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

 



1. 개요
2. 베토벤의 숨겨진 딸?
3. 베토벤의 사인은 매독인가 납중독인가
4. 메모광 베토벤
5. 천하의 악필 베토벤
6. 수학과 지식에는 문외한
7. 베토벤이 배운 지식들
8. 베토벤의 생가
9.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빠 로맹 롤랑
10. 즉흥 연주의 달인 베토벤
11. 시대연주의 어려움
12. 연주 속도는 빠르지만 작곡 속도는 느렸던 베토벤
13. 정치적으로 악용된(?) 베토벤
14. 공포스러운 얼굴
15. 음식 취향
17. 커피 애호가
18. 무시무시한 피아노 레슨
19. 스트레스 해소
20. 잦은 이사
21. 가정부들


1. 개요


'악성'(樂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악 역사상 불멸의 거장이었던 만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남긴 화제거리도 굉장히 많다. 다만 베토벤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과장/왜곡/창작된 것들도 많으니 상큼한 일화라고 해서 덥썩 믿지는 말자.

2. 베토벤의 숨겨진 딸?


베토벤의 일생이 본격 연구되면서 베토벤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논쟁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는데, 2010년대 이후 그에게 사생아 딸이 있었다는 주장이 점점 유력해지고 있다. 바로 베토벤과 요세피네 폰 브룬스비크 사이에서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
베토벤에게 딸이 있었느냐는 논쟁은 불멸의 연인 떡밥과도 큰 관련이 있다. 공식적으로 미노나는 출산 당시 요세피네의 남편이었던 크리스토프 폰 슈타켈베르크의 딸이라고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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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Minona von Stackelberg)(왼쪽)와 30세의 베토벤의 초상화(오른쪽)를 비교해보면 광대뼈와 작은 입술, 꽉 닫은 입, 아래쪽으로의 응시한 눈이 닮은 듯하다. 하지만 정말로 베토벤의 사생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부모가 이혼했다가 재결합했을때 태어났으며, 1812년 말 요세피네와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확실히 만나 다시금 잠깐 동안 연애를 한 적이 있고, 둘째 딸을 낳은 이후 슈타켈베르트과 일절 동침하지 않았던 요세피네였기에 이 미노나는 베토벤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거기에 재결합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요세피네의 남편이 갑자기 떠나버렸고, 하필 베토벤의 유명한 편지인 '불멸의 연인'도 이 시기에 씌어진데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와 미노나가 태어난 시점간의 기간이 통상적인 가임기간과 일치하고, 미노나(Minona)라는 이름이 'Anonim(Anonym=익명)'을 거꾸로 한 것이라는 정황이 이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미노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몰랐는데 요세피네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왔기 때문이다. 요세피네가 죽게 될 때에서야 비로소 딸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하였지만 파장을 우려하여 세상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혔다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를 위시한 많은 베토벤 연구가에 의하여 비로소 이런 의혹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미노나가 정말로 베토벤의 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미노나는 작곡이나 피아노 연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지만 특별히 전업음악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1898년 85살의 나이로 죽었다. 베토벤 연구가 세이어가 1884년에 미노나를 직접 만났을 당시, 그녀는 자신이 베토벤의 딸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실제로 베토벤의 딸일 가능성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 DNA 검사가 이루어진 건 아니므로 정설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실제 미노나의 어머니 요제피네가 진짜 불멸의 연인인지도 불명이다.

빈이 사랑한 천재들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가 직접 미노나의 묘지에 찾아간 적이 있는데, 묘지의 관리인도 그 묘지가 베토벤의 딸의 묘지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링크
'베토벤의 숨은 딸'이라는 주제가 나름 흥미를 끌자 독일과 프랑스와 합작으로 1996년에 Minona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2020년 1월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Jüri Reinvere가, 같은 Minona라는 제목으로 오페라를 만들었고 그게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초연됐다. 링크
2018년 5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에 대해 다뤘다.
그 외에도 베토벤과 요세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주장은 현재까지 풍문 이상의 근거는 없다.

