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2001년/신인드래프트
1. 개요
2001년 KBO 신인 드래프트 (공식 명칭: '''2001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는 1차 지명과 2차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2. 1차 지명
2000년 6월 5일까지 각 팀에서 팀별 연고지 내 고교 출신 선수 중 1명을 뽑았다.
3. 2차 지명
2000년 6월 15일 서울특별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최되었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 예정자, 상무 소속 선수들 등 총 695명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2]
3.1. 지명방식
1라운드부터 12라운드까지 진행되며 각 팀은 최대 12명의 선수를 지명할 수 있다. 단, 지명을 원치 않는 팀의 경우 해당 라운드에서 패스할 수 있다.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참여하면서 지명방식은 홀수 라운드에서는 지난 3시즌의 성적 역순대로, 짝수 라운드에서는 지난 3시즌의 성적대로 지명하는 방식이다.
3.2. 지명 결과
- ※표시는 지명권 포기나 대학 진학으로 인한 지명권 소멸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은 선수.
- @표시는 고졸로 지명받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대학 진학 후 중도하차한 선수.
- 볼드표시는 통산 war이 스탯티즈 기준 2 이상 되는 선수한테 부탁드립니다.
- @표시는 고졸로 지명받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대학 진학 후 중도하차한 선수.
- 볼드표시는 통산 war이 스탯티즈 기준 2 이상 되는 선수한테 부탁드립니다.
4. 드래프트 평가
- SK 와이번스: 이대호 거르고 김희걸(개명해서 지금은 김건한), 조형식, 김동건. 김희걸은 빠른 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평가받았고, 조형식은 속초상고 동기 조영훈과 투타를 이끌어 창단한지 얼마 안 되는 팀의 대통령배 8강 진출과 세계청소년대표팀 우승에 기여했고, 김동건은 공수주 모두 뛰어난 유격수로 평가받았다. 이대호를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1차 지명자 정상호, 나머지 2차 지명에서 김강민, 채병용, 박재상 등 향후 SK 왕조의 주축 멤버가 될 선수들을 많이 뽑았기 때문에 아주 손해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대호를 거르고 뽑은 2차 1순위 지명자들이 제대로 활약해 주지 못했다는 것. 그나마 투수 김희걸을 지명해 2003년~2004년 2년간 전천후 투수로 잘 기용하다가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하여 KIA에서 박재홍을 데려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 롯데 자이언츠: 거포감 세 명을 건져올렸지만 1차 지명한 추신수는 롯데의 입단 제의를 거절한 채 미국으로 떠났다. 최준석은 2006년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된 후에 제 기량을 발휘한 후 FA를 선언하여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했다가 2018년에 NC로 이적했다. 이대호는 롯데에 남아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이후에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명으로 성장했다. 그 외에도 얼굴은 이토이인데 성적은 정반대인 외야수와 골프 스윙을 하는 팡야 선수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 한화 이글스: 1차 지명한 김태균은 KBO 최고의 타자 중 하나가 되었으며, 데뷔 첫 해 3할 3푼대 고타율과 20홈런을 치며 맹활약, 신인왕을 차지했다.[18] 하지만 2라운드에서 뽑은 선수는 프로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었고, 몇몇 이름이 알려진 선수들은 지명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입단했다.
- 해태 타이거즈: 1군 레귤러가 된 선수가 없다. 김주철, 김민철이 그나마 없는 살림의 해태에서 쓰이긴 했지만 신인 때 이후 묻혀졌고, 그나마 김경언이 김성한의 신임을 받으면서 1군 출장 횟수가 가장 많았지만 김성한 퇴임 이후 그저그런 타자로 전락해서 2군에 박혀있는 시간이 길었고 어쩔 때 한번 대타로 간간히 쓰이다가 한화로 가서야 터졌다. 1차 지명을 받은 투수 정원은 2006년 딱 한 해 반짝하고 2008년에 임의탈퇴 공시됐다.
- LG 트윈스: 단 한 선수만 1군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1차 지명을 받은 이동현. 데뷔 2년차던 2002년 중간계투로 124이닝을 소화하는 등 LG의 주축 투수가 되는 듯 싶었으나 혹사로 인해 팔꿈치 부상이 왔고 금지어의 당겨쓰기 등 관리를 해주지 못한 탓에 두 차례나 더 수술을 받는 등 5년에 걸친 재활 끝에 돌아와 2019년 은퇴할 때까지 LG의 뒷문을 지켜오고 있다. 그 밖에 프로에서 활약한 선수는 없었다. 2차 1픽 투수 박용진은 3년 후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후 선수 생명이 끝났다.
- 두산 베어스: 어째 이쪽도 건진 선수가 별로 없다.(...) 그래도 김상현이 뒤늦게 터져 스윙맨으로 활약해주긴 했다. 채태인은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나중에 삼성으로 갔다. 당시 고교 최대어 중 하나였던 이동현을 LG에 빼앗기고 대신 1차 지명으로 뽑은 휘문고 투수 황규택은 단 한 번도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결국 은퇴하면서 2000년의 문상호에 이어 2년 연속으로 1차 지명은 망했다.
