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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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有邦
1940년 9월 18일 ~ (84세)
대한민국의 정치인, 법조인이다. 본관은 보성(寶城).#
오유방은 1940년 9월 18일 경기도 경성부 내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1]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제14회), 사법시험(제1회)에 합격하였다. 군법무관 신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재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중선거구제로 바뀐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지역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신민당 김재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0.26 사건 이후 민주공화당 내에서 박찬종, 남재희, 정동성 등 다른 소장파 의원들과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민주정의당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3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4년 국정교과서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법률개폐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같은 해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선출에 반대하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에 몸담았다. 이 새한국당 쪽 인물들이 돌고 돌아 갈라질 때, 그는 이종찬과 함께 DJ 계열로 가게 되었다.
1994년 아태재단 후원회 부회장을 맡아 김대중과 가까워졌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서정화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 때의 선거 포스터가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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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용산 지역구 공천에서 설송웅[2] 후보에게 밀려 낙천한 후, 한 동안 정치 일선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17대 선거에는 아예 나서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18대 선거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한나라당 쪽으로 출마를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옛날 지역구 중 하나인 은평구 갑 지역에 출마 신청을 했는데, 결과는 과거 탈당 및 다른 당 출마 전력을 이유로 컷오프 되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용산구청장 후보 선거위원장을 맡아 다시금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고, 2015년에는 헌정회 법률 고문을 맡았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 정치권 인사들의 일정에 대해 중개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 공천을 신청하였지만, 새누리당을 탈당한 진영 국회의원을 영입하여 전략 공천하자 이에 반발하여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하지만 무소속 출마 등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애초부터 용산구 국회의원은 전략 공천 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 오죽했음 김종인이 용산구 공천 만큼은 보류하라고 했을까. 게다가 이미 20대 총선 때 76세의 고령으로 출마할까 말까의 정도였는데, 만악이 나갔다면 20대 총선 지역구 최고령이 됬을지도 모른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tvN의 예능인 내게 남은 48시간에서 탁재훈이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고자 사우나에 방문할 때 우연히 출연하였다(...) 탁재훈이 어렸을 때부터 정치 활동을 지역에서 활발히 하다보니 이름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다고.
吳有邦
1940년 9월 18일 ~ (84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법조인이다. 본관은 보성(寶城).#
2. 생애
오유방은 1940년 9월 18일 경기도 경성부 내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1]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제14회), 사법시험(제1회)에 합격하였다. 군법무관 신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재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중선거구제로 바뀐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지역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신민당 김재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0.26 사건 이후 민주공화당 내에서 박찬종, 남재희, 정동성 등 다른 소장파 의원들과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민주정의당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3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4년 국정교과서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법률개폐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같은 해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선출에 반대하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에 몸담았다. 이 새한국당 쪽 인물들이 돌고 돌아 갈라질 때, 그는 이종찬과 함께 DJ 계열로 가게 되었다.
1994년 아태재단 후원회 부회장을 맡아 김대중과 가까워졌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서정화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 때의 선거 포스터가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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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용산 지역구 공천에서 설송웅[2] 후보에게 밀려 낙천한 후, 한 동안 정치 일선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17대 선거에는 아예 나서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18대 선거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한나라당 쪽으로 출마를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옛날 지역구 중 하나인 은평구 갑 지역에 출마 신청을 했는데, 결과는 과거 탈당 및 다른 당 출마 전력을 이유로 컷오프 되면서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용산구청장 후보 선거위원장을 맡아 다시금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고, 2015년에는 헌정회 법률 고문을 맡았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 정치권 인사들의 일정에 대해 중개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 공천을 신청하였지만, 새누리당을 탈당한 진영 국회의원을 영입하여 전략 공천하자 이에 반발하여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하지만 무소속 출마 등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애초부터 용산구 국회의원은 전략 공천 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 오죽했음 김종인이 용산구 공천 만큼은 보류하라고 했을까. 게다가 이미 20대 총선 때 76세의 고령으로 출마할까 말까의 정도였는데, 만악이 나갔다면 20대 총선 지역구 최고령이 됬을지도 모른다.
3.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4. 소속 정당
5. 여담
tvN의 예능인 내게 남은 48시간에서 탁재훈이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고자 사우나에 방문할 때 우연히 출연하였다(...) 탁재훈이 어렸을 때부터 정치 활동을 지역에서 활발히 하다보니 이름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