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파스테르나크

 


'''Бори́с Пастерна́к'''
[image]
[image]'''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1]
(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국적'''
소련 [image]
'''출생'''
1890년 2월 10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사망'''
1960년 5월 30일 (향년 70년 109일), 소련 페레델키노
'''직업'''
소설가, 시인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시인으로서의 활동
2.3. 암흑기, 번역가 활동
2.5. 남은 이야기
3. 작품 세계
4. 작품 목록


1. 개요


[image]
[image]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 삶을 준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Человек рождается жить, а не готовиться к жизни.)"'''

'''<닥터 지바고> 중'''

소비에트 연방시인소설가. 인텔리겐치아의 표상. 성이 길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이 그냥 '보리스'라고도 부른다. 그의 이름보다는 대표작인 <닥터 지바고>를 더 익숙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모국 러시아와 러시아 문학계에서는 손꼽히는 '''대문호(大文豪)''' 대우를 받고 있다.
대표작 《닥터 지바고》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며, 본업은 '''시인'''이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작가 본인은 그 수상을 거부한 사례로도 유명하다. 수상의 배경, 거부가 모두 자의보다는 정치적 배경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러시아 후기인상파 화가로 이름이 있으며 정교회로 개종한 유대인 출신 레오니트 오시포비치 파스테르나크[2], 피아니스트인 로자리야 이시도로브나 카우프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르(1893~1982)라는 남동생과 조제피나(1900~1993), 리디야(1902~1989)라는 여동생들이 있는데 보리스와 알렉산드르를 제외한 가족이 모두 독일로 '''이민을 가버렸다'''(!). 레오니트의 안과 치료를 위해 잠시 내려갔는데 제 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2. 생애



2.1. 유년시절


어린 시절 파스테르나크는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꽃과 바람과 철학을 접하며(...) 부유하게 자랐다. 이 집안에는 제법 저명한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는데 죄다 아버지 레오니트의 인맥들이었다. 그는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 등 소설의 삽화도 그려줬다. 톨스토이 의외에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철학자 레프 셰스토프, 그리고 그의 피아노 스승이자 이웃사촌이었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특히 릴케와는 그 뒤에도 서신을 자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스크랴빈은 파스테르나크의 첫 번째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12살의 파스테르나크는 그를 보며 장래에 음악가가 되리라 마음먹고 그에게서 6년 동안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하루는 스크랴빈에게 자작곡을 직접 들려주었는데, 청취 후 즉석으로 곡의 이곳저곳을 손봐준 스승에게서 놀라움을 느낀 파스테르나크와 스크리야빈은 대략 이런 식으로 질답했다.

파스테르나크: 바그너차이콥스키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스크랴빈: 뭐라고?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니? 그런 건 피아노 조율사들한테나 맡겨라.[3]

무슨 소리인고 하니, 워낙 소심했던 보리스는 스크랴빈이 생각하기에 영 문제될 게 없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작곡 들려준 것도 엄청난 용기였다!
파스테르나크는 그 후로 점점 음악에 자신이 없어졌고, 결국 스크랴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꿈을 접었으며 다니던 음악 학교도 나와버렸다. 스크랴빈은 평소 여러모로 제자를 독려해 주었고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지만, 스스로 자괴감을 느꼈던 탓이다. 자신은 피아노도 스크랴빈처럼 칠 수 없을 것이고 악보도 잘 볼 줄 모른다고, 한마디로 열정만 있고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이 무렵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며 인간의 임의대로 변경시킬 수 없는 섭리라고 생각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1908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지만 스크랴빈의 조언에 따라 1년 뒤에 철학으로 전과했다. 1912년에는 어머니가 한푼 한푼 모은 돈으로 아들을 독일 마르부르크로 유학을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철학을 계속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 번째 동경의 대상이자 신칸트주의의 창시자인 '''헤르만 코헨'''(1842~1918) 교수를 만나며 또 한 번 정신적인 성숙을 이룩하지만 그 끝의 한계점에 부딪쳤다. 그는 코헨 교수가 오래 전 갈릴레오, 아이작 뉴턴, 라이프니츠, 파스칼 같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웠던 고귀한 지식의 정수에만 기대는 모습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왔던 어떤 소녀[4]를 좋아했는데, 그녀의 가족이 독일 여행 중 그가 있는 마르부르크에 들러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머물러 있는 기간은 짧아서 파스테르나크는 그녀가 다시 떠날 즈음 황급히 사랑을 고백했는데, 안타깝게도 '''거절당했다'''. 그들이 베를린으로 떠날 때 그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빈손으로 아무 볼 일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소녀의 가족과 헤어지고 낯선 방에서 하룻밤을 지샌 후 다시 마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파스테르나크가 독일 유학을 포기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2. 시인으로서의 활동


