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코건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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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Patrick "Billy" Corgan Jr.
1967년 4월 17일 일리노이 주 출생.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로 유명하다. 작곡, 작사, 기타 연주 실력, 이미지 메이킹 등등 음악 관련해서 못하는게 없는 음악계의 팀 버튼. 감성적이고 시적인 가사를 잘 쓰는데, 2004년에는 아예 'Blinking with Fists'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도 올랐었다. 오리지널 펌킨스 시절 라디오헤드보다 10년 앞서서 마지막 앨범을 인터넷으로 공개한 적도 있다.
빌리 코건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한 자전적인 곡 <Disarm>의 비디오 클립. 곡 자체도 스매싱 펌킨스 고전 중의 고전이며 팽팽했던 오리지널 멤버들의 모습과 함께 올드팬들에게 좋았던 시절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미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여자를 밝히면서 언론플레이에 능한 천하의 개쌍놈 이미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 마왕 이미지가 공존하는 뮤지션으로 각인되고 있다.
2. 상세
특유의 싸이키델릭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각종 효과음과 간결하고 인상적인 리프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수준급 기타리스트이다. 8살 때 듣게 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앨범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블랙 사바스의 헤비함, 더 큐어(The Cure)와 바우하우스(Bauhaus)의 분위기 메이킹,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기타 표현 능력이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고. 스매싱 펌킨스 시절부터 들을 수 있는 두껍고 기름진 퍼즈 사운드는 블랙 사바스의 헤비한 기타톤을 지향한 것이라고 한다. 보컬 스타일은 치프 트릭(Cheap Trick)에 영향받았다고 한다.[1]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로는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과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를 뽑았다. 그런데 기타 플레이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기타 솔로는 그다지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며, 'Zero' 같은 곡에서처럼 가끔 기타 솔로를 아예 싸이키델릭 효과음으로만 채워넣는 경우도 있다. 본인 말로는 '나는 손이 빠르지 않아서 잉베이처럼 칠 수는 없거든' 이라고.
어디까지나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을뿐 그의 속주 실력은 수준급으로 밴드의 출세작 중 하나인 <Siamese Dream> 앨범의 경우도 얼핏 들으면 기타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 사이키델릭 성향의 얼터 음반 같지만 잘 들어보면 많은 곡에서 그의 속주 기타가 난무한다. 이 앨범이 NTR의 충격 및 멤버와의 불화때문에 혼자 다 해먹은 걸로 유명한 앨범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손 느리다는 건 그냥 커트 코베인이나 제임스 이하 까는 얘기인 듯. 롤링 스톤 선정 저평가된 25명의 기타리스트에 22위로 이름을 올리기도.
그 외에 좋아하는 밴드는 판테라(Pantera), 라디오헤드(Radiohead)[2] ,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다이노서 주니어(Dinosaur Jr.), 러쉬(Rush), 메탈리카(Metallica) 등이라고.
스매싱 펌킨스 초중기인 3집까지만 해도 하드록 내지 헤비메탈에 기반하여 특유의 동화적인 감각을 가미한 음악을 주로 했으나, 인더스트리얼 계열 음악이 한참 뜰 때부터 테크노/인더스트리얼의 영향을 점점 받기 시작하더니[3] 4집 <Adore> 이후부터는 줄곧 일렉트로닉적인 요소가 강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발표한 솔로 앨범 'The Future Embrace'는 이러한 일렉트로닉/슈게이징적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앨범으로 평가는 나쁘지 않았으나 대중적인 호응은 얻지 못했다. 69000장 팔렸다.
오리지널 스매싱 펌킨스 해체 전까지는 욕을 먹어도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해체 후 밴드 즈완 결성, 솔로 앨범, 시집 발표 등 뭔가 활동은 열심히 했지만 이상하게 평가가 좋지 못했다. 묘하게도 이런 실망의 여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빡빡이 외계인 컨셉이 강해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했던 건 음악 외적인 것보다 동화풍의 멜로디와 가사에 숨어있는 번뜩이는 이미지 때문이었다는 걸 반증하는 셈. 사실 스매싱 펌킨스는 빌리 코건 혼자 북치고 장구치던 밴드였기 때문에 딱히 오리지널 시절 수준의 멤버를 못 모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전성기 시절만큼 임팩트 있는 곡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창작 활동은 아직도 왕성하긴 한데...
