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파힛 제국

 



''''''마자파힛 제국''''''
''''''Kemaharajaan Majapahit
Jawa/ꦗꦮ
'''
'''
[image]
문장
[image]
최대 강역
강역
존속기간
1293–1478[1], 1517[2] 또는 1527[3]
위치
자바섬,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4]
수도
마자파힛[5] (1293–1478)
다하 (1478–1517)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언어
중세 자바어(공용어, 문어, 교양어)
산스크리트어(종교 언어, 교양어)
종교
힌두교, 불교, 크자웬(Kejawèn)
주요사건
1293년 건국
1527년 멸망
성립 이전
싱하사리 왕국
멸망 이후
드막 술탄국, 발리 왕국
1. 개요
2. 간략한 배경
3. 역사
3.1. 건국 과정
3.2. 전성기
3.3. 분열과 쇠퇴
3.3.1. 마자파힛의 소멸
4. 화기: 쳇방
5. 사회와 문화
5.1. 산스크리트화
6. 통치 기구
6.1. 관료와 행정 단위
6.2. 본토 행정
6.3. 속령
7. 법률: 《쿠타라마나와》
8. 군주 목록
9.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자바어: ꦏꦫꦠꦺꦴꦤ꧀ꦩꦗꦥꦲꦶꦠ꧀[6], ꦗꦮ[7]
인도네시아어: Kemaharajaan Majapahit
산스크리트어: विल्व तिक्त[8]
한자: 滿者伯夷 (만자백이), 爪哇 (조와)
영어: Majapahit Empire
1293–1527년간 현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영토를 지배한 중세 후반기 동남아시아의 해상 대제국. 싱하사리 왕국의 신하이자 국왕의 사위였던 라덴 위자야가 (후) 크디리 왕국에 의해 싱하사리 왕국이 멸망하자 때마침 자바섬에 상륙한 원나라 군대와 연합, 크디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후 몽골군도 격퇴하여 세운 국가이다.
라덴 위자야(재위 1293–1307년) 이후 4대 황제(마하라자)인 하얌 우룩(재위 1350–1389년)의 시대에 마자파힛은 자바를 넘어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술라웨시, 말루쿠, 서뉴기니, 심지어 민다나오섬(현 필리핀 남부)까지 정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14세기 말에 잠시 복속되었던 순다(자바 서부) 지역이 독립하였고 1400년에는 말레이 반도 서부에 믈라카 술탄국이 세워졌다. 15세기 초반, 명나라에서 파견된 정화의 원정대는 믈라카 술탄국과 마자파힛으로부터 독립성을 주장하는 팔렘방의 화인 무슬림 세력을 지원하여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에서의 마자파힛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1404–06년의 계승 전쟁인 파레그렉 전쟁은 제국을 쇠퇴의 길로 이끌었다. 1468년에 제국은 분열되었고, 1475년에 정국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난 마자파힛의 황자 라덴 파타가 독립하여 세운 드막 술탄국이 마자파힛을 위협하더니 결국 1527년에 최후의 거점이 드막에 함락되어 한때 위대하던 제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다만 마자파힛 영주의 후계자들은 1908년 시점까지 자바섬 동쪽의 발리섬을 지배하였으며, 발리는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과 달리 이슬람화되지 않고 힌두교 문화를 유지하였다.

