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트 제도
오스만어 ملت سیستهمی
터키어 Millet Sistemi
오스만 제국 고유의 행정제도로 제국 내에 거주하는 서로 다른 문화, 종교 정체성을 가진 신민(Reaya)들을 각자의 종교 공동체가 맡아 자치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제2대 칼리파 우마르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1] . 쿠란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에 대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박해하지 않는 경우 평화와 공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물리적으로 박해할 경우에 한해 지하드(성전)을 벌일 수 있고[2] , 지하드 시 3가지 조건을 비무슬림에게 제시하는데 첫째 무슬림으로 개종, 둘째 지즈야를 납부하고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받던가 이 둘다 싫으면 전쟁을 통해 모든 사람[3] 과, 재산이 무슬림으로 귀속된다고 코란에 명시되어 있다.[4] 우마르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도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리스도교의 5대 총주교구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이슬람 제국 안에 다수의 비무슬림과 소수의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황에 이르자 다수의 비무슬림들을 회유하고, 이들 가운데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무슬림에게는 일종의 보호세인 지즈야를 납부하도록 하되, 이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경우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에 이러한 전례를 들어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룸인), 유대인과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바인에 대해 지즈야를 내는 조건으로 기존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도록 했다. 단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제도하에서 자치를 누리는 비무슬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들을 활용했다. 만약 각자의 밀레트 내에서 반란이나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우선적으로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선거로 선출되는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선거에 개입해 정권에 맞는 인사를 내게 하거나, 파디샤가 직접 임명하는 무슬림 최고지도자 (셰이훌 이슬람 - Şeyh-ûl İslam)의 경우 직접 해임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역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의 목록을 보면 같은 인물이 여러번 임기를 맡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심지어 중한 상황인 경우 종교지도자의 목을 문자 그대로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정교회 밀레트의 최고지도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Πατριάρχης Γρηγόριος Ε΄)의 경우 "황제께 충성하지 않고 반란질이나 하는 저 역적들은 무신론적인 세속주의자들일 뿐이니 우리 신자들 중 역적패당에 가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파문하겠다." 라고 선포까지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전통상(...) 밀레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선종 후 그리고리오스 5세는 정교회에 대한 이슬람의 탄압의 상징이 되어 시성되어 현재는 아테네의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좌 성당인 미트로폴레오스 성당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5][6]
처음 밀레트 제도는 지금의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도시를 대상으로 했다. 흔히 이슬람, 정교회, 유대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가 잘 알려져있지만, 제국이 확장되면서 더 다양한 종교와 문화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이 제국에 포함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들에게도 세분화해 자치를 인정했다. 콥트교, 시리아 정교회 등의 오리엔트 정교회와, 아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프랑크족로 싸그리 묶여 분류되었던 로마 가톨릭 신자[7] 등도 각각의 밀레트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원칙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와 일치한 칼데아 가톨릭, 시리아 가톨릭 등 동방 가톨릭 교회와 극소수였던 개신교 인구도[8][9] 도 독자적인 밀레트가 있었다.
밀레트 제도 하에서 각 민족[10] 들은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민사소송을 진행했고, 세금 또한 각각의 교회에 납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정교회 밀레트의 경우 파디샤와 내각이 올해의 세금할당량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전달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이를 각 교구에 나눠서 할당하고, 각 교구는 이 세금에 교회 십일조를 추가해서 정교회 밀레트에게 속한 신민들로부터 거두고 각자 할당된 세금을 이스탄불에 보낸 다음, 남은 세금은 교회살림, 자선사업을 위해 활용하는 식의 구조이다.