앨범 만들때는 보통 드럼과 스트링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직접 연주 한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 과정을 '내가 연주할거니까 니들은 손대지마' 같은 분위기라고 표현하며 작업하는 도중에 멤버들과 이견이 생기면 보통 주먹다짐으로 해결하는데 본인이 다 이긴다고 자랑했다. 1집도 이런 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다만 빌리 코건은 영악한 성격이라 언플이 심하다. 게다가 멤버들이 밴드를 떠나거나 하면 인터뷰에서 탈퇴한 멤버를 까는 등 뒤끝이 별로 좋지 못하다. (즈완 때 대판 싸우고 헤어진 것은 꽤 유명하다.) 일례로 최근 2기 멤버 중에 베이스 니콜 피오렌티노가 2집 Siamnese Dream의 커버 모델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링크 결국 이후 밴드 관계자가 앨범의 두 소녀들은 니콜 피오렌티도가 아닌 리산드라 알과 알리 랭어라고 언급했다. 링크
3. 장비
빌리 코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타는 57년형 리이슈 Fender Stratocaster이며, Gish와 Siamese Dream 시절 많이 사용했다. Mellon Collie 시절에는 74년형 리이슈 스트랫, Gibson ES-335, Les Paul도 사용했으며, Schecter C-1을 사용한 적도 있다. 빌리 코건의 스트랫은 픽업과 내부 배선을 개조하고 독특한 페인팅을 해서 정통적인 스트랫과는 많이 다르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펜더 아티스트 시리즈로 빌리 코건의 시그니처 스트랫이 생산된 적이 있다. 싱글형 험버킹 픽업인 디마지오 BC-2 픽업셋이 달려있다. 그러나 펜더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약을 중단하고 이후 Reverend 기타의 엔도서만 하고 있으며, 2016년 새로운 시그니처 기타인 Reverend BC-1이 출시되었다. 이쪽은 싱글코일처럼 생긴 험버킹이 아니라 대놓고 험버킹 픽업이 달려있다. 라이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빌리 코건을 상징하는 톤은 Siamese Dream의 두껍고 크리미한 퍼즈톤인데, 이는 일렉트로 하모닉스의 퍼즈 페달 Big Muff의 70년대 후반 모델을 사용한 것이다. 같이 투어를 했던 얼터너티브 밴드 Catherine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제임스 이하와 같이 구입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빅머프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하나로 빌리 코건을 꼽게 되었다. 'Siamese Dream' 톤을 재현하기 위해 일렉트로 하모닉스 사에서는 2017년 Op-Amp Big Muff Pi라는 복각 버전을 출시했으며[4] JHS Pedals에서 이 페달에 더 세세한 톤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만든 'Pumpkin Patch' 모디파이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2018년 근황에 따르면 페달 이펙터를 버리고 Line 6의 멀티 이펙터인 HX Effects[5] 를 사용하는 중이다. 15개나 되는 페달을 투어에 갖고 다니기도 귀찮고 노래와 기타를 동시에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일이 페달 밟느라 탭댄스 하는게 힘들어서 그렇다고.
앰프는 초창기에는 마샬을 단독으로 썼으나, 최근에는 마샬, 디젤, 뱀프, 셀머 등 자신이 소장한 앰프 8종류를 복제한 프리앰프 모듈러 시스템을 랙에 넣고 다니면서 곡에 따라 선택해서 쓰고 있다. 메인 드라이브는 페달을 쓰지 않고 앰프 게인만 사용하고 있으며, 파워 앰프는 메사 부기를 사용한다.