- 현대 유니콘스: 두 선수가 터지긴 했는데, 희한하게도 지명 당시 포지션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한 명은 투수로 입단했다가 현역 복무를 마치고 타자로 전향한 후 터졌고, 또 한 명은 고교 졸업 당시 유격수였는데 지명받은 후 입학한 대학교에서 투수로 전향, 경찰청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선수단이 인계된 넥센 히어로즈에 돌아와 주전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 2013년에는 부처님도 차지하지 못한 골든 글러브도 차지한다. 1차 지명으로 지명한 인천고 설의석은 얼마 안 있어 방출되었고, 2차 12순위로 지명한 어떤 발 빠른 외야수는 현대가 홍익대학교로 보냈다가 약한 타격 때문에 지명권을 포기했다. 졸업 후 두산 베어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삼성 라이온즈: 역시 흉작.(...) 삼성 구단 역사상 최고액 계약금 5억 3천만 원을 안긴 1차 지명자 이정호는 고교 시절부터 있었던 팔꿈치 부상과 그에 따른 관리 실패로 통산 1승에 그치는 등 1군에서 제대로 뛰지 못하고 2004년 FA 박진만의 보상선수로 현대로 가버렸다.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한 1루수 조영훈은 터질 듯 터질 듯 안 터지다가 KIA를 거쳐 전력보강 선수로 이적한 NC에 자리잡았으며,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한 박성훈은 조원수박차 라인을 이루다 결국 장원삼을 상대로 넥센에 트레이드되었다. 그 외에는 김덕윤 정도가 간간이 1군에서 모습을 비쳤지만 김덕윤도 2006년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됐고 2년 후 두산에서 방출되어 은퇴했다.
5. 이모저모
- 2000년 초 창단한 SK 와이번스는 신생구단 전력 평준화 지원 차원에서 이 해와 이듬해인 2002년 신인지명에 한해 1라운드에서 3명을 먼저 지명하는 혜택을 누리게 됐다.
- 지명된 대졸 이상 선수가 겨우 5명뿐으로, 역대 신인지명 중 고졸선수에 대한 선호가 제일 높았다.
- 지명한 선수 전원을 입단시킨 SK와 달리 삼성은 1차 지명자 이정호와 2차 1라운드 지명자 김덕윤 둘을 제외하고 모두 대학교에 보냈다.
- 두산에 2차 10라운드로 지명된 채태인은 이미 보스턴 레드삭스와 입단 합의를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두산이 지명한 것은 만약 미국에서 실패하거든 자기네 팀으로 오라는 뜻. 그러나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로 채태인은 삼성에 입단했다.
- 지명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선수 51명 중 졸업 후 제대로 입단한 선수는 16명에 불과했다. 한화 지명자였던 최준원은 SK에 다시 지명되었으며 등 5명은 신고선수로 겨우 프로에 발을 들였다. 나머지는 대학에서 중도하차했거나 지명권이 풀렸다.
- 추신수가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부산고 동기 정근우가 지명받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은 작은 체구때문에 스카우터들이 관심을 잘 주지 않아서다. 한화 2차 1픽 김백만이 부산고 출신인걸 보면... 결국 정근우는 고려대로 진학했고 훗날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았다.
- 이 드래프트의 주 대상이었던 1982년생에 국가대표급으로 성장한 선수가 많았고, 최소 팀 주전~백업급으로도 상당히 많은 선수가 활동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추신수, 김태균, 이대호, 손승락이 있고, 당시에는 미지명자였지만 정근우]도 국가대표급으로 성장했다.
- 부산-경남팜의 황금기 중 하나다. 82년생 부산-경남팜 출신은 부산고는 추신수,김백만, 정근우[19] 경남고는 이대호, 장기영, 경남상고는 김덕윤, 김경언, 송산, 백승룡 부산상고는 채태인, 이승화, 차정민, 부산공고는 이명우[20] , 마산고는 김태구와 신재웅[21] 을 배출했다. 이 해 고졸 부산-경남팜은 대졸 포함 19명의 지명자를 배출했다.
[1] 지명 거부 후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2]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교, 대학 졸업 예정자들은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다.[3] 2014년 시즌 중에 김건한으로 개명.[4] 2013년 김태영으로 개명.[5] 현재는 장민석[6] 현재는 이우민[7] 현재는 박준서[8] 현재는 박종윤[9] 2004년 병역비리 사건 때 불구속 입건된 뒤 지명권이 풀렸다가 공익요원 복무를 마친 후 신고선수로 입단.[10] 방출 이후 기아 타이거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가 또 방출. 결국 일본 독립 리그로 건너갔다.[11] 중앙대 진학 후 지명권 포기, 이후 신고선수로 입단[12] 동아대 진학 후 지명권 포기, 이후 신고선수 입단.[13]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1년 만에 방출.[14] 단국대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뒤 1년 쉬고 송호대에 입학.[15] 각 팀마다 12명을 지명할 수 있기에 SK의 11, 12라운드 지명은 없었다.[16] 동국대 진학 후 지명권 포기, 이후 2005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SK에 지명.[17] 2010년 공익근무 복무 후 오재필로 개명.[18] 다만 김태균의 성적도 좋았지만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게 흠이었고 같은 해에 데뷔해 거의 전경기 출장했던 박한이를 밀어내고 수상한지라 논란이 좀 있었다.[19] 대졸 후 2005년에 지명[20] 유급으로 2002년에 지명[21] 대졸 후 2005년에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