밀레트 제도 하에서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각각 출신종교에 따라 직업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탄지마트 이전에는 무슬림만이 의무병제도에 징집되고, 고위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군부에는 튀르크인, 쿠르드인, 알바니아인 같은 무슬림이 많았고,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한 정교회 밀레트에서는 바다일을 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 많았다. 개중에는 오스만 제국이 뒤를 봐주는 해적들도 많았으며, 16-18세기까지 에게해는 이들의 천국이었다.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지금의 파키스탄과 이란, 발칸 반도, 이집트를 망라하는 대규모 무역망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에서와 같이 유대인들은 대부업에도 종사했으며, 오스만 황실조차도 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꾸거나, 유대인들을 이용해 은행업을 하기도 했다. [11] 밀레트 제도하에서 각 공동체의 다른 문화, 종교법을 유지했는데, 각각의 밀레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법이나 금지하는 법, 예를들면 가톨릭의 이혼문제나 앞서 언급한 이슬람의 이자대출금지 문제등을 해결하기 위해 그 밀레트에 속하지 않음에도 다른 밀레트의 재판관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당시의 생활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밀레트 제도하에서 각 종교 신자들은 각자의 종교법을 존중받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서 금지하는 술을 마시거나, 팔 수 없었고, 위반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정교회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유대교 신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파는 것이 모두 합법이었으며 전혀 문제가 없었다.19세기까지 이스탄불에서는 구 테오도시오스 성벽 내의 구시가지 중부와 동부에는 무슬림이, 남부에는 아르메니아인이, 북부와 서부에는 정교도가 거주했는데, 무슬림이든 비무슬림이든 각자의 구역에 방문하는 것은 자유였기 때문에 무슬림들 중에서 비무슬림 구역으로 넘어가 거기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슬람법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불법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비무슬림 술집 주인은 자기 가게에서 술먹다가 뻗어버린 무슬림을 보면[12] 그 술집의 뒤를 봐주는 유력자(주로 예니체리들이 많았다.)나 동네 왈패들에게 연락해 취객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특히 그리스인의 사략선으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구시가지에서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지역 바로 근처에 항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밀레트에서는 "우리 애들이긴 한데, 술먹고 타락했으니 응당 벌을 받은거다" 샘치고 모른척 해줬다고(...) 그리고 이 술과 관련해서 예니체리들은 명목상으로는 개종한 무슬림이지만 실제로는 모태의 신앙을 몰래 간직하거나 예니체리들이 많이 가담한 종파인 벡타쉬파를 많이 믿었는데, 이들은 주류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종파라 이슬람 이맘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 예니체리들이 기득권세력으로 떠오른 16세기 이후에는 무슬림 주제에 술집을 하거나, 커피집이나 도박장을 운영하고, 시장 상인들에게서 자릿세 명목으로 삥을 뜯는 등 완전히 양아치집단이 되어버려 오랫동안 황제의 골치를 썩였다.
오스만 제국을 이슬람 제국, 혹은 서구 제국주의식 식민제국이라 규정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밀레트 제도에 있다.
원칙적으로 밀레트 제도는 해당 구성원의 종교에 기반했기 때문에 모국어가 그리스어이든, 터키어이든, 세르비아어나 아랍어이든 정교회 교도기만 하면 룸 밀레트에 속하고, 콥트교 신자면 콥트 밀레트에 속하고, 마찬가지로 모국어가 터키어든, 아랍어든, 알바니아어든 무슬림이면 무슬림 밀레트에 속했다. 오스만 제국 전체 역사를 볼 때, 이 밀레트간의 이동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비무슬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에도 애초에 밀레트가 다르면 동족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마을도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향촌의 경우 마을단위로 개종을 했으면 했지, 개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해 밀레트를 옮기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13] 개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해당 개인의 모든 관계, 즉 혈족, 친족, 마을 공동체를 모두 버리고 완전히 낯선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슬림 밀레트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애초에 이슬람 교리 상 이슬람을 버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했다.
정교회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일화에서도 나오지만, 일리아스 아르두니스는 지즈야를 면제받기 위해 꼼수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한 그리스인 마을 출신으로, 무스타파라는 무슬림 이름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토스를 여행했을 때 겪은 신비적인 체험으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신앙을 찾았고, 8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친한 튀르크인 군인이 "이보게 무스타파, 자네 어딜 그리 다녀왔나?" 라고 묻는데 "나는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일세." 라고 말한 것 때문에 마을의 관리들이 그를 법정에 세우고 배교혐의로 처형시킨다. 정교회의 일대기에서는 그 후 기적이 일어나 일리아스의 시신이 썩지않고 광채를 발하는 것을 보고 놀란 무슬림인척 하던 마을사람들이 단체로 믿음을 회복하고, 일리아스의 친구인 튀르크 군인을 비롯한 일부 무슬림마저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경우 이러하게 무슬림인 척 해서 비무슬림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으려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에 시성된 경우이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사는 동네이기도 하고(...) 애초에 오스만 제국 황실은 제국의 권위와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나 관심이 있었지, 사회적 통제 수단으로서 종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황실을 위협하는 광신도나 극단주의 설교자들을 조졌으면 조졌지, 이슬람을 버렸다고 조지는 경우는 정말로 해당 인물이 반란이나 쿠데타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당대의 오스만인들은 일종의 보험차원으로 무슬림이면서 성당에 나간다거나, 그리스도인이면서 무슬림인척 하거나 하는 등 여러개의 종교를 갖는 것도 흔했다. 또한 세금 때문에라도 신민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는데, 비(非)무슬림이 내는 세금이 무슬림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 따라서 신민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려면 국가 재정이 큰 타격을 입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그 외에도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정교회 신자가 상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샤리아법 대로 행한다거나,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등[14] 매우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양상을 보여줬다.
