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제프 전투

 

'''르제프 전투'''
Ржевская битва
Die Schlachten um Rschew
제2차 세계대전독소전쟁의 일부
'''날짜'''
1942년 1월 8일 ~ 1943년 3월 31일
'''장소'''
소련 르제프벨리키예루키
'''교전국'''
<^|1> [image] 소련
<^|1> [image] 나치 독일
'''지휘관'''
게오르기 주코프
발터 모델 귄터 폰 클루게
'''결과'''
독일의 전술적인 대승. 하지만
전선의 큰 변동이나 영향을 주지는 못함.
'''병력'''
210만 명
70만
'''피해규모'''
120만 사상
40만 사상
1. 전투의 서막
1.1. 너무 일찍 끝난 월동 준비
1.1.1. 제1차 르제프 전투
1.1.2. 르제프-시쵸프카 공세
1.1.3. 화성 작전
1.1.4. 들소 작전과 종결
1.1.5. 결과/영향
2. 미디어에서

[image]
1942년 1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르제프, 시쵸프카 전역에서 벌어진 약 14개월에 걸친 거대한 공방전이다. 실제로 르제프는 인구수도 적고 면적도 그리 넓지 않으나, 통칭 르제프 전역은 한반도 남한 영토에 버금갔고 전선의 최대폭은 450km에 달했다.

소비에트 스톰 ― 6. 르제프 고기분쇄기

1. 전투의 서막



1.1. 너무 일찍 끝난 월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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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MG34를 점검하는 소련군
독일국방군은 1942년,로스토프 전투와 모스크바 공방전의 패배 이후로 다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를 본 스탈린은 이대로 소련에서 독일 국방군을 모두 내쫓아낸다는 계획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북서전선군(Northwestern Front), 칼리닌 전선군(Kalinin Front), 서부전선군(Western Front), 브리얀스크 전선군(Bryansk Front)으로 구성된 200만의 군대에 의해서 진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은 르제프로 진격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모스크바 전투와 로스토프 전투의 상처가 채가시기도 전에 '''바로'''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실제로 모스크바전투가 1월 7일에 종결된 것으로, 르제프 전투는 1월 8일 개전으로 되어 있다). 즉 위에 서술된 200만의 소련군은 새로이 편제된 군대가 아니라 모스크바 공방전을 치러 지칠대로 지친 전력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휴식과 재편제를 통해 전투력을 회복하여야 했지만, 소련군 최고사령부 어느 누구도 승리에 도취된 강철의 대원수를 막을수 없었기에 그렇게 르제프 고기분쇄기 전역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1.1.1. 제1차 르제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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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제9군과 제4기갑군의 방어에 의해서 전선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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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소련군이 진격하긴 했으나 결국 그 돌출부에 막혀서 진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소련군이 독일군 9군과 4군의 일부를 포위하고 있음에도 독일군을 제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련은 이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수차례의 공세를 퍼부었고, 독일군 후방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완벽한 포위망을 이루려 했다. 실제로 1942년 1월 말에 독일군 9군과 4군은 양단 직전까지 갔고 포위망도 완성 직전이었다.
그러나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대장이 해임되고 신임 사령관으로 발터 모델 기갑대장, 참모장 한스 크렙스 대령이 부임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발터 모델의 탁월한 공세적 방어에 소련군 33군은 역으로 포위되었고, 항공 탈출을 명령받은 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는 이를 거절하고 자결을 택하면서 제1차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된다. 9군의 주력 기갑부대였던 제6기갑사단을 후방인 프랑스 지역으로 돌려서 판터 전차 훈련에 임하게 할 만큼 독일군은 여유있게 춘계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1.1.2. 르제프-시쵸프카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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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선 화살표가 전부 독일군의 공격. 화살표 사이로 소련 제39군이 보인다.)