파스테르나크는 결국 철학을 포기하고 어렸을 때부터 은근히 동경해오기 시작한 시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진한다. 그는 1913년 러시아에 돌아온 후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기 무섭게 찔끔찔끔 써오던 시들을 묶어 《매우 어리석은 위선의 가면을 쓰고》라는 이름의 시집을 냈다. 그런데 그의 첫 시집은 그보다 나중인 1914년에 출간한 '''《구름 속의 쌍둥이(Близнец в тучах)》'''로 쳐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는 시험작이었던 듯하다. 한편 《구름 속의 쌍둥이》는 상징주의적인 색채가 짙다고 평가되는데, 작가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것도 표현하지도, 상징하지도 않은 미성숙한 책이라고 하며 '''후회했다'''.
여러모로 난해하다는 평을 들은 시집을 통해 시인으로 본격 데뷔한 파스테르나크는 같은 해 미래파 시그룹인 <원심력>에 가입하여 그의 세 번째 동경의 대상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를 만난다. 당시 신인이었던 파스테르나크는 어렸을 때부터 책 몇 권에 혁명에 눈을 뜨고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무렵 볼셰비키 위원이 되어 감옥까지 세 번이나 들락날락한 선배 시인[5] 마야콥스키가 거의 신 같았기 때문에, 존경을 넘어 그를 숭배했고 사랑했다. 그 기간은 1920년 의견 차로 결별할 때까지 6년 동안 지속됐으며,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콥스키가 점점 마야콥스키 본인이 표방했던 낭만주의적 서정성을 혁명적 사상에 의해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서 《안전통행증》에 서술된 과정을 보면 파스테르나크가 일방적으로 마야콥스키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것. 결국 마야콥스키는 그 이후 완전히 정치적이며 선동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소련의 체제를 끝까지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레닌이 죽은 뒤 초기 혁명의 의미가 변질된 소련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마야콥스키는 1930년 사회적 압박과 연이은 작품의 실패에 따른 고독을 못 견뎌 자살하고 말았다. 이 때는 마야콥스키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목숨을 잃을 때였고, 파스테르나크는 훗날 자기 혼자만 살아남은 것을 죄처럼 여겼다.
그는 시인으로만 살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1914년부터 16년까지 모스크바의 한 생산업자 아들의 가정교사를 지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었을 1916년부터 17년까지는 어렸을 때 다리를 다친 전적 때문에 군에 징병되지 않은 대신 우랄 산맥에 위치한 군수품 공장에서 사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시집을 여러 권 낸 이후에도 로열티가 영 들어오지 않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투잡을 뛰었다.
1916년 12월에는 두 번째 시집 '''《경계를 넘어서(Поверх барьеров)》'''를, 1922년에는 세 번째 시집 '''《삶은 나의 누이(Сестра моя — жизнь)》'''를 출간했다. 영명(英名)은 'My Sister Life'. '나의 누이인 삶'이라는 뜻이다. 《삶은 나의 누이》 자체는 1917년에 완성했는데 파스테르나크가 가장 먼저 낭독해준 대상이 마야콥스키였고, 그는 시집을 만족해했다고 한다. 시집의 배경은 1917년 여름 로마노프카와 발라쇼프를 여행하면서이고, 옐레나 비노그라트(1897~1987)와의 만남을 주제로 쓰여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여인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은근스레 마음을 품었던 모양인데, 옐레나에게는 이미 세르게이 리스토파트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세르게이가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하자 그를 무척 그리워하는 편지를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낸다. 