3. 베토벤의 사인은 매독인가 납중독인가


베토벤의 사인, 그리고 귀머거리가 된 원인은 당시에 창궐하던 매독과, 매독 치료로 인한 수은 중독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는데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실제로 납중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 인체에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탓에 독일에서는 수도관을 납으로 만들었다. 납 중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든다.
  • 생전에 베토벤은 애주가였던 데다 와인 마니아였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와인에 첨가제로서 감미료를 넣어먹는 것이 유행[1]했었고, 이 감미료 성분에는 아세트산납이 포함되어있었다.
  • 복수(腹水)가 차는 증상[2]을 자주 호소했었는데, 당시 복수를 빼내기 위한 천자(穿刺) 수술에는 납 성분이 포함된 약제가 자주 쓰였다.
  • 이 외에도 당시 유럽에서 납은 수도관 말고도 각종 생활용품(냄비, 식기, 세면대 등)에 널리 쓰이는 재료였다. 때문에 납 농축 경로에 대한 가설 중에는 베토벤이 잠에서 깨거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는 버릇을 지적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 납중독만이 확실한 사인은 아니라는 반론도 많으며, 발진티푸스, 면역 장애, 손거스러미라는 설도 있다.
한편 베토벤의 부친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는데, 베토벤 역시 만만찮은 술꾼이었다. 베토벤 사후 해부 도중에 밝혀진 바로는 과음으로 말미암은 손상이 심했다고 한다. 만년에 황달로 고생한 것을 보면 과음으로 인한 간손상이 분명 그의 사망에 일정부분 원인 제공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4. 메모광 베토벤


청력장애에 시달렸던 탓인지 꽤나 메모광이었으며 악상이 떠오르면 늘 메모했는데 정작 악보는 별로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 "왜 많이 메모하는데 악보는 별로 안 쓰나요?" 그러자 나온 대답이 '''"나는 한 번 메모하면 다 외우니까 쓸 필요없다."''' 베토벤이 자주 휴가를 보냈던 어느 여관에서는, 베토벤이 왔다 갈 때마다 악상을 메모한 문짝이나 벽지, 식탁보 등을 수집가에게 팔아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나.
그리고 가계부를 썼던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하나다. 하이든과 만나서 핫초코와 커피를 마셨는데 비용은 베토벤이 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5. 천하의 악필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자필 악보. 이게 악보인지 낙서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심지어 이런 악필 때문에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팀파니 문제 등 악상기호마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악보 상태만 이런 게 아니라 베토벤이 쓴 편지나 일기나 기록도 대체 무슨 글씨인지 몰라서 연구가들을 애먹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공책을 줘서 대화 내용을 적게 하여 그걸 보고 대화했다.[3]

6. 수학과 지식에는 문외한


베토벤의 음악적 능력과는 다르게 수리계산력은 0점이었다. 실제로 베토벤은 셈법 중 더하기밖에 할 줄 몰랐을 뿐더러 셈을 틀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 예로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하는 뿐만 아니라 받아 올림과 받아 내림 등을 빼먹어서 그 합도 틀렸다. 실제로도 몇몇 베토벤에 대한 일화를 찾아보면 돈계산 등이 틀려서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일화가 나올 정도이기도 하다.
생애에서도 보았듯 원체 그는 자신을 음악신동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따로 직업교육이나 사회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숫자계산과 같이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나 인간관계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변에 머물렀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괴팍하고 지랄 맞은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대인배들이었던 셈이다.

7. 베토벤이 배운 지식들


베토벤은 어릴 적엔 음악만 집중적으로 교육받는 바람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실질적인 지식에는 까막눈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19살 때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1762-1823) 백작[4]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목들을 청강하면서 무식쟁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마침 이 해(1789)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해였고, 그 덕분에 그는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정신과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실러의 예술 사상 등 심오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교육이었던 이 대학 청강은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평생 그가 동경하고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된 인류애나 진리의 승리와 같은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놓았다.
유품들 중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s-2와 함께 그리스 비극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플루타르코스의 열전인 플루타크 영웅전과 안경[5]이 있다.

