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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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2] 의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또한 2019년 전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3]#
1873년 4월 1일 러시아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출생하여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했다.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4] 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부조니, 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악파 성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5] 피아노 협주곡 4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이외의 곡도 다수 작곡했으며, 피아노 협주곡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에 가까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나[6] 〈보칼리제〉 등의 곡도 광고 등에 흔히 등장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주 스타로루스키에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총 3남 3녀를 낳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그 중 4번째 자식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부친은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이었으며 모친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로 결혼시에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유복했다.
다른 상당수의 유명한 음악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어린시절부터 일찍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세때 자청해서 피아노를 배운 이후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리아빈의 에튀드 5번을 무려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로는 2, 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만에 완성했다고 한다.[7]
그 후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압도적인 '''비판'''을 받으며[8] 그 충격으로 후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9]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다.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 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이 곡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10]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을 고친 방법은 '자기암시 기법'[11] 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 다만 이 곡의 1악장은 정말 우울증이 치료된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격정적이며,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악절이 상당히 많다.
이 곡은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박사[12] 에게 헌정되었으며,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1901년 11월 09일 초연되었다.[13]
뒤이어 1909년에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 (악보와 함께 듣기) 극악의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많은 피아니스트 지망생들, 심지어는 프로 연주가들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곡.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14]
영화 샤인에서는 데이비드 헬프곳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분열정동장애를 일으켰다고 묘사된다(헬프곳의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연주 듣기).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는 과장된 면이 있다. 가장 난해한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카더라도 도는데, 기교적으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보다 프로코피예프 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더 어렵다. 그리고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라흐마니노프의 피협 3번 레코딩이 존재한다.[15] 그 중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 직접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호로비츠의 연주들이 유명하다.[16] 연주의 난이도로 특히 유명하긴 하지만 작품성도 이전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실험적인 부분이 돋보이는 훌륭한 곡이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매우 높게 샀는데,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미국에서 살며 적은 수의 작품만을 남긴 채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굉장히 유명했다. [17] 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큰 나머지, 2~3년정도의 연습을 통하여 정식으로 연주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 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큰 손은 마르팡 증후군[18]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이와 더불어 손가락의 관절도 굉장히 유연해서 오른손 2, 3, 4, 5번 손가락으로 도-미-솔-도의 C코드를 짚은 뒤 '''엄지를 손바닥 아래로 밀어넣어 1옥타브 위의 미를 짚을 수 있었다'''.[19]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20] 그렇기에 그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을 주제로 하는 이런 # 연주 겸 콩트도 있다.[21]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인기를 끈 이유가 '큰 손'뿐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고 유연한 손으로 구사할 수 있는 기교, 테크닉적 완성도'와 '큰 몸으로 낼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등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있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 작곡가로서[22]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그러나 작곡가 본인의 해석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연주자들의 해석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23]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24]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25]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에는 크게 종교(종소리)와 우울증(죽음), 그리고 러시아가 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가 어렸을 때 정교회의 예배나 니주니-노브고르드 성당에서 들었던 종소리에 영감을 받았다고 했었고,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 피아노협주곡 2번 1악장의 도입부 특유의 피아노 타건과 합창교향곡 "종"[26] , 전주곡 3-2 '종'[27] 등등... 교회의 종소리와 정교회의 엄숙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기악곡에 묻어나오는 종교적 색채 외에도 종교에 관련한 작품도 많이 작곡했다. 우울증은 앞에서 언급했던 교향곡 1번의 혹평으로 3년 간 슬럼프인 것도 있지만, 지주였으나 방탕한 삶을 살아 가정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와 평소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 슬럼프 시기에 사촌이랑 결혼한 것에 대한 정교회의 비난 등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환경에서 심적으로 억누르는 요소가 정말 많았다. 또한 조국이 소비에트 혁명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그는 죽을 때 까지 조국을 그리워했다. 조국을 떠난 후 했던 인터뷰나 평소의 의식주도 그렇지만 음악적으로도 '러시아인다웠다'고. 그가 망명 후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4번과 그의 마지막 작품 "교향적 무곡(춤곡)"에서는 러시아 특유의 서정성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요소들이 작곡가가 명곡을 뽑아내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이 외에도 작품관을 관통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그레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의 동기가 존재한다. 그의 많은 작품이 이 동기를 내포하고 있거나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예시로는, 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파가니니의 주제에 대한 광시곡, 전주곡 op.32 no.4, 죽음의 섬, 그리고 교항적 무곡 3번이 있다. 이 중, 죽음의 섬과 교향적 무곡 3번은 아예 이 동기를 주선율로 삼아 곡을 완성시킨다.
