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셸

 



''''''La Rochelle'''
라 로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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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국가'''
프랑스
'''레지옹'''
누벨아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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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상업적 번영과 템플 기사단
2.3. 위그노의 도시
2.4. 종교 전쟁
2.4.1. 1차 포위 (1572 ~ 1573년)
2.4.3. 2차 포위 (1627 ~ 1628년)
2.4.4. 가톨릭의 승리
2.5. 근대
2.5.1. 도시의 쇠퇴
2.5.2. 오리엔탈리즘과 산업화
2.6. 근현대
3. 교통
4. 스포츠
5.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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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서부 누벨아키텐 레지옹, 대서양비스케이 만에 접한 항구 도시. 중세 후반에 한자 동맹과 교역하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까지 가는 항로가 개발되며 번영하였다. 라 로셸은 16세기까지 보르도를 제치고 프랑스 서부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16-17세기에는 위그노 (프랑스 신교도)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으며, 위그노 전쟁 시에 공성전이 일어났다.
1600년 기준으로 라 로셸은 프랑스에서 2번째 혹은 3번째로 큰 도시였으나, 현재는 국제 요트 경기가 열리는 인구 8만의 중소 도시이다. 라 로셸은 가톨릭과 절대왕정의 밑거름이 된 중앙 집권 에 제일 강력히 반발한 곳으로서, 프랑스 근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2. 역사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로마 지배 이전에는 갈리아 부족인 산토네스족이 이 지역을 점령해 거주했다. 로마 시대에는 염전으로 쓰였고 빌라가 듬성듬성 있던 해안가였다. 현재의 도시는 서프랑크 왕국 시절인 10세기에 지어졌다. 12세기의 아키텐 공작이던 기욤 10세는 1130년에 샤티플라이옹 플라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며 항구를 황폐화 시켰고 새로운 항구 도시로 라 로셸을 지목, 항구를 개발하였다. 1137년 공작은 도시에 상업 특권과 코뮌의 지위를 주었다. 12세기 후반에는 그의 딸이자 여공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리처드 1세의 어머니이신 그분)가 상업 특례를 갱신시켜 주었다.

2.1. 상업적 번영과 템플 기사단


1139년, 엘레노어[1]는 당시 십자군에서 가장 열심히 싸우던 기사단으로서 주로 프랑스 인으로 구성되던 성전 기사단(템플기사단)에게 면세 혜택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제분소(방앗간)를 붙여주었다. 따라서 라로셸은 성전기사단이 대서양 연안에 소유한 가장 큰 거점이 되었고 자체 함대도 소유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 플랑드르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엘레오노르는 1152년에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앙주 - 노르망디 공작이자 곧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와 결혼하였고 그가 1154년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로 즉위하자 도시는 플랸테저넷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1214년 2월에는 존 왕이 실지 회복을 위해 상륙, 아키텐에서 필리프 2세와 맞서기도 했다. 결국 1224년, 루이 8세의 공격으로 도시는 다시 프랑스 령이 되었다. 이후 100여년간 별일 없이 지내던 도시는 1337년에 백년 전쟁이 발발하며 다시 요동치게 된다.

2.2. 백년전쟁


1360년의 브레타니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아키텐을 회복하였고 따라서 라 로셸도 136년만에 플랜태저넷 가문령이 되었다. 그리고 1372년, 프랑스의 동맹인 카스티야 왕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아키텐 해안을 공갹하였는데, 라 로셸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2]에서 펨브룩 백작이 이끈 잉글랜드 해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는 개인 화기가 쓰인 첫 해전이자 프랑스의 반격의 상징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카스티야의 도움으로 1340년의 슬로이스 해전 이후로 빼앗겼던 채널 (도버 해협)의 제해권을 회복하였다.[3]
그리고 라 로셸은 그해 9월 7일에 자유를 얻었는데, 프랑스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입성을 거절하였다. 도시는 국왕 샤를 5세가 상업 특권을 인정해 준 1372년 11월에야 프랑스 영토로 복귀하였다. 1402년에는 포르투갈의 항해 열풍에 탑승한 프랑스의 탐험가 장 드 배렝쿠르가 라 로셸에서 출항하여 카나리아 제도로 향해 항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419년 12월 30일에 잉글랜드는 한자 동맹의 전함까지 빌려 카스티야 함대와 다시 라로셸에서 격돌하였는데, 이번에도 카스티야 왕국의 승리였다. 카스티야 측은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승기를 잡았다.

