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1. 개요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요안니스 8세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형으로, 동로마 제국의 제위 요구자였던 인물
2. 생애
디미트리오스는 1407년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들이 많아서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평화로울 때 태어났다면 황족으로써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안락한 삶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당시 제국이 처한 상황은 그에게 순탄치 않은 운명을 부여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후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1][2] 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사방에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포위당하여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태였다. 디미트리오스의 아버지인 마누일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을 비롯한 서방 세력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고, 티무르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란 역부족이었다.
1422년 디미트리오스는 마누일에게서 림노스 섬을 통치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1423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로 향했고, 맏형인 요안니스 8세가 황제로 즉위한 지 2년 후인 1427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이후 1448년에 요안니스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그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섯째 형인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와 분쟁을 벌였는데,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콘스탄티노스 11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그 후 디미트리오스는 정식으로 미스트라스의 친왕이 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와 형이 했던 것처럼 망해가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으나, 1453년에 있었던 마지막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2,200여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로마인들의 영토는 콤네노스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트라페준타를 제외하면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다스리던 모레아가 유일했으나, 두 형제는 제국의 잔재를 유지하지도 못했고, 콘스탄티노스처럼 명예롭게 죽지도 못했는데, 이는 그들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기는 커녕, 상대방을 축출하여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분을 벌였는데, 1460년에 디미트리오스는 동생을 축출하기 위해 조국과 형의 원수인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였다. 결국 술탄 메흐메트 2세와 디미트리오스의 연합군 앞에서 견디지 못한 토마스는 이탈리아의 교황령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디미트리오스는 술탄의 제후로서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토사구팽당해 아드리아노플에서 연금되는 상태가 되어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은 죄값인지, 연금당한 상태에서 10년 동안 비참하게 살다가, 1470년에 사망했다.
반면, 토마스는 로마에서 교황의 보호를 받으며 비교적 안락한 삶을 보낼 수 있었는데, 비록 멸망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여기는 것은 서방 세력도 마찬가지였기에, 교황은 그에게 명목상으로나마 황제 대접을 해주었다. 이후, 토마스는 1465년에 로마에서 사망했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 및 모레아 전제군주 칭호는 그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승계했다. 그리고 안드레아스는 생계를 위해 황제의 칭호를 프랑스의 샤를 8세와 스페인의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 등에게 팔아넘겼는데[3] ,칭호를 사들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은 실제로 칭제하지 않았기에, 허울 뿐인 로마 황제 자리는 형식적인 계승권마저 흐지부지되며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