정치적으로도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역사학자들은 흔히 '고전기'라 부르는 16세기 기준으론 주로 정교회 계열 기독교 피지배민들은 관료, 예니체리 후보생, 납세자, 상인으로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인재들이었고, 정교회권 피지배민들도 이때만 하더라도 4차 십자군이 상징하는 동로마 제국 말기의 위기를 틈타 발칸 반도 일대까지 가톨릭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같은 기독교인'들의 패권주의적 탐욕을 똑똑히 기억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빌려 전 시대 라틴 제국 시절 들어왔던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을 쫒아내며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상당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반면 소위 '정통 무슬림'들이 많이 살던 아나톨리아 내륙, 동부 지방에는 여전히 (오스만 중앙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지방에 할거했던)튀르크 유목 부족들의 영향력도 강력했고, 데브시르메 제도의 부상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기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쩌리가 된 이들은 당국과 사이도 안 좋아 카리스마적인 반정부 성향 수피의 선동과 함께 이웃 적성 열강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란을 종종 일으켜 16-17세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말도 잘듣고 국가에 공헌도 많은 반면 같은 무슬림인 튀르크, 아랍 유목민들은 하등 도움도 안되면서 말썽은 엄청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단 이러한 모습도 19세기에 이르면 변하기 시작하는데, 민족주의 시대 이후 각각의 종교 공동체들이 자신의 혈통적, 언어적,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해 떨어져나가거나, 서구의 선교로 인해 기존의 종파를 버리고 다른 종파로 이동하는 현상이 자주 보였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 서구열강과의 우호관계를 원하는 정부에 의해 선교행위를 막지 말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부분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정교도 같이 기존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선교의 대상이었으며, 일부 무슬림들도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밀레트 제도는 의외로 오랜 기간 존속했는데, 1909년 제2차 입헌개혁[15] 까지 존속했다. 1910년 7월 3일에 오스만 제국은 신헌법을 발표하면서 1876년 압뒬하미트 2세시기에 공포된 미트하트 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하는 조항'''을 갱신했으며, 추가로 '''각 교회에 대한 법령''' (Kiliseler Kanunu)을 제정했다. 해당 법의 핵심은 '''갈등지역[16] 내의 교회, 학교, 성지는 해당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쪽에 귀속된다'''[17] 이다.