2.3. 위그노의 도시


1453년에 잉글랜드 최후의 거점이던 보르도가 프랑스에 함락되자 백년 전쟁도 끝났다. 15세기까지의 라로셸은 프랑스의 대서양 항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고 플랑드르 등의 지역과 포도주와 소금, 치즈 등을 주로 거래하였다. 한편,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유럽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활발했던 지역들 (플랑드르, 스위스 등)에는 장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칼뱅의 신교가 퍼지게 되었다. 라 로셸도 그 예외가 아니었고 상업적 특례가 보장됭 자치 도시였기에 영주, 주교 등 봉건적 잔재도 없어 위그노 비율이 매우 높아졌다. 이에 프랑스 중앙정부(빌루아 왕조)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552년, 두 명의 '이단'이 시내 광장에서 화형당한 것이 시초였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원인 중 하나는 상인들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무리한 과세로도 볼 수 있다. 탄압이 심해지지 1555년에서 1567년까지 위그노들은 현재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쪽에 국가를 세워 종교적 자유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포르투갈에게 추방되며 실패하였다. 1560년에 도시에서는 프랑스의 첫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났는데, 동시에 노르망디루앙에서도 일어났다. 1562년, 기즈 공이 바시에서 63명의 비무장한 위그노를 죽이자 라로셸에서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수도사 13명이 살해되었다.

2.4. 종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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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의 포위를 지휘하는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17세기 초의 프랑스 재상이던 리슐리외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으며 버티던 라 로셸을 결국 함락시켰다. 이후 프랑스가 신교 측으로 30년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 한 부분이다.

2.4.1. 1차 포위 (1572 ~ 15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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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화 된 라로셸. 인구 수에 비해 상당히 잘 요새화 된 경우에 속한다.
1568년, 도시는 제네바의 신정 정치를 모방한 독립을 선포하였다. 시민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빌럼을 도우러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전함들은 라로셸을 기지로 삼아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1571년부터 도시는 프랑스 해군의 봉쇄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2만명이었다. 1572년 8월에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도시는 프랑스 서부 위그노들의 마지막 피닌처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공성전 (1572.11-1573년)은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일만큼 치열했다. 73년 2월 11일부터 포위는 프랑스의 차기 제위 계승자인 앙주 공작 (미래의 앙리 3세)이 맡게 되었고, 근위대장 몽고메리의 함대가 해상 봉쇄를 강화하였다.
애초에 포위는 프랑스 측에 유리하였다. 포위군은 2만 8천명인데 반해 수비군은 1천 5백명에 그쳤다. 포위군 측에는 고위 귀족, 왕족들(나바라의 앙리, 미래의 앙리 4세 포함)이 많았고 그중 일부는 전사하기도 하였다. 2월부터 6월까지 국왕군은 8번의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다. 3월 26일에는 성벽을 파괴할 갱도에서 화약이 잘못 터져 공격군 150명이 때죽음 당하기도 했다. 5월 23일에 지원군으로 스위스 용병 6천명이 도착, 26일에 재차 공세를 펼쳤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네 달간 이어진 8번의 공세에서 2만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55명의 장군 중 66명이 죽고 47명이 부상당하였다. 하지만 수비 측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울 요청하였으나 1572년에 체결된 블루아 조약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한 영-프 동맹)을 의식하여 7척의 비정규군을 보내는데 그쳤다.[4] 한편, 73년 5월 말에 앙주 공 샤를은 자신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끝내게 되었다. 6월 24일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7월 6일에 포위군은 후퇴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 내전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던 국왕 샤를 9세는 불로뉴 칙령 (라로셸 조약)을 반포하여 세 도시 (라로셸, 몽토방, 님스)에서의 신교도의 예배와 믿음을 엄격한 조건 하에 허용하게 된다.

