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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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東權
1932년 10월 30일[1] ~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여담


1. 개요


전두환 정부에서 검찰총장, 노태우 정부에서 안기부장을 역임한 관료, 법조인. 본관은 대구(大丘)[2].
노태우 정부 중반기에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2년 반을 장기 재임하면서, 북방외교에 앞장섰으나 공안정국에 가담했던 상반된 행적을 남겼다.

2. 생애


1932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3]#에서 순조 때 종3품 사간원사간(司諫)을 지낸 서낙순(徐洛淳)의 5대 종손인 아버지 서승원(徐升源)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조경(鄭祚鏡)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일제강점기 때 자천보통학교(현 자천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서울미동초등학교에 전학 와서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청 사회과장을 지냈는데, 그가 13세이던 1947년 9월 10일 강화도에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서울특별시에서 운전자의 과실로 인해 교통사고로 숨졌다.
아버지의 별세 이후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로 내려와 1952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노태우와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같은 해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했다.
고려대 법과대학 재학 시절은 동란 후 어수선한 시국이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면서 시국에 대한 걱정과 토론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이 많았다. 당시 경북고-고려대 법과대학 1년 선배였던 유수호와 하숙을 같이 했는데,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도 항상 방에 불이 켜져있던 유수호를 보면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고시 합격을 목표로 뒤늦게 공부대열에 합류하였다.
그 결과 고려대 법과대학 재학 중이던 1956년에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군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196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26년 동안 몸을 담았다. 1962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64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1965년에는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지청장을 지냈고, 1967년에는 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지청장을 지냈다.
1973년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승진했고, 1975년 서울고등검찰청으로 올라왔다. 1980년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를 거쳐, 1980년 대한민국 법무부 송무담당관 겸 대검찰청 검사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검찰 재직시 스케일이 크고 소탈하면서도 일처리에는 치밀하고 섬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부정 환급사건을 말끔하게 처리했고 유/무죄를 놓고 논란이 많았던 덕성여대 메이퀸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 유죄를 확정지었다.
1981년 법무무 보호국장을 역임했고, 1981년에는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되었다. 1981년 4월부터 1981년 12월까지는 제24대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그 후 1982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되었으며, 1985년 2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제20대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무려 2년 3개월 동안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장수했으나, 재임 당시 5공 정권 하에서 가장 큰 인권침해사건으로 꼽히는 권인숙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5]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따른 문책성 인사로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정계로 자리를 옮겨 1987년 6월에 민주정의당 국책평가위원을 잠시 맡았다. 그 후 1987년 10월부터 1989년 7월까지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전임 박세직의 뒤를 이어 제17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무려 3년 6개월간이나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2인자 노릇을 하였고, 이른바 '북방외교'를 주도하였다. 전쟁까지 치렀던 주적 북한을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포용하고 북한과의 교류와 왕래, 그리고 교역의 길을 트자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 당시 동구권 국가들이 연이어 붕괴하면서 "북한도 붕괴시켜버리자"는 의견이 보수진영에서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의견을 극복하고, 1990년 9월 서울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 1990년 10월 평양 주석궁에서 열린 제2차 남북 고위급 회담의 실무를 담당하는 등 한반도 평화무드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표되었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이뤄졌다. 남북관계의 큰 진전이 이루어진 것. 이런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비밀특사로 여러차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났다고 한다.# 1991년 10월초에는 비밀리에 북한으로 들어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직전까지 갔으나 아쉽게 좌절되기도 했다.[6]
그외에도 중국, 러시아, 동구권과 수교하는 데 힘을 써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중국 특수를 불러오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혹자에 따르면 안기부장 재직 당시 국내 첩보활동을 강화하면서 광범위한 도청을 지시하였다고도 한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의 만 달러 수수 혐의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이 194석에서 149석으로 45석이나 줄어든 성적표를 받아들자[7] 안기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8] 그 뒤 1992년 6월에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로 자리를 옮겨 정치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를 나와 동서법률문화연구소에서 대표변호사를 지냈다.
1998년 4월부터는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

3. 가족관계


  • 둘째 딸 서은숙(徐銀淑)은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으며, 둘째 사위 남순열(南淳烈)[9]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셋째 딸 서하진(徐河辰)[10]은 《라벤더 향기》 《책 읽어주는 남자》 등을 쓴 소설가이며, 셋째 사위 박진헌(朴辰憲)[11]은 사업가이다. 첫째 사위 유종열(劉種烈)[12]한국은행 기획국장, 미래에셋생명 상근감사를 지냈다#.

4. 여담


  • 역대 정보기관 수장들이 퇴임 후 수난을 면치 못한 것과는 달리, 퇴임 후에도 별다른 외풍을 맞지 않았다. 전직 안기부장들이 흔히 당하곤 하던 구속은커녕 불구속 기소조차 당하지 않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후원회장을 맡았다. 이로써 한때 경북야구의 황금기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1] 음력 10월 2일.[2] 봉사공 경치(景穉)파. 대구 서씨 29세 동(東) 항렬.[3] 대구 서씨 집성촌이다. 정도영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어머니 연일 정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풍천 임씨 임동순(任彤淳)의 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5] 성고문 사건의 경우 수사결과 발표시에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박종철 사건의 경우도 서동권은 사건의 진실을 미리 알았으나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하며 덮어두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5공화국은 독재정권의 특성상 정보기관의 영향으로 굵직한 시국 사건들에 대해서는 검찰의 정치적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경찰이 물리력 행사가 가능하다보니 학생 운동권 탄압 등 공안 사건에서 경찰보다도 뒤쳐질 때가 많았다. [6] 당시 노태우 정권 내의 매파들이 북한과의 상호불가침협정 체결 및 연방제 수용에 반대하여 결렬되었다고 한다.[7] 당시 정주영 통일국민당의 돌풍에 민자당이 직격탄을 맞았다.[8]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정형근이 주도하여 뿌린 안기부 흑색선전 유인물 800장때문에 물러났다는 말도 있다.[9] 영양 남씨이다.[10] 본명 서덕순(徐德順).[11] 밀양 박씨이다.[12] 진주 유씨(晋州 劉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