2011년에 호주의 라임라이트 매거진이 현존하는 유명 피아니스트 100인에게 (그리고리 소콜로프, 안드라스 쉬프, 알프레드 브렌델, 등) 자신들의 우상을 뽑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1위를 했다. (2위부터 5위까지 호로비츠, 리히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에밀 길렐스). #
▲ 영화 샤인에 소개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의 카덴차 연습 장면. 두 개 존재하는 카덴차 중 Ossia 버전이다.
생애 전반과 사후 몇십년간 끊임없이 비판과 저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살롱 음악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들은 과거의 작곡법을 답습하기만 했을 뿐 그 어떤 음악적 발전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후 30년정도가 지난 70년대에야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은 인터뷰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매우 긴 시간동안, 또는 영원히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3. 주요 작품 및 특징
▲ 교향곡 2번 3악장 Adagio. 아름다운 목관과 현악의 울림으로 유명하다. 이 곡 덕분에 글린카 상을 받게 된다.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제 18변주. 피아노는 발렌티나 리시차(Valentina Lisitsa).
'''198cm의 키,''' 매우긴 팔, '''13도를[28] 넘는''' 넓고 두툼한 손이라는 작곡가 본인의 사기적인 신체 스펙이 반영되어 있다.
10도 이상으로 손을 찢으며 건반을 4개 이상을 누르는 옥타브와 굳이 넣지 않아도 됐을 음표가 떡칠되어 있고[29] , 이 모든 것을 모두 물 흐르듯이 표현해야 한다. 이러니 솔직히 말해 아무리 타고난 테크닉과 센스가 있어도 신체적 스펙이 받혀주질 않으면 친다 해도 한계가[30] 들린다.[31]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곡들을 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과시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였고 그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 어떤 어려운 패시지도 산만하게 들릴 정도로 간단하게 흘려보낸다. 심지어 그 악명 높은 3번 협주곡조차도! 따라서 이는 그냥 천재의 무심함의 산물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면모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3번 협주곡의 작곡 일화인데, 자신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사랑하는 친구인 요제프 호프만를 위해 3번을 선물/헌정했으나, 호프만의 손이 옥타브를 겨우 집을 정도로 작다는 것을 전혀 배려하지 못했다(...).
문서 전체에서 피아노 곡 위주로 서술되었지만, 여러 다른 악기들을 이용한 작곡도 많이 했다. 그와 함께 낭만시대 피아노의 본좌 취급을 받는 쇼팽[32] 이나 리스트[33] 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작곡 스타일도 다양해서, 현악사중주 1번의 2악장 스케르초는 많은 대표적인 작품들이 대체로 암울하고 어두운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발랄하다. 현악사중주 1번은 1, 2악장 모두가 명곡이니 그의 초기곡들을 듣고 싶다면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3.1. 교향곡
3.2. 관현악
- 스케르초 D단조 (1887)
- 교향시 로스티슬라브 왕자 (1891)
- 교향시 바위 Op.7 (1893)
- 교향시 보헤미안 카프리스 Op.12 (1894)
- 교향곡 제1번 D단조 Op.13 (1896)[34]
- 교향곡 2번 E단조 Op.27 (1908)
- 교향시 죽음의 섬 Op.29 (1908)[36]
- 교향곡 3번 A단조 Op.44 (1936)
- 교향적 무곡 Op.45 (1940) : 작곡가 최후의 작품.