르제프 전역에서의 소련군 연결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하노버 작전이 높은 전과를 올리자 중부집단군은 7월 초에 이를 자이들리츠 작전으로 확대, 소련군 39군이 주축이 된 돌출부를 아예 잘라버리는 성과를 올렸다. 5월 23일에 파르티잔의 기총 사격으로 중상을 입은 발터 모델은 수술 후에도 목숨이 위험했으나, 고비를 넘긴 후 6월 16일부터 자택에서 요양하게 되었고 9군 사령관 대리인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기갑대장이 자이들리츠 작전에서 9군을 지휘했다.
7월 30일, 소련의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이 50만여 명의 병력과 1,700여 대의 전차, 1,000여 기의 작전기를 동원해 시작한 대대적인 제1차 르제프-시쵸프카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당시 46장갑군단이 지키고 있던 곳을 독일군에 비해 무려 5배에 이르는 병력으로 돌파해 나갔고 8월 5일에는 30km를 전진했을 정도로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데르자 강 앞에서 충분한 도하 장비가 없던 소련군은 멈춰야 했다. 사전 보급이 충분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 소련군은 강을 도하할 때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이러는 동안 독일군에게는 때마침 수히니치에서 증원군이 도착했다. 사실 이는 히틀러가 수히니치 공략을 위해 준비한 회오리 작전에 투입될 병력이었지만 르제프 일대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작전을 취소해 르제프에 증원했다. 스탈린만큼이나 히틀러 또한 르제프 전투를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제5기갑사단은 소련 제 6, 8전차사단에 공격을 가했고 같은날 증원된 독일 제 2전차사단은 카르마노프 부근에서 소련 제 20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독일의 기갑전력에 포위당한 경험이 수없이 많던 소련군은 갑자기 증원된 전차 사단 앞에서 상당히 위축되었고 독일 측에서도 비팅호프는 역공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바주자 강을 중심으로 전선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하지만 주코프의 눈에 독일 제5기갑사단과 제2기갑사단의 간극이 벌어진 것이 포착되었고 그는 그 간극을 충분히 활용할 생각으로 다시 공세를 준비하였다. 그는 후방에 있던 예비대 소련 제 5군에게 제 8전차 군단과 제 2 근위기병군단을 지원하고 이곳으로 공세를 펼치라고 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세는 다시 한번 독일 제 1기갑 사단에게 가로막혔고 워낙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단단하게 한 탓에 결국 주코프는 공세를 중단했다. 이 무렵 발터 모델은 9군 사령관에 복귀했다.
가을의 제2차 르제프-시쵸프카 공세에서 스탈린은 미국 대통령 특사 웬들 윌키를 참관시켰다. 영미연합군으로 하여금 제2전선의 개전을 요구하기 위한 시도였던 만큼 주코프도 코네프도 압도적인 병력과 물량을 쏟아부었으나, 여전히 제병합동전술에 미숙한 면모를 보인 소련군은 3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제2차 공세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1.1.3. 화성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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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불과 180km 떨어진 르제프의 독일 제9군을 제거하려다가 선두 부대가 포위당해 괴멸당한 작전. 소련군은 약 40만명, 독일군은 약 4만명의 인적손실을 입었다. 독일이 상당히 제한적인 자원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를 연이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엘 제 9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모델의 공이 크다. 그는 "공세적 방어"라는 것을 즐겨 썼는데 한마디로 공세를 벌이는 쪽의 취약한 측면이나 후방에 전력을 집중시켜 역으로 상대를 포위하는 전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화성작전에서 방어선 중 점점 허물어지는 거점이 있으면 즉시 그 부대에 증원을 하는 방식 (심지어는 최정예 사단인 그로스 도이칠란트조차 갈기갈기 찢어 전략적 거점에 투입하였을 정도로 유연한 전술을 구사했다.)으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시키면서 효과적으로 소련의 공세를 저지했다.

사실 이 화성작전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천왕성 작전의 양동 작전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여러 자료들이 공개된 이후에야 이 작전이 비슷한 시기 시행되었던 바실렙스키의 천왕성 작전과는 별개의 작전이였다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애초에 투입된 병력 자체가 양동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많았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전투를 벌이다 적당한 선에서 발을 뺀 것이 아니라 당시 정황을 보면 르제프 일대의 독일 제 9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는 것이 알맞다. 그리고 르제프는 양동 작전을 펼치기에는 스탈린그라드와 물리적인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양동작전이라고 해도 독일 수뇌부가 동요하거나 볼가 강 인근에 진 치고 있는 B집단군과 여타 추축군의 전력이 르제프에 투입되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살펴 보았을 때 아마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정리함과 동시에 모스크바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르제프 돌출부도 노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마디로 천왕성 작전과 화성 작전의 실체는 각개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전전선에 걸쳐서 대반격을 시도하려 했던 것. 실제로 화성작전은 실패했지만 천왕성 작전이 성공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스탈린 뿐만 아니라 주코프, 바실렙스키와 같은 소련의 명장들도 지나친 낙관론에 빠져 코카서스에 진을 치고 있던 독일 A 집단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려고 하다가 만슈타인의 뛰어난 기동방어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패배로 전선은 한번 더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은 절대 르제프에 관심이 없지 않았다. 당시 소련의 선전매체에서는 스탈린이 항상 일선에서 장성들과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처럼 나왔지만 스탈린은 항상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었기에 독일이 모스크바를 다시 치려고 할 때에 공세 시작 1순위가 될 것이 자명했던 르제프 돌출부는 그야말로 이 크렘린의 독재자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실제로 소련군은 모스크바 전투 후 쉴새없이 르제프를 몰아쳤고 청색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독일의 주력이 남쪽의 코카서스 지방을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다시 노릴 것으로 판단했고 그 공세의 시발점은 르제프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여담으로 당시 스탈린은 영미 연합군에게 유럽에서 제 2전선을 열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던 때인데 이때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과 여러 기자들을 데리고 르제프를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스탈린이나 STAVKA에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 따라서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화성작전은 소련의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을 공산이 매우 높다.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록 중령감청항공 정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무한궤도 군용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화성 작전; Operation Mars)을 완성하려 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라이플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하였다.
칼리닌 전선군은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은 북부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하였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은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며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한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하였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만 명을 기록했으나 소련군은 8배가 넘는 33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에다가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1.1.4. 들소 작전과 종결


