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서
'''"(야구) 오래 하고 볼 일이에요."'''
ㅡ 2012 준 플레이오프 1차전 MVP에 선정된 후 인터뷰에서.
1. 개요
전 롯데 자이언츠 소속 내야수이자 현 경일대학교 야구부 코치. 현재의 이름인 박준서는 2009년 개명한 이름으로, 개명 전 이름은 박남섭이다. 별명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활동한 역대급 스위치 히터 치퍼 존스에서 따온 '''치퍼준서'''.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광주동성고 시절에 제법 촉망받던 유격수였다. 다만 이때 같이 촉망받은 유격수들을 묶어 흔히 1981년생 3대 유격수라 하는데, 한명은 박기혁, 나머지 한 명은 '''김주찬'''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8]
3. 프로 선수 시절
[image]
2001년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망한 쌍방울의 선수단을 인수해서 막 시작한 SK의 얇은 선수층을 틈타 데뷔 시절부터 간간히 1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2002년 백골프의 취임과 함께 자신의 지시와 철학에 부합하지 않는 선수를 내치던 롯데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타격 폼의 문제로 백골프와 충돌하던 조경환이 트레이드될 때 트레이드 상대로 지목되어 외야수 윤재국, 외국인 투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와 함께 팀을 옮기게 되었다.(박준서+윤재국+페르난도 에르난데스↔조경환+대니얼 매기)
표정이 엄청나게 시크하다. 만사가 다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팬들은 의욕이 있는 거냐며 오해도 많이 받았다.[9] 물론 잘할 때는 차도남이라며 찬양받는다.
'''참고로 어떤 남자 배우와 묘하게 닮았다.'''
3.1. 인고의 시절
나름대로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성장이 정체되면서 주전 자리를 꿰차는 데 실패했다. 결국 주로 1군 백업과 2군을 오가는 선수가 되고 말았다. 특히 주전 2루수였던 조성환이 2004년 골절상으로 시즌 아웃된 데 이어 병역 비리로 3년의 공백을 가진 사이에도 결국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픈 대목. 2004년[10] 에는 한화 이글스의 송창식이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아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운도 약간 따르지 않았다.
주로 2군에서 많이 머물렀지만, 키스톤에 공백이 생길 때 자주 콜업되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통산 타율이 2할을 간신히 넘는데서 알 수 있는 안습의 타격, 모델 워킹 소리까지 듣는 성의없는 주루 등으로 인해 1군에 올라올 때마다 롯데 팬들에게 '''아주''' 많이 까였다. 그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등번호 16번[11] 을 배정받았다고 까였고, 2012년에는 등번호 7번[12] 을 배정받았다고 또 까였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절대''' 터지지 않을 유망주[13] 로 취급받았고, 박준서가 주전 나오는 상황이면 롯데는 그 시즌 망한거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
그래도 2할을 넘기기조차 버거운 타격 능력을 가지고 15년째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수비력. 젊었을 땐 1루 2루 3루 유격수까지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가치가 높았다. 따라서 경기 후반 대타 기용 후나 굳히기 상황에서 대수비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3루수와 유격수를 많이 봤으며 특유의 순발력과 유연성으로 잡기 어려운 타구를 귀신같이 처리해 팀 승리를 이끈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공격 일변도의 라인업을 선호했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조차 부임 첫 해 개막 엔트리에 박준서를 넣었을 정도.
다만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는만큼 한 포지션에 특화되지 못해 수비의 안정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30대를 접어들면서 타격 능력은 향상되었는데 수비력이 갈수록 퇴보하는 중. 특히 2012년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잇달아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팀을 탈락시킨 임팩트가 너무 큰 탓에, 수정되기 전 나무위키 박준서 문서에는 농담으로도 수비가 좋다고 하기는 힘들다는 서술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근래엔 거의 1루수와 2루수로만 기용되고 있다.[14]
3.2. 2012 시즌
그의 야구 인생 반전의 시즌.
3.3. 2013 시즌
'''본격 안타보다 타점이 더 많은 타자. 롯데 원탑 강심장. 크보 대타 끝판왕.'''
3.4. 2014 시즌
2014년 롯데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역대급 임팩트 없는 주장이자 롯데 역사상 최악의 주장.
5월 11일 경기에서 오랜만에 선발 출장했지만, 3회초 1사 1,2루 상황에서 김문호의 1루수 땅볼때 1루 주자였던 상태에서 진루 도중 갑자기 손을 들면서 공이 손목을 맞아 공이 빠지며 첫 득점이 나올 뻔했지만 NC 측에서 고의로 그런것 아니냐며 항의를 했고 결국 득점은 무효처리되고 수비방해로 아웃되었다. 김시진 감독과 박준서 본인은 고의가 아니었다고 항의를 했지만 판정을 뒤집진 못했다. 결국 팀은 후반에 큰 점수를 주며 지고 말았다. 다음날 박준서 본인은 1군에서 말소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 식빵 잘 구우시는 분께서 만세를 시전하신 게 임팩트가 커서 조용히 묻혔다.