2. 간략한 배경


마자파힛이 태동한 13세기 이전, 자바 서부에서는 수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 자바 중부와 동부에서는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면서 분열되고 통합되기를 반복하였다. 최초로 중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정비된 체제를 갖추고 국제 교류에 참여한 세력은 중북부 해안 지대의 칼링가 왕국(6세기?–752)으로, 당시 군도 지역이 으레 그렇듯 인도화된 힌두교–불교 왕국이었으나 힌두계 동남아시아 교역망 장악을 꾀한 불교계 스리위자야 왕국의 해상 원정으로 점령당했다(752).
[image]
[1] 다하로 세력 중심 이동, 원거리 속령들에 대한 통제력 약화 상태가 장기화됨[2] 다하가 드막에 점령당함, 제국으로서 재기 불능. 드막 술탄국에 종속 시작[3] 완전한 멸망[4] 현재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일부 등에 해당[5] 또는 윌와틱타(Wilwatikta). 현재의 인도네시아 트로울란. '마자카르타'(Majakarta, 인도네시아어 모조크르토Mojokerto)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는데, '마자파힛 성'이라는 뜻이다.[6] Karaton Mojopahit[7] Jawa[8] Wilwatikta
한편 8세기 초엽, 순다 왕국의 왕이었던 산자야(Sanjaya, 순다 국왕 재위 재위 723–732, 마타람 국왕 재위 732–746)라는 시바파 힌두교도가 세력을 규합하여 므라피산(Gunung Merapi)의 사면을 흐르는 오팍강(Sungai Opak) 유역의 크우 평원(Dataran Kewu)[9] 지역에 마타람 왕국(Kerajaan Mataram, 732–1016)[10]을 세웠다. 마타람은 번성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중부 자바를 석권하였고, 장엄한 프람바난 사원(9세기, 힌두교 사원)과 보로부두르(8–9세기, 불교 사원)를 비롯하여 칼라산 사원(Candi Kalasan, 8세기, 불교 사원)과 세우 사원(Candi Sewu, 8세기, 불교 사원) 등 많은 힌두교, 불교 사원을 건설하였다. 929년, 음푸 신독(Mpu Sindok, 재위 929?–947)의 치세에 왕국의 중심지가 자바 중부 마타람 지방에서 오늘날의 좀방(Jombang)현과 마디운 인근에 해당하는 자바 동부로 옮겨졌고, 기존의 산자야 왕조가 끝나고 이샤나 왕조(Wangsa Isyana)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세력 중심 이동은 당대 자바 중부의 빈번한 화산 활동을 피하기 위해, 또는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1] 현대 역사가들은 중부 자바가 중심인 시대(732–929)에는 이 왕국을 '마타람 왕국'으로 부르고, 동부 자바가 중심인 시대(929–1016)에는 이 왕국을 '므당 왕국'(Kerajaan Medang)으로 부른다. 단, '므당'이라는 명칭은 937년의 안죽라당 비문(Prasasti Anjuk Ladang)에서 사용되어 후대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중심이 동부로 옮겨지기 전인 마타람 시대에도 당대에는 한동안 사용되었던 국호로 보인다. 실제로 안죽라당 비문에는 "Mdaŋ i Bhûmi Matarâm", 즉 '마타람의 땅에 (도읍을 둔) 므당 (왕국)'이라는 구절도 있다. 므당 시대부터는 자바에서 마타람 시대에 절정기를 맞은 대규모 사원 건축이 뜸해지고, 사원 건축에서 인도적인 모티브의 직접 차용보다는 자바의 토착 요소가 강조되기 시작한다.[12]
마타람–므당 내에는 종교를 기반으로 대립하는 두 세력(불교, 힌두교)이 있었는데, 불교계 세력은 사일렌드라 왕가[13]를 중심으로 뭉쳤으며, 시바파 힌두계 세력은 마타람의 초대 왕 산자야가 개창한 산자야 왕가를 중심으로 뭉쳤다[14]. 이 두 세력은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불교 세력이 강성할 때는 마타람–므당의 왕가가 사일렌드라 왕가로 바뀌기도 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산자야 사후 즉위한 마타람의 2대 왕 파낭카란(Panangkaran)은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도로서, 마타람의 왕은 한동안 사일렌드라 왕가에서 배출되었다. 이때 다라닌드라(Dharanindra, 재위 775–800) 시대부터 사일렌드라 왕조 마타람의 왕이 스리위자야의 왕을 겸하는 연합왕국이 형성되어, 다라닌드라, 사마라그라위라(Samaragrawira, 재위 800–819?), 사마라퉁가(Samaratungga, 재위 812?–833) 시대까지 3대를 지속하였다. 사일렌드라 왕조 사마라퉁가 왕 사후에는 사마라퉁가의 딸 프라모다와르다니 공주(Pramodhawardhani)와 결혼한 산자야 왕가의 부마 라카이 피카탄[15](Rakai Pikatan, 재위 838–850)에게 왕위가 넘어감으로써 마타람에서는 다시 산자야 왕가에서 왕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프라모다와르다니 왕비 이후 사일렌드라 왕가가 복위하는 일은 없었으며, 사일렌드라 왕가는 이미 통혼으로 일정한 지지기반을 확보한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왕국 지역으로 옮겨 갔다. 수마트라에서는 사마라퉁가 왕의 아들 발라푸트라 왕자(Balaputra)가 사마라퉁가 사후 라카이 피카탄의 왕위 승계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스리위자야의 왕이 되었다.
왕가가 서로 분리된 후로 자연히 마타람–므당 왕국은 당대의 번성한 스리위자야 왕국과 정치, 경제적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고, 불교계 스리위자야 세력은 므당 내부의 세력 대립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990년, 므당의 왕 다르마왕사(Dharmawangsa, 재위 990–1016)는 사일렌드라 왕조 스리위자야의 팔렘방을 공격하여 도시와 궁성을 약탈하고 점령을 꾀하였으나, 스리위자야는 꿋꿋이 힘을 모아 반격하며 1006년에 므당 침공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스리위자야가 사주한 므당 산하 르와람(Lwaram) 영주 우라와리(Wurawari)의 반란으로 므당이 혼란에 빠진 사이 스리위자야군이 우라와리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거꾸로 므당을 침공, 1016년 자바 동부의 수도 와투갈루(Watugaluh)로 쇄도하였다. 와투갈루에 적군이 진입할 당시 다르마왕사 왕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던 중이었으므로 수도 침공에 충분한 대비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다르마왕사 왕은 결연한 크샤트리아의 자세를 보이며 궁성을 지키다 사망하였다. 므당의 궁성은 파괴되고, 와투갈루는 점령 및 약탈당하였으며 므당 왕국 또한 함께 멸망하였다.
[image]
[9] 현재도 역사적 이유로 '마타람'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금의 욕야카르타 등과 가까우며, 나중의 마타람 술탄국도 이 지역 및 근처를 핵심 강역으로 한다.[10] 나중의 마타람 술탄국과 구별하여 '고 마타람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1] (가종수 2014, 31)[12] (가종수 2014, 33-34)[13] 자바 중부의 크두 평원(Dataran Kedu)을 핵심 영지로 하여 출발한 왕가로, 기원으로는 여러 설이 있다. 마타람–므당이나 스리위자야의 왕가가 되기도 했다. 발리의 와르마데와 왕가 역시 사일렌드라의 방계이다.[14]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이렇지만, 산자야도 사일렌드라 왕가에 속하였으며 산자야 왕가라는 별도의 왕가는 없고, 오직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 분파와 시바파 힌두교 분파만이 존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15] 프람바난 사원을 지은 왕으로 유명하다.
와투갈루의 재앙에서 피신한 다르마왕사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Airlangga, 990–1049)는 3년 후인 1019년, 와해된 므당의 호족 세력 일부를 규합하여 카후리판 왕국(Kerajaan Kahuripan)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스리위자야가 남인도의 촐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약화되어 자바에 간섭하기 어려워진 틈을 타 아이를랑가 왕은 므당의 고토로 진격, 주변 군소 세력을 정복해 나갔고 1032년에는 반란자 우라와리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계속된 아이를랑가의 원정으로 카후리판 왕국은 므당의 기존 강역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동부 자바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를랑가 왕은 당대 예술의 후원에도 열성을 보였다. 1030년대 초 궁정 시인 음푸 칸와(Mpu Kanwa)는 아르주나의 이야기를 다룬 《카카윈 아르주나위와하》(Kakawin Arjunawiwaha)를 아이를랑가 왕의 후원으로 완성하였는데, 작품의 주인공 아르주나는 아이를랑가 왕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아이를랑가 왕의 왕비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위(Dharmaprasadottungadewi)는 촐라 침공에서 도피한 스리위자야의 공주[16]였는데, 아이를랑가 왕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얻은 맏이 상그라마위자야 공주(Sanggramawijaya)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공주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해두었다. 그러나 상그라마위자야 공주는 나중에 왕위 승계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출가한 공주보다 어린 두 왕자는 동등한 승계권이 있었으므로 아이를랑가 왕은 1045년에 왕국을 둘로 쪼개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고서 자신은 속세를 떠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제 왕국의 동쪽 절반은 장갈라 왕국(Kerajaan Janggala, 1045–1136)이, 서쪽 절반은 크디리 왕국[17](Kerajaan Kediri, 1045–1221)이 되어 별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12세기 중반 크디리의 자야바야(Jayabaya)가 원정(1135–1137)을 통해 장갈라를 흡수했다. 이처럼 크디리와 장갈라가 다시 통합되는 12세기 전반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유명한 자바의 전통 설화인 판지 설화가 생겨났다. 크디리 역시 힌두–불교 문화를 발전시키며 수마트라 세력과 경쟁하는 자바 동부의 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크디리 내부에서 왕권과 종교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던 사이 종교 세력의 지지를 받은 지방 영주 켄 아록(Ken Arok, 국왕 재위 1222–1227)[18]이 크디리 중앙군을 물리치는 혁명을 일으켜 크디리의 영토에 싱하사리 왕국(Kerajaan Singhasari, 1222–1292)을 세웠다. 켄 아록이 세운 라자사 황가는 싱하사리의 왕가였으며, 이후 마자파힛의 황가가 된다. 싱하사리는 자바 중동부 세력과 수마트라 세력 간의 오랜 대립에서 마침내 우위를 점해 수마트라로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펼쳤다.

3. 역사



3.1. 건국 과정


마자파힛의 모태가 된 싱하사리 왕국은 명군 크르타나가라의 지휘 하에 기존에 수마트라를 지배하던 믈라유 왕국(다르마스라야)을 1290년에 격파하며 인도네시아 군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당시는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이 보낸 몽골군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아시아를 휩쓸고 있을 때였는데, 쿠빌라이 칸은 싱하사리 왕국도 원의 피보호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기 위해 맹기(孟琪)라는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크르타나가라 왕은 맹기의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 귀를 자르고(도둑질을 한 범죄자한테 하는 체벌), 쫓아내 버렸다. 격노한 쿠빌라이 칸이 당연히 군대를 일으켰으며, 대체로 남송인으로 구성된 3만의 병사와 1천 척의 함선, 1년 치의 보급품이라는 큰 규모의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1291년, 싱하사리 왕국의 지방인 자바의 크디리 영주 자야캇왕(Jayakatwang[19])이 크르타나가라에게 반기를 들고, 크디리 왕국[20]을 세운다. 이에 크르타나가라의 사위[21] 라덴 위자야의 군대가 북쪽에서 쳐들어온 크디리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남쪽 방면에서 기습해 온 자야캇왕이 무방비 상태였던 수도 쿠타라자에 입성하였다. 몽골의 침공을 앞두고 크르타나가라 왕은 자야캇왕에게 살해당했고, 싱하사리 귀족들의 증오를 받는 가운데 싱하사리를 병합한 크디리의 자야캇왕 왕이 즐거워하는 동안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섬 동부 수므늡 지역의 지배자였던 아랴 위라라자(Arya Wiraraja) 공의 도움으로 마두라섬으로 피신하여 자야캇왕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목재 자원이 풍부했던 자바 동부 타릭 지역을 지배하게 된 라덴 위자야가 숲을 개간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지역의 마자라는 과일이 쓴 맛을 냈다고 해서 이름을 '쓴 마자', 즉 '마자파힛'이라 짓게 된다. 바로 이곳이 후대 인도네시아 최강국이 되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현대의 트로울란(Trowulan))이 된다.
이후 자야캇왕은 라덴 위자야를 사면하였고 위자야는 일시적으로나마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한편, 중국의 원나라는 왕조 교체가 되든 말든 착실히 자바 원정을 준비하였다. 한몽 혼성의 2만 군대와 1천 척의 배가 준비되었다. 취안저우를 출발한 원나라 함대는 베트남과 참파의 해안을 따라 천천히 남진해오면서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을 지났다. 말레이와 수마트라의 군주들은 몽골 군대의 위세에 겁을 먹어 조공을 바치고 복속했고 몽골군은 다루가치들을 남기며 마침내 자바로 접근하고 있었다. 자야캇왕 왕에게 도전했으나 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라덴 위자야가 몽골 해군의 접근 소식을 들은 것이 이때였다. 복속하는 것을 대가로 몽골과 동맹을 맺은 라덴 위자야는 자야캇왕 왕을 쳐부수기 위해 군세를 모으고 몽골군에게 크디리 왕국의 지도를 넘기는 등 적극 협조했다.
격전의 날에 라덴 위자야군을 선제공격하려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몽골–라덴 위자야 연합군은 다하 전투에서 3만의 군세로 10만에 달하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를 쳐부쉈고, 2000명이 훨씬 넘는 수를 사살하고 익사하게 만들었다. 자야캇왕 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도망쳤으나 몽골군에게 생포되고 만다. 승리를 거두자 라덴 위자야는 조공을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자파힛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을 받기를 원했다. 몽골인 장군 시비와 위구르 장군 예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가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했으나 유독 중국인 장군 고흥(高興)만은 이에 반대하고 다른 둘에게 경고했다. 이 경고는 사실이 되었다.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이백 명의 최정예 병사는 라덴 위자야의 초청에 따라 조공을 받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마자파힛으로 왔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라덴 위자야는 몽골의 호송대를 쳐부숴 버렸고, 나아가 기습공격으로 몽골군 본대마저 박살을 내 버렸다. 정예 병사가 3000명 이상 숨진 사건에 몽골은 황급히 살아남은 병사와 물자를 수습해 퇴각해야 했고, 라덴 위자야는 싱하사리–크디리 멸망 이후의 권력 공백을 틈타 자바에서 세력을 넓혀 1299년 마자파힛을 수도로 하는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22]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마자파힛 제국이 되었다.