2.4.2. 낭트 칙령


위그노 전쟁을 종결시키고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군주로 즉위한 앙리 4세낭트 칙령를 내려 프랑스 전역의 종교적 자유를 선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서남부는 재차 빠르게 신교도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군주로 즉위한 루이 13세는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영향으로 낭트 칙령 대신 이전의 불로뉴 칙령으로 되돌아 가려 했고, 남부 도시들에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 관리들은 전부 가톨릭 신도였고 이에 반발한 일부 도시들이 1620년에 재차 봉기하였다. 이 반란은 1622년에 극에달하는데, 그 와중에 라로셸의 함대가 일부 도시들을 돕다가 프랑스 함대에게 패하였다. 2년간의 혼란은 1622년 10월 18일에 루이 13세가 부왕의 낭트 칙령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한 몽펠리에 조약이 체결되며 끝난다.

2.4.3. 2차 포위 (1627 ~ 1628년)


1622년의 몽펠리에 조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24년에 재상이 된 리슐리외는 다시 신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625년 2월에 재차 반란이 일어났고 라로셸 인근의 레 섬이 신교도 령이 되었다. 섬은 긴 전투 끝에 그해 9월에 다시 왕당파가 소유하였고 1626년 2월5일에 파리 조약이 맺어지며 라로셸은 다시 평화를 찾는 듯하였다. 다만 도시는 함대 소유가 금지되었고 시가지 서쪽 바다 건너의 프랑스 요새는 '적정 기한' 내에 철거되기로 하였다.
한편, 1572년에 맺어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대합스부르크 동맹은 1624년에 갱신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626년, 리슐리외는 비밀리에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국내의 개신교 세력을 일소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기류를 파악한 라 로셸은 재무장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27년 6월, 찰스 1세의 명으로 파견된 잉글랜드 함대는 버킹엄 백작의 지휘로 도시 근처 레 섬에 상륙하였다. 라로셸의 시민들은 잉글랜드 함대의 입항에 반대하였다. 국왕 측에 빌미를 주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이것만을 기다렸다는듯이 리슐리외의 국왕군이 도시를 공격하자 시민들은 어쩔수 없이 잉글랜드 군을 수용하여 2차 포위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1453년 이후 174년만에 잉글랜드-프랑스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627-1628년의 2차 포위 당시 라로셸

결사항전을 결의하는 시민들
1627년 8월부터 도시를 포위한 프랑스 군은 9월 10일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프랑스 공병들은 육지쪽 성벽을 완전히 둘러싼, 11개의 탑을 갖춘 포위 성벽을 만들었고 이 작업은 1628년 4월에 끝났다. 포위군은 3만명에 이르렀다. 1627년 11월부터는 바다 쪽에도 방조제 형식의 벽을 만들었고 1628년 3월에 완공되어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동맹이어서 그 배들로 병력 수송까지 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전함들도 해상 봉쇄에 참가하였다.
1628년 4월, 잉글랜드의 구원 함대가 포츠머스를 출항하였으나 해상에 세워진 방벽에 막혀 회군하였다. 그해 8월에 출발한 30여척의 구원대가 9월경에 도시에 접근하였으나 프랑스 함대에 폭격을 가하는 것에 그친 후 돌아갔다. 해상 방벽의 위력은 막강하였다. 두 차례의 시도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본 시민들은 결국 1628년 10월 28일에 국왕군에 항복하였다. 2만 7천에 달하던 도시의 인구는 5천명으로 줄어 있었다.