4. 일대기
4.1. 유년 시절
코건의 독선적이면서 괴팍한 성격과 음악적 재능은 개인적인 인생의 굴곡과 연관성이 깊다. 그의 아버지 빌리 코건 시니어는 블루스 기타 연주자였고 1970년 부인 마사와 이혼 후 비행기 승무원과 재혼한다. 계모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빌리를 괴롭혔고 그의 배다른 동생은 뇌성마비, 투렛 증후군 환자였다. [6]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티비만 보면서 백수건달로 놀았고 코건은 7살부터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면서 계모의 학대를 견뎌야 했다. 왠지 콩가루 집안에서 탈선의 길에 빠진 소년 가장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Siamese Dream>에 수록된 'Disarm'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자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동 앨범의 'Spaceboy'는 그의 동생 Jessy에 대한 곡이다. 동생 Jesse Corgan과 드럼 잼을 함께 하는 영상 안하무인이였던 아버지와 자신을 눈꼴시립게 여기는 계모와는 달리 배다른 중증 환자의 동생, 친어머니는 애정을 가지고 사랑했다. 코건의 친어머니 마사는 1996년 사망했다. <Adore>에 수록된 'For Martha'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이며, 이후 그는 자신의 레이블 이름을 'Martha's Music'으로 개명한다.
중학교때는 농구선수였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육상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얼굴만 봤을 땐 모르지만 키가 191cm인 꺽다리이다. 신체적으로 운동에 능하지만 왼쪽 손에 홍반이 있어 컴플렉스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을때는 가리는 편.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건 주립대 등의 대학에서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그는 진학을 포기한다. 시카고 인디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플로리다로 가서 'The Marked'라는 메탈 밴드를 조직하지만, 밴드는 지지부진하게 해산되고 다시 시카고로 돌아온다.
4.2. 스매싱 펌킨스
이후 코건은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새 밴드 조직을 모색하던 차 제임스 이하를 만나게 되어 같이 데모 테이프를 만든다. 이 데모에서 코건이 2곡, 이하가 1곡을 썼는데 이 때 코건이 이하가 쓴 곡을 엄청나게 까서 삐진 이하는 한동안 그와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7] 1988년의 어느날 코건과 이하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평소처럼 공연을 마친 밴드를 신나게 까고 있던 차, 옆에서 그 말을 듣고 빡친 여자와 키배를 뜨게 되는데(...) 그 여자가 다아시 렛츠키였다. 키배 뜨다 정이 들었는지 둘은 다아시를 베이스로 영입하여 스매싱 펌킨스를 결성하고 시카고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다. 참고로 스매싱 펌킨스라는 밴드 이름은 코건 빼고 아무도 안 좋아했다고 한다. 1989년 밴드는 주로 연주하던 클럽 메트로 사장의 추천으로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을 영입하여 4인 체제를 갖춘다.
1990년 서브팝을 통해 발표한 데뷔 싱글인 <I AM ONE>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하고 버진레코드와 계약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5월 Caroline 레이블에서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프로듀서 Butch Vig(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하드록 사운드와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몽환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8개월이라는 긴 스케줄로 된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한다. 비슷한 시기, 펑크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여 록씬을 평정한 너바나가 월드 투어를 시작해서 사기를 꺽기도 했지만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밴드의 내부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코건이 메이저 진출 후 만나서 약혼까지한 코트니 러브는 스매싱 펌킨스가 해외로 투어를 도는 중에 코건의 라이벌인 커트 코베인과 바람이 나서 코건을 차버렸고 밴드메이트이자 커플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이시 레츠키는 파경에 이르렀으며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2년 Reading Festival에서는 빌리가 흥분하여 기타를 부수어 버렸다.(...)
1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어가 끝나고 코트니 러브와의 결혼마저 결렬되자 빌리 코건은 우울증에 걸린채로 밴드 활동을 중단하고 시카고에 은둔하고 만다. 이후 코건이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여친이자 소꿉친구인 크리스 퍼비언이 다시 그를 찾아왔고 마침내 둘은 코건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 코건은 '후세 사람들이 자신과 밴드가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할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판매량에 못마땅해하며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그는 임원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앨범에 수록될 주요 곡들을 연주해서 평가를 받는 상황을 겪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한 그는 일부러 연주를 대충 했는데 임원들은 그것을 듣고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집 앨범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밴드 멤버들에게 연락을 하고 본격적으로 앨범 녹음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드러머인 지미 챔발린은 1집 투어 중 접한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는 같이 스튜디오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자 빌리 코건은 애틀란타에 있는 Triclops Sound Studios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챔벌린에 의해 미리 녹음된 드럼파트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는 엄친아적인 행동을 하여 앨범을 완성시킨다. 이후 빌리 코건의 "이 앨범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설득으로 멤버들이 다시 밴드에 가입,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1993년 7월 발매된 2집 앨범 Siamese Dream은 4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1993년 빌보드 차트 4위까지 오르며 성공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한 퍼즈 톤의 기타 멜로디가 돋보이는 'Today', 자신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담은 'Disarm', 숨겨진 좋은 곡 'Geek USA', ' Rocket', 병으로 고생하는 동생 Jesse를 위해 만든 'Spaceboy' 등 앨범 수록곡들 대다수가 명작으로 꼽힌다.
