가 손휴 안심시키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일수도 있겠지만[48], 적어도 황호 집권 이후 촉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건 군데군데 보인다. 그러나 왕숭 같은 사례도 그렇고 당시에도 이 급작스러운 항복은 말이 있었던 듯. 왕숭은 초주의 제자들과도 친한 사람이었는데 저런 말을 했을 정도니,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싶기도 하다. 다른 논자들도 '나라에 있어서 군주보다 사직이 중하고 정 안 되면 군주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로) 목숨이라도 내걸어야 군주로서의 대의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유선을 비판하고 있다. 하긴 적국인 조위와 서진조차도 너무하다고 깔 정도면 말 다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마소의 정촉은 훗날 후손들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데 동진을 무너뜨리고 유송을 건국한 유유가 이 정촉건을 빌미로 사마씨 황족들을 도륙냈기 때문이다. 즉 촉한의 황제인 유선은 나와 같은 가문의 사람인데 사마씨가 촉한을 멸망시키고 유선을 희롱한 건 자기 가문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라며 자기가문에 모욕을 안긴 사마씨들을 살려줄 수 없다며 사마씨 황족들을 도륙냈다.

6. 기타 창작물에서



6.1.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연의에서 등애전에서는 답중 전투, 면죽관 전투, 강유전에서는 답중후퇴전, 검각방어전 등으로 전투가 묘사된다.
등애전에서는 등애가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한 직후에 제갈서가 등애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등애 덕분에 서부전선이 안정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사마소의 지시에 따라 종회와 군대를 나누어 촉 정벌을 위해 답중과 한중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한다.
등애는 강유가 퇴각하기 전에 답중성을 포위하고 강유는 조광이 성 안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서쪽으로 퇴각하며, 조광이 문앙과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문앙에게 사망한다. 강유는 수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빠져나가려 하며, 등애와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무승부가 된다. 동쪽에서는 제갈서가 나타나 강유를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추격하며, 제갈서가 실수해서 잠깐의 틈을 주자 강유는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간다.
등애가 이끄는 위군은 촉군이 검각을 틀어막아서 방도가 없자 약초꾼에게서 들은 험로인 강유성으로 가는 길인 잔도를 통해서 가기로 하며, 제갈서는 위험한 길이라면서 홀로 반대하고 떠난다. 강유성으로 가서 마막의 항복을 받고 등애는 면죽관으로 진군하며,장준, 조광이 이끄는 촉군의 복병이 나타나 등애군을 공격하며, 등충이 단기접전에서 장준을 죽인다.
조통이 동생의 원수라면서 분노에 사로잡혀 문앙을 공격해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전사하며, 나헌이 문앙과 단기접전을 벌이다가 상대가 강한 것을 깨닫고 적당히 싸우다가 자신은 해야할 일이 있기에 여기서 죽을 수 없다면서 물러난다. 결국 제갈첨도 전사하고 면죽관은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함락하며, 그대로 성도로 진군해 포위하자 유선이 항복하면서 촉이 멸망한다.
강유전에서는 후화에서 패하자 강유가 위군이 촉 정벌을 할 것을 예측하고 성도에서 지속적으로 원군을 요청했지만 묵살되며, 위군이 한중을 공격하고 부첨이 양평관에서 배신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이에 강유는 검각으로 퇴각해서 막기로 하는데, 등애가 추격할 것을 우려해 조광, 영수가 답중에 남아 적을 막아서 시간을 끌기로 한다.
제갈서가 서쪽 길목의 음평교를 장악한 것을 보고 영수가 조광을 통해 검각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공함곡을 거쳐 옹주로 가는 척을 하자 제갈서가 일부 병력을 빼서 조광이 있는 북쪽으로 가게 하며, 북쪽에서는 조광이 위군을 막고 문앙과 단기접전에서 부상을 입지만 필사적으로 위군을 막는다. 강유가 음평교로 진입하자 남쪽에서 등애가 이끄는 복병이 등장해 강유를 추격해 단기접전을 벌이지만 강유가 등애를 부상입게 만들어 물러나게 하며, 강유는 답중에서 퇴각하는 것에 성공하지만 조광, 영수는 전사했다.
