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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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德壽宮 石造殿
'''대한제국이 건립된 연도에 짓기 시작해서 대한제국이 망한 연도에 완공한 비운의 궁전.'''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에 있는 덕수궁의 건물이다.
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근대화한 대한제국의 위용을 보이려 지은 것이 석조전이다.
전통 궁궐에서 정전, 편전, 침전은 각각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석조전은 저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석조전을 대한제국 황궁 그 자체로 사용할 것을 뜻했다.
2. 이름
‘석조(石造)’의 뜻은 말 그대로 '돌(石)로 만들었다(造)'인데, 정식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궁궐 전각 이름이 나름 깊은 철학과 관련된 뜻을 담는 반면 석조전은 저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황궁 자체로 세운 건물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
당시에는 ‘석조궁전(石造宮殿)', '석궁(石宮)' , '석조전당(石造殿堂)' 등 다양하게 불렀으며 나중에 ’석조전(石造殿)‘ 으로 굳었다.# 그동안 나무와 흙으로 건물을 지었던 한국인들에게 서양처럼 전체를 돌로 지었다는 것이 아마 굉장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건축 자재를 곧 이름으로 쓴 듯 하다.#[1]
3. 역사
3.1. 건립 단계
대한제국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건립을 발의했다. 처음에는 경희궁에 지으려 했으나 브라운 권유로 경운궁에 세웠다.[2]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으로 환궁[3] 한지 한 달 채 못지난 1897년(건양 2년) 3월에 브라운이 통역관과 함께 경운궁 안 지형을 측량했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보아# 이미 그 때부터 서양식 궁전 건설을 기획한 듯 하다.
공사 진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었다. 1897년(건양 2년) ~ 1901년(광무 5년)에 설계 및 기초공사를, 그리고 1903년(광무 7년) ~ 1906년(광무 10년)엔 구조공사, 마지막으로 1907년(광무 11년) ~ 1909년(융희 3년)은 내부공사를 했다.
설계는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이 맡았다. 하딩은 석조 건물이 낯선 한국인들에게 공사에 앞서 나무로 1/10 정도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1900년 5월 26일자 미국 잡지〈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서 저 모형을 실었다.
기초공사는 1900년(광무 4년)부터 시작했다.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4] 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 陽吉) 기사를 초빙하여 1901년에 마무리했다. 자재는 창의문 근처 돌산에서 나는 화강암을 활용했다.
1902년(광무 6년)에서 1903년(광무 7년)에는 공사를 멈췄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그 이유로 정변(政變)을 꼽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1903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때 건축 주도권이 브라운에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 種大郞)[5] 에게 넘어갔고 공사도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6] 에서 맡았다. 이시이 슈헤이(石井周平)를 감독으로 하고 두 일본인 기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으며 1905년(광무 9년)부터는 영국인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Henry William Davidson)이 합류하여 함께 작업했다.
내부 공사는 2년이 걸렸다.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다. 배관 및 난방 시설 설치는 영국의 크리털 회사(Critall & Co.)에서 담당했고, 내부 장식과 가구 등은 역시 같은 영국의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3.2. 일제강점기
1909년(융희 3년)에 드디어 완공했고 1910년 12월 1일에 공식적으로 낙성했다.# 그런데...
약 3달 전인 8월 29일에 '''이미 나라가 망했다.'''(...)
그래서 처음 계획처럼 황궁으로 쓰지 못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은 공들여 지어놓고서는 막상 완공하자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다.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침실로 사용한 것은 이왕세자로 전락한 의민태자(영친왕)이었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간간히 조선에 올 때마다 여기서 지냈다. 1922년에는 아내 이방자와 돌도 채 안된 아기였던 장남 이진과 함께 와서 머물렀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진이 갑자기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7]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에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했다.[8] 그러면서 건물 내부와 앞 뜰도 많이 바꾸었다. 미술관이 된 뒤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처음에는 조선 작품도 같이 전시하려 했으나 일본 미술가들이 "조선인의 작품을 한 공간에 같이 전시할 수 없다"며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1936년에는 서남쪽에 새로운 이왕가미술관을 지어 1938년에 완공한 뒤 개관했다. 석조전은 근대일본미술진열관이라 했고 신관은 조선고대미술진열관이라 하여 조선 미술품을 전시했다.# 이것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흔히 석조전 서관으로 부른다.