3.3. 실내악
- 현악 4중주 1번 (ca. 1890) (2악장(로망스, 스케르초)만 작곡함)
- 슬픔의 3중주 1번 G단조 (1892)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2개의 소품 Op.2 (1892)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살롱 소품 Op.6 (1893)
- 슬픔의 3중주 2번 D단조 Op.9 (1893, 1913년 개작)
- 현악 4중주 2번 (ca. 1896) (2악장(알레그로 모데라토, 아다지오 몰토 소스테누토)만 작곡함)
- 첼로 소나타 G단조 Op.19 (1901)
3.4.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F♯단조 Op.1
-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 Op.30
- 피아노 협주곡 4번 G단조 Op.40
- [37]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Op.43
3.5. 피아노
- 환상적 소품 Op.3 (1892): 이 중 2번 전주곡 C♯단조가 가장 유명하다. 이 곡은 굉장한 인기를 끌어 라흐마니노프의 연주회 때마다 청중들이 연주해주길 원했고,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반복되는 연주 끝에 결국 이 곡에 싫증이 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모음곡에서 전주곡이라는 제목은 의미상 첫 곡에 와야 정상이다. 이 곡이 Op.23과 Op.32처럼 전주곡만 있는 모음곡이 아님에도 전주곡이 1번곡이 아닌 이유는 이 작품번호에 수록된 곡들이 여타 모음곡과 달리 기승전결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곡들의 나열일 뿐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그가 직접 연주한 no.1, 엘레지
- no.3, 멜로디
- 모음곡 1번 Op.5 (1893)
- 살롱 소품 Op.10 (1894)
- 6개의 소품 Op.11 (1894)
- 악흥의 순간 Op.16 (1896) : 2번만 원전판(오리지널)과 개정판이 있다. 빠른 템포로 왼손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4번째 곡이 특히 유명하다.
- 모음곡 2번 Op.17 (1901)
- 쇼팽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2 (1903) :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단 2개의 변주곡 중 하나. 프레데릭 쇼팽의 전주곡 Op.28의 심플한 20번째의 주제로 한 30분 가량이 소요되는 대형 변주곡이다. 조성도 그렇고 끝까지 들으면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후에 쓰여진 변주곡은 세월이 많이 지난만큼 적용된 피아니즘이 완전히 다르며, 이를 비교하며 들어보도록 하자.
- 10개의 전주곡 Op.23[38] (1903) : 5번째 곡이 가장 유명하다.
- 피아노소나타 1번 D단조 Op.28 (1908) : 장대하고 우울한 내용으로 인해 "파우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잘 연주하지 않는 곡이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독주곡들을 통틀어 연주하기 가장 어려운 곡중 하나라고 평가받는다.
- 13개의 전주곡 Op.32 (1910) : 이것과 앞의 Op.3-2, Op.23 전주곡들을 합한 24개의 전주곡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조로 되어 있다.[39] 이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이 Op.3 중 프렐류드만 따로 떼어와서 Op.23, Op.32와 함께 전집으로 녹음하기도 한다.
- 회화적 연습곡 Op.33, Op.39 (1911, 1916) : Op.33에서 작곡가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번호는 빼고 출판되었다.
- 피아노 소나타 2번 B♭단조 Op.36 (1913, 1931 개작): 1913년에 출판된 초판과 1931년에 출판된 개정판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보통 개정판이 연주된다. 초판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어렵다.
- 코렐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42 (1931) : 엄밀히 따지면 라흐마니노프가 잘못 붙인 제목이다. 주제인 '라 폴리아'는 코렐리에 의해 만들어진 선율이 아니라 17세기~18세기초에 유행하던 작자미상의 화성진행(선율이나 곡이 아니다)이다. 즉, 정확한 제목이 되려면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라 폴리아' Op.5, No.12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어야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편집을 제외한 피아노 독주곡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며 곡의 음악적인 난이도 또한 가장 어렵다고도 한다.