강유는 검각으로 가는 도중에 조통이 조광의 죽음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통을 시켜 성도에 원군을 요청하는 서신으로 보내며, 강유는 검각에 들어가고 종회가 검각을 공격했지만 여러 차례 종회를 격퇴해 강유가 이끄는 촉군은 사기가 올랐다.
검각에서 강유에게 올 원군이 가까운 곳까지 도착했을 무렵에 종회가 군사들을 시켜 다시 검각을 공격하며, 강유가 위군을 막는 도중에 장익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하자 강유는 요화와 함께 산을 올라타 우회해서 위군의 본진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 사이에 검각을 방어한 촉군은 2차례 공격하는 위군을 막아내며, 강유와 요화는 본진을 기습하는 것에 성공해 위군을 격퇴해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성도를 포위해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한다.

6.2. 진삼국무쌍


진삼국무쌍 6에서는 진의 최후 상대로 등장. 그 후 1년 뒤 사마소가 죽고 손오도 망해 진이 통일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진의 정사와 IF의 무대로 등장. 정사에서는 진의 최종 무대로, 갈라졌다가 합류한 진의 대군이 남쪽에서 북쪽의 성도성으로 밀고 들어간다.[49] IF에서는 생존한 사마사가 4년간 국력을 키우다가 자신은 촉으로,[50] 사마소는 오로 침공을 개시한다.[51] 정사의 본진과는 달리 서쪽에 본진이 있으며, 성도성으로 가면 남쪽에서 촉의 군세가 나타난다. 하지만 촉이 멸망했음에도 강유를 비롯한 촉의 잔당들이 성도를 탈환하려했지만 실패하고, 오의 잔당들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최종결전을 벌이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진삼국무쌍 8에서는 촉군과 진군의 최후 시나리오로 성도 공략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촉군의 경우 성도에 침입한 왕원희, 가충을 격파하는 것이 승리조건이며, 강유관에 침입한 등애의 격파, 검각으로 진입하는 종회의 격파 등이 세부 임무로 구성된다. 진군의 경우 성도의 유선 격파[52]가 승리조건.
[1] 정사 삼국지 진류왕전, 진서 문제기. 전쟁 이후의 '성도의 난'까지 포함하면 264년 1월까지.[2] 촉한의 사민부에 기록된 병사수, 사마소는 출정전 9만이라고 주장했으나 조금 많다. 종회와 함께 정촉에 대한 연구는 많이 한 만큼 정확하진 않아도 대략적인 규모는 파악하고 있던 것.[3] 등애군은 음평에 오를때 정예 병사로서만 인솔했기 때문에 자세히는 측정 불가, 또 제갈첨과의 세 번 전투하고 얼마나 전사했는지 파악 불가, 화양국지 왕숭의 증언으로는 강유관에서 처음 나왔을 때가 2만이라 하나, 원자,진서 문제기에선 만여 명 추산, 둘 다 제갈첨과의 싸움에서 희생자 수 추정 불가[4] 종전 후 남은 병사가 10만 2000명이었다.[5] 江油關, 강유수(江油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출전: 『中国历史地图集』第三册 22-23쪽.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방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 즉, 강유관은 변방을 지키는 요새로 인식되었던 셈이다.[6] 실제론 다른 이유도 있긴 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조모 문서와 사마소 문서를 참고해두면 좋다.[7] 이는 이후 등애가 촉한에 들어와서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촉한의 경제력으로 오나라를 멸할 수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등애는 이런 상소를 올린 후 종회에게 잡혀 죄인 신세가 되었고 사마소는 자기가 한 말과 같은 말을 했던 그를 위험분자로 보고 차갑게 외면했지만.[8] 다만 이때 사마소가 촉의 병력이나 국력을 좀 과소 평가한 감은 있다. 실제 촉한이 소모하고 남은 최종 병력은 10만 명이 넘었으니까.[9] 조환이 촉 정벌 조서를 처음 내린 것이 5월이고 사마소가 낙양에서 병사들의 출발전 진열식을 한 것이 8월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유선이 '저들이 촉한을 공격할 리가 없다' 인식했다면 노답일 수밖에.