민족주의의 시대에 들면서 오스만 제국을 구성하던 밀레트들은 각각의 민족정체성을 종교가 아닌 문화 및 언어에서 찾기 시작했고, 대표적으로 정교회 공동체로 함께 묶이던 룸 밀레트(Rum Milleti)가 현대의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이 독립하고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자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에서 점차 무슬림+튀르크인 다수의 단일민족국가화 되는 현상이 벌어졌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인 '청년 튀르크당' (Jön Türkler)은 이 판세를 굳히기 위해 저런 법을 만든 것이다. 1912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조사 통계를 보면, 이미 현대의 터키 공화국에 속하는 아나톨리아 반도 어느 지역이든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법의 제정명분 자체는 당시 비무슬림 밀레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던 룸 밀레트(정교회)가 소수 그리스도교 종파들을 흡수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오스만 제국 내 비무슬림 전체에 대한 소외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터키어 Millet Sistemi
1. 개요
오스만 제국 고유의 행정제도로 제국 내에 거주하는 서로 다른 문화, 종교 정체성을 가진 신민(Reaya)들을 각자의 종교 공동체가 맡아 자치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2. 기원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제2대 칼리파 우마르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1] . 쿠란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에 대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박해하지 않는 경우 평화와 공존, 무슬림이 소수인 사회에서 무슬림을 물리적으로 박해할 경우에 한해 지하드(성전)을 벌일 수 있고[2] , 지하드 시 3가지 조건을 비무슬림에게 제시하는데 첫째 무슬림으로 개종, 둘째 지즈야를 납부하고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받던가 이 둘다 싫으면 전쟁을 통해 모든 사람[3] 과, 재산이 무슬림으로 귀속된다고 코란에 명시되어 있다.[4] 우마르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도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리스도교의 5대 총주교구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이슬람 제국 안에 다수의 비무슬림과 소수의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황에 이르자 다수의 비무슬림들을 회유하고, 이들 가운데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비무슬림에게는 일종의 보호세인 지즈야를 납부하도록 하되, 이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경우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에 이러한 전례를 들어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룸인), 유대인과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바인에 대해 지즈야를 내는 조건으로 기존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도록 했다. 단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제도하에서 자치를 누리는 비무슬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들을 활용했다. 만약 각자의 밀레트 내에서 반란이나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우선적으로 각 종교의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선거로 선출되는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선거에 개입해 정권에 맞는 인사를 내게 하거나, 파디샤가 직접 임명하는 무슬림 최고지도자 (셰이훌 이슬람 - Şeyh-ûl İslam)의 경우 직접 해임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역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의 목록을 보면 같은 인물이 여러번 임기를 맡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심지어 중한 상황인 경우 종교지도자의 목을 문자 그대로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정교회 밀레트의 최고지도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Πατριάρχης Γρηγόριος Ε΄)의 경우 "황제께 충성하지 않고 반란질이나 하는 저 역적들은 무신론적인 세속주의자들일 뿐이니 우리 신자들 중 역적패당에 가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파문하겠다." 라고 선포까지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전통상(...) 밀레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선종 후 그리고리오스 5세는 정교회에 대한 이슬람의 탄압의 상징이 되어 시성되어 현재는 아테네의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좌 성당인 미트로폴레오스 성당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5][6]
3. 내용
처음 밀레트 제도는 지금의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도시를 대상으로 했다. 흔히 이슬람, 정교회, 유대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밀레트가 잘 알려져있지만, 제국이 확장되면서 더 다양한 종교와 문화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이 제국에 포함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들에게도 세분화해 자치를 인정했다. 콥트교, 시리아 정교회 등의 오리엔트 정교회와, 아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프랑크족로 싸그리 묶여 분류되었던 로마 가톨릭 신자[7] 등도 각각의 밀레트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원칙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와 일치한 칼데아 가톨릭, 시리아 가톨릭 등 동방 가톨릭 교회와 극소수였던 개신교 인구도[8][9] 도 독자적인 밀레트가 있었다.
밀레트 제도 하에서 각 민족[10] 들은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민사소송을 진행했고, 세금 또한 각각의 교회에 납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정교회 밀레트의 경우 파디샤와 내각이 올해의 세금할당량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전달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이를 각 교구에 나눠서 할당하고, 각 교구는 이 세금에 교회 십일조를 추가해서 정교회 밀레트에게 속한 신민들로부터 거두고 각자 할당된 세금을 이스탄불에 보낸 다음, 남은 세금은 교회살림, 자선사업을 위해 활용하는 식의 구조이다.
