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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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몬테네그로의 옐레나의 고명아들로 출생했다.
5월 초에 즉위해서 한 달만에 폐위당하는 바람에 5월 국왕(Re di Maggio)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2. 생애
2.1. 왕세자(피에몬테 공작) 시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외아들로 태어나 왕세자 지위인 피에몬테 공작이 되었다. 왕세자 시절엔 왕실 인사 자격으로 남미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방문했다.
1929년 벨기에의 마리 조제 공주[2] 와 결혼했는데 혼사 관련해 벨기에를 방문했을 당시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움베르토 2세는 동성애자였고, 사랑이 싹 틀 여지가 없던 부부 관계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식 당일 밤에도 두 부부는 합숙하지 않았고, 움베르토 2세는 난음파티에 참석했었다고 한다.[3] 마리아 조제는 무솔리니와 염문설이 돌기도 하였다.[4] 움베르토 2세는 젊은 군 장교나 운동선수, 영화계 인물들과 사귀었고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라이터, 보석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무솔리니 집권기에는 부왕과 다른 왕족처럼 무솔리니에 협조적이었는데, 1920년대부터 왕실관련 자료들을 모은 무솔리니가 동성애자였던 움베르토 2세를 아웃팅하겠다고 협박했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이탈리아 남프랑스 침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협조 아래 무솔리니 정부 추진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지만 졸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했으나, 동시에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여 연합군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탈리아는 커다란 전쟁 피해를 겪었다.
무솔리니 정부의 실책으로 파시즘 세력만이 아닌 왕가까지 많은 반감을 사게 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움베르토 2세를 섭정으로 임명해 국왕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이양했다. 그는 새로 재편된 정부와 함께 연합군에 적극 협조하여 대(對)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전쟁을 수행했다.
2.2. 정체 논쟁과 즉위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을 용인했기 때문에 종전 후 그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이에 좌파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화정 수립 여론이 다시 크게 고개를 들었다. 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개인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정권에 협조했으며 물질적 안락을 누리며 생활한 사보이아 왕가 전체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다. 사보이아 왕가는 전쟁 말기 연합군 본토 진공 작전 시기에 이르러서야 무솔리니를 버렸으며, 이는 사회정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왕실 보전과 이탈리아 구(舊) 체제 보전을 위해서였다. 특히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던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및 그 지지자들은 파시즘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라 왕정에 대한 반감도 극심했다.
이탈리아 사회당[5] , 이탈리아 공산당, 행동당(Partito d'Azione) 등 좌파가 주도하는 공화정 추진 세력은 공화정 수립을 실현하고자 왕가를 파시스트 협력자로 비판하고 이 기회에 왕정을 폐지하자며 개헌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기독교민주당 내 자유주의자들은 좌파만큼 국민투표 추진에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당시 기독교민주당 소속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도 자신이 수장을 맡고 있는 연립정부[6] 내 개헌 국민투표 제안에 동의했다. 개헌 국민투표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것이냐 아니면 왕정을 유지하느냐는 것이냐였다.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아 왕가 일원 중에서 그나마 전쟁 뒷수습에 노력한 편이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달리 왕당파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왕정 유지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나마 인기 있는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했다.
움베르토 2세는 물론 왕정 유지를 주장했지만 개헌 국민투표 자체는 수용했고 이탈리아인들의 민의에 따르겠다고 공언했다. 움베르토 2세는 왕정 지지 성향이 강한 가톨릭 교회와 남부 지역 지지를 등에 업으면 개헌 국민투표에서 약간의 표차로 승리해 왕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움베르토 2세는 즉위 즉시 대규모 사면을 단행하고 이집트를 국빈 방문하는 등 개헌 국민투표 및 총선 선거운동 동안에도 왕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행동당(Partito d'Azione) 등 좌파는 당연히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적극 찬성했고, 중도우파 성향 기독교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이었으나 당 내 자유주의자들[7] 을 중심으로 공화정 수립 찬성 여론이 일었다. 왕정 유지 측에서는 국가자유블록(Blocco Nazionale della Libertà)[8] 등 노골적 우익 왕당파 정당·가톨릭 교권 세력[9] ·일부 파시스트 잔당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했고, 구체적인 지지 정당을 떠나 남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움베르토 2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왕정 지지를 호소할 때 남부에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북부에서는 면박·야유를 보내거나 심하면 살해 협박을 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헌 국민투표 유세 중 공화파와 왕당파 둘 다 네거티브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공화파 일각에서는 움베르토 2세를 동성애자라고 인신공격해서 보수적인 왕당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고, 왕당파 일원이었던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 vs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2.3. 국민투표와 왕정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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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2세의 바람과는 달리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에서 54% 대 46%로 왕정 폐지가 확정되었다. 전체 투표자 54%가 공화정 수립에 '''투표'''했으며, 동시에 진행된 총선에서는 친(親) 공화정 후보[10] 들이 대거 당선되어 전체 당선자 중 압도 다수를 차지했다. 움베르토 2세는 투표 결과를 두고 장관들의 쿠데타(?)라고 비난했지만 왕정 폐지에 저항하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고[11] 어차피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도 별로 없었다.