결국 또 '''차였다'''는 이야기인데, <옐레나에게>라는 시에 '피해야 할 욕설도 그녀에게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싯귀를 넣었다. 그런데 시집의 주요 소재는 이 이야기 자체는 아니고, 주요한 특징은 시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쉽지만 난해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과, 옐레나 비노그라트와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 같은 스토리로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시 하나하나에 독립적인 모티브가 주어져 시 본연의 특징을 살렸다는 데에 있다. 그는 단어 선택에 자연물, 특히 식물을 많이 차용했고 계절적인 이미지를 두루 품었다. 이 시는 미하일 레르몬토프[6]에게 헌정되었고, 마리나 츠베타예바 같은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상징주의를 넘어선 그의 초반 시적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 이후로 그의 시는 독창적인 경향을 짙게 띠며 서정성을 띠던 시의 세계를 서사시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는 같은 해 단편소설 '''《제냐 류베르스의 어린 시절(Детство Люверс)》'''[7]과 '''《툴라에서 온 편지》'''를 발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923년 후속작인 '''《테마와 변주(Темы и вариации)》'''를 발간하고, 레닌과 관련된 최초의 서사시 '''《고상한 병》'''을 내놓는다. 1925년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다룬 서사시 '''《1905년(Девятьсот пятый год)》'''과 포템킨 전함에서의 봉기 사건을 다룬 서사시 '''《슈미트 중위(Лейтенант Шмидт)》'''의 집필에 착수해 각각 1926년과 1927년에 발행했다. 1924년에 집필을 시작한 운문체 소설 '''《스펙토르스키(Спекторский)》'''는 1931년에, 시집 '''《두 번째 탄생(Второе рождение)》'''은 1932년에 발표하였다. 이 과정은 그의 시적 사상이 명확해지기 위한 과도기에 속한다.
1922년 미술을 전공하던 학생 예프게니야 블라디미로브나 루리예[8]와 첫번째 결혼을 하여 1923년 아들 예프게니를 낳았다. 그들은 중간에 파스테르나크의 부모를 뵈러 베를린에 다녀왔는데, 이것이 그가 부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1930년 예프게니야는 요양을 하러 독일에 갔는데 파스테르나크는 그녀가 공부를 위해 그 길로 파리를 가기 원했었나보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돌아와보고 나니 남편은 나이 40에 이미 '''바람이 났다.''' 새로운 사랑의 대상은 이미 피아니스트인 하인리히 네우하우스의 유부녀인 지나이다 니콜라예브나 네우하우스[9]라는 여자였고, 예프게니야는 1931년에 이혼문서에 도장 찍었다. 파스테르나크는 1934년 지나이다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1937년에는 둘째 아들인 레오니트를 얻었다. 친분이 있는 그루지야의 시인이자 1937년 스탈린의 숙청기간 때 자살한 파울로 야시빌리의 이름을 따 파울이라고 지으려 했는데 지나이다가 말려서 아버지 레오니트의 이름을 고스란히 따 지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아들 레오니트는 나중에 나탈리야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옐레나라는 딸과 보리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지나이다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병약한 아들인 아디크 네우하우스도 데려와 죽을 때까지 키워주었다.