이후 23일에 다시 1군에 등록되었다. 그러다 6월 25일 자로 전날 부상을 입은 문규현과 함께 다시 말소되었다. 편도선염 때문이라고. 이후 회복했는지 7월 5일에 다시 등록되었다. 대신 김문호가 말소.
부진을 거듭하며 양아들 소리를 듣고 있다. 선발로 출장하자 대타로 안봐서 좋다는 사람도 있을 지경.
2014년 10월 17일 김시진 감독 사퇴 파동과 맞물려 주장으로서 일대 홍역을 치루는 중이다.
박준서는 17일과 18일 이틀 간 최하진 사장과 면담을 갖고 지난 5월 권두조 코치 사퇴 파동에 얽힌 구단측과 오해를 풀고 사과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그런데 차기 감독으로 공필성 코치가 내정되었다는 카더라가 구단 안팎으로 돌기 시작하고, 결국 선수들이 집단으로 '''감독 임명 반대'''에 나서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졌다. 관련기사
26일 배재후 단장과 고참급 선수들이 만남을 가졌고, 다음날 박준서는 "선수들은 결단코 '공필성 감독 결사 반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감독·코치 선임은 선수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언론을 통해 진화에 나섰다. 관련기사
그런데 27일 밤 롯데 선수들이 회동을 갖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전 박준서의 언급에 대해서는 "선수들 전원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약속을 하면서 반박기사를 요구했다"며, 이문한 운영부장의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반발했다. 관련기사
당연히 기사를 접한 롯데 팬덤은 멘붕 중. 사장과 단장의 파워 게임도 부족해서 이제는 프런트가 선수들 사이도 이간질을 하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3.5. 2015 시즌
2015년 3월 11일 사직에서 열린 LG와의 시범경기에서 경기 종료 후 LG의 1차 지명을 받은 포수 유망주인 김재성 선수에게 욕설을 하였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다.
시범경기 이후 감감 무소식이었다가 6월 5일 김대륙, 김대우와 같이 1군에 올라왔다. 3경기 5타수 무안타. 그런데 이유는 모르지만 6월 9일쯤 2군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다시 감감 무소식이다.
시즌 후 11월 30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방출된 후 인터뷰 기사가 났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길어야 2년 반짝 활약했던 주제에 뭘 더 바라냐며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시즌 동안 보여준 게 거의 없기 때문에 타 구단 이적은 어렵다는 게 중론.
결국 현역에서 은퇴하고 2017년 부산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8년 상원고 코치로 옮겼고 2020년에는 새로 창단한 경일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이동했다.
4. 연도별 성적
5. 여담
- 과거 박남섭 시절 멋지게 쓰리런 홈런을 날리고 홈에 들어올 때 베이스를 밟기 전 자신의 배트를 줍는 과정에서 걷는 발을 멈추지 않아 자기가 들어올린 배트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빙구 에피소드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크게 흥하려고 하는 찰나 더 큰 흥행 떡밥이 발생하는 바람에 묻혔다.
-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차전 MVP 선정 후의 인터뷰에서 "올해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었는데 그만두려고 할 때 뭐가 오는구나, 오래하고 볼 일이에요"라는 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1군과 2군을 오가며 제대로 주전으로 자리잡지 못했고, 당시 본인 나이도 그리 적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은퇴를 생각했던 듯했다. 하지만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2012 시즌 활약이 대단했던 데다가 준 플레이오프를 팀의 승리로 이끈 선수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선수 생활을 좀더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 발이 빠른 편이라고 한다.
6. 관련 문서
[1] 개명 전 본명은 박남섭(朴南燮).[2] '''참고로 이 날 한국야구위원회가 설립되었다'''.[3] 주로 1루수와 2루수를 자주 맡았다. 가끔씩은 유격수나 3루수로 출전하기도 하며, 2013년 시즌 초반에는 외야 겸업을 했었다.[4] 원래는 우타였으며, 스위치 히터로 전향한 후 2014년부터 좌타로 전향한 아주 희귀한 케이스. 같은 예로는 KIA의 서동욱.[5] 박준서~ 워어어 박준서~ 워어어 박준서~ 롯데의 박준서(x2)[6] 윗 사진의 왼쪽 손목을 보면 염주를 차고 있고, 만(卍) 자가 걸린 목걸이를 차고 있다.[7] 이 당시엔 김주찬도 수비 준수하고(!) 발빠르고 타격 좋은 완전체에 가까운 유격수였다. 그런데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고 마음의 병이...[8] 다만 박준서는 당시 유급으로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 참여.[9] 인터뷰 스타일도 무지 털털하게 하는 거 보면 그냥 허허실실 스타일인 듯.[10] 타율은 2할 4푼대였지만 157타수동안 2루타 10개, 3루타 3개를 쳐내는 등 쏠쏠한 활약을 했다.[11] 박정태의 선수 시절 등번호다.[12] 전년도 문규현이 배정받았던 등번호다.[13] 라고 보기에도 힘든 1981년생[14] 2012년 인터뷰에서 자신은 3루수가 가장 편하고 유격수가 자신없다고 했다.[15] 그 전에도 김주찬은 감자튀김에 집착하는 에피가 몇 개 있었다. [16] 룸메 조성환은 반대로 달랑 성경책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