2집 <Siamese Dream>의 세계적인 성공 후 그는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채로 3번째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작업을 시작했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고 전작에서 담지 못했던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했다. 코건은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플러드는 밴드가 리허설을 하자마자 레코딩 스튜디오에 와서 녹음을 시작하자는 방침을 세웠고 녹음시에도 밴드 멤버들의 합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8] 코건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또한 코건은 전작의 성공 요소 중 하나였던 두꺼운 기타 사운드를 한층 발전시키면서도 이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기타 트랙의 연주는 1집 때처럼 코건과 이하가 반반 나누어서 담당했다. 또한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했고 두곡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믹싱 과정에서는 처음으로 ProTools을 사용해서 디지털 레코딩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레코딩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앨범 작업 중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앨범 제작 과정이 담겨있는 666테이프 영상
어쨌든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관현악의 선율로 가득찬 'Tonight,Tonight'에서부터 미니멀한 사운드의 1979, 하드한 'Fuck You'에 이르기까지 28트랙 모두 하나도 놓칠수 없는 놀라운 곡들로 가득차 있는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900만장 이상이 팔리며[9] 그들의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과용으로 키보디스트 멜보인이 죽고, 곁에 있던 드러머 지미 챔벌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밴드는 활동을 반강제로 중단해야만 했다. 투어가 중단되자 3집 앨범에서 자신의 곡이 대거 빠진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갖고 있었던 제임스 이하는 자신의 솔로 1집 앨범 작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다이시는 3집의 지나친 투어일정에 지친 나머지 우울증에 걸려 코카인에 중독된채 은둔해버린다.[10] 코건 역시 결혼 생활의 파탄과 친어머니 마시의 죽음으로 인해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였다.
1996년 8월 27일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럼에 맷 워커(ex-Filter), 키보드에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투어가 종료된지 18개월 후, 밴드는 지미 챔벌린이 빠진 라인업으로 새 앨범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4집 <Adore>다.
물론 드러머가 빠진 언밸런스한 라인업에다가 앨범 발표 전 참여한 사운드트랙의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서 어느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1998년 발표된 <Adore>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리프는 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조용조용해진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전반적으로 테크노 느낌이 강했다. 덕분에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의 외면속에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못했고 평론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약물복용으로 그룹에서 빠졌던 드러머 지미 챔벌린이 돌아오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 2월, 그들의 통상 5번째 앨범 <MACHINA/the machines of God>이 발매된다. 앨범은 전작 <Adore>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테크노 사운드와 두터워진 퍼즈톤의 사이키한 분위기,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앨범 녹음을 마치고 다아시는 영화 배우로 데뷔를 준비한다며 팀을 떠났으며 빈 자리는 코트니 러브의 밴드인 Hole의 메리사가 채웠다. 결국, 밴드는 2000년 월드 투어를 끝으로 해체를 선언했고, 그 해 12월, 밴드로서 처음 공연했던 고향 시카고의 '메트로'에서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이후 몇 년간 빌리와 제임스는 각각 솔로 활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성실하게 소소한 결과물을 쌓아나갔다면 빌리는 자신의 컨셉에만 신경을쓰며 부진하였다. 상대적인 만족도 차이인지 2005년 중순부터 빌리 코건은 솔로 앨범 프로모션에서, 일간지 광고에서 재결성 의지를 계속 밝혀오다 2007년 재결성을 선언하고 새로운 멤버들로 나머지 자리를 채운다. 이 재결성에 팬들은 환호하였지만 새로 내놓은 앨범 Zeitgeist는 트랜스포머에 수록곡 'Doomsday Clock' 한곡을 수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1]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관객들도 공연장에서 옛날 곡들은 신나게 따라불러도 '''신곡은 다들 멀뚱멀뚱 그게 뭐임 먹는거임?'''