2.3. 암흑기, 번역가 활동


192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협회가 문학을 심하게 통제했으므로 혁명을 찬양하지 않는 파스테르나크는 창작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중 1930년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그루지야의 시인인 '''파올로 야시빌리'''(პაოლო იაშვილი/Paolo Iashvili, 1894~1937)를 만났다. 그 때는 한 문학잡지에 그의 자전적 수필인 《안전통행증(Охранная грамота)》(1932)[10]이 연재되고 있었을 때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가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그루지야에 처음 방문하여[11] <푸른 뿔>그룹의 여러 시인들의 소개를 받고, 거기서 또 한 명의 친구가 될 '''티치안 타비제'''(ტიციან ტაბიძე/Titsian Tabidze, 1895~1937)를 만난다. 파스테르나크는 캅카스를 여행하며 엄청난 컬쳐쇼크지상낙원과도 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그루지야는 파스테르나크 생애 제 2의 고향이 된다.
파스테르나크는 두 번에 걸친 그루지야 방문에서, 그 밖에도 게오르기 레오니제(გიორგი ლეონიძე/Giorgi Leonidze, 1899~1966), 시몬 치코바니(სიმონ ჩიქოვანი/Simon Chikovani, 1902~1966) 등의 여러 시인들을 만나며 몇몇 시인들의(특히 레오니제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은 점차 커져서, 그를 감시하는 위원회 임원 니콜라이 티호노프, 빅토르 골체프 등과 함께 1933년 11월 그루지야를 다시 방문할 때는 아예 티호노프와 함께 이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죄다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고, 1935년에는 그 결과물을 '''《그루지야 서정시》'''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발간했다. 그 외에도 1934년에는 그가 번역한 바자 사벨라의 서술시 《뱀을 먹는 사람》 단행본과 레오니제, 치코바니, 야시빌리 등등의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해갔다. 말로는 암흑기였지만, 파스테르나크에게는 시인으로서 값진 경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경사는 앞으로 다가올 피바람의 폭풍전야에 불과했으니...
1932년에 극단적인 혁명사상을 모토로 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РАПП)이 해체되고 소련작가동맹으로 재결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이 체포되고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기에 처형당하거나 압박을 못견뎌 자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 중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사랑했던 티치안 타비제와 파올로 야시빌리가 끼어 있었고, 파스테르나크는 타비제의 처형 소식을 1954년에야 전해듣고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빠졌다. 당시 그는 타비제에게 끊임없이 소련작가동맹 눈치 보지 말고 네 생각을 펼치라고 조언했기 때문에, 그 말을 고스란히 듣고 시를 쓰던 타비제는 결국 혐의가 찍혀 희생된 것이었다. 옆에서 끌려가는 타비제를 보며 공포에 휩싸인 야시빌리는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 그루지야 작가동맹 본부 건물에서 자살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생전의 야시빌리를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로 기리며 크게 슬퍼했다. 타비제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타비제의 아내 니나 타비제에게 온갖 언어를 쥐어짜며 10여 년동안 격려해 줬지만, 결국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마르지 못했다.
1930년대의 피바람 속에서 파스테르나크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숙청 레이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에는 스탈린의 직접적인 역할이 적용했다. 파스테르나크가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의 작품을 번역해주었던 것도 있었고,[12] 스탈린 개인은 파스테르나크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너무 자기 세계에 빠져서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4차원 또라이(...)로 분류했기 때문에 자신이 팬이었던 미하일 불가코프와 더불어 숙청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체포하지 말라고 이른 것이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체포된 동료 이오시프 만델스탐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는데 스탈린이 만델스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질문하자 시종일관 '잘 모르겠는데요'로 맞섰고, 스탈린한테 넌 동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면서 대차게 까였다. 게다가 당시 신세계의 신과도 같았던 스탈린과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파스테르나크의 제안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하튼 이런 기행(奇行)으로 만델스탐은 석방은 못 됐지만 처형은 면했으며, 파스테르나크 본인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해서 "구름 속에서 사는 이 사람을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메모했다고 한다. 후에 파스테르나크는 숙청을 회고하며 "숙청에 대해 기술하려면 심장 박동이 멈추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증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파스테르나크는 동료들과 함께 타타르스탄의 치스토폴로 피신했다. 그 동안에도 그는 계속 그루지야의 시들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집》(1953년 출판)이나 괴테의 《파우스트》(1953년 출판) 등을 계속 번역했다. 러시아에서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번역 방식으로 대중들로부터 명역이라며 사랑을 받았는데, 일부 비평가는 영어 각본을 이른바 '파스테르나크화'했다고 줄기차게 깠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 왕립 극단이 햄릿을 무대에 올릴 때 파스테르나크의 번역본을 원본과 대조해가면서 원래 대사의 묘미를 더 살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 퀄리티는 그야말로 넘사벽...
옆 마을에 살던 친한 동료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1941년 가을에 자살했고, 그녀를 말리지 못한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1943년 8월, 그는 치스토폴에 아내와 아이들을 놓아두고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전선으로 가기까지 그는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전 언제 가나요'라며 재촉했고,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는 답변만 9개월을 받았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시집 몇 편을 더 출간했는데, 1943년의 '''《새벽 기차를 타고(На ранних поездах)》'''가 여기에 속한다. 이 때부터 그의 제2의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지만, 상황도 상황이고 압박이 여전히 심했으므로 그 뒤에는 다시 침묵을 지키는 척하면서 모스크바의 외곽 페레델키노의 저택에 방콕하여 무언가의 집필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바깥세계에서는 안드레이 즈다노프라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파스테르나크의 동료 시인들인 미하일 조시첸코와 안나 아흐마토바를 신명나게 까고 있었다.

