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역사
1. 개요
불가리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역대 국가수반
2.1. 역대 국왕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B6%88%EA%B0%80%EB%A6%AC%EC%95%84%EC%9D%98_%EA%B5%B0%EC%A3%BC_%EB%AA%A9%EB%A1%9D
불가리아 제1제국(681년 ~ 1072년)
불가리아 제2제국(1185년 ~ 1422년)
불가리아 왕국(1879년 ~ 1946년)
3. 고대
3.1. 트라키아인
고대에는 캅카스와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종족들과 현지인들이 혼혈된 트라키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트라키아인은 기원전 1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청동기 문명-철기문명을 영위해나갔지만 오랜기간 동안 부족국가 형태에 머물러있었다.
이들은 흑해 북쪽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여겨지며 가까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바로 아래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거치며 빠른 속도로 문명화되었던 것에 반해 오랜 기간 동안 부족국가 체제를 유지했다. 고대 트라키아인들은 그리스와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신화적으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키아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여겨지는데, 다키아인들 자체가 트라키아와 분리되기 이전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민족인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 기록이나 발굴되는 유물 등지에서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1.1. 기원전 480년 오드뤼사이 왕국: 그리스의 영향을 받음, 바르바로이라고 불림
한 동안 페르시아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했다가 기원전 480년경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건국하였고, 이 시기에 그리스와 많은 교류를 거치면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트라키아어도 그리스문자로 표기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르바로이라고 불리며 멸시를 받았다.
3.1.2. 로마 제국
트라키아 왕국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역을 통일하고 트라키아 일대도 정복되면서 얼마지나지 않아 마케도니아 제국이 쪼개지면서 독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로마 제국이 발칸반도 일대를 차지하면서 트라카아 일대도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래도 검투사를 배출해낸 것으로 나름대로 유명한듯 했었지만 트라키아 자체는 이후로도 촌동네 취급을 받았다. 그런 이유인지 여기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도 트라키아 촌놈으로 많이 지칭됐고, 그 이후에도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시대까지 오랫동안 검투사, 전사, 기병 등 무인의 산실로 유명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죽은 기원전 71년에서 '''300년'''이나 지난 시대인 군인 황제 시대 때에도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0년대) 시대에도 트라키아와 트라키아인은 여전히 촌구석과 촌놈 취급을 받았다.
3.1.3. 동로마 제국 안에서의 트라키아 인
200여 년 더 지나서 동로마 초기의 황제인 레오 1세 트라키안은 트라키아 출신의 황제였다! 저 때의 '트라키아'는 이미 수도권인 만큼 비하의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으로 되짚어 보면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세 시대의 인구 50만 되고 그런 으리으리하고 짱짱한 위세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중의 동로마 황제들도 아르메니아인, 이사우(브)리아인, 프리기아인 등의 출신지명이 특징으로 잡혀 별명으로 붙어 있는데, 이들은 수도권(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 및 동로마의 핵심지(앞의 수도권+에게 해 연안의 그리스와 소아시아 서부)와 거리가 다소 있는 지방들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래로 일약 신 '''수도권'''이 되면서 그런지 몰라도, 동로마 제국 시대엔 그런 무인의 산실+촌동네 이미지는 아나톨리아의 내륙 테마들로 옮겨간다.
이후에 이 일대의 트라키아인들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오랜기간에 걸쳐 받으며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함에 따라 트라키아어도 사어가 되었다.
3.1.4. 6 ~ 7세기, 슬라브인들과 융합
트라키아 + 슬라브
이후 이들 트라키아인들은 서기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안테 슬라브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남하함에 따라 상당수가 살상되고 살아남은 트라키아인들은 남하한 슬라브인들에게 융합되어서 트라키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그리스어에서 불가리아어의 원형인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대체되었다.
3.2. 트라키아 슬라브인들과 튀르크계 불가르인들의 동화
트라키아 + 슬라브 + 불가르 튀르크
한편 불가르인들은 서아시아 캅카스 산맥 지역에서 살고 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다. 그 이후 볼가 강가[1] 로 이주했고, 이 때문에 불가르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6세기 초, 불가르 부족 중 하나였던 우티구르족[2] 의 쿠브라트가 불가르 부족들을 통일하고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대 불가리아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대 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아들 바트바얀은 하자르인에게 패배하였고 대 불가리아는 하자르에 멸망되었다. 쿠브라트의 잔당들중 코트라그의 무리는 볼가 강과 카마 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도망쳤고 이들이 볼가 불가르인으로 동화된다. 아스파루흐(Аспарух)는 현재 불가리아 지방에 와서 도망쳐 토착민으로 살고 있던 트라키아 슬라브인들에 동화되었다. 나머지 잔당들은 바이에른, 이탈리아 등지로 패주하였으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국하지 못하였고 이들 불가르인들은 주변 민족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4. 중세
4.1. 불가리아 제1제국
4.1.1. 811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역사적으로는 681년 최초의 불가리아 칸국이 건설되어 등장하였다. 이 시기 불가리아 칸국은 그 세력을 크게 떨쳐 811년에는 크룸 칸이 동로마 제국 황제 니케포루스 1세의 군을 궤멸[3] 시키기도 하는 등 동로마 제국을 크게 위협하였으며, 여러 차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공물을 받기도 했다.