3.6. 오페라
- 알레코 (1892)
- 인색한 기사 Op.24 (1904)
-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Op.25 (1905)
3.7. 가곡
- 6개의 노래 Op.4 (1890~3)
- 6개의 노래 Op.8 (1893)
- 12개의 노래 Op.14 (1896)
- 12개의 노래 Op.21 (1902)
- 15개의 노래 Op.26 (1906)
- 14개의 노래 Op.34(1912) : 마지막이 그 유명한 보칼리제이다.
- 6개의 노래 Op.38 (1916)
3.8. 합창
- 6개의 합창 Op.15 (1895)
- 칸타타 "봄" Op.20 (1902)
- 성 요한 크리소스톰 전례 Op.31 (1910)
- 합창 교향곡 "종" Op.35 (1913)
- 철야기도 Op.37 (1915)
- 3개의 러시아 노래 Op.41 (1927)
4. 기타
- 증손자가 현 룩셈부르크 총리 그자비에 베텔이다. 베텔의 어머니가 러시아계 프랑스인이었다.#
-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몇몇 연주자들처럼 그의 베히슈타인 피아노를 대동하고 다녔는데, 1911년 조지아에서 연주회가 끝나고 당시 러시아 왕립 음악원 조지아 분원장이자 그의 팬이었던 스테판 미르조예프가 기념으로 피아노를 팔아달라고 부탁해 그에게 넘겨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예술이 부르주아의 사치로 여겨져 박해를 받자, 생활이 곤궁해진 미르조예프는 라흐마니노프의 베히슈타인을 2만5천 루블에 조지아 콘서바토리에 넘겼다. 볼셰비키는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그의 흔적은 무엇이든 파괴하려 들었지만 이 피아노의 존재는 다행히 알지 못했고, 오늘날 조지아 박물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베히슈타인 피아노가 전시되고 있다. 한편 그 뒤 새 피아노를 구입한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내 와이프와 내 소중한 블뤼트너 피아노, 이 둘만 가져왔다"[40]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유독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인기 있는 작곡가다. 라흐마니노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곡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특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와 비교해 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연주 빈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나무위키에도 상당히 많은 문서들이 작성되어 있는 작곡가다. 형식과 전개가 훌륭한 곡보다 전개가 산만하더라도 선율 자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음악팬들의 취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선율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가 대한민국에서 인기가 많은 것과도 상통한다. 다만 차이코프스키는 형식과 구조적 완성도도 훌륭한 작곡가이며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곡가다.
4.1.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뮤지컬)
5. 바깥 고리
[1] 이 표기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본인이 실제로 쓴 표기이다. 러시아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Rachmaninov, 또는 Rakhmaninov로도 흔히 쓰인다.[2] 정확히 말하면 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러시아계 미국인[3]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뽑은 것이다,[4] 동시대의 인물로 핀란드의 장 시벨리우스(1865-1957), 스웨덴의 휴고 알벤(1872-1960),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 등의 국민악파 음악가들이 있다.[5] 이는 많은 중-후기 낭만주의 시대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음반과 대비했을 때 그들보다 악보에 충실하고, 과도한 박자 변동 없이 리듬이 더 정확함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라흐마니노프의 출생년도는 쇤베르크와도 1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6] 관점에 따라서는 이 곡이 피아노 협주곡보다 더 유명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18번째 변주가 워낙 널리 '사용'되기 때문이다.[7] 물론 그의 초기작품인 만큼 스승에게 습작성을 어느정도 지적받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개정을 했다. 이 개정시기가 2번 협주곡을 작곡한 뒤의 일이기에 그의 협주곡 1번을 첫 번째 협주곡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상당히 많다.