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구성헌
[clearfix]
1. 소개
德壽宮 九成軒
덕수궁의 건물이었다. 현재는 없다. 석조전 바로 뒤에 있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구성헌이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 이 설계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2. 이름
'구성(九成)'은 《서경(書經)》 -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소소[2] 의 음악 9곡을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簫韶'''九成''' 鳳凰來儀)"는 구절에서 따왔다.#
현판의 글자는 북송의 문인이자 관료인 소식(소동파)의 글씨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한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1899년(광무 3년) 3월에 아펜젤러가 촬영한 사진에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에 그 이전에 세운 듯 하다.
용도도 확실하게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여러 자료들을 볼 때 원래는 세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 언급한 아펜젤러의 사진에는 구성헌을 ‘세관(Custom House)’[3] 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 1904년 4월호에 실린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약도에도 구성헌을 ‘전(前) 세관(Former Custom House)’이라고 표기했다.# 이를 미루어볼 때 원래는 경운궁이 아니었으나 나중에 경운궁 영역으로 들어온 듯 하다. 언제 편입했는지 역시 알 수 없으나 1899년(광무 3년) 7월에 고종이 여기서 독일 고문관을 만났다는 기록을 보아# 1899년 3월[4] 에서 7월 사이로 보인다.
위에 언급한 독일 고문관 외에도 러시아와 일본의 공사를 접견하는 등 고종은 구성헌을 외국의 외교관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3년(광무 7년)에 새로운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을 완공하면서 구성헌의 사용빈도는 많이 줄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로 대부분의 경운궁 주요건물들이 불탔으나, 구성헌은 무사했던 듯하다. 그 해 11월에 고종이 살아남은 건물들 중 하나로 구성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1907년(융희 원년) 9월 30일 자 《대한제국 관보》를 보면,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외부에 나갔다가 구성헌으로 돌아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를 보아 영친왕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구성헌을 처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3.1. 철거
현재 구성헌은 없다. 철거된 시기도 모른다.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1938년에 편찬한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석조전을 지을 때 그 부지 안에 들어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적었다. 그래서 구성헌이 석조전 공사를 시작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틀렸다.
석조전의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00년(광무 4년)부터였다. 그런데 위의 역사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 구성헌은 1907년(융희 원년)에도 존재했다. 이것만 봐도 《덕수궁사》의 내용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조전과 구성헌의 영역이 겹치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 실린 경운궁 약도의 6번이 석조전이고[5] 10번이 구성헌이다. 만약 영역이 겹쳤다면 저렇게 표기할 리가 없다.
또한 사진엽서 제작소인 히노데 상행(日之出商行)에서 1914년에 발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덕수궁 일대의 사진이 실려있는데 거기에 완공을 앞둔 석조전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석조전의 동편 기둥 사이에 구성헌의 전면 일부가 살짝 드러난 것이 보인다. 이를 보아 석조전과 구성헌의 영역은 별개였으며, 석조전 공사가 끝나가는 1910년 즈음까지도 구성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석조전을 완공한 후 구성헌을 사용하긴 힘들었다. '''그야말로 정말 딱 붙어있어서''' 건물이 석조전 그늘에 가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게 철거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4. 구조
현재 구성헌 건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후술할 내용들은 남아있는 사진을 토대로 유추한 것이다.
- 남향을 하고 있다. 2층 건물로 전면 약 10.6m, 측면 약 9.7m에 약 115m²(35평)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 정면은 1, 2층이 각각 6칸이고, 측면은 5칸이다. 정면 각 칸들의 폭은 대체로 비슷하나 왼쪽에서 4번째 칸만은 다른 칸에 비해 폭이 굉장히 좁다.
[1]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부른다.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2] 簫韶. 고대 중국의 순 임금이 지은 음악의 이름.[3] 당시에는 해관(海關)이라고 불렀다.[4] 아펜젤러가 세관이던 구성헌을 촬영한 시기.[5] 'New Unfinished Palace(새로 짓고있는 궁전)'이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