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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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載熙
1934년 1월 18일 ~ (90세)
1. 개요
2. 성향
3. 선거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자, 정치인, 관료이다.
1934년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25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재학 시절 이강석이 서울대 법학과에 부정하게 편입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졸업 후 한국일보, 민국일보[1],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조선일보에서 정치부장, 서울신문에서는 편집국장, 주필로도 활동했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 분구 전)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소장파 국회의원으로서 박찬종, 오유방, 정동성 등과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고병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김영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 다만 분위기가 격양된 상황에서 남 의원이 술잔을 집어던지며 사건을 확산시켰다는게 문제. 결국 술잔에 맞아 부상당한 장성이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바람에 얼굴 이마에 부상을 당하였다.
한편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을 두 번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강서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당 최두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6년 지역구를 이신범에게 물려 주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후로는 진보 정치인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 5월에는 문재인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주 만나는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2. 성향


군부독재 정권에 참여하였고 꾸준히 보수우익정당에서 활동하였지만, 개인의 정치성향은 오히려 중도진보인 상당히 기묘한 인물이다. 이때문에 민정당 국회의원 시절에는 ''체체내 리버럴''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정계를 떠난 뒤에는 점진적인 개혁과 시민계몽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을 교정하자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2]
4.19 직후 민국일보 정치부 기자시절 혁신정당을 담당하면서 안면을 트게 된 구 혁신계[3] 인사들[4]과 평생동안 친분을 쌓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이었을뿐 진보적인 활동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유신독재 정권에 영입돼 이후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보수우익정당에서만 활동한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혁신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계속되었고, 정계 은퇴 이후에는 오랜 세월 관찰한 구 혁신계의 역사에 관해서 여러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재희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만일 자기가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따랐을 것이며, 10년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예춘호와 사돈 사이다. 남재희가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있던 시절, 사돈 관계를 맺었는데 당시 예춘호는 전두환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여서 화제가 됐다. 남재희의 회고에 따르면 불이익은 커녕 전두환으로부터 축하와 함께 두둑한 축의금까지 받았다고 한다.[5]

3.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선거구)[6]
'''민주공화당'''
'''45,426 (28.81%)'''
'''당선 (1위)'''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8선거구)[7]
'''민주정의당'''
'''76,786 (36.09%)'''
'''당선 (1위)'''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
'''민주정의당'''
'''75,132 (22.69%)'''
'''당선 (1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 을)
'''민주정의당'''
'''25,198 (31.32%)'''
'''당선 (1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 을)
민주자유당
26,356 (29.91%)
낙선 (2위)


[1] 1962년 경영난으로 폐간되었다.[2] 페이비언(Fabian)은 19세기말 영국의 지식인들이 결성한 정치단체로 폭력혁명을 배제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사회를 바꾸자는 주장을 내걸었다. 이들은 노동당(영국) 창당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3] 1970년대까지는 현재의 진보진영을 혁신계라고 불렀고, 진보는 발전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실제 1956년 대선에 출마한 진보당 조봉암의 선거구호는 "혁신만이 살길이다''. 진보가 정치용어로 자리잡은 것은 1990년대 들어서 노회찬이 진보정치연합을 만들면서 부터이다.[4] 김철(1926), 고정훈 등등[5] 전두환은 원래 화끈한 현질과 쇼맨쉽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세력을 키운 인간이다.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두툼한 봉투를 받았는데, 자기 생각보다 0이 하나 더붙어 있어서 놀랐다는 증언을 남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6] 강서구[7] 강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