8. 베토벤의 생가


시내에는 베토벤의 생가가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 19세기에 한차례 헐릴 뻔하다가 그 집 1층의 술집 단골들(…)의 주도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6] 덕분에 베토벤이 22살까지밖에 살지 않았던 본이 베토벤을 열심히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본 시에서는 당시 술집 단골들의 후손들에게 사례라도 해야 할 듯. 반면 베토벤이 음악인생 대부분(35년)을 지낸 오스트리아 에서도, 빈이야말로 베토벤이 일생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한 진정한 고향이라고 본을 까면서 베토벤이 마지막을 보낸 집을 베토벤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어차피 베토벤이 거쳐간 곳은 모조리 베토벤의 이름을 팔아 명소를 만드는 분위기고[7] 그가 손가락이라도 건드렸던 물건들은 모조리 경매시장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고가의 기념품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이 두 도시의 알력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만큼 베토벤이 유명하다는 뜻이고 또 유명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

9.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빠 로맹 롤랑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은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여 베토벤을 연구한 책인 '베토벤의 생애'[8]까지 썼지만, 이 책은 베토벤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참고로 로맹 롤랑은 이 책에서 '''"신이 벌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베토벤이 소리를 못 듣게 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외에도 로맹 롤랑의 명작 소설 중 하나인 '장 크리스토프' 역시 베토벤을 모델로 했다.
반면 독일 음악가인 막스 레거(1873~1916)는 베토벤을 부풀려진 음악가라고 혹평했다. 책에서도 "베토벤이 귀가 들렸다면 이렇게 과대 평가받았을까?"라고 주장했다가 로맹 롤랑을 비롯한 베토벤 매니아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것은 당연지사. 하루는 어느 애송이 피아니스트가 막스 레거 앞에서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 "베토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가운데 한 사람의 흉상을 피아노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어디가 나을까요?"라는 질문하자 막스 레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길. '''"베토벤이나 올려놓으라고. 베토벤은 귀가 막혀서 못 들을 테니까."''' 즉 연주 솜씨를 깐 거다. [9]

10. 즉흥 연주의 달인 베토벤


현재는 클래식 분야에서 연주자들이 즉흥연주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지만 바로크 시대는 즉흥음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통주저음 항목 참조) 연주자의 즉흥능력이 중요했고 고전파 시기인 모차르트/베토벤 시절에도 연주자의 즉흥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오늘날처럼 녹음/녹화가 가능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축제나 사교모임 등에 동원된 연주자들은 필수적으로 모임의 콘셉트에 맞춰서 분위기를 띄우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베토벤은 1792년 비인에 온 후 초반에는 작곡가보다는 피아노 연주자 및 선생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그의 즉흥연주 능력은 매우 유명했다. 당시 빈에서는 유명한 연주자들끼리 연주대결을 펼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베토벤은 이 연주대결에 기꺼이 응해서 특유의 승부근성과 즉흥능력으로 비인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을 도장깨기식으로 압살해 버렸다. 당시 빈에서 젊고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주목받던 요제프 뵐플(Joseph Wolfl, 1773 - 1812)이나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 1771 - 1858) 등도 베토벤에게 밀렸으며 특히 뵐플은 베토벤과 대결 후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베토벤이 이 피아니스트들과 계속 경쟁만 했던 것은 아니고,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면서 빈의 여러 연주자 및 작곡가들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베토벤의 즉흥능력은 사교모임이나 연주 배틀 뿐만 아니라 연주회나 작곡에서도 빛을 발했는데, 피아노 협주곡 3번(op. 37) 1악장이나 피아노와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환상곡(op. 80) 등의 피아노 파트는 초연때까지도 악보가 완성되지 못해서 즉흥으로 연주를 했다. 또한 그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 연주자의 재량으로 삽입되는 카덴차는 매우 길고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 그의 피아노 작품, 특히 후기작품에는 즉흥곡 풍의 패시지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심지어 여성들에게 구애를 할 때에도 피아노 앞에 몇시간씩 앉아서 자신의 즉흥능력을 과시하면서 여성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사귀는 족족 어른들의 사정으로 깨지는게 문제였지만.