4.1.2. 863, 정교회 수용
9세기에는 나라가 크게 안정되었으며, 보리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정교회)를 받아들이고 문화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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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893, 전성기: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시메온 대제
10세기에는 명군주인 시메온 1세(시메온 대제)[4] 가 집권하였다. 시메온 1세는 그리스 방면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였다.[5]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에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황제(차르[6] )의 제관을 씌워주었고,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다음의 세 번째 유럽 제국인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초기 기독교 이후 최초의 총대주교좌인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창설되어 종교적으로도 큰 위신을 얻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국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키릴로스와 메토디 형제에 의해 키릴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이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성립된 교회 슬라브어와 이를 바탕으로 향유된 불가리아 문학은 정교회 슬라브권으로 퍼져나갔다. 이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동유럽권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불가리아는 러시아 이전의 슬라브 세계의 실질적인 맹주 역할을 하던 국가였다. 이렇게 불가리아는 동유럽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가톨릭의 헝가리 대공국과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하며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서부와 북부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며 발칸 반도의 대국으로 번영할 것처럼 보였으나..
4.1.4. 동로마 제국의 공세전환
불가리아 제국이 최대 판도를 이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의 혼란스러웠던 정치가 내부 불안요소가 정리됨에 따라 점차 안정되고, 또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면서 자존심이 상했던 동로마 제국이 오히려 공세로 돌아서자 상황은 급변했다. 상대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동로마 제국은 감히 북쪽 국경에서 제국을 자처하고 있는 불가리아 제1제국을[7] 아니꼽게 보았다. 불가리아의 전성기는 어디까지나 '''동로마의 혼란기를 담보로 해서 성립한 것'''이었는데, 안정기에 접어들어 고질적인 우환거리였던 유럽과 아시아의 양대 전선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제국 동부에서 병력을 전용하여 발칸 반도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 동로마 제국에게 불가리아는 애시당초 근본적인 국력에서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4.1.5. 보야르들의 세력확장
설상가상으로 국내의 혼란 또한 극심해져서 황제(차르)의 귀족(보야르)들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고 반란과 봉기가 잇달았다. 그 결과 10세기 후반, 제국이 성립한지 백년도 안되어 키예프 공국과 동로마 제국에게 연이어 공격당해 일차적으로 몰락하였다.
4.1.6. 제국멸망(1014)
그 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Βασίλειος Β' Βουλγαροκτόνος)"[8] 의 공격을 받아 클레이디온 전투(1014)에서 패해 불가리아 제1제국은 허망하게 몰락하였다.
4.2. 불가리아 제2제국
4.2.1. 제3의 로마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185년 동로마 제국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독립, 불가리아를 부활시켰다. 불가리아 제2제국은 한때는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등지를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은 차르 칼로얀과 이반 아센 2세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을, 클로코트치냐 전투에서 에피루스 공국을 격파하면서 13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할 유력한 후보국에 속하기도 하였다.[9] 이 시기 불가리아는 시메온 대제 시기와 버금 가는 전성기를 누렸고 불가리아인들은 쇠퇴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신하여 제국의 수도였던 터르노보를 제3의 로마라고 지칭할 정도[10] 로 큰 자부심을 가졌다[11] .
4.2.2. 몽골의 침입, 이바일로의 난: 위기
하지만 이반 아센 2세의 사후, 몽골 제국의 침략과 봉건화의 촉진으로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이바일로를 중심으로 농민 반란이 일어나 한때는 수도 터르노보를 점령당하고 이바일로는 차르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바일로는 이후 국내 귀족들의 반발로 폐위되어 킵차크 칸국에서 모살당하고, 불가리아는 결국 킵차크 칸국의 간섭 하에 들어간다.