3.2. 전성기


14세기 트리부와나(Tribhuwana Wijayatunggadewi, 라덴 위자야의 딸, 재위 1328–1350) 황제와, 그녀와 투마펠 공 차크라다라(Cakradhara, Bhre Tumapèl)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하얌 우룩(Hayam Wuruk, 재위 1350–1389) 황제 시대 마자파힛 제국은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는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자바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러,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본토(나가라 아궁) 및 만차나가라(동질적 속령) 외에, 누산타라(이질적 속령)에 대한 제국의 지배는 명목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을 제외하면[23] 술라웨시, 말루쿠, 뉴기니 등 현대 인도네시아 동부 권역에 해당하는 누산타라 지역에서는 《나가라크르타가마》 등 자바의 기록 외에 이를 교차 검증할 당대 현지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이 때문에 정말 마자파힛군의 원정과 복속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산타라 체제 하에 있었던 지역의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오래 누산타라 체제가 유지되었는지 등은 아직 섣불리 확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중국(원나라)–동남아–인도–아라비아–투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였으며,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는 이 제국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판지 설화 등을 테마로 여러 장의 화려한 그림을 연속적으로 교체하며 설명을 곁들이는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극은 마자파힛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마자파힛 당대의 도판은 찾기 어렵지만 16–18세기의 와양 베베르 도판은 오늘날까지 남은 것이 많다. 가믈란 음악, 각종 와양 극, 자바 무용 양식은 대체로 오늘날과 흡사한 형태로는 근세, 특히 마타람 술탄국 시대에 정립되고 후계 국가들 수라카르타 수난국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정교화되었지만, 상당 부분 마자파힛 시대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
주로 수도 마자파힛(트로울란) 근처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자바 전역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힌두–불교 사원 건축물 또한 많은 경우 마자파힛 시대의 것이다. 고대의 마타람 시대 이후 자바에서는 마타람의 것에 비할 만한 대규모의 사원 건축이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지만, 파나타란 사원(자바어: Candhi Panataran, 인도네시아어: Candi Penataran)은 예외적으로 넓은 부지에서 마자파힛 시대인 14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주로 증축된 대규모 사원으로(최초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정교한 부조는 자바식 힌두–불교 시각 예술의 걸작이다.[24] 이 밖에도 다양한 마자파힛 시대 사원들이 남아 있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것들이 많은데, 특징이 뚜렷한 둘만 예로 들어 본다. 자바 중부의 수쿠 사원(Candhi Sukuh, Candi Sukuh)은 15세기 전반[25]에 세워진 사원으로, 고대 마타람의 보로부두르 이후 자바에서 극히 드문 피라미드 모양의 사원이며 해발 1186m의 라우(Lawu)산 사면에 위치한다. 츠타 사원(자바어: Candhi Cetha, 인도네시아어: Candi Ceto)도 라우산 사면의 해발 1495m에 위치하며, 다른 유명한 자바 사원들과 달리 자바 고유 모티브의 활용이 돋보인다. 또 츠타 사원은 마자파힛 세력이 쇠퇴하던 말기인 1479년 무렵 건축된 것으로, 자바 중·동부에서 마자파힛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사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26]

3.3. 분열과 쇠퇴


하얌 우룩 황제 사후 15세기 초에 하얌 우룩의 두 아들 사이에서 벌어진 파레그렉 전쟁(1404–1406)은 광대한 제국에 내재되어 있던 고질적인 분열 문제를 드러냈다. 서마자파힛 황실과 동마자파힛 황실 사이에서 벌어진 파레그렉 전쟁은 서마자파힛의 승리로 끝났고 제국은 재통일되었으나, 광대한 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방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독립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안정한 제국은 다시 한 번 분열되었다. 15세기 중반 크르타부미 공(Bhre Kertabhumi)의 반란(1468)으로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이 점령되고 크르타부미 공이 스스로 브라위자야 5세(Brawijaya V)로 즉위하자, 쫓겨난 황제 브라위자야 4세(Brawijaya IV, 싱하위크라마와르다나)가 구 크디리의 고도 다하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브라위자야 4세가 죽자 황자 라나위자야(Ranawijaya)가 브라위자야 4세의 다하 세력권을 계승했다(1474). 1478년, 라나위자야의 군대는 수도를 수복하기 위해 크르타부미의 통제 하에 있던 마자파힛(트로울란)을 공격한다. 이에 크르타부미는 아들이자 드막 왕국의 지배자 라덴 파타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벌어진 부자 전쟁(父子 戰爭, Perang Sudarma Wisuta)에서 라덴 파타의 지원군이 너무 늦게 도착하여, 우다라(Prabu Udara) 장군이 이끄는 라나위자야군이 간신히 승리하고 크르타부미를 황궁에서 사살하였다. 라나위자야는 재통일된 마자파힛의 황제로 즉위한다(1478). 표면상 다시 한 번 분열이 봉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긴 분열 와중 드막 왕국의 세력은 사실상 독립 체제를 구축하였고, 자바 북부와 서부에서 점점 더 교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무슬림 상인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어 마자파힛 정통성의 근원인 힌두교–불교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1478년부터 마자파힛의 수도 마자파힛은 더 이상 수도 기능을 하지 못하고, 다하가 사실상 마자파힛의 새로운 수도가 되며, 마자파힛은 다하와 인근의 자바 중동부 지역만을 실질적으로 영유한 군소 세력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1478년을 제국으로서 마자파힛의 붕괴 시점으로 잡는 역사가도 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마자파힛 후기의 정치사는 매우 불명확해지게 된다. 《파라라톤》, 《바밧 타나 자위》 등 공식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자바 역사서들에는 1478년 이후 드막과 마자파힛(다하 정권) 간 전쟁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이후에 벌어진 약 50년간의 일 중 많은 부분은 비공식적인 자바의 기록이나 당대에 관해 언급하는 중국계, 포르투갈계 사료에 의존해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하 정권과 드막 정권 간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벌어졌음이 분명하다. 대략적인 재구성은 이하와 같다.
1498년, 유능한 장군이자 대재상(Patih)으로서 중앙정부의 제2인자였던 우다라가 라나위자야[27]를 무력화시키고[28] 스스로 마자파힛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 틈을 타 드막 왕국의 라덴 파타는 마자파힛의 종주권 인정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포하였고, 프라부 우다라와 라덴 파타는 각기 세력을 가지고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존 두 차례의 내전(파레그렉 전쟁, 크르타부미 반란)과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 20년 가까이 전쟁이 만성화, 장기화되었을 뿐더러, 최종적으로는 라덴 파타의 군대가 1517년 프라부 우다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의 세력 거점 다하를 점령해버렸던 것이다[29]. 이 와중 반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세력에 의해 1511년 믈라카가 점령되었을 때, 다하의 프라부 우다라는 포르투갈 세력에 희망을 걸고 원조를 요청하게 된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드막의 라덴 파타는 1513년 1월, 팔렘방즈파라(Jepara)에서 편성한 100척의 함대에 5천 명의 군사를 태워 보내 사위 파티 우누스(Pati Unus)[30]가 지휘하게 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공격하였으나, 말라카 함락에는 실패한다.[31]
크르타부미 반란과 드막의 다하 점령에 이르는 약 50년의 기간 동안 마자파힛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광대한 군도를 통제할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전 군도를 아우르는 세력으로서 마자파힛 제국은 이 기간에 붕괴하였다. 마자파힛의 기존 속령 가운데 팔렘방 등 일부는 이 과정에서 드막 정권으로 종주 세력을 바꾸기도 했다. 이 와중에 말레이 반도의 신흥세력 믈라카 술탄국은 믈라카 해협을 통제하는 세력으로서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였으며[32], 다른 외곽 지역도 서서히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내전 상태의 마자파힛 중앙정부는 독립한 지방에 통제력을 재확립할 여력이 없었다.
승리자 라덴 파타는 크르타부미의 아들로서 마자파힛 황족이었으므로, 프라부 우다라를 몰아낸 합법적인 제국의 계승자라는 것이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었고, 이전 두 차례의 계승분쟁에서와는 달리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라덴 파타의 거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어떤 사료에서는 라덴 파타가 그저 마자파힛을 버리고 자신의 세력권 드막 지역으로 돌아갔다고 기술되어 있는 반면, 다른 사료에서는 프라부 우다라가 라덴 파타의 봉신이 되어 라덴 파타의 막내딸과 결혼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라덴 파타의 승리로 끝난 전쟁은 그의 본의와 거취가 어찌되었든 마자파힛 제국의 분열을 회복 불가능하게 장기화하여,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마자파힛의 오도아케르라고 할 수 있을 라덴 파타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518년, 승리의 만족감 속에 드막에서 편안히 눈을 감는다.