2.4. 닥터 지바고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의 본격적인 집필은 1945년이다. 이 때부터 스탈린이 죽는 1953년까지는 페레델키노에 처박혀 나 죽었소 상태로 집필에 매달렸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가 되거나 말거나...
그가 매달린 것은 집필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올가 이빈스카야'''(Ольга Всеволодовна Ивинская, 1912~1995)였다. 1946년, 노비 미르지 사무실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34세의 그녀는 당시 56세였던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 뒤로 친분을 갖게 되고 차차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빈스카야 본인은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고 두 번째 남편이 전사(戰死)하자 과부가 된 상태였다. 류드밀라라는 딸과 드미트리라는 아들이 있는 이빈스카야는 먼저 파스테르나크에게 다가갔으며, 그를 위해 페레델키노에 다차(dacha, 별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거기에 매료된 파스테르나크는 아내 지나이다와는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빈스카야와 함께 살았다. 밤에는 아내와, 낮에는 일 핑계로 이빈스카야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지나이다를 버리지 못하는 파스테르나크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진 그녀는 그의 비서의 신분으로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비서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런데 이빈스카야와 함께 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9년 올가 이빈스카야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했다. 《닥터 지바고》의 집필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이 파스테르나크를 잡아 족쳐야겠는데 자기 입으로 그를 체포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녀를 대신 잡은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수용소에서 5년을 썩고 스탈린이 죽자 석방되어 나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파스테르나크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감옥 안에서 유산을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는 동안 파스테르나크는 그녀의 어머니와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 무렵 파스테르나크가 그녀에게 쓴 편지는 꽤나 아련하다.

가만히 응시해도 눈 오는 밤

모든 것이 아물거려 나는 경계를 그을 수 없네.

나와 그대가 어디서 나뉘는지...

스탈린 사망 이후 해빙기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은 소련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집필하는 동안 폐암과 심장병이 악화되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여러 번의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고비를 넘겨왔었다.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불발하자, 파스테르나크는 마침 친분을 맺은 아이제이아 벌린 경(Sir Isaiah Berlin, 1909~1997)의 도움으로 원고를 영국으로 빼돌리고, 이빈스카야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의 잔지아코모 펠트리넬리(Giangiacomo Feltrinelli, 1926~1972)를 통해 출판에 성공했다. 펠트리넬리는 공산당원이었는데 이 일로 인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서방 세계에 알려진 소설은 러시아의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다는 업적을 인정받아 출판 1년만에 노벨문학상 루트를 탔다. 이 때 그의 수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시대 서정시 및 위대한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에 관한 중요한 공적에 대하여 이 상을 수여합니다(for his important achievement both in contemporary lyrical poetry and in the field of the great Russian epic tradition)."
파스테르나크는 아내 지나이다와 함께 트빌리시의 니나 타비제의 집에 놀러가 쉬고 있던 중 이 전보를 받고 기뻐서 이틀 뒤 이렇게 수상 소감을 전했다.

