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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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에 위치한 적산가옥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가장 보존이 잘된 적산가옥으로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유명한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1]가 건축한 2층의 전통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그 규모나 관리 수준이 꽤 남다르다. 해방 후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가 한동안 후신인 한국제분이 지녀왔는데, 2016년 한국제분이 사조그룹으로 넘어갔음에도 팔지 않고 이용구 창업주 손녀가 갖고 있다. 2005년 6월18일 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화 타짜의 평경장의 집이 바로 이곳이다. 그 밖에도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촬영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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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많이 변형된 적산가옥. 아무래도 주욱 사람이 살아온 집이다보니 변형은 어쩔 수 없다. 창원시 진해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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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포항시에 위치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 전시관, 대문 너머 가옥의 형태가 많이 망가져 있다. 위의 사진은 과거 모습으로 현재는 말끔하게 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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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1가에 위치한 더하우스1932 카페. 1932년에 건축되어 조선인쇄주식회사의 사장이었던 일본인 고스기(小杉謹八)가 사택으로 사용하였고, 미군정장관을 지냈던 미합중국 육군 제24보병사단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육군 소장이 해방 직후 미군정시대에 살았던 주택. 건평 140여 평의 3층 규모의 건물로서 현재 리모델링되어 커피숍으로 사용되고 있다.
1. 상세
2. 역사
3. 특징
4. 분포
5. 관련 문서


1. 상세


敵産家屋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 혹은 '적들이 만든'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적들이 만든 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근대 및 일제강점기일본인이 지은 건축물을 뜻한다. 과거에 일본인 촌을 이루었던 지역엔 아직까지 꽤 많은 수가 남아있고, 사람이 사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거기다가 기와와 지붕만 일본식으로 바꾼 개량한옥을 찾아보면 어머어마하게 많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당연히 일본인들이 적산가옥에서 먹고 잤다. 물론 당시에는 당연히 적산가옥이라 부르지 않았다. 적산이란 '적의 재산'이란 뜻인데 일본인이 그런 단어를 쓸 리가... 당시에는 ''''문화주택''''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 의미는 '''서양의 건축 양식 및 구조 방식을 일식 양식에 버무려 설계한 집'''[2]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문화 주택들은 대부분 콘크리트 혹은 벽돌, 철근콘크리트 등의 서양식 재료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붕 부분에 목재로 만들어진 부분이 존재하는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일제가 이러한 건축물을 앞다투어 지어서 거주하려 했던 이유는 당대에 일본의 탈아입구 사상에서 비롯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양의 문물이 뛰어남을 인정하였고, 이를 앞다투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려 했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가 이만큼 서양의 문화를 흡수했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너희 같은 미개한 동양 문화에 집작하는 조선인들보다 우리가 훨씬 뛰어나다!'는 의미로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이 집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본으로 돌아가기 급급했고, 당연히 소유권이고 뭐고 붕 뜨자 적산가옥도 당연히 집 없는 한국인들이 차지했다. 도망간 일본인 지주 집에서 가재도구나 가구, 재봉틀 따위를 털어옴은 물론, 종업원이 가게, 심지어 사립학교까지 차지하기도 했다.[3] 6.25 전쟁 때 파괴되거나 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사라져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인들은 별 수 없이 돌아갔던 것일 뿐이지 소유권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일수교 얘기가 나오게 되었을 때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찾으려고 했다. 한일수교 이전에는 일본 정부 안에서 종종 '한국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4]도 나왔는데, 이럴 때마다 한국 여론이 분노했음은 물론이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반이라 논란이 있었다.[5] 결국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긴 이른바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명시해 이 문제는 끝났다.[6]
극소수지만 그냥 한국에 남아 한국인이 된 일본계 한국인도 있는데,(주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이나 혼혈아) 이들의 재산은 침해받지 않았다.

2. 역사


1910년 한일병합 체결 이래 일제는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착취기지로 정하고 조선의 물자와 농수산물 등을 일본으로 반출 및 착취를 했다. 1920년대 들어서 일본 현지에서 일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각지에 일인촌을 형성하여 일옥(日屋)을 지으며 살았는데, 이들은 조선도 일본땅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며 조선을 자기들의 장으로 만들려 했다.
1930년대 들어서 일옥들은 증가하게 되어서 조선 방방곡곡 일부에 일옥이 지어지게 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영토인 양 여기며 생활을 즐기거나 벚꽃 등을 심으며 놀이를 즐기는 등 조선을 자신들의 주색장으로 전락시키기에 이른다. 일옥 곳곳에는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점차 일본화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고 조선에 광복이 오자 일본인들은 새벽이나 밤에 조선인들 몰래 집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미군정에 의해 추방되었다. 일옥들은 빈 집으로 남게되어서 일부 조선인들에 의해서 불타거나 부서졌다. 1945년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이후 남한에 있는 일옥들은 미군정청령에 따라 미군정이 특별관리를 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령에 따라 남한에 소재한 일옥들 대부분을 국유지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으로 지정했다.