3.3.1. 마자파힛의 소멸


극도로 약화된 마자파힛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멸망하기까지 드막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불과하였다. 이 세력은 드막의 새로운 군주 트릉가나(재위 1521–1546)의 원정으로 더 쪼그라들다가 1527년[33] 전후 트릉가나의 마지막 원정으로 완전히 드막에 흡수된다. 1520년대 마자파힛의 군주 또는 실권자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한데, 라나위자야(기린드라와르다나) 또는 그 후계자가 적어도 명목상의 군주였을 가능성이 있다. 1517년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마자파힛 잔당, 특히 투반(Tuban) 항구[34] 등의 세력이 자바 중·동부에 잔존하였고, 라덴 파타의 드막 세력권을 계승한 군주들이 계속해서 이들을 공격하였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들 중 하나가 라자사 황가의 후계자로 정통성 있는 군주를 세워 '마자파힛'의 후계 세력을 자칭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520년대 마자파힛의 역사는 기록 부족 및 상충으로 상당히 불명확하지만, 자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료 및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성인 전승 등을 종합해 보면 마자파힛과 드막의 후기 전쟁사를 약간 재구성해볼 수 있다. 《히카얏 하사누딘》(Hikayat Hasanuddin) 등의 기록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1524년에 마자파힛과 드막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드막 대성원(Masjid Agung Demak)의 이맘이자 드막 원정군을 이끌었던 장군 수난 응우둥(Sunan Ngudung)은 마자파힛 편에 선 라덴 파타의 동복동생(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름) 트룽 공작(adipati Terung) 라덴 쿠센(Raden Kusen)[35]에 의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수난 응우둥의 아들이자 9인의 왈리(Wali Sanga) 중 하나인 수난 쿠두스(Sunan Kudus)[36]가 지휘한 1527년의 원정에서 드막군은 승리를 거두어 최종적으로 마자파힛을 멸망시켰고, 라덴 쿠센은 이번에도 마자파힛 편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수난 쿠두스는 포로로 잡힌 적장 라덴 쿠센을 경의를 표하며 융숭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밧 드막》(Babad Demak)이나 《바밧 마자파힛》(Babad Majapahit dan para wali) 등의 지역 연대기(babad)에 따르면 수난 응우둥과 라덴 쿠센의 전투와 수난 응우둥의 전사는 1520년대가 아니라 50년 전인 1470년대, 부자 전쟁(Perang Sudarma Wisuta)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히카얏 하사누딘》에 등장하는 마자파힛과의 전쟁에서 1524년에 사망한 드막 대성원의 이맘은 정확히는 '라마툴라 공'(Pangeran Rahmatullah)으로, 일반적으로는 수난 응우둥과 동일시되지만, 행적이 유사한 다른 장군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편, 수난 응우둥의 아들인 수난 쿠두스는 이슬람 성인으로서 어느 정도 전설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실 마자파힛과의 전쟁보다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자 드막 군주의 고문으로서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행적[37]이 유명한 인물이다. 《바밧 타나 자위》에 따르면 드막의 마지막 군주 아랴 프낭상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 수난 쿠두스의 지지를 받는 등, 수난 쿠두스가 적어도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대 인물의 일반적인 수명을 고려할 때, 16세기 전반에 수난 쿠두스가 마자파힛과 드막 간의 전쟁을 종결지은 장군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수난 응우둥=라마툴라 공' 설을 따르는 경우에도 《히카얏 하사누딘》의 기록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기는 하다.
마자파힛 최후의 거점이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최후까지 마자파힛이 투반, 다하 및 중부 자바 일부를 보유하며 다하를 수도로 유지하다가 다하가 점령됨으로써 멸망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최종적으로 투반만이 구 마자파힛 중앙정부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가 투반이 점령됨으로써 마자파힛이 멸망했다는 설이다.
이후의 자바 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득세하였으며, 동부의 블람방안 왕국을 제외하면 힌두–불교계 세력의 입지는 사라지게 된다. 드막 술탄국이 트릉가나 시대에 사실상 마자파힛의 계승 세력으로서 자바 전역과 수마트라 동부, 보르네오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트릉가나 사후 드막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대세력으로서의 드막 술탄국은 결국 계승 분쟁과 내분으로 채 100년을 못 가고 16세기 중반에 허망하게 붕괴하였으며, 이후에는 반튼 술탄국, 치르본 술탄국, 파장 왕국, 칼리냐맛 왕국, 수라바야 공국 등으로 자바 각지가 쪼개졌고 이외에도 수많은 도시가 저마다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긴 분열의 끝에 드막 술탄국의 후계 세력 가운데 마타람 술탄국(1587–1755)이 자바의 패권을 획득하고 자바를 거의 통일하는 데까지는 갔으나, 마자파힛이 세력을 확장하였던 14세기와는 달리 지방 세력과 유럽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자파힛과 같은 수준의 해양제국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네덜란드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4. 화기: 쳇방


