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중국인

 



1. 개요
2. 역사
3. 현황
4. 알바진인
5.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6. 중국의 러시아계 유대인
7. 같이 보기


1. 개요


러시아중국은 서로 인접한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고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지대 역시 양국 입장에서는 변방이다. 이로 인해 중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중국 당국이 분류하는 56개 민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만명이상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1]에 거주하고 있지만, 일부는 내몽골 자치구, 만주지역에도 거주하고 있다.

2. 역사


19세기 말 하르빈다롄에 정착한 이들과 청나라 신장성으로 이주한 백여 명 정도의 정교회 구교도들이 시초이다. 러시아인들의 본격적인 중국 이민은 러시아 제국에서 발생한 적백내전이었다. 당시 많은 백군 난민들 수만여 명이 미하일 이바노프 장군을 따라 20세기 초반 중화민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white émigré)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미 러시아 타운이 구비되어 있던 하얼빈을 중심으로 대규모 러시아인 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2][3] 하얼빈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일제의 만주 침공과 만주국 설립 와중에 심한 탄압을 당했으며, 이 와중에 하얼빈의 러시아인 상당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상하이를 통해서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의 최종 행선지는 대개 미국캐나다, 서유럽, 호주 등이었다.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러시아인 난민들이 대거 정착했었다. 그러나 철도 교통을 통해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던 하얼빈과 다르게 당시 신장성은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으며, 난민 대부분은 간쑤성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하거나 알타이 산맥 부근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성스차이의 친소군벌 정권이 신장성을 장악하게 되고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백군 난민 출신 군인들을 지휘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벌어졌다. 백계 러시아 난민들은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에서도 합류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신장에 있던 러시아인들 중 상당수는 적백내전 이전에 러시아로 종교 박해 문제로 이주한 고의식파들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에 남아있던 고의식파 신도 상당수는 소련으로 압송되어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한다.
러시아도 중국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 만큼, 러시아인(슬라브인) 뿐 아니라 러시아에 사는 일부 여러 소수민족들도 중국에 오기도 했다. 이들도 러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대다수는 러시아계 중국인으로 분류한다.

3. 현황


중국에 남은 러시아족은 점차 동화되어 가고 있는데, 2000년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계 중국인과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은 74%에 달했다.이들은 원래부터 황백혼혈이 많았다. 스탈린이 소련 영토에 살던 중국인 상당수를 친소 군벌 성스차이가 장악했던 신장으로 추방하는 와중에, 해당 중국인들과 결혼했던 러시아인 배우자들과 자녀들이 신장으로 따라간 것# 성스차이는 이들 중 상당수를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숙청했으나, 러시아인 가족들은 소련과의 외교를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았다.
중국에 정착해서 중국국적을 지니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수가 많지는 않아도 중국에 유학이나 취업, 사업상의 이유로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은 꽤 많기는 하다. 중국과 직접 국경을 접한데다가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도 활발하기 때문이다.

4. 알바진인


알바진인이란 중국에 정착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후손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후이족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만 다르지 혼혈화되면서 외모에선 중국인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이고 문화적으로도 러시아보단 중국과 가깝다. 심지어 언어에서도 러시아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사용할 정도이다. 중국 정부에선 이들을 한족으로 분류하고 있다.[4]
17세기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 코사크들 중 러시아로 귀환하는 대신 청나라에 남을 것을 결정한 이들 수십여 명이 그 기원으로 청나라에서는 베이징의 버려진 절 하나를 주고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하도록 허락해주었다 한다.

5.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image]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백인계 타타르인들(특히 볼가 타타르인)의 후손들.[5] 일반적인 러시아계 중국인 및 알바진인과 다르게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우즈베크인이나 위구르족 같은 중국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과 가깝다.
물론 말 그대로 러시아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신장 지역에 거주하던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위구르, 카자흐족들의 민족주의 발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비교적 소득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수준은 오히려 평균보다 더 높은 편이다. 보통 중국 내에서 인구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소수민족들이 미분류민족으로 대충 처리되는 것과 반대로 인구 수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었다.
러시아계 중국인들이 같은 러시아인끼리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중국 내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중국 내 러시아계 타타르인들도 위구르인, 카자흐인, 후이족 등 중화인민공화국 내 황인계 무슬림 민족들하고 통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는 아예 한족, 몽골족, 만주족 등 비무슬림 민족과 통혼하기도 한다. 1930~40년대부터 60년대 찍힌 타타르인 사진들은 백인 외양이 좀 더 강하다면 세대가 지날수록 사진에 나온 것처럼 외양이 황백혼혈 민족인 우즈베크인/위구르인과 흡사해진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투바인, 야쿠트인 같이 순혈 황인 외모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르한 샤히디가 있다.
신장성 이외에 만주 하얼빈에서도 타타르족들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동방 철도를 경비하기 위해 파견한 타타르 군인들을 위해 하얼빈에 모스크가 건설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타타르 무슬림들이 하얼빈으로 들어왔다. 한 때 하얼빈의 타타르인들은 타타르어로 된 신문을 인쇄하고 학교를 열고 금요일 합동 예배를 근행하기도 하였다. 하얼빈의 타타르족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점차 하얼빈을 떠나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타타르인들이 남기고 떠난 모스크는 공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임대되었다. 오늘날 하얼빈에 남은 타타르인 인구는 노인 몇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6. 중국의 러시아계 유대인