11. 시대연주의 어려움


베토벤 덕분에 고전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해졌다. 베토벤은 메트로놈을 써보고 거기에 매료돼서 자신의 악보에 메트로놈 박자수를 일일이 지정해 놓기도 했다. 문제는 그 연주 속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빠르기보다 2~30% 정도 빠른 탓에 낯설게 들릴 것이다.[10]
피아노 소나타도 피아노 소나타이지만 교향곡에서도 지휘자별 연주 시간 편차가 심해지는 원인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같은 경우 (유명 연주자들 녹음만 보면) 오토 클렘페러는 1970년에 83분으로 연주를 끝마쳤는데 1992년 존 엘리엇 가디너경은 59분으로 연주를 끝냈다. 클렘페러가 말년의 육체적 노쇠로 템포가 느려졌음을 감안해도 카라얀의 76년 녹음이 67분, 푸르트벵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녹음이 76분임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연주이다. 물론, 이 조차도 베토벤의 지정 속도보다는 약간 느리다.
한편 즉흥연주의 달인이었던 베토벤은 피아노로 카덴차를 연주할 때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때가 잦았다고 한다. 심할 때는 1시간 이상 연주해 동료 연주자들이 기다리다 지칠 정도였다고.

12. 연주 속도는 빠르지만 작곡 속도는 느렸던 베토벤


앞서 베토벤이 직접 지정한 연주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빠르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와 달리 작곡속도는 당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늦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당대 다른 작곡가들 대비 작품수도 상당히 적은 편. 특히 공연에 맞춰 작품을 의뢰받은 경우 공연 전날 완성된 악보가 도착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며 공연당일에 즉흥연주로 때우고 뒤늦게 악보를 완성해서 출판하거나 아예 공연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곡이 미완성으로 남아버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완벽주의 기질도 한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치밀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법 스타일상 당대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처럼 양산형으로 곡을 쏟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당시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의 작곡속도에 맞춰진 공연 일정을 따라가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으며 많은 작품이 공연 직전에야 완성되었던 탓에 연주자들은 제대로 리허설도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연주하기 쉽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을텐데, 연주기교는 뭣같이 어렵고 작곡가는 요구사항이 많고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연습조차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했으니...... 연주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은데 가장 처절한 에피소드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초연이 있다. 초연 당시 베토벤이 직접 피아노연주를 맡았는데, 초연시까지도 피아노 파트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해서 악보에 대략적인 선율과 중요한 부분만 적어놓고 상당 부분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나중에 출판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피아노 파트는 당연히 초연시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고. 그리고 그가 손댄 오페라는 피델리오를 제외하고 모두 시작단계에서 중단되어 버렸는데, 여기에는 느린 작곡속도도 한몫 했다. 그나마 피델리오도 몇번이나 대폭적인 개작을 한 끝에 간신히 공연되었을 정도.

13. 정치적으로 악용된(?) 베토벤


후대에 베토벤의 음악을 정치상 이용한 집단이 있는데, 바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였다. 나치가 독일인들의 베토벤 음악 애호를 이용해 베토벤 찬양으로써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여러 곡이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단결'이란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9번 교향곡의 합창의 순수한 휴머니즘적인 가사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이 가사가 게르만 족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독재와 권위주의를 혐오하던 베토벤이 이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당연히 2차 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후 이런 주장들은 금세 사라져버렸고 유태인을 혐오한 전과가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다르게 어떤 비난도 듣지 않았다.[11]

14. 공포스러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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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보다시피(…) 포스가 느껴지다 못해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인지라 음악실에 걸린 베토벤의 초상화는 학교와 관련된 괴담의 단골이다. 심지어 '''베토벤에게 수업받은 카를 체르니조차 베토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울었다고 한다.'''

15. 음식 취향


평소 미식가였다. 자신이 고용한 요리사의 요리가 미흡하자 요리사를 해고하고 자신이 직접 쇠약한 몸을 이끌고 요리했다고 한다. 쉬우면서도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먹고, 값 비싼 와인을 마셨다. 좋아하는 요리 중에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얹은 마카로니가 있었는데, 이 요리를 가정부에게 주문하면 가정부는 우거지상이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한 번 작곡에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는데[12], 그 사이 식사 시간은 한참 지나고 준비한 요리는 불어터지고 식어서 먹지 못할 지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치즈나 마카로니나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상당히 비싼 고급 식재료였기 때문에, 가정부는 베토벤이 언제 식탁에 앉을 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했다고 한다. 건강이 나빠지고 난 후 설사로 고생도 했고 배가 점점 불러와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점심 때 계란 반숙 비슷한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와인만큼은 마셨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으로 투병 생활에 대한 위안을 찾았다.
식사 후에는 촛불의 심지를 자르고 시커멓게 그을린 가위[13]로 이를 쑤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16. 형편없는 요리사