[image]
[16] 촐라 침공 시 재위한 왕의 딸, 혹은 적어도 왕과 가까운 왕족. 1035년 아이를랑가 왕은 '스리위자야스라마'(Srivijayasrama)라는 불교 사원을 지어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위 왕비에게 헌정했는데, 이 역시 왕비가 스리위자야 고위 왕족이라는 설에 대한 간접 증거이다.[17] 자바어로는 '카디리'(Kadiri)라고 하며, 인도네시아어로는 주로 '크디리'(Kediri)라고 하지만 원음을 존중하여 '카디리'라고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18] 고래의 귀족이 아니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한 인물.[19] wang은 고유명사의 일부로 王이 아님[20] 이를 앞서 나온 크디리 왕국과 구별하기 위해 후 크디리 왕국, 제2차 크디리 왕국, 또는 글랑글랑 왕국(Kerajaan Gelang-gelang)이라고도 한다.[21] 크르타나가라 왕은 아들이 없었고, 왕의 막내 공주 가야트리 라자파트니(Gayatri Rajapatni)가 라덴 위자야와 결혼하였다. 가야트리 라자파트니 소생의 공주 트리부와나는 나중에 마자파힛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전통적으로 자바에서 가야트리 라자파트니는 미와 지혜를 갖춘 여성의 전형으로 칭송받았다.[22] 서아시아에서 오스만이 건국된 연도다.[23] 수마트라(제한적으로 말레이 반도도 포함)와 보르네오의 경우 마자파힛 이전 시대부터 토착 세력 및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관찰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보르네오 북부 브루나이 술탄국의 경우 중국과 상대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중국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는데, 1370년에는 명나라 사절이 브루나이에 도착하였고, 중국인들은 당시 브루나이가 마자파힛 통제 하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명과의 직접 접촉에 따라 1370년대부터는 브루나이가 명나라로 조공을 바치게 되었지만,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버렸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며, 당시 마자파힛과 브루나이의 정치적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사료는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명나라가 브루나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관계로 브루나이는 약 30년간 명목상의 명 조공국으로 남아 있다가, 정화의 원정과 마자파힛의 약화에 따라 15세기 초에는 잠시 실질적인 명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이 과정은 중국 측 기록에 의해 상당히 상세히 알 수 있다. 1408년 브루나이의 국왕 카르나(Maharaja Karna, 중국식 표기는 '마나야가나'麻那惹加那)가 신하들과 함께 명의 수도 난징으로 와서 영락제 조정에 입조하고 난징에 머물던 사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 묘가 오늘날 '발니국왕묘'(浡泥国王墓)로 난징에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대외 정책이 폐쇄적으로 바뀜에 따라 브루나이는 명으로의 조공을 끊고 독립적인 행보를 시작하였다.[24] (가종수 2014, 233-240)[25] 입구의 석문에는 1437년으로 적혀 있음[26] (가종수 2014, 200-209)[27] 당대의 지유 비문(Prasasti Jiyu)에 의하면 적어도 1486년 다하 정부의 군주는 라나위자야(기린드라와르다나)였음이 확증되었다.[28] 라나위자야는 기록에 따라 정확한 실권 상실 및 퇴위 시점, 사망년도가 엇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1510년대의 사정은 어느 정도 확실한데, 토메 피르스의 당대 기록 《동방지》에서는 1513년 시점 다하(포르투갈식으로 '다유'Dayo)의 군주는 '바타라 비지아야'(Batara Vigiaya)이지만, 정부의 실권자는 '파트 암두라'(Pate Amdura)였다고 한다. 여기서 '바타라 비지아야'는 '브라위자야'(Brawijaya)로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라나위자야를 (적어도 비공식적으로)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며, '파트 암두라'는 파티 우다라임이 분명하다. 즉, 1513년 시점에 적어도 라나위자야는 살아서 명목상의 군주인 채였고, 실질적인 집권자는 프라부 우다라였음을 알 수 있다.[29] 이는 중국계, 포르투갈계 사료 양측에서 교차 검증되는 사건이다. 중국계 사료에 따르면 1517년 라덴 파타가 다하를 직접 공격해 점령한 이유는 다하 정권과 말라카의 포르투갈 세력 간의 협력에 위협을 느낀 것이었다.[30] 라덴 파타 사후 드막의 왕위를 계승함[31] 이후 파티 우누스는 실패를 거울 삼아 군도에서 선박 건조로 유명했던 술라웨시의 고와 지역에 375척의 선단 건조를 의뢰, 1521년 이 375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말라카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3일 밤낮을 이어진 전투 결과 이번에도 말라카 함락에는 실패하였다.[32] 믈라카 술탄국은 싱아푸라 왕국이 마자파힛에 의해 멸망(1398)한 후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가 이끌고 도피한 싱아푸라의 잔당에 의해 건국(1400)되었다. 믈라카가 마자파힛의 직접통제를 받은 적은 없었고, 15세기 중반부터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다.[33] 종종 1527년을 마자파힛의 최종 멸망 시점으로 잡는데, 이는 자바 측 기록 《바밧 상칼라》(Babad Sangkala) 등에 따른 것이다.[34] 자바 북동부의 항구. 투반의 영주 일가는 일찍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마자파힛 중앙정계와 복잡한 혈연 관계망을 형성하였으므로 라자사 황가에 여전히 충성하였다. 《동방지》에 따르면 1510년대 초 투반의 무슬림 영주는 파트 비라(Pate Vira, 포르투갈어식 표기로 '파티 위라' 정도에 대응함)였다. 파트 비라는 마자파힛군을 지휘하며 당시 드막 산하에 있던 그레식(Gresik)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이 마자파힛의 그레식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35] 라덴 쿠센 역시 무슬림이었으나 마자파힛에 충성하였던 장군이다.[36]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여 드막 대성원의 이맘이기도 했다.[37] 가령 므나라 쿠두스 성원(Masjid Menara Kudus) 건축 등.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자파힛 제국이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패권을 획득한 배경에는 이 국가가 쳇방(cetbang)이라는 대포를 생산하고 군사 원정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 국가였다는 사실이 있다. 쳇방은 청동제 후장식 대포였고, 주로 포신은 오늘날 자바 동부 보조느고로현(Bojonegoro)의 라작웨시(Rajakwesi) 지역에서, 흑색화약은 스와탄트라 빌룰룩(Swatantra Biluluk)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자바 지역에 화기가 처음 전래된 것은 1293년 쿠빌라이 칸의 원정 과정에서였다. 화기 기술을 습득한 후 늦어도 14세기 중반 하얌 우룩 황제(재위 1350–1389)의 시대에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한 마자파힛 제국은 이 쳇방 포를 육전에서 사용하여 자바섬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구축했으며, 자바식으로 개량된 정크선 함대에 장착해 군도 전역을 정복하고 해양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하얌 우룩 시대의 마자파힛 해군 제독 음푸 날라(Mpu Nala)가 특히 쳇방 전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푸 날라의 초기 경력인 1357년 숨바와 원정 등에서부터 쳇방이 사용되었으며, 가자 마다가 육성하고 음푸 날라가 이끄는 마자파힛 해군은 수마트라의 고도 팔렘방과 잠비 등 구 스리위자야 왕국[38]의 심장부인 수마트라 핵심 지역뿐 아니라, 보르네오 남부, 숨바와섬을 비롯, 클란탄, 크다, 슬랑오르말레이 반도까지 원정을 나가 마자파힛의 세력권을 넓혔다.[39]
마자파힛 세력의 쳇방은 세계사적으로도 힌두계 내지 힌두–불교계[40] 세력이 화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라는 의의가 있다. 인도 지역에도 13세기 후반 몽골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북인도에 화기가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 후반부터는 전쟁에서 화기가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 화기 사용에 앞장선 것은 델리 술탄 왕조바흐마니 술탄국 등 북부–중부 인도의 이슬람계 세력이었으며, 적어도 약 1366년경부터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화기를 도입 사용한 것 정도가 예외적이다.
마자파힛 제국이 말기에 접어들어 혼란 와중에 쇠퇴해감에 따라 제국의 많은 화기 기술자(제조, 운용)들은 자바를 떠나 더 높은 임금과 생활조건을 제안하는 수마트라섬, 말레이 반도, 필리핀 등지의 새로운 교역 중심지로 이동하였다. 16세기에 말레이 반도에 도달한 포르투갈인들은 자바 상인 집단이 반도에 건설한 식민지를 목격하고, 그들이 직접 화기를 생산하며 상선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자바의 후발 세력인 드막 술탄국(1475–1554)은 쳇방 포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강철로 만든 쳇방을 앞세워 두 차례(1513, 1521)에 걸쳐 포르투갈이 점령한 말라카를 공격하였던 적이 있으나, 점령에는 실패하였다[41].
16세기부터 쳇방은 렐라(lela)와 른타카(rentaka)라는 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렐라는 수마트라섬,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섬 지역에서 토착 무역 국가들이 상선단 보호를 위해 사용한 대형 함포였는데, 동시대 유럽 대형 함포에 비하면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른타카는 활강식 총열을 사용하는 선회포로서, 통상 렐라보다 구경이 작고 총열이 길었다. 렐라와 른타카는 16–18세기에 걸쳐 현재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아우르는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토착 세력들에 의해 두루 사용되었다. 심지어 필리핀 지역에서는 19세기 말의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에서 른타카를 활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 사회와 문화