[10] 따라서 멸망 당시의 촉의 여력을 온전히 역산하기 위해선 유언 이래 촉지방에서 유씨 정권들이 해오던 재화-군수품 교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11] 사실 답중도 중요한 수비지점 가운데 하나다, 제갈량의 3차 북벌 당시 여기를 확보한것도 북벌의 전진기지로 사용될 수 있음과 동시에 촉 내지로 들어오는 방어지점인 이곳을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천수, 적도, 금성에서 내려오는 위군을 막는 포인트로 위멸촉지전에선 사마소가 답중에서 강유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따로 6만 대군을 동원하면서 비로소 이용되긴 했지만 진작에 침공을 위해서 이쪽 루트를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12] 강유는 원래 한수에 있던 한중독이 맡아야 할 역할을 중앙군 장익에게 맡기면서 양안관구로 수비지점을 끌어올렸는데 이는 한수가 남쪽에 치우쳐 있어 제때 지원군으로 방비를 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3] 중국전사(全史) 제33권 중국위진남북조군사사(中國魏晉南北朝事史)가 이 의견을 지지한다.[14] 물론 양안관구가 촉한의 병력이 집결하기까지 종회, 등애, 제갈서의 공격을 기적적으로 버텨주면 검각에서 병력을 집결해 등애와 제갈서군의 뒤를 칠 수 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그렇지. [15] 그리고 지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 사실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위나라 옹주자사 제갈서가 이미 길을 막고 원래 요화가 주둔했어야 할 교두(橋頭)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확실해졌을 것이다.[16] 이는 강유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위군이 만약 게릴라, 유격전 형식으로 깔짝대거나 치고 빠지기를 할 경우를 대비해 대규모 군대가 몰려오기 전까지 각지 요충지를 수비하고, 대규모 군대가 몰려올때는 요충지를 버리고 한중 내지를 수비하는 것이다. 강유의 구상은 대군을 몰살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일정수 이상의 위군이 들어오지 않으면 각 요충지에서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만약 대군이 몰려들면 물러나 수비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17] 등애군은 3만인데 촉의 주력이자 정예였던 강유군이 3만을 맞붙어 상대하지 못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18] 장익(翼)과 동궐(厥)이 겨우(甫) 한수(漢壽)에 이르니(至), 강유(維)와 요화(化) 또한(亦) 음평(陰平)을 포기하여(舍) 퇴군하였다(而退), 마땅히(適) 장익(翼)과 더불어(與) 동궐(厥)이 합하니(合), 돌아와서(還) 검각(劍閣)을 보호하여(保) 종회(會)를 막아내었다(拒) - 강유전[19] 주석으로 '각기 구본(舊本)들은 모두 (化가 아닌) 비(比)라 그릇되어 저술한다.《삼국지 강유전)》도 동일하게 오기하였다. 이를 개정(改正)하니, 주석(注釋)으로 더욱 상세히 설명한다'라고 쓰고 비를 화(化)라고 고쳤다.[20] 요화가 미리 가서 충분한 전력으로 지키고 있었다면 강유군이 고립되지 않았을 것이니 애당초 이런 기동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본래 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에서도 움직이며 적을 끌어들이고 공간을 만드는 스페이싱은 전술의 기본 개념으로 촉한 최후의 사령관 강유의 전술적 능력이 돋보이는 기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영수라는 인물이 강유에게 이 계책을 진언한 것으로 나오는데 역사에서는 그런거 없이 강유의 기동이라고 나온다.[21] 실제 역사에서 음평을 넘어 강유관에 나타난 등애의 위군이 1~2만이었다. 