이러한 제 9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해야 했다. 소련이 다시 공세를 시작해서가 아니라 장장 200여일간 펼쳐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엄청난 소모와 패배에 의해 독일군 수뇌부는 현재는 전선을 단축시켜야 한다는데에 의견이 일치했고, 후퇴하지 말고 현지 사수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히틀러조차 군부의 제안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만큼 전 전선에 있는 독일군에 대한 충격이 컸던 것. 실제로 그때의 상황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상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고 당시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난 무리한 공세를 시도한 스탈린과 STAVKA가 상황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볼만큼 전선의 균형추가 소련에게 급격히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1942년 가을부터 르제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주장해왔던 모델은 자신의 휘하의 35만의 독일군과, 독일군에 협조적이었던 현지 주민 6만명을 200km 후방에 구축될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시켰다. 소련군에게 자신들의 철수 사실을 모르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명령은 유선 전화기를 통해 전하거나 구두로만 전했다.[1]
들소 작전은 1943년 3월 1일에 개시되였으며 3주동안 대규모로 후방에 이동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후에 눈치채고 르제프에 도달했을 때는 독일군이 미리 설치해둔 온갖 부비트랩에 걸려 곤욕을 치루었다.
독일 중부집단군은 500km에 달하는 울퉁불퉁한 전선을 300km로 대폭 축소 시킴과 동시에 20여개의 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의 대패 이후 급격히 소련 측으로 기울어져 가던 전황을 어느 정도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훗날 히틀러는 이 병력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하다가 패배하므로 사실상 전쟁의 승패가 이미 결정되게 된다. 총 인원 약 50만명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옮긴 이 들소 작전은 현대전에서 가장 훌륭한 철수작전으로 뽑히기도 한다. 지금도 독일연방군 사관학교에서는 이 들소 작전을 사관생도들에게 가르친다.

1.1.5. 결과/영향


쌍방병력 300만이 넘고 사상자만 100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부전선을 중점적으로 다룬 전사서적을 제외하고는 전후 오랜 시간 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전투이다. 러시아는 21세기에 이른 현재에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문서를 외국인 학자들에게 비공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의 패장인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천왕성 작전을 위한 양동 작전이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전후 기간 내내 르제프 전투의 참전 용사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지금도 르제프 전투를 중점적으로 다룬 서적은 많지 않다.
전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가 지적했듯이 소련군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중장비와 압도적인 병력, 베테랑 장군들이 대거 포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주코프가 1년에 걸쳐서 패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도 르제프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전사학계에서도 재조명 되고 있다. 반면 당시 소련군 참전 군인들에게 르제프는 '''르제프 고기분쇄기'''로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악몽 같은 전투였다. 이 표현은 현대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결국 르제프는 2007년, 명예 군사 도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르제프에서 위대한 방어를 펼친 업적으로'라는 표현에 르제프 전투 생존자들과 후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전쟁 당시 독일군 9군 예하 제6보병사단장이었던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이 1962년에 발표한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은 1년 여의 르제프 전투에 관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본 서적에서 그로스만 장군은 서문에서부터 '독일군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탁월한 지휘력과 헌신이 방어전 승리를 이끌었다.'고 서술하였고, 본문 또한 사령관으로서 모델의 지휘를 중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들소 작전까지 마무리지은 뒤 최종장에 'Generalfeldmarschall Model'이라는 제목으로 모델의 군 경력, 르제프에서의 다양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에서 발터 모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예이다.

2. 미디어에서


상술하듯 르제프 전투는 규모와 중요도에 비해 동시기 다른 전투보다 인지도가 낮아 오랫동안 매체에서 다루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러시아에서 르제프 이고르 카피로프 감독의 영화 르제프[2]가 2019년 12월 5일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1942: 언노운 배틀이라는 이름으로 2020년 7월 29일 개봉했다.#


[1] 나중에 모델은 이런 방식으로 아르덴 대공세 에 동부전선 방어에 투입된 최정예 전력 20만을 연합군 몰래 집결시키는데 성공한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조차 처음에는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했다는 소식에 믿지 못했을정도.[2] '''Рже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