2009년 지미 챔벌린이 '스매싱 펌킨즈는 내 음악 미래가 아닌게벼'라는 코멘트를 남기고 밴드를 떠났다. 이제 초기 멤버 중 남은 건 빌리 코건 밖에 없다.
2010년 8월 14일 10년만에 다시 한번 내한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오리지널 멤버가 아닌 2기 멤버로 방한해 아쉬운 면이 없지않아 있다. 게다가 전엔 브라질과 한국 공연이 제일 인상깊었다고 했는데 재내한 때는 10년 만이라 인지도도 많이 떨어져 좌석이 3/2 밖에 못채워서 빌리 코건이 충격먹고 1979도 안불렀다.
2011년 9월 1일에 새 앨범 'Oceania'를 공개한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웹상에서 공개되고 있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며, 빌리 코건은 'Oceania'를 "앨범 속 앨범" 이라고 밝혔다. 즉, 총 44곡이 순차적으로 공개된 후에야 완성되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라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써의 앨범이라는 말.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기획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라는데, 새 앨범도 앨범이지만 정말 44곡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컨셉트 앨범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더 궁금한 사람들은 밴드의 오피셜 사이트을 한번 체크해보자. 공개된 곡들의 무료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덧붙여 카림 압둘 자바가 나오는 Oceania 앨범 광고 영상이 꽤 위트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인 몸이라 그런지 꽤 수척해 보인다. 나이도 있고... #
2012년에 나온 Oceania는 예전의 스매싱 펌킨스와는 이질적이지만 그래도 망작 소리까지 듣던 전작보다는 상당히 후한 평가를 받으면서 2기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2014년 중반기에 들어 2기 멤버 중 2명이 탈퇴하면서 밴드의 미래가 불투명해져 버렸다. 2014년 12월에 발매된 앨범 Monuments to an Elegy는 빌리 코건과 제프 슈뢰더 둘이서 작업하여 완성되다시피 했고, 이후 2015년 초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던 Teargarden by Kaleidyscope Project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 Day for Night는 엎어졌다.
2015년 여름, 스매싱 펌킨스와 마릴린 맨슨의 합동 투어에서 지미 챔벌린이 등장하여 스매싱 펌킨스로의 복귀 사실을 알렸다. 이상하게도 다른 멤버는 다 내쫓는데, 빌리 코건은 지미 챔벌린을 마약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한번 내쫓고 다시 영입한 뒤, 그 뒤로 즈완, 솔로 프로젝트, 제 2기 펌킨스...계속 데리고 다니고 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미 챔벌린이 스매싱 펌킨스에 딱맞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성격의 리듬을 모두 소화해낼수 있는 그리 흔치않은 드러머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사실 헤비하고 투베이스 졸라 밟아내는 드러머는 많을지 몰라도, 헤비한 속주 드러밍도 소화해 내면서 끊어치는 펑키한 그루브나 엘빈 존스를 연상케하는 재즈적인 필링이나 사이키델릭 블루스에서의 몽환적이고 느릿느릿한 박자까지 다 소화해내는 드러머는 많지 않다. 특히 Tonight, Tonight 같은 심포닉 구성의 곡에서도 적절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센스는 최고로 평가 받는다. 이런식으로 자기 좋아하는 드러머를 꼭 데리고다니는 밴드 리더의 경우로, 코지 파웰을 애지중지한 리치 블랙모어라든지, 데이브 나바로를 버려도 스테판 퍼킨스는 꼭 데리고 다니는 제인스 어딕션의 패리 패럴 등이 있다.
2016년 빌리 코건이 원년 멤버+제프 슈뢰더로 스매싱 펌킨스 재결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2016년에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졌던 제임스 이하를 게스트로 불러 깜짝 공연을 하기도 했다.(어쿠스틱 기타로 사이어미즈 드림 앨범의 몇 곡을 연주) 이전에 비해 원년 멤버들 사이가 많이 좋아진건 사실이지만 아직 재결성 확정은 아니라고.