따라서 처음 작전을 시작할 때는 당연히 병력이 그 이상이었을 테고 그 험준한 산을 넘으며 생길 비전투손실을 감안하면 원래 등애가 이끌던 3만에다가 제갈서군 일부가 등애군에 합류하면 합류했지 등애군 일부가 제갈서군에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등애와 갈라진 제갈서군은 머릿수만 따져도 3만 이하로 봐야 되며 거기다 등애 이 인간이 험난한 산을 넘어 성도를 공격해야 한다면서 정예 인력까지 많이 차출해 간다면? [22] 종회는 장빈에게 편지를 보내 죽은 아버지 장완에게 경의를 표하고 산소를 정비하겠다고 했는데, 장빈은 선친의 묘가 부현(涪縣)에 있으니 서쪽으로 진군하거든 찾아가서 해달라고 했다. 부현은 종회가 검각을 뚫지 못하는 한 갈 수 없는 게 실상이었고, 장빈도 나중에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23] 종회의 군대가 십수만임을 감안할 때, 양안관구에 상당한 곡식이 비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위에 내용대로 한성, 낙성, 황금성들이 종회가 이끄는 주력 부대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은 것을 보면 강유가 왕평의 방어시스템을 변경하면서 생기는 위험성, 즉 위나라의 대군이 한중 내지로 진입하는 상황에 얼마나 잘 대비했는가를 알 수 있다.[24] 상식적으로 만약에 당신이 통일 대한민국의 군인이고 북한 잔당이 숨어들어간 개마고원으로 진군한다고 생각해보자, 근데 명색이 스타라는 인물들이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여긴 어디지?' 라고 하는걸 우연히 들었다면 당신은 그 장군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25] 무도-음평의 저족을 견제하고 이들이 위군과 결탁하는 일이 없도록 음평에 군사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26] 곽준의 아들로 촉한 멸망 이후에도 서진의 장수로써 오나라랑 싸워 교주를 탈취하는등 군재는 확실히 증명한 장수이다.[27] 이 사람은 연의에서 나오는 것처럼 완전히 물은 아니였다. 황호 쪽에 줄을 댄 건 맞지만.[28] 대장군 정봉의 동생이다.[29] 시적은 얼마 전 독자적으로 촉의 염우와 연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조할 것을 꾀한 적이 있었다.[30] 무리수 맞다, 당장 저렇게 누군가를 왕으로 봉할 때는 당연히 황제의 의사가 중요시 되는데 그냥 이걸 쌩 무시해 버린 것. 결코 적장 앞에서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왕은 그 때까지만 해도 (조조나 사마소 같은 사례가 아니면) 오로지 황실 가문만이 가능한 즉위했는데... 누구 귀에 들어가면 꼬투리 잡히기 충분한 짓이다.[31] 그에 반해 성도 바로 북서쪽에 인접한 비현에서는 상욱이라는 관리는 독자적으로 백성들을 거느리며 성을 굳게 지켰다.[32] 등애가 넘은 700리는 한(漢)대의 리 길이(0.4158 km)로 계산할때 291km로 이를 한국으로 따져 계산하면 동서울터미널에서 광주광역시 바로 윗 지역인 전남 장성군 IC 출구까지의 거리 정도 된다. 물론 아예 극한의 험지로 들어가 700리를 간 거니 이보다 더 고충이 심했을 것이다.[33] 사민부는 상서랑 이호에 의해 전달되었는데 항복하면서 등애 정도 되는 뛰어난 행정관이 촉한의 상서대 쯤 되는 기관에게 현재의 정확한 사항을 받길 원하지 옛 정보를 받고자 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나 다른 곳에 숨겨진 병력이 나중이라도 촉한 부흥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제갈첨의 군대는 성도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만큼 계산하긴 쉬웠을 것이다.[34] 그러나 당연히도 반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촉나라 사대부들 두진처럼 자리를 버리고 은거하거나 이밀처럼 할머니를 핑계로 등애를 만나지 않았다.[35] 여기서 '용'은 옛 한중 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이다. 즉 한중 지방을 이른다.[36] 배수의 발언 인용.[37] 촉한이 멸망하고 4년 후에 왕부라는 인물이 제갈첨을 사칭해 반란을 일으키긴 한다.[38] 강유는 유선이 성도를 굳게 수비하려 한다고 듣거나 혹 동쪽으로 오(吳)로 들어가려 한다고 듣거나 혹 남쪽으로 건녕(建寧)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으니 무엇이 정확한 소식인지 몰라 동광한군 처현(郪縣)의 도로를 거쳤다. 