너무나 고맙고, 감동적이고, 자랑스럽고, 놀랐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이틀 뒤, 그는 입장을 바꿔 이런 서한을 보냈다.

제가 속한 사회의 수여하는 이 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수상을 사양할 수밖에 없으니 제 결정에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거부 이유는 소련의 압박과 같은 작가 동료들의 비난 때문이라고도 하고, 수상작 선정 이유가 체제 경쟁자 소련을 비난하기 위한 서방세계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는 동료들의 설득을 인정했다는 설이 엇갈린다. 선정 이유가 정치적 목적이라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에서 공개한 문서에 따라 진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CIA가 개입해있었다.
하지만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의 거부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취소하지 않았다. 이에 소련작가동맹이 그를 제명했고, 급기야 국외로 아예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이렇게 청원했다.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

스탈린보다 약간 관대한 흐루쇼프가 이를 받아들여, 그는 겨우 망명만은 면한 채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폐암과 심장병을 안고 페레델키노에 숨어있다시피 하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
대조적으로 솔제니친은 소련 당국의 심기 따위는 상관없이 직접 수상했다.

2.5. 남은 이야기


파스테르나크의 장례식 때 수천 명의 조문객이 운집하여, 그의 금시(禁詩)를 합창하며 넋을 기렸다.[13] 관은 그의 두 아들인 예프게니와 레오니트가 운구했다.
파스테르나크는 페레델키노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작가촌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그의 옆에는 1966년 6월 28일에 사망한 아내 지나이다와 둘째 아들 레오니트가 나란히 누워있으며 올가 이빈스카야도 가까운 곳에 묻혔다. 무덤은 생전 검소하고 욕심이 없었던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아주 단순한 묘비만 있다.
그렇게 그가 죽은 지 3개월 뒤, 올가 이빈스카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 체포되어 딸 류드밀라과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가 4년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이번에는 《닥터 지바고》의 해외 인세를 불법으로 받아먹는다는, 그러니까 원고를 몰래 이탈리아로 빼돌려 출판했다는 바로 그 혐의가 씌였다. 게다가 이 때는 올가를 끔찍히도 싫어했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들 예프게니를 비롯하여 아내 지나이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빈스카야가 파스테르나크를 유혹하여 이것저것 받아먹었다고 비난까지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파스테르나크를 시키는 대로 잘 감시했고 그가 작품을 국외로 빼돌리지 못하게 할 일을 다 했다'''고 쓰여 있는 올가의 석방 탄원서를 내세우며 그녀가 KGB 요원이라고까지 했다. 정부는 류드밀라를 1962년에, 올가를 1964년에 각각 석방했지만 그 뒤에도 이 모녀는 갖은 법적 공방과 손가락질을 견디며 살았다. 대를 잇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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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4년에 찍은 것.
사진의 주인공 '''예프게니 보리소비치 파스테르나크'''(1923년 9월 23일 생)는 파스테르나크와 첫 번째 아내 예프게니야 루리예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무뚝뚝한 성격으로, 주로 러시아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였다. 1988년 아버지가 탄 노벨상을 대리수상했다. [14] 2012년 7월 31일 8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타계. #

3. 작품 세계


그의 작품 세계는 암흑기 전후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의 시들은 상징주의를 넘어선 것들이 많으며 작가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이게 대체 뭔 말을 씨부리는지 통 알아먹지 못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전기 시집 중 가장 잘 나갔던 《삶은 나의 누이》만 봐도 분명 단어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쌩뚱맞은 곳에 끼워넣어져 당황스러움을 연출하며 갖가지 낯선 이름의 나무, 꽃, 풀의 향연으로 옆에 식물도감이라도 펼쳐놓고 읽어야 할 정도로 내용 자체가 난해하다.
반면 후기의 작품 중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닥터 지바고》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유리 지바고의 시들은 비교적 이해가 쉽다. 어느 감정에 심취해 있지도 않고, 어떤 대상을 신랄하게 까고 있지도 않아 명상적인 측면이 강하다. 작가 본인도 전기의 시를 쓸데없이 난해하게 썼다고 민망할 정도로 후회했다. 그래도 시 자체는 《닥터 지바고》를 읽어보지 않으면 뭐하러 썼나 싶을 정도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작품 곳곳에 파스테르나크 특유의 종교적인 성찰과 자연적인 명상, 그리고 끊임없는 고뇌가 돋보이며 언제나 희망의 주제를 열어놓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4. 작품 목록