2017년 10월 13일. 릭 루빈이 프로듀싱한 빌리 코건의 두번째 솔로 앨범 Ogilala가 발매되었다. 어쿠스틱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으로 제임스 이하가 Processional이라는 곡에서 기타와 멜로트론을 맡았다.
2018년 2월에 빌리 코건은 다아시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제임스 이하, 지미 챔벌린과의 재결합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제프 슈뢰더는 계속 밴드에 남아서 활동을 할 예정. 또한 향후 재결합 멤버로 두 장의 EP를 낼 것이라고 했으며 7월부터 9월까지 투어 공연을 할 예정이다. 이 재결성에 다아시는 참가하지 않으며, 빌리 코건은 다아시가 거절했다고 언플을 시전했는데, 이에 다아시는 인터뷰를 갖고 빌리 코건을 극딜했다. 아마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다아시는 참여할 일이 없을듯.[12]
2020년 7월 건즈 앤 로지스의 북미 동부 투어 동안 오프닝밴드를 맡을 예정이다. 스매싱 펌킨스도 어지간히 한시대를 대표했던 슈퍼밴드지만 건즈앤로지스가 워낙 스타디움급 공룡밴드이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은 액슬 로즈를 존경해왔다고 밝혔다.
4.3. 연애사
'The Marked' 해체 후, 빌리 코건이 고향 시키고로 돌아와서 '난 음악가가 되기 굴렀나봐' 하고 망연자실 하며 집에 짱 박혀 있을 때 그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근무하던 크리스 퍼비언이 그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코건이 그녀에게 구애하여 그들은 사귀기 시작하나 얼마 후 결성된 스매싱 펌킨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퍼비언 역시 자신의 직업에 집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둘은 갈라진다.
이후 밴드가 메이저로 올라온 뒤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게되고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그녀와 깊은 관계가 된다. 그러나 빌리 코건이 Gish 투어를 돌며 외국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코트니 러브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고 자신이 커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린다. 스매싱 펌킨스의 1집 <Gish>가 같은 프로듀서 부치 빅에 의해 프로듀싱되고 발매일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에 가려져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코트니 러브가 커트 코베인과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멘붕한 코건은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리게 된다. 한창 스매싱 펌킨스가 2집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시기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빌리 코건과 커트 코베인을 비교하자 빌리 코건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나는 기타를 연주하는 손조차 정반대다."[13] 라고 말하기도...
2집 녹음을 시작하기 직전, 빌리 코건은 크리스 퍼비언과 재회하게 되고 둘은 코건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1993년 발매된 스매싱 펌킨스의 2집이 성공하자 코건은 전여친 코트니 러브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고 너바나의 투어일정으로 커트 코베인이 외국으로 갔을 때 단둘이 여행을 가는 등 대놓고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크리스 퍼비언은 코건이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코건과의 별거에 들어갔고 1997년 정식으로 그와 이혼했다.
이후 빌리 코건은 1996년 <Zero>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처음 만났던 여성 디자이너인 옐레나 옘척과 사귀기 시작한다. 4집 <Adore> 앨범의 고딕 컨셉은 전형적인 엘레나 옘척의 테이스트이다. 코건은 4집 활동이 끝나면 밴드를 해체하고 옐레나 옘척과 결혼하여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옐레나가 스매싱 펌킨스의 지속적인 활동을 주장하면서 둘사이에 불화가 시작되었고 결국, 둘은 2001년 갈라졌다.
밴드 베이시스트를 항상 여자로 채워서 밴드 여성 멤버들과 항상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입방아에 오를 때도 있다. 오리지널 멤버일때 다아시는 제임스 이하와 사귀다 깨졌으므로 설마 거기까지 마수를 뻗쳤을까 싶지만 즈완 시절의 베이시스트 파즈와는 실제로 사귀다 깨진 것이 확인되었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여성편력은 헐리우드 스타들의 비밀 마사지 클럽에 드나드는 장면이 공공연히 찍힐 정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제시카 심슨과 같이 있는 장면이 파파라치에 찍혔다. 베로니카스의 멤버인 17살 연하(!)의 제시카 오리글리아소와 사귄다고 페이스북에 인증했다가 지금은 페이스북을 접었다.