그리고 동광한군 오성현에서 유선의 항복 명령을 받는데 이곳은 성도, 면죽과 낙성에 가까운 곳이다.[39] 유선이 항복서신에서 '저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그럭저럭 처신하며 (문황제(조비)의) 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라고 써낸 것을 뜻한다. 어차피 적군에게 항복하는 마당에 자신을 높여 쓸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40] 동진 대의 시인.[41] 손성은 강유의 평가에서도 항복하여 절의를 못 지켰던 주제에 무슨 대단한 계책을 내느냐고 깠으나 이 글을 보면 애시당초 유선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강유가 끝까지 근왕군으로서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사실 강유전에서 배송지가 손성의 평을 보고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었고 충분히 촉을 부흥시킬수 있었다고 강유를 옹호하긴 하지만.[42] 유선의 항복칙서가 전하자 촉군이 분격하여 칼로 돌을 내리친 것을 뜻한다.[43] 申包胥,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의 대부(大夫). 초나라가 오(吳)나라 오자서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여 이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초나라를 도와 안정시켰다.[44] 심지어 등애는 이 당시 위나라에서 대촉 방면에선 최고참에 가까웠다. 즉 중앙정부가 아닌 바로 눈앞에서 그들을 봐야하는 현장 실무진 입장에서 볼 때 저런 기책을 고려해도 '''상대가 상식적으로만 대처해도''' 답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45] 홍대용은 아예 이 당시 강유의 최고의 실책을 '''나라가 막장으로 가고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고 '상식적인' 대처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다.[46] 정촉은 촉나라는 물론 '''위나라에서도 엄청 갑작스러웠던 선언이었다.''' 그만큼 문제도 많았고 몇 번이고 말하듯이 강유가 짜 놓은 대로 대처만 잘했으면 무난하게 버텼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지 않았고 위나라는 그리고 두예는 '''아무리 계획을 막 짜도 되는 놈은 된다.'''라는 이상한 교훈만 배워갔고(...) 심지어 이는 정오 때도 또 먹혔다(...). 원래라면 '정복전 이러면 망한다.'라는 반면교사로 나와야 될 사건이 맞상대하는 두 나라가 훨씬더 글러먹었던지라 성공한 것. 좀 더 자세히 보면 위나라 쪽에선 지지율만 보고 일으킨 전쟁 + 자기판단을 과대평가한 참모진 + 현장 지휘관의 반대 묵살 + 상대측에게 전략적으로 밀림이라는 조건 등등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정석적으로 망하고 있었다.[47] 진의 건국이 문제가 아니라 사마씨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을 것이다. 종회를 제외하곤 모두가 반대한 촉정을 억지로 밀어 붙인 이유가 조모 참살이라는 도저히 말이 안되는 폭거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수를 거듭 뒀음에도 심지어 그 촉정이 실패로 끝다면 반대세력들이 그걸 가만히 놔뒀을까? 조상이 낙곡에서 참패한 뒤, 제갈각이 합비에서 참패한 뒤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다.[48] 다만 설후의 이 보고는 비록 유선의 촉한 조정을 보고 말한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손휴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라는 권중달 교수의 평가가 있다.[49] 철롱산 전투에서 곽회를 살리면 아군 장수로 등장한다.[50] 하후패, 곽회, 등애, 종회, 문앙이 참전.[51] 가충, 왕원희, 제갈탄이 참전.[52] 세부 임무들을 모두 달성할 경우 유선의 항복으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