[8] 심지어 세자르 큐이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이 마치 "이집트의 10가지 재앙을 묘사한 것 같다" 며 "지옥의 음악학교에서나 칭송받을 음악일 것이다" 라고 악평했다.[9] 초연 당시 지휘자였던, 애주가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한 채 지휘를 했고, 그 때문에 연주를 망쳤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0] 다만 라흐마니노프가 살던 시대에는 (당연하겠지만) CD가 없었고, 그렇기에 당시 녹음 시간 제한이 있었던 LP판에 곡을 전부 넣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연주를 매우 빠르게 했다. 그렇게 너무 빠르게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중에 최악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했다고.[11]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후 계속 어떠한 말을 되뇌임으로써 실제로도 그런 효과를 볼 수 있게 암시시키는 것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에는 누워 있던 그에게 주치의 니콜라이 달이 "당신은 곧 새로운 협주곡을 작곡할 것이며, 그 곡은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라고 계속 말해 주었다. 이 치료는 약 3달정도 진행되었다. [12] 우크라니아 태생의 신경학, 정신의학, 심리학을 전공한 정신의학자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우울증이 극심해지던 1900년 1월에 그와 만나 3달동안의 최면요법 정신치료를 시전했다. 한편 그는 비올라연주도 할 줄 알았고 이 때문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의 공연 때 관객들이 그에게 활을 들어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인생 최대의 슬럼프 시절이었던 우울증 시기를 다루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선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니콜라이 달 박사가 양대 주연으로 간택되었다.[13]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느낌을 좋아한다면, 교향곡 제2번(라흐마니노프)도 다른 피아노 협주곡들과 같이 들어보기를 추천한다.[14] 호프만은 표면상 자신과 맞는 스타일이 아니라 했는데 전문가들은 손이 작은 이유로 거절했을 거라고 추측한다(호프만 손은 9도정도 됐다고 한다(도에서 도까지 짚고 레를 짚는 정도). 평균적으로 봤을 때 작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피아니스트의 견지에선 별로 큰 손이 아닐 뿐더러 차라리 작은 손사이즈에 가깝다.[15]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4곡의 레코딩은 2, 3번이 비슷한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남은 두 곡은 안습...[16] 참고로 이 곡의 카덴차는 빠르고 가벼운 원곡과 중후한 오시아(ossia)의 2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호로비츠의 카덴차는 기본적으로 전자를 모티브로 하되 호로비츠 특유의 저음부를 보강한 제 3의 카덴차로 오직 호로비츠의 연주에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17]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작곡보다 연주활동을 더 자주 했었다.[18] 유전병의 일종으로 육체적으로는 신장을 비롯해서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척추나 다리가 휘기도 하며 정신적으로는 신경쇠약을 동반한다. 실제로 라흐마니노프의 신장은 무려 198cm이다.[19] 반대로 말하자면 엄지로 미를 짚고 검지를 왼쪽으로 넘겨서 1옥타브 아래에 있는 도를 짚은 채, 3, 4, 5번 손가락으로 그 사이에 있는 미-솔-도를 짚었다는 소리다. 이쯤 되면 이미 사람의 손인지 의심이 가는 수준이다.[20] 여담으로 손 크기 큰 사람 중에 시브킹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인간은 기록상 거의 14~15도까지(대략 도에서 도짚고 시까지 남는) 짚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손 크기로서 불가능할 만한 곡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21] 해당 곡은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2번(작품번호 3). 나무조각으로 한꺼번에 치는 부분은 원래 첫 번째 음표를 치고 나서 옥타브 위로 빠르게 도약하여 다음 음표를 쳐야 하는 부분이다. 악보와 함께 듣기 [22] 일반적인 생각만큼 드문 예는 아니다. 고도프스키의 경우 그의 음반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그 이외에도 최근 발견된 옛날 음반엔 스크리아빈도 있다고 하며, 프로코피예프도 자기 음반을 냈다. 