마타람–므당 시대와 크디리, 싱하사리, 마자파힛 시대까지 자바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이는 오랜 독자적 역사가 진행되며 자바의 실정에 맞게 상당히 변형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의례 참여 방식, 의복, 예법, 언어 사용 양상 등의 사회 관습을 통제하는 상당히 복잡한 규칙이 생겨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했으나, 사회 계층 자체의 경계와 상하 관계는 인도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다.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를 비롯한 다양한 힌두 신격이 숭앙되었지만 외래 신들 외에도 힌두교 전래 이전부터 자바 지역에서 숭배되던 다양한 토착 신격이 자바 힌두교 문화에 편입되어 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힌두교 종파 가운데는 시바파 힌두교가 주류였는데, 자바에서는 주로 시바의 아바타라인 '바타라 구루'(Batara Guru)라는 신이 신들의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인 최고신으로서 숭배되었다. 자바식 시바파 힌두교 체계에서 브라흐마(바타라 브라마Batara Brahma)와 비슈누(바타라 위스누Batara Wisnu)는 인드라(바타라 인드라), 바유(바타라 바유Batara Bayu) 등과 함께 바타라 구루의 자식으로 여겨졌다. 자바의 토착 신격 가운데는 시간을 신격화한 거대한 파괴의 신 '바타라 칼라'(Batara Kala)나 구름을 다스리는 교사들의 신 '바타라 삼부'(Batara Sambu), 달의 여신 '데위 라티'(Dewi Ratih)[42] 등이 있었다. 순다 지역에서 '냐이 포하치 상향 아스리'(Nyai Pohaci Sanghyang Asri)라는 이름으로 숭배된 쌀과 풍요의 여신 역시 자바 지역에서 '데위 스리'(Dewi Sri)로 숭배되었다. 후대의 마타람 술탄국(1587–1755) 시대부터 유명해진 남해의 여신 '냐이 라라 키둘'(Nyai Rara Kidul, 마타람과 그 계승국인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군주들의 상징적 배우자)과 북해의 여신 '데위 란자르'(Dewi Lanjar) 역시 그 원형은 마타람 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자바의 여러 왕국에서는 종파에 따라 다양한 연례 행사가 거행되었다. 마자파힛 시대에 번성한 수도 마자파힛에는 시바파 힌두교뿐 아니라 불교, 비슈누파 힌두교 사원과 성직자가 존재하였으며, 이미 14세기에 수도 마자파힛에는 이슬람교도가 상인 또는 주민으로서[43] 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 목적으로 출가하여 수도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양한 남성과 여성 수도자회가 있었고, 일시적인 수도 생활을 끝내고 속세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자바 지역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일상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문헌이 작성되고 공예품, 석상, 테라코타 등의 유물이 만들어졌는데, 이에 기반하여 오늘날 의복, 관습, 예법, 의례 등에서 결혼과 섹슈얼리티와 같은 주제에 이르기까지[44] 중세 자바인의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다.
최근에는 여성사 측면에서도 자바 고대사 및 중세사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결혼 관계에 있는 여성이 남편과 독립적으로 경제권을 갖는 경우는 흔했는데, 고대의 자바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에 자바[45]에서 반포된 한 칙령은 사망한 부인의 채무에 대해 무지한 남편은 부인의 부채를 대리 상환할 필요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고 한다.[46]

5.1. 산스크리트화


자바 문화권(자바, 마두라, 발리 및 수마트라 일부)의 고대사와 중세사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 중 하나는 산스크리트어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나, 자바어 문학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난 후 중세 무렵에 교양어의 지위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이는 가령 상좌부 불교의 성전어 팔리어가 근대 초기까지도 토착어와 함께 단순 교양어가 아닌 실질적 문어로 사용된 미얀마스리랑카의 사례와는 대조적이다.
분명 4세기부터 몇 세기 동안 인도네시아 군도(자바, 남서부 및 동부 보르네오, 남부 및 서부 수마트라, 발리)와 말레이 반도(주로 크다 지역)에서 출토된 비문의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인 경우가 많았고, 종교적 목적으로 산스크리트어 문헌도 다수 군도로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많지 않지만, 자바에서는 자생적인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비문이 아닌 서적의 형태로도 어느 정도 작성되었다.
그러나 9세기 말부터 13세기 말 중부, 동부 자바에서는 고대 자바어가 문어로서 공적, 사적 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사용되며 산스크리트어의 입지를 대체해 간 것으로 보인다. 자바어 문학은 이 시기에 산스크리트 문학의 모방과 내적 혁신을 거쳐 융성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지역의 비문에 자바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는 사례는 극히 희귀해졌으며 특히 산스크리트어 단독으로 쓰인 사례는 찾기 어렵다. 1280–1460년경, 즉 싱하사리 왕국 후기와 마자파힛 제국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비문에 다시 산스크리트어가 어느 정도 쓰였지만, 중세 자바어의 지위는 이미 공통 문어로서 확고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상대적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보다 많은 산스크리트어 비문이 출토된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캄보디아참파 왕국과도 대조적인 것으로, 요하네스 더카스파리스(Johannes Gijsbertus de Casparis)의 1991년 추계에 따르면 당시까지 발굴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 고대 산스크리트 비문의 수는 산스크리트어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만 계산할 때 약 60기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약간의 만트라나 종교 논문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운문 형식이었다고 한다. 종교적, 학술적 목적의 산스크리트어 교육 자체는 계속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지만[47], 그 질에는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다. 가령 마자파힛 제국 시대의 자바어로 된 윙운피투 비문(Prasasti Wingun Pitu, Prasasti Waringin Pitu, 1447)에 삽입된 산스크리트어 운문은 순수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한 산스크리트어로 된 반면, 파가루융 왕국[48] 초기인 14세기 수마트라 서부에서 파가루융의 창업 군주 아디탸와르만에 대해 쓰인 비문의 산스크리트어는 문법이 맞지 않는 조악한 문장으로 쓰였다.[49]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도네시아 군도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은 문법적으로는 흠결이 없는 편이었으며, 많은 경우 산스크리트 작시법의 규칙까지 엄격하게 따르고 있었으므로 비문법성에 관한 한 파가루융계 초기 비문이 오히려 예외적인 편에 속한다.[50]

6. 통치 기구



6.1. 관료와 행정 단위


마자파힛 전성기인 하얌 우룩 황제 시대의 기록 《나가라크르타가마》에는 마자파힛의 관료 체계와 행정에 대해 상세한 묘사가 있다. 마자파힛의 황제는 여러 분야의 내정과 외정을 다루는 내각(Rakryan Mantri ri Pakira-kiran)의 보좌를 받아 집무하였으며, 이 외에 고위 황족이나 황자들로 구성된 관료단(Rakryan Mahamantri Katrini)도 있었다. 내각의 일원 가운데 '파티 하망쿠부미'(Patih Hamangkubhumi, '라크랸 마파티'Rakryan Mapatih라고도 함)는 특히 마자파힛의 고위 관료단을 총괄하는 대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고위 황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유사한 협의 기구 '바타라 삽타프라부'(Bhattara Saptaprabhu)도 있었다. 이 밖에 종교법관(Dharmmadhyaksa)과 종교 사무관(Dharmma-upapatti) 등 특별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료도 존재하였다.
수도 마자파힛에 거주하는 황제(마하라자)는 제국 전체를 다스렸으며, 제국 하위에는 여러 '나가라'(nagara, '나라')가 있었다. 나가라는 본토(나가라 아궁)에서는 공작 내지 지사(bhra)가 다스렸고, 속령에서는 왕(rajya, raja)이나 대영주(natha)가 다스렸다. 본토의 '나가라'는 대략 이슬람화 이후의 현(kabupaten)에 대응하는 '와텍'(watek)들로 분할되었으며, 각 와텍은 '위야사'(wiyasa)가 장으로서 다스렸다. 와텍 하위에는 '루라'(lurah)가 다스리는 '쿠우'(kuwu, 오늘날의 면kecamatan에 해당)가 있었고, 쿠우 하위에는 여러 마을(wanua)이 있어 촌장(thani)을 중심으로 하였다.