밀레트 제도 하에서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은 각각 출신종교에 따라 직업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탄지마트 이전에는 무슬림만이 의무병제도에 징집되고, 고위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군부에는 튀르크인, 쿠르드인, 알바니아인 같은 무슬림이 많았고,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한 정교회 밀레트에서는 바다일을 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 많았다. 개중에는 오스만 제국이 뒤를 봐주는 해적들도 많았으며, 16-18세기까지 에게해는 이들의 천국이었다.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지금의 파키스탄과 이란, 발칸 반도, 이집트를 망라하는 대규모 무역망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에서와 같이 유대인들은 대부업에도 종사했으며, 오스만 황실조차도 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꾸거나, 유대인들을 이용해 은행업을 하기도 했다. [11] 밀레트 제도하에서 각 공동체의 다른 문화, 종교법을 유지했는데, 각각의 밀레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법이나 금지하는 법, 예를들면 가톨릭의 이혼문제나 앞서 언급한 이슬람의 이자대출금지 문제등을 해결하기 위해 그 밀레트에 속하지 않음에도 다른 밀레트의 재판관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당시의 생활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밀레트 제도하에서 각 종교 신자들은 각자의 종교법을 존중받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서 금지하는 술을 마시거나, 팔 수 없었고, 위반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정교회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유대교 신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파는 것이 모두 합법이었으며 전혀 문제가 없었다.19세기까지 이스탄불에서는 구 테오도시오스 성벽 내의 구시가지 중부와 동부에는 무슬림이, 남부에는 아르메니아인이, 북부와 서부에는 정교도가 거주했는데, 무슬림이든 비무슬림이든 각자의 구역에 방문하는 것은 자유였기 때문에 무슬림들 중에서 비무슬림 구역으로 넘어가 거기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슬람법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불법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비무슬림 술집 주인은 자기 가게에서 술먹다가 뻗어버린 무슬림을 보면[12] 그 술집의 뒤를 봐주는 유력자(주로 예니체리들이 많았다.)나 동네 왈패들에게 연락해 취객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특히 그리스인의 사략선으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구시가지에서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지역 바로 근처에 항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밀레트에서는 "우리 애들이긴 한데, 술먹고 타락했으니 응당 벌을 받은거다" 샘치고 모른척 해줬다고(...) 그리고 이 술과 관련해서 예니체리들은 명목상으로는 개종한 무슬림이지만 실제로는 모태의 신앙을 몰래 간직하거나 예니체리들이 많이 가담한 종파인 벡타쉬파를 많이 믿었는데, 이들은 주류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종파라 이슬람 이맘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 예니체리들이 기득권세력으로 떠오른 16세기 이후에는 무슬림 주제에 술집을 하거나, 커피집이나 도박장을 운영하고, 시장 상인들에게서 자릿세 명목으로 삥을 뜯는 등 완전히 양아치집단이 되어버려 오랫동안 황제의 골치를 썩였다.
오스만 제국을 이슬람 제국, 혹은 서구 제국주의식 식민제국이라 규정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밀레트 제도에 있다.
4. 밀레트의 이동
원칙적으로 밀레트 제도는 해당 구성원의 종교에 기반했기 때문에 모국어가 그리스어이든, 터키어이든, 세르비아어나 아랍어이든 정교회 교도기만 하면 룸 밀레트에 속하고, 콥트교 신자면 콥트 밀레트에 속하고, 마찬가지로 모국어가 터키어든, 아랍어든, 알바니아어든 무슬림이면 무슬림 밀레트에 속했다. 오스만 제국 전체 역사를 볼 때, 이 밀레트간의 이동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비무슬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에도 애초에 밀레트가 다르면 동족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마을도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향촌의 경우 마을단위로 개종을 했으면 했지, 개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해 밀레트를 옮기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13] 개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해당 개인의 모든 관계, 즉 혈족, 친족, 마을 공동체를 모두 버리고 완전히 낯선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슬림 밀레트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애초에 이슬람 교리 상 이슬람을 버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했다.
정교회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일화에서도 나오지만, 일리아스 아르두니스는 지즈야를 면제받기 위해 꼼수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한 그리스인 마을 출신으로, 무스타파라는 무슬림 이름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토스를 여행했을 때 겪은 신비적인 체험으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신앙을 찾았고, 8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친한 튀르크인 군인이 "이보게 무스타파, 자네 어딜 그리 다녀왔나?" 라고 묻는데 "나는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일세." 라고 말한 것 때문에 마을의 관리들이 그를 법정에 세우고 배교혐의로 처형시킨다. 정교회의 일대기에서는 그 후 기적이 일어나 일리아스의 시신이 썩지않고 광채를 발하는 것을 보고 놀란 무슬림인척 하던 마을사람들이 단체로 믿음을 회복하고, 일리아스의 친구인 튀르크 군인을 비롯한 일부 무슬림마저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의 경우 이러하게 무슬림인 척 해서 비무슬림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으려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에 시성된 경우이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사는 동네이기도 하고(...) 애초에 오스만 제국 황실은 제국의 권위와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나 관심이 있었지, 사회적 통제 수단으로서 종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황실을 위협하는 광신도나 극단주의 설교자들을 조졌으면 조졌지, 이슬람을 버렸다고 조지는 경우는 정말로 해당 인물이 반란이나 쿠데타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당대의 오스만인들은 일종의 보험차원으로 무슬림이면서 성당에 나간다거나, 그리스도인이면서 무슬림인척 하거나 하는 등 여러개의 종교를 갖는 것도 흔했다. 또한 세금 때문에라도 신민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는데, 비(非)무슬림이 내는 세금이 무슬림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 따라서 신민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려면 국가 재정이 큰 타격을 입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그 외에도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정교회 신자가 상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샤리아법 대로 행한다거나,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등[14] 매우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양상을 보여줬다.