3. 특징


건축양식이 다른 만큼 외양에서 일반적인 주택과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데, 대표적인 특징을 들자면 겉으로 튀어나와있는 목재 구조, 2층이 1층보다 약간 튀어나와 있는 모습, 일본식 기와가 얹힌 지붕, 밖으로 돌출된 비대칭 형태의 창문 구조 등이 있다.

4. 분포


현재 남아있는 적산가옥은 과거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항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예를 들면 인천 중구[7]부평구, 전남 목포, 여수, 전북 군산, 충남 논산시 강경읍, 경북 포항시, 대구, 부산, 창원 등이 있다. 보통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처럼 보존의 목적으로 남겨진 곳도 있다.
서울특별시에도 의외로 많은 곳이 남아있는데 주로 중구, 종로구의 도심 지역과 서촌 일대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일본인촌, 특히 일본 육군 주둔지[8]가 위치했던 용산구 원효로, 용문동과 신용산, 후암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서울역 바로 뒤편에도 적산가옥 거리가 있었는데 신역사를 지으면서 전부 정리되었다.
군산의 이영춘 가옥은 조선 최대의 일본인 지주였던 구마모토의 별장이었는데, 양한일식이 혼재되어 있지만 기본은 적산가옥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군산시 히로쓰가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들도 있는데, 본래 지역명에 해방 전 소유주 이름을 붙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가, 2009년 9월 1일 문화재청 공고 제2009-157호에 의거 명칭이 '(지역명) 일본식 가옥'으로 변경되었다. 희귀한 예이긴 하지만 동국사처럼 주택이 아닌 절 등이 남은 예도 있다. 심지어 벌교읍에는 '보성여관'이라는 일본풍 여관도 남아있다.
부산광역시에도 원도심을 중심으로 적산가옥이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원도심 일대에는 부산항이 있었고 부산항에는 일본을 오고가는 연락선이 다녀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는 재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진 곳이 있으나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 아직까지 가옥이 존재하는 곳도 많다.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적산가옥으로는 동래별장을 들 수 있는데 현재는 고급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 가수 아이유의 밤편지, 악동뮤지션의 사춘기 뮤직비디오 촬영지인 수정동 정란각도 적산가옥이다.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 초량동에도 적산가옥이 있으며 현재는 카페로 운영중이다.
대구 도심에도 수많은 적산가옥과 일제시대 건물들이 남아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당시에 파괴된 건물들이 적기 때문에 남아있는 건물들이 많다. 특히 북성로와 경상감영공원 일대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 거주구역이었던 터라 더욱 많다. 다만 일부 건물들을 제외하면 관리상태는 매우 나쁘다. 최근에는 여러 가옥들을 복원 후 보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부 건물들이 외관 복원 후 위안부 역사관이나 북성로 공구박물관, 미술관 등으로 재개장했고 개인으로도 중구의 지원을 받아 카페 등으로 개업하는 등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대구시가 북성로 일부에 재개발 승인을 쉽게 받아들여 버렸고 그만 철거가 되어서 거리의 원형을 잃었다. 이러한 대구시의 행정에 당황스럽게 느끼는 시민들이 대부분.
경남 지역으로 창원시 진해구의 주요 건물들이 일본 해군에 의해 지어져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본청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진해 지역 민간 가옥들도 일부 남아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하동군에도 적산가옥이 있으며 현재는 매암차문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방의 주요 철도역(대전역, 순천역, 영주역 등) 근처에 있는 관사촌에는 적산가옥 수십여 채가 남아있기도 하다.
영화 장화홍련에서 스토리의 배경이 된 수미와 수연의 집도 적산가옥이다.
대만에도 일본 제국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적산가옥이 남아있다. 6.25와 같은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보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이런 집에는 대체로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몰려든 외성인들이 기거했다. 예를 들어 타이베이 외곽에서 온천으로 유명한 신베이터우역 근처를 보면 온천 박물관이나 지금도 목욕탕으로 영업하는 룽나이탕 건물 등 완전히 일본식 건물인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2019년 1월,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전남 목포의 소규모 적산가옥 20여 필지를 매입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및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관련문서 참조.

5. 관련 문서




[1] 포목상이 아니고 미곡상이었으며 히로쓰 기치사부로가 맞다는 연구가 있다.#[2] 이를 이른바 화양절충(和洋折衷)이라고 한다.[3] 이때 기업이나 공장도 종업원이 차지해서 해방 후 몇달 간은 자체적으로 노동자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공동운영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미군정은 좌익 세력 성장을 우려하여 없던 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 공장들과 알짜기업들은 이승만 정권 때 들어서까지 자본가들에게 불하되었다.[4] 이 발언은 당시 한국에서 종종 나오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 여론에 대한 맞대응이기도 했다.[5]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원문 '제2장 영토' 부분 참조.[6] 사실 현실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해도, 거기서 영구적으로 생활하려면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7] 중구 구청 건물 또한 일제강점기 인천부청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8] 현재의 미 육군 기지 자리에 과거 일본 육군 기지가 위치했으며 남영이라는 지명이 여기서부터 유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