6.2. 본토 행정


[image]
[38] 하얌 우룩 시대에는 이미 싱하사리 왕국 등 13세기 자바계 세력들에 의해 스리위자야의 계승 세력인 다르마스라야 왕국이 약화되어 멸망 직전이었다.[39] 우리나라가 고려시대 말에 와서야 1380년 진포대첩에서 배에 화포를 장착하고 실제 해전에서 최초로 사용했던 기록을 본다면 사실상 인도네시아의 해군력이 앞섰고 우리나라보다 화포의 선박장착 시기도 최소 20년가량 앞선다는 말이 된다![40] 단순히 불교로만 한정하면 중국이 배제되지 않는다.[41] 이후 드막 술탄 트릉가나의 딸인 칼리냐맛 왕국의 큰차나 여왕(Ratna Kencana, 재위 1549–1579)이 40척의 즈파라 함대를 이끌고 조호르 술탄국의 말라카 공격에 참여(1550)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큰차나 여왕은 1573–1574년에도 3개월을 이어진 아체 술탄국의 말라카 대포위 때 300척의 함대와 1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아체를 도왔으나, 결국 말라카 점령에는 실패하였다.[42] 찬드라와 별개이나, 데위 라티가 찬드라와 함께 숭배되기도 했다.[43] 오늘날 순례지 내지 여행지로 유명한 마자파힛(트로울란)의 트롤로요(Troloyo) 묘지에서는 14세기부터 매장된 19명의 무슬림 이름을 식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인도 태생의 이슬람 선교사 자말룻딘 후세인 알아크바르(Jamaluddin Hussein Al-Akbar)는 각지를 여행하다가 1376년에 마자파힛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44] 가령 마지막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Creese, Helen. ''Women of the Kakawin World''. New York: Routledge, 2015.[45] 논문에서는 단순히 "자바"라고만 하는데, 마타람 왕국 또는 순다 왕국 시대다.[46] Barbara Watson Andaya, "Studying Women and Gender in Southeast Asia,"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n Studies'' 4 I (2007): 113-136.[47] 고대와 중세 자바어에서 산스크리트어 외래어는 매우 폭넓게 쓰였으며, 당시 지적 엘리트 그룹에 속한 자바어 텍스트의 저자는 산스크리트어 교육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대 및 중세 자바어 텍스트 가운데에서도 산스크리트 문법서나 언어학을 다루는 몇 편의 글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인도 언어학을 계승한 자바의 언어학 전통은 인도에 비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그나마 이슬람화 이후 발전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전통 언어학 지식은 이슬람화 이후 19세기까지도 일부 계승되어 《츤티니》(Serat Centhini, 1814) 등에 인용되었다. (Bernard, Arps. "Indian influence on the Old Javanese linguistic tradition." in ''History of the language sciences: an international handbook on the evolution of the study of language from the beginnings to the present, vol.1'' (New York: Walter de Bruyter, 2000), 186-190.)[48] 자바 문화권의 끄트머리에 걸치는 곳으로 명목상으로는 마자파힛의 만차나가라(동질적 속령)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49] 일부 학자는 당시 군도에서 학술적, 종교적 목적으로 간략화된 산스크리트어가 범지역적으로 쓰이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파가루융 초기 비문의 조악한 산스크리트어는 교육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50] 이 절의 내용은 다음 논문에 기반하였다. De Casparis, Johannes Gijsbertus. "The use of Sanskrit in inscriptions of Indonesia and Malaysia." in ''Middle Indo-Aryan and Jaina Studies VII'' (Leiden: E. J. Brill, 1991), 29-46. 자바 및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작성된 산스크리트 문헌의 간단한 소개 및 고대와 중세 자바 문학의 형성에 미친 산스크리트 문학 전통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Suresh Chandra Banerji, ''A Companion to Sanskrit Literature''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9), 589-592.
마자파힛의 지배 지역은 자바 중동부의 본토(나가라 아궁Nagara Agung)와 기타 지역의 속령(이하 절에서 설명)으로 나뉘었다. 마자파힛의 본토 행정 체계는 기본적으로 마자파힛이 계승한 싱하사리의 행정 체계와 대동소이하였다. 본토는 공작 또는 지사(Bhra)가 다스리는 여러 지방으로 정연하게 분할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몇 단계를 거쳐 하위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본토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위 관직인 공작은 거의 라자사 황가의 황족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마자파힛 전성기인 14세기에는 수도 마자파힛을 중심으로 한 본토는 수도를 제외하고 12개의 지방으로 분할되었으며, 그 목록과 통치자의 명칭은 이하와 같다. 카후리판과 투마펠 등 핵심 지역의 공작으로 임명될 수 있는 것은 특히 최고위 황족뿐이었는데, 가령 트리부와나 황제는 재위(1328–1350)하기 전 1309–1328년간 카후리판 공작이었다.
지역명
설명
통치자
카후리판(Kahuripan)
과거의 장갈라(Janggala) 지역, 오늘날의 시도아르조(Sidoarjo)
카후리판 공(Bhre Kahuripan)
다하(Daha)
과거 크디리 왕국의 중심부
다하 공(Bhre Daha)
투마펠(Tumapel)
과거 싱하사리 왕국의 중심부
투마펠 공(Bhre Tumapel)
웡크르(Wengker)
오늘날의 포노로고(Ponorogo)
웡크르 공(Bhre Wengker)
마타훈(Matahun)
오늘날의 보조느고로(Bojonegoro)
마타훈 공(Bhre Matahun)
위라부미(Wirabhumi)
블람방안(Blambangan) 지방
위라부미 공(Bhre Wirabhumi)
파구한(Paguhan)

파구한 공(Bhre Paguhan)
카발란(Kabalan)
오늘날의 말랑현(Kabupaten Malang)[51]
카발란 공(Bhre Kabalan)
파와누안(Pawanuan)

파와누안 공(Bhre Pawanuan)
라슴(Lasem)
오늘날의 라슴, 름방(Rembang)
라슴 공(Bhre Lasem)
파장(Pajang)
오늘날의 수라카르타 인근
파장 공(Bhre Pajang)
마타람(Mataram)
오늘날의 욕야카르타 인근
마타람 공(Bhre Mataram)
이상의 체제는 가끔 변화하기도 하였는데, 가령 1447년의 윙운피투 비문(Prasasti Wingun Pitu)에 따르면 당시 공작이 있는 본토의 지방은 자가라가(Jagaraga), 싱하푸라(Singhapura)[52], 클링(Keling) 등을 포함하여 14개가 있었다고 한다[53]. 이를 보면 15세기에 발리(자가라가) 등 일부 속령(만차나가라)이 본토(나가라 아궁)로 편입되었으며, 동화의 정도에 따라 본토와 속령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3. 속령


이상에서 설명한 자바 중동부의 본토(나가라 아궁)에 속하지 않는 모든 지방은 마자파힛 제국의 속령으로 볼 수 있지만, 당대 마자파힛에서 속령은 엄밀히 말해 '만차나가라'(Mancanagara, 동질적인 속령)와 '누산타라'(Nusantara, 이질적인 속령)로 나뉘었다. 만차나가라는 자바 문화와의 동화 정도가 높은 속령이었고, 누산타라는 자바 문화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속령이었다. 만차나가라와 누산타라는 중앙에서 임명된 공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본토로 연공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러나 만차나가라에서는 마자파힛 중앙 정부가 보다 긴밀한 관리를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무역을 통제하며 세금을 걷기도 했고 때로 만차나가라로 지방 행정관을 파견하기도 했지만(지역의 영주는 누산타라처럼 토착 지배 가문이 그대로 세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산타라는 이와 같은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 대상이 아니었으며 마자파힛 정복 이전부터 내려온 가문의 지방 영주가 자치를 수행했고, 연공만 바치면 중앙 정부의 내정 간섭은 별로 없었다. 속령의 영주가 연공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반란으로 간주하여 원정군이 파견되었다.
14세기 전성기를 기준으로 마자파힛의 만차나가라 지역은 자바 서부, 마두라섬, 발리섬, 수마트라섬 일부(다르마스라야, 팔렘방, 툴랑바왕, 파가루융)가 있었다. 기타의 속령, 즉 술라웨시섬, 보르네오섬, 말루쿠 제도, 말레이 반도, 발리 동쪽의 소순다 열도의 속령은 모두 누산타라였다.