정치적으로도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역사학자들은 흔히 '고전기'라 부르는 16세기 기준으론 주로 정교회 계열 기독교 피지배민들은 관료, 예니체리 후보생, 납세자, 상인으로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인재들이었고, 정교회권 피지배민들도 이때만 하더라도 4차 십자군이 상징하는 동로마 제국 말기의 위기를 틈타 발칸 반도 일대까지 가톨릭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같은 기독교인'들의 패권주의적 탐욕을 똑똑히 기억하던 시절이라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빌려 전 시대 라틴 제국 시절 들어왔던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을 쫒아내며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상당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반면 소위 '정통 무슬림'들이 많이 살던 아나톨리아 내륙, 동부 지방에는 여전히 (오스만 중앙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지방에 할거했던)튀르크 유목 부족들의 영향력도 강력했고, 데브시르메 제도의 부상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기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쩌리가 된 이들은 당국과 사이도 안 좋아 카리스마적인 반정부 성향 수피의 선동과 함께 이웃 적성 열강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란을 종종 일으켜 16-17세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말도 잘듣고 국가에 공헌도 많은 반면 같은 무슬림인 튀르크, 아랍 유목민들은 하등 도움도 안되면서 말썽은 엄청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단 이러한 모습도 19세기에 이르면 변하기 시작하는데, 민족주의 시대 이후 각각의 종교 공동체들이 자신의 혈통적, 언어적,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해 떨어져나가거나, 서구의 선교로 인해 기존의 종파를 버리고 다른 종파로 이동하는 현상이 자주 보였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 서구열강과의 우호관계를 원하는 정부에 의해 선교행위를 막지 말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부분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정교도 같이 기존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선교의 대상이었으며, 일부 무슬림들도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5. 폐지
밀레트 제도는 의외로 오랜 기간 존속했는데, 1909년 제2차 입헌개혁[15] 까지 존속했다. 1910년 7월 3일에 오스만 제국은 신헌법을 발표하면서 1876년 압뒬하미트 2세시기에 공포된 미트하트 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하는 조항'''을 갱신했으며, 추가로 '''각 교회에 대한 법령''' (Kiliseler Kanunu)을 제정했다. 해당 법의 핵심은 '''갈등지역[16] 내의 교회, 학교, 성지는 해당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쪽에 귀속된다'''[17] 이다.
민족주의의 시대에 들면서 오스만 제국을 구성하던 밀레트들은 각각의 민족정체성을 종교가 아닌 문화 및 언어에서 찾기 시작했고, 대표적으로 정교회 공동체로 함께 묶이던 룸 밀레트(Rum Milleti)가 현대의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이 독립하고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자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에서 점차 무슬림+튀르크인 다수의 단일민족국가화 되는 현상이 벌어졌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인 '청년 튀르크당' (Jön Türkler)은 이 판세를 굳히기 위해 저런 법을 만든 것이다. 1912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조사 통계를 보면, 이미 현대의 터키 공화국에 속하는 아나톨리아 반도 어느 지역이든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법의 제정명분 자체는 당시 비무슬림 밀레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던 룸 밀레트(정교회)가 소수 그리스도교 종파들을 흡수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오스만 제국 내 비무슬림 전체에 대한 소외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산 제국의 황제 야지게르드 1세의 종교 정책에서 기원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제국의 황제였음에도 기독교에도 관대하여 기독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후 사산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그 제도와 정책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이슬람 제국이 종교별로 공동체를 조직하는 제도를 유지했다는 것. 즉, 데브시르메와 맘루크의 관계 처럼 이것도 오스만 제국이 없는 제도를 만들어낸게 아니라 기존 이슬람 교리에 있던걸 재포장한 것이다[2] 방어적, 공격적 지하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전쟁의 명분이라는건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무슬림들이 지하드를 선포할 때에도 기존의 역학관계를 파고들어 - 예를들어 비무슬림들의 요청, 동맹국에 대한 공격에 대한 개입, 무슬림에 대한 사소하든 크든 상관없이 박해가 행해진 경우 등등의 명분을 찾아냈기 때문이다.[3] 노예를 말한다. 단 이슬람 교리상 노예는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즉시 해방되어야 하며, 노예와의 성관계 또한 해방시켜 결혼하지 않는 이상은 금지다.