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고르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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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해군 총사령관직을 1956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맡았던 소련 해군 제독.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이 소련 해군의 아버지라면 고르시코프 제독은 사실상 '''소련 해군의 어머니이며 냉전시기와 세계 2위 전력을 자랑하는 현대의 소련-러시아 해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성장
고르시코프는 1910년 2월 26일 우크라이나(당시에는 제정 러시아)의 카메네츠-포돌츠크에서 태어나서 모스크바주의 콜롬나에서 자라 1927년 17세에 소련 해군에 입대한뒤 1931년 프룬제 해군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후 흑해함대의 구축함 프룬체의 항해사로 근무하다가 1932년에 태평양 함대 기뢰전 함선 톰스크에 배치되게 된다. 그 이후 여단장을 역임하며 1937년~1941년 소련 해군 지휘관 코스를 졸업하고 31살에 최연소 제독이 된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이 발발한 1941년 10월에 아조프 소함대 사령관에 임명되고, 케르치 반도 상륙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1년 뒤 1942년 9월에 제47군을 임시 지휘하여 노보로시스크를 방어, 1943년 아조프 소함대에 복귀한 뒤 그해 말에 다뉴브 소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44년 10월 흑해함대 전대 사령관이 된다.
2.3. 전후
2차 대전이 끝난뒤에는 1948년~1951년 함대 참모장, 1951년~1955년 흑해함대 사령관, 그리고 1955년~1956년 해군 부사령관을 역임한다.
그리고 대망의 1956년,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의 후임으로 소련해군 총사령관과 국방차관에 취임하였다.[1]
2.4. 해군 총사령관 시절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군비 증강 기조에 힘입어 그야말로 아무것도 별 볼일 없던 소련해군을 그의 부임기간 동안 '''2위'''로 만들어놓는다. 고르시코프는 막강한 해군력을 지닌 서구에 대항하기 위한 대양해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했고 그 결과 핵잠수함, 탄도미사일 잠수함, 항공기 발사형 대함미사일, 해상작전헬리곱터 등이 포함되었고 소련의 순양함들은 본격적으로 북해와 지중해와 같은 대양으로 진출해 소련 군사력의 힘을 과시했다. 1965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고 1967년에는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소련함대제독(해군 원수)으로 승진한다.
소련 해군의 균형함대 발전론을 주장하면서 1970년 크반트 연구소를 방문해 소련 해군용 Carat 컴퓨터의 개발을 의뢰하는 등 그야말로 소련 해군을 위해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고르시코프가 폭발적으로 성장시켜놓은 소련 해군은 서방세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 내부에선 1975년 순양함 격차 논쟁와 같은 정치적 논쟁까지 벌여졌다.
사실상 소련 해군의 교리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냉전 시기 소련 해군, 그리고 현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그가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가 주장한 소련 해군의 전략은 상시 전 세계 바다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불가능한 목표를 포기하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해역만을 장악한다는 전략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런 개념이다.'''"우리가 이제 영국 본토를 탈탈 털껀데 잠시 도버 해협 앞으로 애들 죄다 모아서 도버 제해권만 장악하면 되겠지?"'''
이런 전략을 주장하게 된 이유에는 미사일과 잠수함의 발달이 있다. 고르시코프는 미사일과 원자력 잠수함의 발달로 해상 어디에서라도 기습의 위험을 피할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이 전략은 냉전 시기 내내 소련 해군의 정식 교리였다.
어찌되었든 고르시코프의 공로로 소련은 냉전시기 미해군을 제외한 나토 해군 전체를 압도하는 수준의 '''수십척의 핵추진 잠수함과 탄도미사일 잠수함을 운용하게 되었으며''' 특히 1972년에 등장한 델타급 잠수함은 소련의 연안에서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체계였다. 소련의 수상함 전력도 기존 2차 세계대전 형 구식 구축함, 순양함, 소형함 위주였다가 키예프급,킨다급 및 크레스타급 미사일 순양함들을 비롯한 현대식 함정들로 전력이 증강되더니 1980년대 초반 부터 키로프급 핵추진 순양함, 슬라바급 순양함과 같은 막강한 대형함들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폭격기 전력도 현대화되어 수백대에 달하는 Tu-16,Tu-22M 폭격기들이 KH-22 초음속 대함미사일들을 탑재하고 미국 항모전단을 겨냥했다. 대양 곳곳에는 소련의 정찰기들과 정보수집선들이 미해군을 감시했고 우주 공간에는 소련의 해양정찰위성들이 미해군의 동태를 추적했다.
1982년, 또 한 번 소비에트연방영웅칭호를 받아 2중영웅이 되었고 1985년에 국방부 감찰단장으로 이직한 뒤 1988년 모스크바에서 별세했다.
소련 붕괴 이후 경제도 붕괴되면서 신생 러시아 연방은 어쩔 수 없이 고르시코프가 남겨둔 유산 상당부분을 스크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고르시코프의 유산은 러시아 해군 전력에 큰 보템이 되었고 그 덕에 소련 해군에 비해 규모가 매우 축소된 러시아 해군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중국 해군의 급격한 팽창 이전까지 한동안 세계 2위의 해군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3. 여담
저서도 제법 있는 편인데, 일단 가장 우리가 잘 아는 것으론 <국가의 해양력>이 있다. 국내 번역도 되었기 때문에, 해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할 책. 다만 가짜 전쟁의 개념을 몰라 오역을 하거나 영문의 문장구조를 잘못 파악해 독소전 개전 초기 상황에 대한 서술을 엉뚱하게 서술하는 등 곳곳에서 번역이 엉망이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역자가 번역한 영역본을 구해 읽는 것을 권한다. 러시아어가 가능하다면 러시아어본을 구해서 읽는다면 한역본에서 나타나는 무의미한 용어 구분에서 오는 혼동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소련인이 쓴 만큼 영미까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까진 않는다. 사실 영미보다는 지상군 위주의 국내 전략가들을 더 많이 깐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저서가 있지만 일단은 <국가의 해양력>이 가장 유명하며, 구하기 쉽다. 이 책은 1999년에 번역출판되었으며, 여기저기 도서관에 많이 비치되있고 2016년 현재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소련 해군의 아버지이자 전임자인 쿠즈네초프 제독과는 사이가 무척 안좋았으며, 고르시코프는 쿠즈네초프의 원수 복권을 강력히 반대해 결국 쿠즈네초프의 복권을 막았다. 대표 저서 <국가의 해양력>에 소련 해군의 활약상을 쓴 편에서도 쿠즈네초프가 장관이었음에도 그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 해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중국 해군력의 발전을 이끌었던 류화칭 제독이 195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의 보로실로프 해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을 당시, 고르시코프의 지도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류화칭 제독의 별명은 '중국의 고르시코프'다.
그 유명세는 미국에도 알려져 고르시코프는 군사소설가 톰 클랜시의 출세작 붉은 10월에 실존인물로 등장한다. 마르코 라미우스 대좌가 쓴 잠수함 관련 논문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라미우스의 유능함을 인정해 그를 최신예 타이푼급 전략원잠 붉은 10월 함의 함장으로 출세시키는 사람으로, 라미우스가 붉은 10월호를 몰고 미국으로 망명하려 하자 결국 붉은 10월을 격침시키기로 결정한다.
러시아 해군은 고르시코프를 기리는 의미에서 키예프급 항공모함 4번함의 함명을 바쿠 함에서 아드미랄 고르시코프 함으로 변경했으나, 해당 항공모함이 인도에 매각되어 인도 해군의 비크라마디티야함이 되자, 현재 건조중인 차기 호위함을 어드미럴 고르쉬코프급으로 명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