2.4.4. 가톨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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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셸의 항복
도시는 군사, 정치, 영토적 권리를 모두 잃었으나 신잉만은 낭트 칙령에 따라 보장되었다. 종교 전쟁의 측면 외에도 라로셸의 항복은 프랑스의 중앙 집권과 절대왕정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 집권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여담으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1627년 말에 포위의 현장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한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배경이 바로 라 로셸의 포위전이다.

2.5. 근대


17세기 후반의 루이 14세갈리아주의를 주장하며 신교를 더욱 탄압하였다. 1661년, 마자랭이 죽고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3백여 개애 이르는 신교도 가족이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1685년에 내려진 퐁텐블로 칙령은 명목상으로나마 남아 있던 믿음의 자유마저 빼앗았다. 그러자 위그노들은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떠났고, 현재 뉴욕 인근에 뉴로셸을 세웠다. (1689년)

18세기의 라 로셸
16세기부터 프랑스의 아프리카, 아메리카 무역의 중심이던 로셸에서는 노예, 설탕, 모피 등이 거래되었다. 한편, 1684년에 로베르 뒤 잘리에는 로셸에서 출항, 미시시피 강 하류에 세인트 루이스를 세웠다. 현재 미국 텍사스에 위치한다.

2.5.1. 도시의 쇠퇴


위그노의 유출 이후 정체되던 도시는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으로 기존의 교역 상대였던 누벨 프랑스가 영국 영토로 넘어가며 결정타를 맞았다. 동시에 프랑스의 해군력도 쇠퇴하였다. 노예 무역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793년에 중단되었다. 1794년 2월, 프랑스 국민 공회는 모든 노예의 해방을 지시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는 영국 해군이 도시 앞바다에서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격파[5]하기도 하였다.

2.5.2. 오리엔탈리즘과 산업화



한편, 18세기 말부터 유럽을 덮친 차이나 열풍과 오리엔탈리즘은 라 로셸의 도자기 산업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산업화도 라 로셸을 바꾸어 놓았다. 1864년에는 로셸의 항구에서 세계 최초의 기계화된 잠수함이 시연을 보이며 프랑스의 기술력을 세계에 홍보하였다. 이에 런던 만국박람회 이후 우쭐해 있던 영국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881∼1891년간의 공사 끝에 도시의 서쪽에 신항인 라팔리스항을 개항한 후, 많은 선박이 드나들게 되었다.

2.6. 근현대


제2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도시의 주항에 유보트 기지를 만들었다. 도시는 노르망디 상륙 이후로도 한참이 지난 1944년 9월 12일에야 연합군이 접근하였고 포위가 시작되었는데, 독일군은 무려 8달이나 버텨내어 1945년 5월 7일에야 항복하였고 다음날 해방되었다. 나치가 소유한 마지막 프랑스 도시이다.

3. 교통


지역 공항으로는 라로셸 일드레 공항이 있다.

4. 스포츠


지역 축구구단으로는 ES 라로셸이 존재한다. 70년대 초반에 리그 2까지 올라간적도 있었으나 점점 쇠락하면서 지금은 6부리그에서 뛰는 별볼일 없는 팀이다. 대신 럭비 리그는 2010년대 말 기준으로 지역연고인 스타드 로셸레가 최상위리그인 Top 14에서 뛰고 있어서 상당한 강세를 보이는 편.

5. 매체에서의 등장


[1] 1137년에 프랑스 왕자 루이와 결혼, 그해 말에 왕비가 됨[2] Battle of La Rochelle. 6/22-23[3] 라로셸을 잃은 잉글랜드는 보르도와 그 남쪽의 가스코뉴를 영유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4] 다만 2차 포위시에 이것을 기억한 리슐리외는 바다에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 지원 선박의 접근울 원천 차단하게 된다.[5] Battle of the Basque Ro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