[4] 너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적들에게 도전하되 그러나 공격하지 마라 하나님은 공격하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시니라.(바카라장 190절), 비록 싫어하는 것이지만 너회에게 성전이 허락되었노라. 그러나 너회가 싫어해서 복이 되는 것이 있고 너회가 좋아해서 너희에게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하나님은 너회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바카라장 216절)[5] 사실 한세기 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민족 종교급 위상을 지녔던 로마 가톨릭교회도 막상 정치적 스탠스는 오히려 당국의 편에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을 비난했고, 비슷한 시기 심지어 폴란드도 평사제들이 개인 자격으로 민족주의 혁명에 뛰어든 것과는 별개로 공식적인 스탠스는 "각 분할 통치 점령국의 정부에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이율배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혁명가들은 필요하면 재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산으로 숨어 들어 게릴라가 되면 되지만 교회 조직들은 신자들, 유서 깊은 성당 건물들, 유물들까지 싸들고 게릴라가 될 순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유는 명확하다. 위의 그리고리오스가 그리스 독립군에 대해 "저 역적 놈들에 가담하면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도 오스만 당국의 보복을 받을 것이 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리스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6] 하지만 총대주교의 처형은 오히려 오스만의 악수가 되었는데 총대주교가 처형당한 날이 하필이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로 기념하는 부활절이었고 그것도 부활절 기념 성찬예배를 보던 중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바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소식을 들은 그리스인들은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격분하였고 독립군은 자신들의 칼에 그리고리오스의 이름을 새겨 튀르크인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유럽 열강들 역시(특히 러시아) 총대주교의 처형에 거세게 항의함과 동시에 유럽 내 친 그리스 여론을 부채질하면서 독립의 불길은 전보다 더 거세게 불타오르게 된다.[7]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만 하더라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중대 교역 도시 알레포 등지에는 적지 않은 베네치아, 제노바 공화국, 토스토스카나등 이탈리아계 라틴 가톨릭 상인 커뮤니티가 살았고, 군사적 변경 지대인 현대 크로아티아-헝가리 일대에도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살았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공식적으로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관계니 대신 '''동맹국인 프랑스 대사가 명목상의 라틴 가톨릭 밀레트의 보호자도 겸했다'''[8] 주로 상술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분할점령-대치 상태인 헝가리에 많이 살았고, 그 다음으로 개인 단위로 무역이나 외교차로 온 북유럽인들도 좀 있었으며, 19세기 쯤 들어가면 미국,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 파견 온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소수나마 현지인 개신교 커뮤니티도 생기긴 했다.[9] 개신교의 경우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과 하나로 묶여 일괄적으로 프랑크인들로 분류됐지만 오스만 제국 측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대립을 인식하게 되면서 18세기쯤 따로 밀레트를 부여 받았다.[10]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극히 희미했고,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현대 터키어로 millet은 민족, 즉 서양의 nation 개념으로 받아들였고,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11] 이슬람에서는 원칙적으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오스만 황실은 유대인 어용상인들을 이용해 은행업을 하기도 했다.[12] 애초에 식별이 어렵지도 않다. 탄지마트 시기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각 밀레트마다 고유의 복장과 스타일을 고수했기 때문에 박박민 머리에다 터번이면 무슬림, 장발에다 터번이면 그리스인 식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13] 단 예니체리로 징집하기 위한 데브시르메 제도로 선출된 비(非)무슬림 아이들은 예외이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무슬림 교육을 받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4] 출처: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15] 청년 튀르크당에 의한 메흐메트 5세의 옹립시기[16] 각각의 종교공동체가 공존하며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지역[17] 원문: “ihtilaflı kilise, mektep ve mukaddes yerlerde hangi unsurun nüfusu çok ise ona aitt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