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외의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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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가톨릭 여성 수도자(수녀), 성인.
한국천주교회의 대다수 신자들에게는 '소화(小花)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는 호칭으로 잘 알려졌다.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수호성인이다.
리지외의 테레사는 그녀의 영적 삶에 대한 접근의 단순함, 실용성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신앙 생활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함께,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성인들 중 한 명이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녀를 "현대 최고의 성인"이라고 불렀다.[1]
2. 생애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가 근처에 있는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시계공인 아버지 루이 마르탱, 레이스 제조공이었던 어머니 젤리 게랭 슬하의 9남매 중 막내였다. 이들 가운데 테레사를 포함한 5명의 딸만이 어른이 될 나이까지 성장했다.
테레사의 가족은 매우 신앙심이 깊었는데, 본래 부모님도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혼했고, 4명의 언니들도 수녀의 길을 선택했을 정도였다.[2] 이러한 가정 속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인정받아 소화 테레사의 부모는 2008년 시복되었고, 2015년에는 성인으로 함께 시성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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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의 나이 5세였을 때 어머니가 선종했다. 그리고 테레사가 10살 때에 엄마 역할을 대신해 왔던 둘째 언니 폴린이 수녀원에 들어갔다. 테레사는 상실감에 빠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게 되었다. 가족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는데, 테레사가 집 방안에 있던 성모상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체험을 한 뒤 곧바로 병이 치유되었다.[4] 이듬해에는 첫 영성체를 모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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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이 된 1886년 테레사는 자신도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5] 로 인해 불허된다. 이듬해 1887년 이탈리아 로마 순례 때 당시 교황 레오 13세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테레사는 교황에게 자신의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는데,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언뜻 테라사의 신앙심을 높이 사서 격려해준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다짜고짜 보채는 어린 소녀 앞에서 마지못해 모호한 대답을 해준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테레사가 계속 간청하자 보다 못한 바티칸 근위병들이 강제로(…) 끌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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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테레사가 살던 리지외 현지의 주교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테레사의 결심을 확인하고서 가르멜 봉쇄수녀원 입회를 허락해주었다. 1888년, 나이가 불과 15세 때 일이었다. 이때부터 '아기 예수의 데레사'(Thérèse de l'Enfant-Jé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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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가 된 친언니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테레사)
수녀원 생활 당시에 테레사는 부각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고, 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사는 이를 '작은 길'이라고 불렀다. 이후 수녀원 입회 이듬해인 1889년에 수련을 받은 데 이어서, 1890년에는 수도서원을 발하여 정식으로 수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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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으로 투병 중인 테레사)
그러던 1896년 결핵에 걸려 각혈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결핵이 불치병에 가까웠고, 테레사의 건강은 치명적으로 나빠졌다. 결국 1년 동안 투병하던 끝에 테레사는 1897년 선종했다. 불과 24세, 수녀원 생활 9년 만에 너무나도 짧은 생을 마쳤다.
3. 사후의 기념, 존경
테레사가 선종한 후, 가르멜 수도회는 <한 영혼의 이야기>(Histoire d'une âme)라는 제목으로 테레사가 수녀원 생활 동안에 쓴 자서전을 출간했다. 이 책은 뜻밖에도 신자들 사이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으로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생전에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테레사라는 수녀가 가톨릭교회 안에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스테디 셀러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에 힘입어 선종 26년 만인 1923년에 교황 비오 11세가 시복했고, 불과 2년 후인 1925년에는 성인으로 시성되기에 이르렀다. 다시 2년 후 예수회의 창립 멤버이자 자신보다 무려 3세기 앞서 활동했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선종 100주기인 1997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성으로서는 3번째로 교회학자로 선포하는 영예를 안았다.[6]
4. 기타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테레사의 사진과 기록화들은 모두 어린 소녀, 젊은 시절의 모습들 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후대 신자들로부터 더욱 사랑과 인기를 얻었다. 간단히 말해서 10대 아이돌 여가수, 김연아[7] 선수가 수녀가 된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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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를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8] 수녀원 시절의 한 연극에서 잔 다르크로 분장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을 정도. 마침 두 사람은 현재 프랑스의 수호성인이며,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도 있고, 이런 탓인지 서로 엮는 관점도 있다.
테레사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과 수녀원이 위치한 프랑스 북서부 리지외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남부 루르드의 성모 발현지 다음으로 유명한 천주교 순례지가 되었다. 순례자들이 많아지자 테레사에게 봉헌된 대성당이 지어졌을 정도. 이곳 성당에는 지난 2015년 시성된 부모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파리에서 기차로 2시간을 조금 넘는 시간을 걸려 찾아갈 수 있다.
근현대 성인들 가운데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의 천주교 선교가 주로 프랑스에서 온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들에게 소화 테레사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숙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충북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을 설립한 임 가밀로 신부는 생전에 테레사를 직접 만나 '영적 남매'의 교분을 나누었을 정도.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역사가 꽤 깊은 성당들 가운데는 소화 테레사 성녀의 성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편이다.
20세기 빈민의 어머니로 존경받은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성녀가 수도명으로 테레사를 선택한 것도 소화 테레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화 테레사가 추구했던 '작은 길'을 본받아 거창하기보다는 소박함을 통해 하느님의 가르침,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의미였던 것.
한국 천주교 신자 가운데 소화 테레사를 세례명으로 하는 이들로는 성악가 조수미 등이 있다. 조수미는 2014년 8월 15일 당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전광역시에서 집전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영성체 성가로 연주된 세자르 프랑크의 가곡 <생명의 양식>을 부르기도 했다.
[1] 하지만 비오 10세가 이 말을 할 당시, 소화 데레사는 아직 정식으로 시복/시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그럼에도 가톨릭 교회에서 일찍부터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2] 테레사는 자신의 자서전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에 더 어울리시는 부모님을 제게 주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말은 리지외에 위치한 테레사 부모의 묘비에도 새겨졌다.[3] 이들 부부의 축일은 7월 12일인데, 바로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다.[4] 현재 프랑스 리지외에 위치한 소화 테레사의 옛날 집에는 이 성모상의 복제품이 전시 중이다. 진품은 테레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수녀원에 안치된 테레사 유해의 유리관 곁에 위치하고 있다.[5]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부터 수도회 입회가 가능하다.[6] 앞선 1970년 가르멜 수도회의 대선배(?)인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동시에 여성 교회학자로 선포되는 첫 주인공이 되었다.[7] 마침 김연아도 '스텔라'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 신자다.[8] 그러나 소화 테레사의 생전에는 아직 잔 다르크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잔다르크는 이후 1910년에 시복되었고, 10년 후인 1920년 비로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