4.2.3. 1300년 ~ 1322년,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중흥기
그러던 중 등장한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1300년 ~ 1322년) 시대에 다시 중흥을 맞아 지방의 독립적인 영주들(보야르)을 다시 차르에게 복종시켰고, 몽골과의 관계도 느슨한 친선 관계로 변화하였다.[12] 하지만 발칸 반도에서는 새로이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 성장하고 있었다.
4.2.4. 1330, 1331 보야르 할거시대
1330년 차르 미하일 쉬시만은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스테판 데챤스키와의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자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스베토슬라프 시대에 안정되는 듯 하였던 불가리아는 다시 봉건 영주들의 할거 상태에 빠졌다. 1330년, 왈라키아 지방에서 바사라브 1세가 창건한 왈라키아 공국이 헝가리 왕국의 카로이 1세를 포사다 전투에서 이긴다.
4.2.5. 1331년 ~ 1371년,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 제2의 중흥
이러한 시기에 불가리아를 40년 동안 통치한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13] 의 시대에 불가리아 제국은 제2의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 문화적인 전성기를 맞았으나, 외부에서는 새롭게 성장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반 알렉산더르는 제국을 스스로 분열시키는 자충수를 두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황후[14] 를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 그리고 첫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슈랏시미르[15] 는 이 사건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다.
4.2.6. 3국 분열
게다가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16] 형 이반 슈랏시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결국 삼분된 불가리아 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4.2.7. 1393, 1395, 1396, 3국의 멸망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터르노보는 1393년에 함락되었고, 이반 시슈만이 오스만 제국군도 피할 겸 헝가리의 지원도 요청할 겸 머물고 있던 니코폴리스는 1395년에 함락되었다. 이반 슈랏시미르의 왕국도 1396년에 수도였던 비딘이 무너지며 멸망.
5. 근대
장수국가에 유산균 유제품이 유명해서 왠지 목가적이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상 이 나라는 팽창주의적이고 투쟁적인 면이 상당해서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리스만큼이나 불가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언어적으로 유대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5.1. 1878, 불가리아 공국
이후 500년 가까이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으나 계속된 전쟁과 제국의 쇠퇴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해 학살정책으로 맞섰다. 그러나 불가리아 사태는 열강의 개입을 불러왔고 결국 1877년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패한 오스만 제국이 1878년 3월 3일 불가리아의 자치를 인정함으로서 불가리아 공국이 성립하였다. 불가리아가 자치권을 얻고 자치 공국으로 승격되며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인 상태였다. 불가리아인들은 독립전쟁 당시에 터키에 싸움을 건 당시의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를 해방자 황제(Цар Освободител)라고 부른다. 소피아 시내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불가리아 공국의 초대 공(公)은 바텐베르크 가문의 알렉산더였지만, 1886년에 퇴위하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일파인 코하리 가문 출신의 페르디난트가 새로 공이 되었다. 그는 원래는 가톨릭 교도였지만 1896년에 동방정교로 개종하였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자치 공국으로 있던 1885년에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였다.
5.2. 1908, 불가리아 왕국
이후, 1908년에는 불가리아 왕국으로 승격하였다. 이 때 오스만 제국에서 형식상으로도 완전히 벗어났다. 불가리아 왕의 칭호는 '차르(цар)'였다. 러시아 제국의 그 차르 맞다!
중세 불가리아 제국 시대에는 '차르'가 '''황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그 의미가 떨어져 근대에 이르러는 '''왕'''의 의미에 가깝게 변해[17] 러시아 제국부터는 새롭게 '서유럽식 황제의 표현인 ''임페라토르(Императоръ)'''를 황제의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현대 불가리아와, 러시아를 비롯한 '''동슬라브 국가'''는 '차르'를 왕, '임페라토르'를 황제의 의미로 사용한다. '''단''', 폴란드 등의 '''서슬라브''', 세르비아 등의 '''남슬라브'''는 '차르'를 황제의 의미로 사용한다.
5.2.1.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주요 동맹국의 일원 중 하나였다. 기본적인 국력의 명백한 차이 때문에 후대에 별로 주목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2차 발칸 전쟁 때 설움을 갚아주려고 독이 단단히 올랐었는지 참전하자마자 발칸전선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심지어 원정온 영국군, 프랑스군 할거 없이 미친듯이 쳐바르고 다녔다. 지지부진하던 세르비아 침공 전선이 1915년 불가리아가 뛰어들자마자 갑자기 전세가 확 뒤집혔을 정도.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패전. 그 바람에 페르디난트 1세는 왕세자 보리스(보리스 3세)에게 양위하고 고향 독일로 은거해야 했다.