한번은 베토벤이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베토벤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서 초대한 것이었는데 베토벤의 기행을 잘 아는 친구들은 마지못해 초대에 응했다. 역시 베토벤은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까맣게 타 버린 구이, 묽은 수프, 익지 않은 야채로 차려진 식탁'''에서 친구들은 머뭇거렸지만 베토벤은 혼자서 황홀한 표정으로 정말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친구들은 ‘형편 없는 요리사’라는 별명을 베토벤에게 붙여 주었는데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이 별명으로 서명을 했다고 한다.

17. 커피 애호가


와인만큼이나 커피를 좋아했다. 과거에 널리 사용되었던 퍼콜레이터라는 커피추출주전자를 이용해 직접 추출하여 아침형 인간답게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며 아침식사 때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추출할 때도 작곡을 할 때처럼 신중을 기해서 커피한 잔에 원두 낱알 60개를 정확히 세어 넣었다. 손님이 오게되면 온 손님의 수만큼, 커피 낱알을 일일이 세어 커피를 추출했다. 링크 그의 친구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의 방 안이 온통 악보와 옷으로 어질러져 있으나, 테이블에는 악보 용지 한 장과 끓는 커피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18. 무시무시한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자신의 아버지처럼 꽤나 엄격하게 가르쳤다.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했으며,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 있다고 한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그나마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카를 체르니[14].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 않았다고 한다.

19. 스트레스 해소


베토벤의 하숙집 주인들은 위대하지만 괴팍한 작곡가를 하숙생으로 들이면서 여러가지 고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틈만 나면 들려오는 베토벤의 괴성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작곡 작업이 잘 안 풀리면 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괴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두드리고, 혹은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심지어는 벽에 머리를 박거나 그냥 물을 한가득 머리에 확 뿌려 열을 식혔다. 문제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는 것. 따라서 다른 방에 거주하고 있던 집 주인이나 다른 하숙생들이 밤에 베토벤의 괴성과 소음에 의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하소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물을 하도 뿌리니 결국 물이 새는 통에 참다 못한 집주인이 버럭거리며 내쫓은 적도 있다.[15]

20. 잦은 이사


빈에서 살던 35년동안 무려 40번 이상을 이사다녔다고 한다. 이는 위에 나온대로 저런 민폐를 끼치니 화가 난 집주인이 내쫓아버린 경우가 많았다. 황당한 것은 때론 집주인이 '''너무 잘해줘서 자신이 부담간다고 그냥 이사가던 적도 있다.''' 그래서 아쉬워하는 집주인에게 사인을 해주던 적도 있는데 위에 서술되듯이 베토벤이 죽고나서 전설이 되며 이런 사인을 거액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1970년대에 나온 일본 위인전 만화 베토벤(위에 나온 1981년 삼성서적 베토벤 만화가 이걸 그대로 표절한 거다.)에서 피아노를 큼직한 짐마차에 통째로 놔두고 이사가는데 그 짐마차 위에 둔 피아노에서 작곡하는 베토벤을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건 만화 속 이야기이고 실제로 이런 적은 없다.