7. 법률: 《쿠타라마나와》


인도 전통의 《마누 법전》(Mānava Dharmaśāstra)은 고대부터 자바어로 《마누사나》(Manusana) 또는 《마누파데사》(Manupadesa, 마자파힛 시대의 명칭)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왔다. 자바에서는 《마누 법전》에서 갈라져나온 토착 법률 전통이 점차 형성되어 갔는데, 대표적인 문헌으로 적어도 12세기부터 《스마라다하나》 등 타 문헌과 비문에 언급되는 《쿠타라마나와》(Kutaramanawa)라는, 《마누 법전》에 바탕하였지만 단순 번역에 그치지 않는 자바어 법전이 있었다. 《쿠타라마나와》라는 이름의 문헌들은 여러 차례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12세기 이래 마자파힛 시대[54]까지 자바에서 확실한 법적 권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타라마나와》는 기본적으로 인도 전통의 법전 다르마샤스트라의 일종이며, 오늘날 남은 것으로 다양한 판본이 있다. 《쿠타라마나와》로 불리는 문헌 외에도 고대와 중세 자바에서는 다양한 서적과 칙령, 비문 등의 형식으로 법률 문서가 다수 작성되었으며, 방대한 전근대 자바어 필사본 더미에서 이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마자파힛이 멸망한 후 드막 술탄국과 마타람 술탄국의 법률 체계는 점차 샤리아의 요소를 많이 도입해 나갔지만 마자파힛 법률 전통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자파힛의 힌두 문화를 계승한 발리에서는 19세기까지도 《쿠타라마나와》 등 중세 자바 전통에 기반한 법률 체계가 정착하고 정교화되며 사용되었다.[55]
오늘날 구할 수 있는 《쿠타라마나와》의 가장 흔한 판본은 275개 항목으로 된 것(모두가 규정인 것은 아님)으로, 용커르(J. J. Jonker)가 레이던 대학교가 연구용으로 취득한 발리의 고대와 중세 자바어 필사본 더미에서 발견한 것(1876년, LOr 2215)을 1885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고 편집하여 유럽 동양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다. 용커르가 번역한 서적의 표지에는 '쿠타라마나와'가 아니라 단순히 '아가마'(agama)라는 단어만 적혀 있었지만, 다른 판본의 《쿠타라마나와》(오늘날 적어도 10종 내외의 판본이 있다)와 내용이 유사 또는 일치한 것으로 보아 《쿠타라마나와》의 일종임은 분명하다. 이 판본의 《쿠타라마나와》는 인도의 본을 따라 사성 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체계를 사회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으로 서술하였고, 이어 다방면에 걸친 법률 규정을 나열하였다. 《쿠타라마나와》의 조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형법에 해당하는 범죄와 처벌을 규정한 부분이지만, 민법상법, 즉 재산과 거래, 상속, 결혼, 이혼에 관한 조항도 다수 있다. 대략 항목별로 묶어 정리하면 각 항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각종 벌금에 관한 규정
  2. 여덟 종류의 살인과 그 처벌
  3. 노예의 처우
  4. 여덟 종류의 절도와 그 처벌
  5. 협박
  6. 상거래
  7. 저당
  8. 대금 지불
  9. 지참금
  10. 결혼
  11. 성범죄
  12. 상속
  13. 모욕
  14. 상해
  15. 과실
  16. 싸움
  17. 토지
  18. 명예훼손
조항의 일부를 발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56] "53. 절도를 저지른 자나 저질러진 절도를 사주한 자에게는 재판관이 국왕을 대리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한 자의 재산은 압류되며, 가족들은 구류에 처하고 가족들에게 만 냥의 벌금을 부과한다. 절도범의 부인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절도범을 부추겼음이 판명되면, 부인도 함께 사형에 처한다."[57], "64. 출입 금지된 숲에서 사냥한 자는, 사냥에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4천 냥, 사냥에 성공했을 경우 8천 냥의 벌금을 부과한다. 성공한 경우 벌금에 더하여 사냥감 가치의 두 배를 추가로 배상해야 한다."
《쿠타라마나와》 및 다양한 자바어 중세 법률 문헌은 오늘날 다양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군도, 나아가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힌두 법률 전통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자바어 외 다른 언어로 작성된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고전 법전으로는 15세기 전반에 믈라카 술탄국에서 작성된 말레이어로 된 《믈라카 법전》(Undang-Undang Melaka)이 유명하지만 이것은 이슬람화 이후에 성립된 것이며, 자바어 외 도서부 동남아시아 언어로 된 이슬람 이전 법률 서적으로는 2021년 현재 14세기의 《니티사라사무차야》(Nītisārasamuccaya, 말레이어)[58] 등 극소수만이 현존한다. 그나마 자바어와 말레이어 외 순다어 등 다른 언어로는 15세기 이전에 단편적인 기록들 외에 서적의 형태로는 법률 문헌을 찾기 어렵다.

8. 군주 목록


여성 군주의 경우 (女)로 표기. 황제가 아닌 집권자의 경우에는 (*) 표기.
황제명
별명/칭호
재위 기간
라덴 위자야
크르타라자사 자야와르다나Kertarajasa Jayawardhana
1293–1309
칼라가멧Kalagamet
스리 자야나가라Sri Jayanagara
1309–1328
스리 기타르자Sri Gitarja(女)
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Tribhuwana Wijayatunggadewi
1328–1350
하얌 우룩Hayam Wuruk
스리 라자사나가라Sri Rajasanagara
1350–1389
위크라마와르다나Wikramawardhana

1389–1429
수히타Suhita(女)
댜 아유 큰차나 웅우Dyah Ayu Kencana Wungu
1429–1447
크르타위자야Kertawijaya
브라위자야 1세Brawijaya I
1447–1451
라자사와르다나Rajasawardhana
브라위자야 2세
1451–1453

공위 시대
1453–1456
기리샤와르다나Girishawardhana[59]
브라위자야 3세
1456–1466
수라프라바와Suraprabhawa[60]
브라위자야 4세
1466–1468[61]–1474
크르타부미 공Bhre Kertabumi
브라위자야 5세
1468–1478
기린드라와르다나Girindrawardhana[62]
(관습적으로) 브라위자야 6세[63]
1478–1498[64] 또는 1527?[65]
프라부 우다라Prabu Udara(*)[66]
파티(Patih)[67] 또는 (드물게 오해로) 브라위자야 7세
1498–1517[68] 또는 1518

9. 참고 문헌


  • 가종수. 2014. 자바의 사원과 유적. 서울: 주류성출판사.
  • 양승윤. 2005. 인도네시아사. 서울: 대한교과서.
  • Cœdès, George. 1968.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 Munoz, Paul Michel. 2006.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Singapore: Editions Didier Millet.
  • Shaffer, Lynda Norene. 1996. Maritime Southeast Asia to 1500. London: ME Sharpe Armonk.
  • "Indonesia, The Majapahit Era", Encyclopædia Britannica.

[51] 오늘날의 블리타르현(Kabupaten Blitar) 일부도 포괄하였을 수 있음[52] 이 싱하푸라는 오늘날 싱가포르 지역에 해당하는 싱아푸라 왕국 지역이 아닌 자바 서부의 지명으로 보인다.[53] 완전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카후리판, 다하, 투마펠, 웡크르, 마타훈, 위라부미, 카발란, 큼방즈나르(Kembang Jenar, 라슴), 파장, 자가라가, 클링, 클링가푸라(Kelinggapura), 싱하푸라, 탄중푸라(Tanjungpura).[54] 《나가라크르타가마》와 14세기의 다양한 마자파힛 비문에서 《쿠타라마나와》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55] 발리에서 자바식 힌두 법률 전통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Helen Creese, "Old Javanese legal traditions in pre-colonial Bali," ''Bijdragen tot de Taal-, Land- en Volkenkunde'' 165 no.2-3 (2009): 241-290.[56] 조항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쿠타라마나와》의 영역 발췌 일부를 중역하였다. (링크) 링크에는 일부만 제시되어 있지만, 《쿠타라마나와》 자체는 영어로 완역되어 있다.[57] 이어지는 조항들에서 무거운 벌금으로 사형을 피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절도범은 기본적으로 매우 무거운 벌금에 더해 훔친 물건 값의 두 배를 배상해야 한다.[58] 수마트라 서부 크린치(Kerinci)에서 발견된 것으로, 오늘날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다르마스라야 왕국 또는 파가루융 왕국 초기의 법령집이다.[59] Girisyawardhana로도 씀[60] 싱하위크라마와르다나 또는 판단살라스 공Bhre Pandansalas[61] 마자파힛 분열.[62] 라나위자야Ranawijaya[63] 라나위자야가 이전의 브라위자야 5세까지와 마찬가지로 '브라위자야'라는 이름을 자칭했는지에 대한 엄격한 문헌 증거는 없으나, 현대 자바인들은 라나위자야를 브라위자야 6세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브라위자야의 이름은 5세로 끝났다고 설명하기는 하지만, 본문 주석에서 소개한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를 비롯하여 라나위자야 집권기에도 '브라위자야'의 이름이 적어도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64] 우다라의 쿠데타로 명목상의 군주로 남게 됨[65] 마자파힛 멸망[66] 1498년의 쿠데타로 라나위자야에게서 실권을 빼앗았으나, 스스로 제위에 올랐거나 오르려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동방지》에 따르면 적어도 1513년에는 군주가 아닌 파티(대재상)의 위치에서 실권을 행사하였다.[67] 대재상.[68] 사실상 이 시점에서 마자파힛 붕괴. 이후 잔존 마자파힛 강역은 드막 술탄국의 파티 우누스(Pati Unus, 재위 1518–1521)와 트릉가나(Trenggana, 재위 1521–1546)를 거치며 드막 술탄국에 흡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