5.2.2.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서 독일의 그리스 침공과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돕기도 했다. 물론 나치의 위협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긴 했지만 마케도니아와 북그리스(테살로니카)를 확보하는 등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간청 에도 불구하고 같은 슬라브계 소련을 치는 독소전쟁에는 참전을 거부했다. [18]
소련은 처음에 독일에 대패하자 불가리아를 중재로(당시까지 불가리아와 소련은 우호적) 독일과 강화를 하려고 했다. 이 때 주모스크바 불가리아 대사가 스탈린에게 "우리나라(불가리아)는 소련이 이기길 바랍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그런데도 소련군은 전세가 역전되자 가만히 있던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뭐 그래도 양국 간 전쟁 상태는 사흘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그 사흘동안에도 제대로 된 교전은 없었다고 한다.
그보다 조금 전인 1943년에 국왕 보리스 3세는 히틀러와 회담한 뒤 급사(독살설이 유력하다), 6살 난 왕세자 시메온(시메온 2세)이 왕위를 이었다.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한 후 연합국으로 전향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리고 소련군과 손잡고 독일군이 발칸 반도에서 탈출하는 것을 봉쇄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빈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불가리아는 이번에도 패전국이 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공산당 투표를 통해 1946년 9월 9일, 왕정 폐지 크리를 맞았다. 시메온 2세는 아직 어린아이여서 망명이 허락되었지만, 섭정인 숙부 키릴 왕자는 총살... 은거한 페르디난트 1세가 아직 살아있었다.[19]
5.3. 공산주의 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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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디미트로프(불가리아어: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1882년 6월 18일 코바체브치 ~ 1949년 7월 2일)
불가리아의 첫번째 공산독재자다. 특이한 점은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독일 경찰은 당시 독일을 여행 중이였던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등의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과 독일 의회의 루페를 체포해서 그들을 방화범으로 몰려고 했는데 디미트로프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결국 무죄판결을 이끌어냈고, 그렇게 1933년 12월 독일 사법부는 루페를 제외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이 사건으로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자로써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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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디미트로프
이후 디미트로프는 소련에도 가기도 했으며 스탈린이 대숙청을 실시하자 그는 자신을 스탈린주의자라고 틈만 나면 주장했고 이후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불가리아가 공산화되자 결국 불가리아의 초대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디미트로프는 티토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는데 훗날 티토와 스탈린의 관계가 틀어지자 점점 스탈린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9년 디미트로프는 소련에서 치료 도중에 죽었는데 디미트로프의 병세가 엄청나게 급격하게 악화되어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스탈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상당히 나오는 상황이다.
6. 현대
6.1.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공산주의 독재자로 1954년부터 공산체제가 무너진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을 했다.
자세한 것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항목 참조
6.2. 민주화 이후
1980년대에 외채문제로 경기침체가 계속 진행되어나가면서 불가리아 공산당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져 나가던차에 1989년에 주변국과 함께 민주화 되었다. 민주전선연합(SDS)이 여당이 되었으나 2014년 현재는 분열로 "강한 불가리아를 위한 민주주의당"(DBS, 2009년 당시 청색연합의 일원)과 함께 의석 0석 상태가 되었다.
재밌는 것은 민주화 이후 1946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시메온 2세가 귀국하여 2001년에는 정치를 시작하면서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 이라는 정당을 조직, 선거에서 승리하며 왕위에서 쫓겨났다 선거에서 승리해 권좌에 복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후 4년간 총리를 지내고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키릴 약자로 НДСВ,영어식 표기로는 NDSI, New Democracy Simeon II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의 당수를 맡고 있다가 최근 물러났다. 이 당은 2007년 당 이름이 '안정과 진보를 위한 국민운동연합'(National Movement for Stability and Progress)으로 변경되었고 몇번더 바꾸었다. 2001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신자유주의 도입과 유럽연합 가입 협정(2007년 가입) 통한 경제성과에도 불구하고 2005년 선거에서 지지율이 절반으로 떨어져서 여당 자리를 내주었고, 2009년 선거에서는 참패(3%)하여 지금은 의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2013년엔 1.9%.
2014년 현재 불가리아의 제1당은 2009년 승리를 거둔 보리코 보리소프 전 총리의 우파 '불가리아 유럽발전시민당'(GERB)이다. 시메온 국민운동연합에 참여했던 보리소프 전 소피아 시장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2007년 창당한 신생당. 그러나 후술하는 민영화와 자금세탁, 범죄조직 연루의 불명예로 의석을 많이 잃었으며 결국 과반 달성에 실패, 현재 신임 총리는 좌파가 옹립한 무소속이다. 그럼에도 불가리아 민주화 이후 1당을 다시 유지한 정당은 이번이 처음으로, 내각 구성을 못한게 아니라 안한 것에 가깝다.