21. 가정부들


그리고 베토벤 본인이 쓴 일기장을 보면 집안일을 하던 가정부들에게도 두어 달을 못 견뎌 그만두게 할 정도로 깐깐하게 굴었다고 한다. 가정부가 청소하다가 어디 한 군데라도 대충 청소했다 싶으면 종일 잔소리를 했던 건 기본이다. 그래도 베토벤 같은 유명인을 자주 볼 수 있는 직업이라면 나름 명예로운(?) 자리였을 텐데, 이게 독이 든 성배였던 셈. 더구나 가정부들을 더욱 오래 못 있게 만든 게 있는데 바로 냄새였다, 베토벤은 평소에 작곡을 하거나 일을 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나오고 싶을 때까지 방에 틀어박혔는데 이 때문에 몸에 엄청난 악취를 풍겼고 가정부들은 그 냄새에 아주 진저리를 쳤다. 더구나 이런 냄새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면 일에 집중이 안 된다며 완강하게 굴기까지 해서 가정부들은 베토벤의 친지나 친구들을 동원해 그가 잠들었을때 옷을 갈아입히는 고된 작업을 해야 했다. 물론 목욕도 그때 가서야 했는데 문제는 이러면 목욕하다가 깨기 일쑤고 깨면 뭐 하는 짓이냐며 또 불같이 화를 내어 가정부들 입장에서는 정말 피곤한 고용주였다.
[1] 게다가 나중에는 처음부터 감미료가 들어간 와인이 팔리기도 했다.[2] 간경화(肝硬化)가 진행된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다. 이를 근거로 베토벤은 생전에 간경화를 앓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다.[3] 보청기도 썼지만 한마디로 작은 나팔 같은 것을 귀에 꽂고 상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당시 보청기. 1810년 초반까지는 이거라도 쓰면 조금 들렸으나 그 후로는 아예 들리지 않아 이것도 안 쓰게 된다.[4] 베토벤은 그에게 나중에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헌정한다.[5] 말년에는 노안 때문에 안경을 써야지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6] 물론 지금은 1층에 술집이 없고 건물 전체가 베토벤 기념관이 되어 있다.[7] 유서를 썼던 하일리겐슈타트, 요양을 위해 머무르면서 7번 교향곡을 썼던 체코의 테플리츠, 온천을 위해 자주 방문했던 바덴바이빈 등.[8]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다. 안톤 쉰들러의 증언을 토대로 썼다.[9] 하지만 막스 레거 본인은 베토벤의 바가텔 Op.119 No.11의 주제를 가지고 변주곡을 쓰기도 했고, 애정이 있었는지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이 변주곡은 그의 변주곡 중에 최고로 꼽히기도 하는 만큼, 무작정 혹평했다고 여기기엔 무리수가 있다.[10] 그래서 농담 삼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사실은 고장나 있었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몇몇 지휘자는 가능하면 베토벤의 연주 속도를 존중하려 노력했고 최근 녹음된 베토벤의 여러 음악은 마치 2배에서 3배 속도로 연주한 듯이 매우 빠르게 들리기도 한다. 작곡가 본인의 의도를 존중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물론 바람직한 것이지만 감상자가 듣기엔 음악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게 진행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11] 살리에리 문서에도 나오는 베토벤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1794~1870)가 유태인이며, 유태교를 믿던 사람인데 베토벤은 종교 가지고 일절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모셀레스 본인이 늘그막에 쓴 회고록에서도 여전히 베토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치며 "그 분은 내 종교 가지고 왈가왈부한 적도 없고 민족 가지고도 뭐라고 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실력만을 이야기했다"라고 베토벤이 죽은지 40년이 넘어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하며 자기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참고로 베토벤은 늘그막에 기독교라는게 예수라는 유태인 애송이가 만든 종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해서, 친구들이 이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사람들은 병세가 심해져서 그런가 보다 여기면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12] 이것 때문에 베토벤의 몸에는 엄청난 악취를 풍겼고 심지어 그 옷들을 갈아 입으려고도 안했다고 한다. 더구나 여기에 뭐라고 말하면 불같이 성까지 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잠들때 온갖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악취를 참아가면서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웃픈 일화가 있다. [13] 당시는 촛불이 거의 유일한 조명 수단이었는데, 촛불을 자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촛불은 녹아 내려도 심지는 까맣게 타기만 하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좀 길어졌다 싶으면 반드시 가위로 잘라내야 했다. 이 촛불 심지 자르는 데만 쓰는 가위도 있었으며, 귀족 집안 같은 곳에는 이런 촛불 심지 자르는 일만 담당하는 전속 하인도 있었다고 한다. 굳이 하인까지 필요한가 싶지만, 그런 큰 집 여기저기에 놓여 있을 초의 개수를 생각해 보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촛불 1개의 광속이 약 13루멘인데, 우리가 흔히 쓰는 10와트 LED등 1개가 900루멘 정도 된다. 즉, 당시에 지금 LED등 1개 정도의 광속을 얻으려면 '''70개''' 정도의 촛불이 필요했던것.[14] 체르니의 가장 유명한 제자가 리스트이니 베토벤과 리스트는 체르니로 인해 연결된다.[15] 그러다보니 현대 정신의학자들은 이런 베토벤의 증세를 분노 조절장애, 우울증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