[image]
러시아 제국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와중에 하얼빈에도 철도를 건설하였는데, 이 과정에 하얼빈에 러시아 타운이 생기고, 적백내전 과정에서 러시아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을 포함한 백계 러시아인 난민 상당수가 중국으로 피난한 케이스이다. 2차대전 당시 일본에서 하얼빈 내 백군 극우단체를 후원하여 하얼빈 내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거나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으로 끌려가는 등 수난을 겪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본 정부는 나치 독일과 다르게 유대인 완전 박멸까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6], 하얼빈 외 지역에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수난을 덜 겪는 편이었다[7]. 러시아계 유대인 상당수는 하얼빈이나 신장에서 상하이를 거쳐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이민하였고, 미처 이민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경우 상당수는 국공내전 이후 소련으로 다시 끌려가서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풀려나 소련에 재정착한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소련에서 파견된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미하일 보로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보로딘의 경우 엄밀히 말하면 벨라루스계 유대인이긴 한데,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 소련의 유대인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지역 출신이기도 하고, 당시 기준으로는 따로 벨라루스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8] 그냥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유대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카이펑의 유대교도와 가깝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카이펑 유대교도는 유대교 관련 지식이나 율법 상당수를 소실한 상황이다.[9] 오히려 러시아계 유대인과 인도계 유대인이 차라리 더 가깝다고 보면 된다.

7. 같이 보기




[1] 우루무치일리 카자흐 자치주를 포함한 중가리아(북강) 대부분의 지역에 거주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나머지 지역에선 소수가 거주한다.[2] 731 부대 희생자 중 상당수가 하얼빈에서 거주하던 러시아 백군 난민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이 소련군 전쟁 포로라고 날조하고 있으나 피실험자 상당수가 임신부를 포함한 여성이었다. 출처는 영문 위키의 731 부대 항목과 링크 참조 바람[3]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사 학자였던 니콜라이 랴자노프스키도 하얼빈으로 피난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백군 난민의 후손이다.[4] 반대로 후이족, 위구르족의 경우 종교가 이슬람교가 아닌 경우에도 후이족, 위구르족으로 분류하고 있다.[5] 명, 청 때는 타타르라는 말이 오랑캐 비슷한 늬앙스의 비하명칭에 가까웠으나,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타타르인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비하적 의미가 옅어졌다.[6] 정확히는 유대민족을 박멸하는 그런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에 가깝다. 나치 독일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그 자신들이 동부 전선에서 뻘짓을 반복하기 전에 점령지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지라, 점령한 곳에서 수많은 유대인집시들을 죽여대면서 그들의 커뮤니티를 철저히 뭉개버렸다. 반면, 일본 제국중일 전쟁조차 완전히 끝맺지 못할 만큼, 점령지의 극심한 저항을 상대하느라 일본 입장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을 줄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강점한 지역의 한국인중국인들을 상대로 민족말살정책이다 신멸작전이다 하면서 허구헌 날 학살과 강제동화를 일삼았는데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의 문화적 특성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니 동맹국이 저지르는 유대인 말살 정책따위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7] 그래서 미국랍비마빈 토케이어가 저술한 탈무드 해설서에 의하면, 일본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본 제국 시기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고 한다. 일본의 전쟁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이라면 이를 갈 지경이었지만, 복어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군 점령지에 정착했다가 탈출해온 이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호의적으로 인식하거나, 최소한 적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8]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한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핵심 장본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라자리 카가노비치도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안 좋은 편이었다.[9]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식문화로 설명하자면 원래 유대인은 돼지고기는 절대 먹지 않고 소고기, 양고기의 경우 모세오경에 나온 방식으로 도살한 후 피를 다 빼고 하체 부위는 먹지 않고 상체만 먹는데 비해, 카이펑 유대인은 소고기나 양고기 관련한 금기는 아예 없고 그냥 심플하게 '''돼지고기를 먹는 대신 돼지의 하체 부위만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