유튜브에 "(작곡가 이름) plays" 로 검색해 보면 금방 쏟아져 나온다.[23] 기본적으로 연주자의 소양은 작곡가가 작곡한 음들을 가감없이 재현해내는 연주력, 해석력에 있다. 클래식 외적으로 연주&작곡을 겸임하는 사태가 많이 일어나다 보니 순수연주자와 순수작곡자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경향 때문인지 "작곡가 본인이 해석한 것이 무조건 진리" 라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장르와 상관없이 연주자는 작곡을 겸임하더라도 연주 자체에 있어선 음악성, 음악해석력, 테크닉 이 세 가지로서만 평가받는다.[24] 피아노 롤은 직접 치는게 아니라 연주한 본인의 롤을 돌리면서 피아노가 자동 연주하는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연주의 형태가 칠 때 그대로 100% 재현되는 게 아니니(nwc나 피날레같은 작곡 프로그램에서 악보를 전자음으로 자동재생시키는 것과 원리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천공 카드 재생은 진짜 피아노를 연주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전자음이 나지는 않는다.) 취향상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레코드를 듣는것이 나을수도 있다. 유튜브에 의외로 작곡가가 직접 연주한 레코드도 상당히 많다.[25] 당시의 레코딩들은 종종 속도가 변질되기도 했다. 다만 라흐마니노프의 경우에는 녹음 시간이 한정된 LP판에 연주들을 모두 담아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정상 속도보다 빠르게 연주했다고도 한다. [26] 각 악장마다 금종(환희), 은종(결혼), 동종(공포), 쇠종(죽음)을 묘사한 합창 교향곡. 에드거 앨런 포가 쓴 동명의 시를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27] 아사다 마오가 피겨 프로그램에 사용해서 유명해진 곡[28] 정확히말해 피아노 가온 도에서 높은 라까지 벌릴 수 있다는얘기. 한 손을 쫙 펼쳤을 때의 길이가 30cm짜리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편하다.[29] 바흐의 간결한 작곡법에 매료되어 불필요한 음표는 무조건 뺀 쇼팽과 비교되는 점. "아니 뺀 게 그 정도야?"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지만 실제로 쇼팽의 음표사용은 매우 경제적이다. 음표 하나만 빼먹어도 엄청나게 티가 난다. [30] 정확히 말하면 힘들어 하는 모습이 [31] 시원하게 몰아쳐야 하는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3악장의 피날레 부분에서 계속 쉼표를 찍는 게 대표적인 예시다. 정말로 힘든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만, 이런 경우엔 본인 체력의 한계를 망각한 피아니스트의 선곡 미스일 뿐이다 [32] 피아노 이외의 악기를 이용한 작곡에는 소질이 없었다. 심지어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오케스트라 부분도 자신이 작곡하지 않았다.[33] 교향시 3번 '전주곡'과 같이 매우 뛰어난 작품도 작곡했지만 피아노가 사용되지 않은 작품들은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34] 앞서 서술되어 있듯이 평단에게 엄청난 혹평을 받아서 라흐마니노프를 우울증에 걸리게 했던 곡이다.[35] 이 곡은 교향곡 2번을 알렉산더 워렌베르크가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작품이다.[36] 라흐마니노프는 이 교향시를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라는 그림의 흑백 복제화를 보고 작곡했는데, 후에 그가 생각보다 밝은 색의 원화(컬러)를 보고서 "만일 그 때 복제본이 아닌 원화를 보았더라면 이 곡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37] 워렌베르크의 교향곡 2번 편곡 버전[38]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첫째 딸 이리나의 출산을 기다리며 이 전주곡 작곡에 전념했는데, 특별히 이리나가 태어난 날 라흐마니노프는 자리에 앉아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더없이 행복한 만족의 소우주(a microcosm of wide-eyed innocence and blissful contentment)'라는, 전주곡의 6번째 곡(No.6)을 작곡했다.[39] 이런 구성은 바흐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쇼팽이 전주곡집 Op.28에서 모든 조를 사용했던 것의 영향이다.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흐와 쇼팽은 조의 순서를 규칙적으로 구성했으나, 라흐마니노프는 몇 곡만 나란한조나 같은 으뜸음조끼리 묶은 것 외에는 그다지 규칙성에 구애받지 않았다.[40] "There are only two things which I took with me on my way to America… my wife and my precious Blüthner."