3.3. 광복 이후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는 임시정부 대환영 기념 잔치가 열렸고 # 1946년 3월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 유명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면서# 자연히 비공개되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덕수궁을 일반에 다시 개방했으나 석조전은 여전히 출입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UN한국위원단에서 여러 번 회의장으로 사용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새 외무부 청사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를 입어 1954년 5월에 보수했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립 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그리고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이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을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어서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2005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편한 뒤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비었다.[9] 이에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할 지 아니면 원래 황궁으로 복원할 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복원하기로 하여 2009년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2014년 10월 7일에 복원 공사를 끝냈고 같은 해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大韓帝國歷史館)’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지층, 1층, 2층으로 나누었다. 정면 54.2m, 측면 31m, 높이 17.5m이며 연면적 약 4,122㎡(약 1,226평)의 규모이다.
4.1. 외부
- 가운데에 지층만한 높이의 계단이 있고 양 옆에는 큰 좌대를 놓았다. 계단은 맨 밑에 반쯤 땅에 묻힌 단까지 합쳐 총 18단이다. 계단 위에는 현관이 있으며 좌, 우로 방과 베란다를 둔 모습이다.
- 모든 기둥머리는 양 끝이 아래로 회오리 치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건물 정면과 좌, 우면 가운데 앞에 시원하게 뻗은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현관을 구성했다. 이런 현관을 포티코(portico)라고 한다. 포티코는 기둥 숫자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뉘는데, 정면 현관처럼 기둥이 6개인 경우를 헥사스타일(Hexastyle), 측면 현관처럼 4개인 건 트리스타일(tristyle)이라 한다. 석조전 포티코에 세운 기둥은 줄지어섰다(列)하여 열주(列柱)라고 하는데, 열주는 둥글지만 좌, 우 회랑의 기둥은 네모나게 각진 모습이라 차이가 있다.#
- 현관 1층의 가장자리 바깥 기둥은 둥글다. 기둥의 3/4는 바깥으로 나와있지만 1/4는 벽 속에 있다. 가장자리 안쪽 기둥은 반대로 1/4가 나와있고 3/4가 벽 속에 있다.
- 1층 베란다 창문은 위, 아래로 긴 모습이다. 창틀은 십(十)자로 만들었고 위에 삼각형 모양 박공을 단 뒤, 그 아래 양쪽에 돌 받침대를 놓았다. 창틀 상부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하부엔 두 직선 틀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작은 원형 틀을 각각 5개씩 둔 뒤 그 위에 대각선과 직선으로 무늬를 넣어 마치 부채처럼 보이게 했다. 2층 베란다 창문은 1층과 거의 같다. 그러나 창틀 위에 박공이 없고 단지 가로로 긴 석재 부재를 달았으며, 창문 윗부분이 깔끔한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다르다.
- 기둥머리 위로 처마도리(architrove), 프리즈(frieze), 코니스(cornice)를 얹었다. 코니스와 프리즈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네모난 부분은 마치 치아처럼 생겨서 덴틸스(dentils)라고 부른다.
- 코니스 위, 지붕 부분은 가운데 현관과 나머지 부분이 다르다. 중앙 현관 코니스 위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보통 페디먼트는 아르테미스 신전 항목 복원도에서 볼 수 있듯 건물 전체의 지붕으로 설치하는 게 대부분인데 석조전은 건물의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중앙 현관을 돌출 시킨 뒤 그 위에만 설치한 것이다.# 페디먼트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오얏꽃 잎을 장식했다.
- 현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코니스 위에는 중간 부위가 호리병처럼 생긴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그 위에 세로로 무늬를 낸 항아리 모양 장식을 올렸다. 이런 장식을 피니얼(finial)이라고 한다.
- 뒷면을 제외하고는 동, 서, 남쪽으로 베란다가 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나 아시아권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를 건축 양식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사실 한국 날씨는 동남아시아와 다르나 하딩이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이던 양식대로 설계한 것이다.#
- 지층 주변을 기단부 기둥으로 둘러쌓았다. 지층도 베란다처럼 뒷면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있다. 지층의 출입문은 가운데 가장자리 2칸과 동, 서 양쪽 끄트머리에 각각 1칸 씩 위치해있다. 지층의 창문은 별다른 장식이나 구조물이 없다.
4.2. 내부
5. 관람
외부와 지층은 덕수궁 입장료만 내면 얼마든지 관람이 가능하다. 단 1, 2층의 내부를 관람하려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한 뒤에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로 들어가 보는 것만 가능하다. 현장 예약은 65세 이상 어르신 및 외국인만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홈페이지에 접속하거나 02-751-0753 번호(석조전 안내데스크)로 문의하면 된다.