대한민국에 소개된 적이 있는 작품은 '''볼드체'''로 처리한다. 연도는 대부분 출판연도.
  •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Близнец в тучах)》, 1914년
  • 시집 《경계를 넘어서(Поверх барьеров)》, 1916년
  • 시집 《삶은 나의 누이(Сестра моя — жизнь)》, 1922년
  • 단편소설 《제냐 류베르스의 어린 시절(Детство Люверс)》, 1922년
  • 단편소설 《툴라에서 온 편지(Письма из Тулы)》, 1922년
  • 시집 《테마와 변주(Темы и вариации)》, 1923년
  • 서사시 《고상한 병(Высокая болезнь)》, 1923년
  • 단편소설 하늘(Воздушные пути)》, 1924년
  • 서사시 《1905년(Девятьсот пятый год)》, 1926년
  • 서사시 《슈미트 중위(Лейтенант Шмидт)》, 1927년
  • 산문집 《이야기(Повесть)》, 1929년
  • 운문소설 《스펙토르스키(Спекторский)》, 1931년
  • 시집 《두 번째 탄생(Второе рождение)》, 1932년
  • 자전적 수필 《안전통행증(Охранная грамота)》, 1932년
: 우리나라에는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제냐 류베르스의 어린 시절》, 《하늘의 길》, 《툴라에서 온 편지》가 부록으로 끼어있다.
  • 시집 《새벽 기차를 타고(На ранних поездах)》, 1943년
  • 시집 《지구의 팽창(Земной простор)》, 1945년
  • 번역 《파우스트(Фауста)》, 1953년
  • 번역 《셰익스피어 비극집(Заметки к переводам шекспировских трагедий)》, 1953년
  • 번역 《그루지야 서정시(Стихи о Грузии. Грузинские поэты)》, 1958년
  •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 1958년
  • 시집 《하늘이 맑게 갤 때(Когда разгуляется)》, 1962년
  • 자전적 수필 《사람과 상황(Люди и положения)》, 1967년
  • 희극 《눈먼 미인(Слепая красавица)》, 1969년
그루지야의 시인들과 나눈 서간들을 묶어서 소개한 책도 있었으나 # 2012년 현재 품절된 도서.

[1] 러시아어로 '''설탕당근'''(영단어로 parsnip)이라는 뜻이 있다.[2] 본명은 아브룸 이츠호크레이브 포스테르나크(Аврум Ицхок-Лейб Постернак)이다.[3]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 《안전통행증》에서 발췌.[4] 이름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고 철자 V로 시작되는 듯하다.[5] 나이는 파스테르나크가 세 살 많다.[6] 당시에도 레르몬토프는 이미 죽은 지 꽤나 오래 됐다.[7] 예프게니야라는 소녀의 시점에서 흔한 사춘기 소녀의 심리를 잘 표현한, 아기자기하고도 조금 슬픈 소설이다.[8] 무라토바라는 성도 가지고 있는데 재혼 후의 성인 듯하다.[9] 시집 《두 번째 탄생》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10] 우리나라에는 《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앞에 설명한 스크리야빈, 코헨 교수, 마야콥스키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11] 그가 그 전에 그루지야와 아예 연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야콥스키가 그루지야 출신이기 때문이다.[12] 그런데 정작 고향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였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13] 이 모습은 뮤지컬화된 닥터 지바고의 라스트 씬에서도 유리 지바고의 장례식 장면으로 묘사되었다.[14] 수상 소감이 의미심장한데,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의 러시아어판 출간에 CIA가 개입된 것을 전혀 몰랐고, 노벨상 수상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노벨상 때문에 슬픔과 고통만 겪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