전통적으로 공업 발달이 미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찍 해방돼 레지스탕스 활동이 미약했던 이탈리아 남부는 왕정 지지도가 북부에 비해 높았지만 투표율이 낮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지하 활동이 활발했고, 일찍이 공업이 발전하여 노동운동이 활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활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이탈리아 북부는 '''다수가 왕정 폐지'''에 투표했다. 특히 전쟁 말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붕괴와 무솔리니 죽음의 직접적 기폭제가 된 대규모 시위·봉기가 일어났던 토리노, 밀라노, 베네치아 등 북부 주요 도시는 '''압도적으로 왕정 폐지에 투표했다'''. 이는 무솔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 실책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용인하고 후원했던 사보이아 왕가에 대한 반감이 저항 운동에 적극 참여한 북부를 중심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움베르토 2세는 국민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쥐트티롤 지역, 트리에스테 지역, 이탈리아군 출신 포로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당시 법무장관이자 공산당원이었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12] 가 중립 의무를 위반했으며 투표 결과가 일부 조작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했다. - 그러나 투표 조작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그의 이의제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6월 12일에 이탈리아 정치권은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고, 6월 18일에는 이탈리아 대법원이 움베르토 2세의 소송을 기각하여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은 왕가를 추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보이아 왕가 모든 남자 구성원과 왕비 마리아 조제의 이탈리아 입국을 금지했다.
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왕정 지지 여론이 더 높았던 남부 나폴리 등에서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왕정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부 과격 왕당파는 무력으로 공화국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움베르토 2세는 국가 분열과 내전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13] 왕정 유지에 투표한 유권자도 대부분 내전을 감수할만큼 왕정 유지에 사활적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해방의 한 축인 연합국 측에서도 왕정 폐지로 인한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6월 13일에 움베르토 2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등 다른 왕가 구성원과 함께 망명을 떠났다.
2.4. 망명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망명지가 이집트인 것과 달리 움베르토 2세 본인은 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났으며, 망명지에서 포르투갈 구(舊) 귀족[14] 및 파시스트들과 교제하며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마리아 조제는 별거에 들어갔고 곧 혼자서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별거했음에도 두 사람은 정치적·종교적[15] 이유로 이혼하지 않았다. 별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타인과의 염문설이 도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 사이가 전쟁 패전과 왕정 폐지를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붕괴하자 마리아 조제가 먼저 떠났던 제네바로 이주해 그곳에서 1983년에 사망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사망 때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일체 조문하지 않았다. 사망 당시 몇몇 정치인이 그의 유해를 국내로 운구하자고 제안했지만, 좌파 정치인들이 크게 반발했고 다수 여론 또한 그 유해의 국내 운구에 부정적이었다. 움베르토 2세의 유해는 사보이아 왕가 일원들이 대대로 매장되어 온 프랑스 사부아의 오트콩브 수도원(Abbaye Royale d'Hautecombe)에 매장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마리 조제가 죽은 다음 해인 2002년 11월에야 의회 표결을 통해 사보이아 왕가 남자 구성원의 이탈리아 입국을 허가했다.
3. 가계도
둘 사이에는 자식이 넷이 있었고 모두 인공 수정을 통해 임신하였다고 왕실이 직접 인정하기도 하였다.
[1] 풀네임은 Umberto Nicola Tommaso Giovanni Maria di Savoia[2] 이탈리아어: Maria Jose del Belgio(마리아 요세 델 벨조), 프랑스어: Marie-José de Belgique(마리조제 드 벨지크), 알베르 1세의 딸이자 레오폴드 3세의 여동생[3] 참고로 결혼식에 마리 조제 공주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움베르토 2세가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라고 한다.[4] 이에 대해 클라라 페타치는 자신의 일기에 마리아 조제가 먼저 무솔리니를 유혹했다가 실패했다고 적었고, 무솔리니 아들은 그녀와 자신의 아버지가 짧은 기간 로맨틱한 사이가 되었지만 문제가 되자 아버지 쪽에서 먼저 정리했다고 주장했다.[5] 파시즘 정권 시기 이탈리아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다. 전쟁 전에는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반(反) 파시즘·반(反) 정부 활동을 조직하는데 주력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공산당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 조직에 앞장섰다. 무솔리니 집권 전에도 국가 파시스트당 당원의 백색테러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무솔리니 집권 중 전쟁 전에도 수 천 명 당원들이 수감당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에는 많은 당원이 파시스트와 독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전후 사회에 대한 구상에 있어 공산당과 차이가 있었지만, 파시즘에 대한 증오와 왕가에 대한 반감에 있어서는 공산당과 별 차이가 없었다.[6]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립정부에 입각해있었다.[7] 후에 '기독교민주당 좌파'로 지칭되는 세력이 된다.[8] 개헌 국민투표와 같은 날 치뤄진 1946년 총선에서 2.77%를 득표하고 16석을 획득했다.[9]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투표 전날 직접 성 베드로 광장에 나가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10] 공식적으로 공화정을 지지하는 정당들의 후보자 및 당 차원에서는 공화정 지지를 택하지 않은 정당에 속해있지만 본인은 공화정에 호의적인 후보자들.[11] 전후 왕가는 이탈리아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12] 후에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반(反)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했다. 1964년 톨리아티가 죽자 소련은 사마라주 '스타브로폴나볼게'시 이름를 그의 이름을 따 톨리야티로 개칭하였다.[13] 당시 남부가 전반적으로 왕정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고 하지만 남부의 공화정 지지 여론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으로 낮은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도시 지역은 공화정 지지가 만만찮게 있거나 오히려 왕정 지지보다 높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파시즘을 용인했던 이탈리아 재계도 분열과 내전을 원치 않고 있었다. 만약 일부 왕당파가 실제로 국가 분열을 시도한다면 얼마나 물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상황이었다.[14]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이탈리아 구(舊) 체제에 호의적이었지만, 망명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왕정과 신분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개헌한 지 한참이었다.[15] 두 사람 다 종교가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