불가리아의 다른 주요 정당은 '불가리아 사회당(Bulgarian Socialist Party)'으로 1990년 기존 공산당(구 "조국전선"의 일부)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면서 후신으로 창당된 당이다. 90~91년, 94~97년, 05~09년 집권. 2013년 5월 총선으로 지지는 많이 올랐으나 아직 제2당(44->84)이다. 다만 구 여당의 조각 거부로 이번 연정을 주도했다.
그외 연정에 참여한 터키계 소수민족 정당인 사민주의 리버럴 계열의 '정의와 자유 운동'[20] , 극단적 정교회 민족주의 정당인 공격당(ATAKA)이 원내 정당이다. 극우정당 불가리아구국국민전선도 문턱 4%에 근접한 3.7%의 득표를 올렸다.
2013년 2월, 불가리아에서는 공기업 민영화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 등으로 대규모 시위와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정부는 총리와 내각이 총사퇴하며 국민에게 사죄를 했고 선거에서도 의석(117->97)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새 사회당-민주당 연정 정권 역시 정확히 과반인 120석의 의석(84+36)속에 조기총선 요구와 반대시위에 부딪치고 있다.
2019년에 불가리아의 반부패 위원장이 아파트 스캔들에 휘말려 사퇴하는 일이 발생되었다.#
[1] 현재 러시아 볼가 강가에 살고 있는 튀르크계 추바시족(Чăвашсем; 추바시란 말은 평화롭다는 뜻의 jăvăş에서 나왔다고 추정된다.)이 이들과 큰 상관이 있으리라 추정된다.[2] 훈이 멸망하고 나뉘어진 불가르족중의 하나다.[3] 이때 불가리아의 크룸 대왕이 니케포루스 1세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기도 했다.[4] 마지막 군주요, 사실상 즉위기간이 없다시피했던 시메온 2세를 제외하면 이 이름을 쓴 군주는 없었다.[5] 테살로니키와 아드리아노플을 연이어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0세기 초의 유튜브 연도별 판도를 보면 동로마의 유럽 영토가 거의 다 점령당해 없다시피하다.[6] '차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국가가 불가리아이다.[7] 자신들이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하긴 하였으나 자존심 상 용인할 수가 없었다.[8] 불가리아인의 학살자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항목을 볼 것.[9] 동로마인들은 처음에는 라틴 제국을 때려잡는 칼로얀을 환영했으나 이후 불가리아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보복으로 칼로얀은 트라키아 동부의 동로마인 마을을 잇따라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거나 자기 땅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를 계기로 칼로얀은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즉 '로마인들의 학살자'라고 일컬었는데, 당연히 이는 '불가르인들의 학살자'라고 불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를 의식해서 만든 별칭이었다.[10] 마치 러시아 제국의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정교회 세계의 최대 도시가 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했던 것처럼.[11] 이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터르노보의 화려함을 인정하여 '제2의 콘스탄티노플' 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콘스탄티노플 자체가 '새로운 로마'였으므로, '제 2의 콘스탄티노플'은 곧 '제3의 로마'가 된다.[12] 1299년에는 킵차크 칸국의 왕족인 차카가 내전에서 패해 불가리아로 도망친 후, 이반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가 토도르와의 싸움에서 패사했다. 차카는 게오르기 테르테르의 사위였다.[13] 왈라키아 공국의 창건공, 바사라브 1세의 사위[14] 왈라키아 공국의 창건공, 바사라브 1세의 딸[15] 왈라키아 공국의 창건공, 바사라브 1세의 손자[16] 아버지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죽을 때까지는 왕을 칭하며 얌전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이복동생이 즉위하자 황제를 칭했다.[17] 이건 원조 격인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의 타이틀이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들어서 상설적으로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를 분리하게 되면서 부제직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인 이래 카이사르는 부제, 제위 계승자, 황제에 버금가는 최고위 황족 등의 의미로 떨어졌다. 자세한 것은 Caesar(title) 참조.[18] 독일의 침공을 불러온 친연합국 쿠데타 이전의 유고슬라비아도 그렇지만 이 동네 나라들은 친독적 중립을 취하려는 경향이 강했다.[19] 페르디난트 1세는 망명한 독일 코부르크에서 1948년 9월 10일에 죽었다.[20] 어설픈 테러 가도에 당수가 테러범을 때려눕힌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