6. 여담
-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5월에 도둑이 들어 비단 10여필을 훔쳐갔다. 고종의 유물이었다고 하며 당시 돈으로 무려 500여 원 어치[10] 였다고 한다.# 약 한 달 후 창덕궁경찰서[11] 에서 범인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모 남작의 사위 윤형구로, 모르핀[12] 에 중독되어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후에도 공범자들을 색출하여 잡았는데 수괴는 중국인 왕림탄이며 궁전의 용품을 훔쳐서 비싸게 팔려던 목적이었다고 한다.#
- 국내에 비슷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이 몇 채 있다. 석조전을 모티브로 한 건물들도 있지만, 백악관 등 다른 건물들을 오마주하여 지은 것도 있다. 공교롭게 대부분 학교 건물들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경희대학교 본관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과 계명대학교 본관 및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을 들 수 있다.
- 2020년 3월 SK텔레콤이 덕수궁관리소와 함께 덕수궁을 3차원 입체 표현한 어플 'AR(증강현실) 덕수궁'을 시범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 그 중 석조전과 덕수궁 대한문, 중화전과 석어당 등 네 곳을, AR로 재현한 판다 · 고양이 · 웰시코기 등과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든 AR 포토존으로 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 2015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마다 중앙홀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시간은 오후 7시부터 8시까지이다. 무료이지만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덕수궁 홈페이지나 02-751-0740로 전화하면 된다.
7. 대중매체에서
- KBS2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123회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고종(이진우 분)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내레이션이 깔릴 때 배경으로 나온다. 그런데 석조전은 1910년에 준공되었기에 저 장면은 고증 오류이다. 단, 근대 국가로 국체(國體)가 바뀌었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쉽게 각인시키기 위한 극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다.
- 영화 《덕혜옹주》 포스터 배경이었다. 극에서는 딱 한 번만 나온다. 바로 위에 나온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재현한 씬이다. 포스터는 석조전에서 찍었지만 영화에 나온 장면은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제작진들이 여러 해에 걸쳐 고증한 끝에 실제와 상당히 비슷하게 재현하여 고증작업에 도움을 준 문화재청 학예사들마저 놀랐다는 후문이다.#
- JTBC에서 방송한 《차이나는 클라스》 34회(강연자: 유홍준)[14] 와 152회(강연자: 임석재[15] )[16] 에 등장했다. 차이가 있다면 34회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152회에서는 건축적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것.
[1] 단, 2009년부터 진행된 복원공사 도중 적색 벽돌을 쌓은 뒤 석재로 외관을 포장하여 건축했음을 확인했다. 즉, 이름처럼 완전히 돌로만 지은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대식당에 가면 불투명 유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2] 경희궁은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과 운교를 설치했을 정도로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어서 그곳에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3]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4] 沈宜錫. 1854 ~ 1924. 탑골공원 팔각정, 원구단, 광화문 기념비전 등을 지은 도편수로 이외에도 배재학당 강당을 비롯하여 독립문, 손탁호텔 등의 서구식 건축 공사에도 참여했다. 정동 토박이였기에 서양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일찍이 서양 건축에 눈 뜬 듯 하다.[5]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한 그 사람 맞다.[6] 타이세이 건설의 전신.[7] 이남주(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현손녀) 전 성심여자대학교 교수는 2014년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과 한 인터뷰에서 이방자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한) 석조전에 피카소 그림을 보러갔는데, 이방자가 아주 담담하게 "저기 저 방에서 진이 죽었어"란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8] 그 후 의민태자(영친왕) 부부가 조선에 올 때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39년이며, 이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저로부터 24년이 지난 1963년이었다.[9] 2004년과 2005년 사이 텀이 있는데, 2004년 11월 '조선 왕실 역사 박물관 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인 200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 해 8월에 개관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10] 현재 가치로 대략 5천만원 정도.[11] 대한제국 황실(당시 이왕가)에 관한 경찰 업무를 담당하던 곳.[12] 당시에는 모루히네라고 불렀다.[13] 나머지는 경복궁 교태전 일곽, 창경궁 옥천교 일대,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 성정각이며 능, 원, 묘 중에서는 융건릉과 덕혜옹주 묘(홍유릉 구역) 산책로를 꼽았다.[14] 2017년 11월 1일 방송.[15]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16] 2020년 4월 8일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