2015년 11월 16일, 코건과 그의 여자친구인 Chloe Mendel 사이에서 아들인 Augustus Juppiter Corgan이 태어났다.
2018년 10월 2일, 딸 Philomena Clementine Corgan의 탄생을 발표했다. (생일은 미정)
4.4. 프로레슬링 업계 진출
프로레슬링 마니아로 이전부터 유명했으며 자기가 직접 레지스탕스 프로라는 프로레슬링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14] . 2014년 말 TNA가 여러 병크로 휘청거리자 TNA를 구매한다는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 2015년부터는 TNA의 각본 담당 수석 프로듀서로 취임해 활동하면서, 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TNA 관련 질문에 답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이력 덕분인지 선수들을 자기 콘서트에 초청하며 선수와 단체의 인지도를 높혀주기도 했다. 2016년 8월 12일 결국 딕시 카터를 대신해 TNA의 새로운 사장이 된다. 그러나 음악씬에서 25년을 버텨온 양반이 이번에는 호구를 잡혀버렸다.. 결국 2016년말 퇴사하였다.
2017년 5월 1일 NWA를 전격 인수하였다.
5. 기타
대한제국 순종황제 시절 이후로 우승을 못하다 108년만에 우승한 모 야구단의 열렬한 팬이다. 심심하면 리글리 필드에 출몰하고 7회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부른다.
할머니가 상당히 깡촌 출신였다고 한다. 펌킨스의 첫번째 앨범 Gish의 제목은 할머니가 살던 고향 마을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 '''릴리안 기쉬가 열차 타고 마을을 지나갔다'''라는 에피소드에서 따왔다고 밝혔기 때문. 반대로 빌리 코건은 대도시 시카고 출신이다.
젊은 시절때의 모습이 마이 케미컬 로맨스의 리더로도 활동했었던 제라드 웨이와 상당히 닮았다, 본인도 그걸 의식하고 있었는지 한 인터뷰에서 농담식으로 '''내 친아들이다'''라고 답하기도, 참고로 빌리 코건은 제라드 웨이보다 나이가 10살 더 많다.
2018년에 미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빌리 코건과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이 비슷하다며 빌리 코건이 테일러 스위프트의 친부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두 사람의 나이차는 22살이다.) 그러자 코건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의 딸이 될 수 없는 이유와 정신건강과 소셜미디어와의 연결 관계에 대해 장문의 글을 올렸다.
[1] 시카고에서 연주한 멜랑콜리 투어 오프닝 공연에서 칩트릭을 게스트로 부른 적이 있다.[2] '라디오헤드가 세계 최고의 밴드가 아닐지언정, 세계 최고의 밴드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3] 이런 경향은 영화 Lost Highway OST에 수록된 'Eye' 즈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4] 유튜브에 빌리 코건이 이 페달을 시연하는 영상도 있다.[5] Helix 멀티 이펙터에서 앰프 모델링 기능을 뺀 페달.[6] 부모 이혼 전에 생긴 친동생이 하나 있긴 한데, 제시랑 달리 언론에서 언급이 안 되는걸 보면 평범한 일반인으로 보인다. 참고로 동료였던 제임스 이하의 동생도 장애인이다.[7] 이 때부터 시작된 무한 까임에 지친 이하는 결국 코건과의 관계를 아예 끊어버리게 된다. 나중 일이지만.[8] 전작들은 악기를 각각 따로 녹음했다고 한다.[9]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하다. 즉, 450만개 x 2 = 900만장.[10] 다이시의 정신건강을 염려해서 제임스 이하는 코건에게 다이시를 밴드에서 탈퇴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4집 앨범의 베이스는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가 반반 맡아서 연주하였다. 이후 다이시는 4집 활동과 5집 녹음에 참여했지만 결국 5집 녹음 직후인 1999년에 코카인 중독으로 밴드에서 방출당했다.[11] 트랜스포머 1에서 미카엘라가 범블비를 뒤에 매달고 후진하는 장면에 나온다[12] 참고로 얼터너티브 네이션이란 웹진에 실린 독점 인터뷰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해당 매체는 한국 아이피를 차단하니 아이피 우회 접속을 해서 볼 것(...)[13] 빌리 코건은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커트 코베인은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한다.[14]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넘긴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